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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교회 시대의 강해(5부)-버가모 교회 시대
*소 개*
월리엄 매리언 브래넘 형제는 1960년 12월 4일부터 11일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요한계시록1~3장까지
일곱 교회 시대에 관한 메시지를 연속으로 설교했는데, 이 지면을 통해서 시리즈로 소개해 드리고자합니다.
윌리엄 매리언 브래넘 형제님의 놀라운 사역은 말라기4장:5~6절, 누가복음17장:30절, 계시록10장:7절, 등등,
성경에 예언된 말씀에 대한 성령께서 입증하신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계적인 사역은 다른 여러 성경 예언들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이 마지막 때에 성령께서 그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그의 사역은 신부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시켜 휴거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로 이 메시지를 읽는 동안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비(마음 판=고후3:3)에 쓰이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정확하면서 편집하지 않은 번역을 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하였지만, 영어 오디오 파일들이
브래넘 형제님이 하신 설교를 있는 그대로 전해 줄 것입니다. 브래넘 형제님이 설교한 1,100여개의 설교들은
여러 언어로 통역과 번역이 되어 있으며, www.messagehub.info 에서 다운로드 받고 인쇄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메시지 책자들을 보고자 하시면 한국성서교회 (biblechurch.kr) 를 방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 책자에 대해서 문의하실 일이 있으신 분들은 이 메일 주소는 biblechurch77@gmail.com 입니다.
이곳에서 인용된 성경은 바이블 애플 KJV 흠정역이며
메시지 책자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주제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도록
편집하였음을 미리 알립니다.
* 계시록2장12~17절.
12.버가모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을 가진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13.내가 네 행위를 알고 또 네가 거하는 곳을 아노니 즉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안디바가 나의 신실한 순교자가 되어 너희 가운데서 곧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한 그때에도
나의 믿음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도다. 14.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몇 가지 있나니 이는 거기에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네게 있기 때문이로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고 또 음행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거니와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
16.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어 먹게 하고 또 흰 돌을 그에게 주리니 그 돌 에는 새 이름을 기록되어 있어 그 돌을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느니라.
* 버가모 성.
퍼가멈(Pergamum 고대 이름)은 아시아에 위치한 성으로, 세 개의 강이 지나는데, 그 중 한 강은 바다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 성은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성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버가모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
다음으로 둘째가는 도서관을 가진 문화의 성읍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성행하기도 했는데, 사원 안에 가두어
기르던 산 뱀의 행태로 숭배했던, 에스큘러 피우스를 경배하는 방탕한 의식들을 행했습니다.
물댄 작은 숲과 공중로와 공원들이 있는 이 아름다운 도시에는 소수의 헌신적인 신자 무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허식적인 아름다움에 속지 않고 그곳을 가득 채웠던 사탄 숭배를 혐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버가모 시대는 주후 312년에서 606년까지 약 삼백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 이 시대의 사자.
각 시대에 보냄을 받은 사자를 선택하는 하나님이 주신 규칙을 사용해서, 즉, 첫 번째 사자 바울의 사역과
가장 흡사하게 닮은 사역을 가진 사람을 뽑는데, 우리는 아무 망설임 없이 마틴(Martin)을 버가모의 사자라고
선언합니다. 마틴은 315년에 헝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일생을 바쳐 한 일은 그가 뚜르즈와 그 주변에서
감독으로 수고했던 프랑스에서였습니다. 그는 399년에 죽었습니다. 마틴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던 성 패트릭의
삼촌이었습니다. 마틴은 군인 시절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던 것도 이 직업에 종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기적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거지가 시내 거리에서 아파서 누워 있습니다.
마틴이 보초를 맡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거지는 얕은 옷을 입고 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며 있었습니다.
마틴이 그곳을 지나가게 될 때까지는 아무도 거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의 딱한 처지를 보자, 여벌 옷이 없었지만 마탄은 외투를 칼로 둘로 잘라서 추위에 떨고 있는
그 사람의 등 위에 그 천을 둘러주었습니다. 그는 그 거지를 잘 간호해주고 자기 갈 길로 갔습니다.
그 날 밤 마틴에게 환상 가운데 주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지처럼, 마틴의 반쪽 옷을 어깨에
두르고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틴은 예비 신자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 옷으로 날 입혔노라." 그때부터 마틴은 온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기려고 애썼습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권능을 표명하면서 기적의 연속이 되었습니다. 군을 떠나 교회에서 지도자가 된 후
마틴은 우상숭배에 대하여 아주 강경한 태세를 취했습니다. 그는 작은 숲들의 나무들을 잘랐고 우상들을 깨고
제단들을 허물었습니다. 그의 행동에 대해 이교도들이 대항했을 때 그는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했던
식으로 그들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나무 밑 둥에 묶으라고 제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그는 나무에 깔릴 것입니다. 이교도들은 언덕 한 편에 자라고 있던 한 나무에 마틴을 묶었고, 자연적인
중력의 당김이 그 나무가 쓰러지자마자, 마틴을 뭉게 버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할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를 빙 돌게 하여 모든 자연 법칙에 어긋나게
언덕 위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그 큰 나무가 쓰러질 때 혼비백산 도망가던 이교도 몇을 뭉게 버렸습니다.
역사가들은 적어도 세 번은 마틴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믿음으로 죽은 자를 일으켰다고 인정했습니다.
한 번은 죽은 애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엘리사처럼, 그는 그 애기 위에 자기 몸을 쭉펴 포개고 기도했습니다.
그 애기는 다시 살아나 건강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은 마틴은 박해가 한창이던 때에 사형장에 끌려가고
있었던 한 형제를 도와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틴이 도착했을 때에는 그 불쌍한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나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의 몸에는 생기가 없었고 그의 두 눈은 돌출되어
나와 있었습니다. 마틴은 그를 나무에서 내리고 기도하자, 그 사람의 생명이 다시 돌아와 사랑하는 가족들과
재회했습니다. 마틴은 원수가 그 누구이든지 간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많은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던 악한 황제를 개인적으로 대면하러 갔습니다.
그 황제는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틴은 황제의 친구인 로마에 있던 잔인한 감독 다마써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거짓 포도나무에 속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인 그 감독은 중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틴은 왕궁에 돌아갔습니다. 이젠 성문이 잠겨 버렸고 사람들은 그를 들어오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틴은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 앞에 엎드려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그는 일어나라고 말하는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일어나자 성문들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거만한 통치자는 고개를 돌려 그와 얘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틴은 다시 기도했습니다. 갑자기 불꽃이 보좌에서 계속 나왔고 불쾌한 황제는 재빨리 자리를 비웠습니다.
진정 주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마틴이 주님을 섬기는 열정이 그토록 강렬하자 마귀는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진실한 성도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원수들은 심지어 마틴을 살해할 암살단원들까지 고용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집에 은밀히 들어 왔고 그를 막 죽이려고 하던 순간 마틴이 일어나 꽂꽂이 서서 그의 목을
칼에 갖다 대었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뛰려고 하자, 하나님의 권능이 갑자기 그들을 방여기 저기로 밀어
던졌습니다. 그 거룩하고 두려운 분위기에 그들 모두는 혼비백산하여 손이 발이 되게 빌면서, 마틴을 죽이려고
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흔히 주님이 두드러지게 사용하시게 되면 사람들은 교만으로 자신을
치켜 올려 세웁니다. 그러나 마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겸손한 하나님의 종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마틴이 설교단으로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어떤 거지가 그의 서재에 오더니 옷을 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틴은 그 거지더러 집사장에게 가보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집사는 그에게 나가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마틴을 찾아왔습니다. 마틴은 일어나서 거지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좋은 옷을 벗어서 주고는
집사더러 덜 좋은 다른 옷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마틴이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양떼는 그의
몸 주위에 부드럽고 흰 빛이 감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로 이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요. 그 시대에 보냄을 받은 진짜 사자였습니다. 결코 다른 것은 하나도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만을 바라던 그는 아주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마틴은 먼저 기도하고 성령에 의해 하늘로부터 보내져 내려온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 상태에 놓이게 될 때까지는 결코 설교하라는 권유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종종 마틴은 충만한 확신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곤 했습니다. 마틴과 그의 권능의 사역에
관해 좀 알아봤다 해서 성도들에 대한 박해가 약화되었다고 생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악한자들을 도구로 삼은 사탄에게 여전히 핍박과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무에 묶여 불태워졌습니다. 엎드려 통나무에 못박혔고, 들개들이 풀려나와 그들의 살과 내장들을
물어뜯어 희생자들은 무시무시한 고초를 당하며 죽어갔습니다. 태아들은 어머니에게서 찢겨 나와 돼지에게
던져졌습니다. 여자들의 가슴은 잘려졌고 그들의 심장 맥박이 피를 쏟아내는 동안 똑바로 서 있도록
강요당하며,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이교도만의 행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
“주 예수의 이름을” 고수하고 있었던 신자들을 제가하는 것이 하나님께 은혜를 베푼다고 느꼈던 자칭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으므로 그 핍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훨씬 큰 비극이었습니다.
요한복음16:2.그들이 너희를 회당들에서 내쫓을 것이요. 참으로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리라. 마태복음24:9.그 때에 그들이 너희를 넘겨주어 고통받게 하고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해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마틴은 이적과 기사와 성령의 권능에 의하여, 그 시대에 사자로 입증되었습니다. 마틴은 위대한 사역을 은사로
받았을 뿐 아니라, 마틴 자신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조직에 대항했습니다.
마틴은 고위직 가운데 있던 죄에 저항했습니다. 그는 말과 행동에서 진리를 옹호했습니다.
마틴은 그리스도인의 승리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한 전기 작가는 마틴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그가 화를 내거나 불안해하거나 슬퍼하거나 웃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항상 한 가지 모습을
하고 있었고 인간성을 초월한 것처럼 보였고, 그의 표정엔 천상의 기쁨 같은 게 번져 있었다.
그의 입에선 그리스도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결코 입에 올리지 않았고, 그의 마음속엔 경건과 평화와 동정심
말고는 결코 다른 어떤 것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종종 그는 심지어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의 죄 때문에 울었다.
그런데 그 비난자들은 마틴이 조용하고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을 때, 독사 같은 입술과 독이 가득한 혀로
마틴을 공격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들 자신은 소유하지 못했고 흉내 낼 수도 없었던 덕성들 때문에,
마틴을 미워했는데, 슬프게도 그를 가장 심하게 공격했던 사람들은 주교(감독)들이었다.”
* 계시록2:12.“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을 가진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세 째 교회 시대에 주어진 메시지가 나올 참입니다. "그의 교회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 개봉된
드라마의 세 번째 장면이 막 계시되려고 합니다. 나팔 같은 음성으로 성령은 그 비할 데 없으신 분,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을 가진 이!” 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조롱의 표시로 자색 옷이 입혀진,
얻어맞고 가시관을 쓰셨던 하나님의 어린 양을 "너희의 왕을 보라!"하면서 소개했을 때와 이 소개는 얼마나
크게 다릅니까? 이제 왕복을 입으시고 영광으로 관을 쓰시고서 “하나님의 권능이신 그리스도” 주님이 서
계십니다.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을 가진 이” 라는 말에는 신성에 대한 또 다른 계시가 있습니다.
에베소 시대에, 기억을 더듬어 보시면, 그는 불변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서머나 시대에서 우리는 한 분이신 참된 하나님으로서 그를 보았고, 그분 외에는 다른 신은 없었습니다.
이 버가모 시대에서 그의 신성에 대한 더 나아간 계시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과 연관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4: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에베소서6: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
계시록19:13.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느니라.
15.그분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는데..
요한복음1:1.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하나님이셨더라.
2.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더라.
요한1서5:7.하늘에 증거하는 이가 셋 있으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라 이 셋은 하나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말씀과 연관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바로 그분입니다.
그의 이름 안에 있는 말씀. 요한복음1: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말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번역된
말의 어원은 `로고스(logos)'인데, 그것은 “생각 또는 개념”을 뜻하는 말입니다. 로고스는 ‘생각과’ ‘말’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자, “표현된 생각”은 ‘말 또는 말들’입니다. 그것이 놀랍고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요한은 하나님의 생각이 예수 안에 표현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아주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1.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2.이 마지막 날들에 자신의 아들(로고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 3.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시며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치시는 이 아들께서는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신 안에 표명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표현된 형상이었습니다. 요한복음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실체가 육신이 되어 우리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걸어 다니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었고, 본 적도, 볼 수도 없었던 위대한 영께서 이제 육신의 장막을 치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충만함을 표현하면서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요한복음1:18절...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으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때때로 자신의 임재를 구름이나 불기둥으로 표명해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갖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속성들이 선지자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말씀의 계시로써만 알려지셨던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드러낸다(declare)는 말은 우리가 종종 주석(exegesis)이라 번역하는 헬라어 어원에서
온 말로 철저하게 설명하여 분명히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살아계신 말씀인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이셨으므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는 요한1서1장1~3절에서 그분에 관하여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고 명확하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나타내셨습니다.
1.처음부터 계셨던 그것 즉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그것을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자세히
살펴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노라. 2.(그 생명이 나타나시매 우리가 그것을 보았고 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며 너희에게 보이노라.) 3.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니라. * 하나님의 실체가 볼 수 있도록 드러내졌을 때, 그는 육신 안에 계시되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히브리서1:1~3절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표현된 형상이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 안에 계셨던, 자신을 사람에게 표명(표현)하시고자 육신 안에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절들에서 특히 1절과 2절에서 주목해야 할 게 또 있습니다.
1.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2.이 마지막 날들에 자신의 아들(로고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런데 여러분의 성경에 주석을
보면 정정해 놓은 게 보이실 것입니다. “로(by)”라는 말은 올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안에(in)” 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올바르게 됩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선지자들 안에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사무엘상3:21.주께서 다시 실로에서 나타나셨으니 주께서 실로에서 주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더라. 이 말씀은 요한1서5장7절을 완벽하게 "성령과 말씀은 하나"임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나타내셨습니다. 말씀은 아버지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그는 여전히 그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내가 스스로 하지 아니하느니라. 오직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 곧 그분께서 그 일들을 행하시느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한복음14장10절)에서 아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완벽한
표명은 말씀과 행위로 표명하시는 내주하는 성령에 의한 것이었음이 여기서 가장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쭉 말씀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신부가 말씀 신부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때,
신부는 예수님이 행했던 일들을 그대로 생산할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들 모두가 하나입니다. 서로 떨어져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선지자들은 내주하는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었고 말씀이 그들에게로 왔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측량할 수 없는 성령이 있었고 말씀이 그에게 왔습니다.
예수는 행하시면서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내 교리는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니라.
(사도행전1:1, 요한복음7:16.)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침례요한은 선지자인 동시에 그의 시대의 사자였습니다.
요한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미 성령으로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요단 강에서 침례를 베풀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예수)이 그에게 왔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진정으로 성령 충만된 자들에게 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7:17“…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요한복음8:43.너희가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로다.
이절에서 보면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죠? 성령과 말씀은 하나이기 때문이며, 만약 여러분이
선지자들처럼 성령을 가지고 있다면 말씀이 여러분에게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은 성령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걸 읽어 보셨습니까?
요한복음14:26.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여기서 또 다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 때문에 말씀이 오는 것을 찾았습니다.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을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예언의 말씀을 가져오는 영입니다.)
요한복음16:13을 보면, "그러나 그분 곧 진리(말씀)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듣은 것(하나님의 말씀)
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침례 받는 것의 증거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나 방언 통역하는 것이나 예언하는 것이나 소리 지르고 춤추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음을 여러분 아주 주의 깊게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증거는 여러분이 진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즉 여러분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증거는 여러분의 시대 계시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4:37.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를 선지자나 영적인 자로 생각하거든 그는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들이
주의 명령인 줄 인정할지니라. 자, 보십시오. 내주하는 성령의 증명에 대해서. 바울은 그것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교회의 질서를 세우면서 그의 시대에 준 말씀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또 다른 계시를 주장했던 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야만 했습니다.
36.도대체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나왔느냐? 혹은 그것이 너희에게만 임하였느냐?
성령으로 충만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신자인지, 아니냐 하는 증거는 진리(말씀)를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영접하는 것이고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신의 시대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계시록22장17절을 보셨습니까?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신부는 성령이 말씀하신 동일한 말을 말합니다. 신부는 자기가 성령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말씀신부입니다.
각각의 교회 시대에서 우리는 이 말을 듣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이 말씀을 줍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자기
시대의 말씀을 받았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여러분 시대에 주어진 말씀을 들을 것이며, 그 말씀을 말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생각을 이해하셨습니까? 반복하겠습니다, 각 교회 시대는 똑같은 권고로 끝납니다.
"귀 있는 자는(개인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은 말씀을 줍니다.
성령은 각 시대를 위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 선택 받은 사자는 그 말씀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각 각의 시대를 위해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으로 선택된 사자(천사)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자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영접한 선택함 받은 소수의 무리는 그 시대에 항상
“말씀을 들었고” 그 시대 표명된 말씀을 받아들여 그들 안에 하나님의 씨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요한복음8:47.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그것들을 듣지 아니함은
너희가 하나님에게서 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은 예수님
(말씀)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버가모 교회에서도 그들의 시대를 위한 그분의 말씀을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참된 씨인 소수의 무리들만이 하나님에게 속하였으므로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사야54:13."네 모든 자녀는 하나님(성령)의 교리를 받을 것이며," 예수님은 요한복음6:45절에서 똑같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씀과 하나 됨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에게 속하였는지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인지의 여부를
증명합니다.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그러면 방언과 통역과 다른 은사들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표명들입니다.
그것이 말씀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2:7절을 읽어보십시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표명)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다음에 바울은 그들 표명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좋은 질문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 질문을 물어보고 싶어 하는 걸압니다.
진정으로 성령 충만되지 않으면 정말로 성령을 표명할 수가 없는데 왜 그 표명이 성령 침례의 증거가 아닌가?
전 옳은 것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 사람들의 기분이 상하거나 그들의 교리를 거스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께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하지 않는다면 전 하나님의 참된 종이 아닐 것입니다. 맞지 않습니까?
잠시 동안 발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종교적이었고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는 제물을 올바르게
드리는 것과 하나님께 다가가는 올바른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참된 씨 선지자가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유명해지고자 불의의 삯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음행과
우상 숭배의 죄 가운데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세상이 지금껏 본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예언의
부분 중 하나가 그를 통해 표명됐음을 부인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절대로 성령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은 대제사장 가야바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그가 예수님께서 죽어야만 하는 죽음의
종류에 대해서 예언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야바가 친애하는 늙은 시므온이나 그 다정한
안나라 하는 성도처럼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라고 기록된 것이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바는 성령의 진짜 표명을 가졌습니다. 우린 그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증거로서의 표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거기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되어 있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말씀의 증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계시로 말미암아 제가 얼마나 깊이 이 진리를
느끼고 이해하는지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리기 전에, 전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이 절 선지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는 환상들은 결코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만약 누가 환상이 한 번이라도 어긋난 적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절 이만큼이나 따라왔으니, 제 얘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해 전에 처음 오순절교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저는 그들의 캠프모임 중 하나에 참가했었는데 거기에 방언과
방언 통역과 예언의 많은 표명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두 명의 설교자들이 다른 형제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말하며 열중해 있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그 예배에 빠져들었고 정말로 다양한 표명들에 관해 흥미를
느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들 은사들에 대해 모든 걸 배우고자 하는 게 간절한 소원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 두 사람들에게 그것들에 관해서 말해 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은사를 통해
저는 첫 번째 사람 안에 있는 영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 그 다정하고
겸손한 형제와 짧게 대화해 보고나서 저는 그가 진짜, 독실한 그리스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진짜였습니다.
다음 젊은 남자는 첫 번째 남자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자랑을 늘어놓았고,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대화를 하는 동안 환상이 하나 제 눈앞을 스쳐갔는데 그가 금발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밤색머리의 여자와
동거하며 두 자녀를 가진 것을 보았습니다. 위선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위선자였습니다. 전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찌 안 놀랄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 두 남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진짜 신자였고, 다른 사람은 죄 많은
모방자였습니다. 하지만 둘 다 성령의 은사를 표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혼돈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해답을 달라고 간구하려고 그 모임을 떠났습니다.
저는 혼자 비밀 장소로 가서 성경책을 옆에 두고 기도하며 해답을 위해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구절의 성경을 읽을 줄 몰라 저는 무심코 성경을 열어 마태복음에 있는 어떤 곳을 보았습니다.
잠시 동안 읽다가 성경을 내려놓았습니다. 잠시 후 바람이 불어 성경의 페이지를 히브리서6장으로 넘겼습니다.
저는 히브리서6장4~9절을 읽어 내려가다가 그 이상한 절에서 특별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4.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께 참여한 자가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6.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 7.자기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땅을 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채소를 내는 땅은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니와 8.가시와 찔레를 내는
것은 버려지고 저주함에 가까워서 마지막에는 그것이 불살라지리라. 9.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에게는 더 좋은 것들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저는 성경을 다시 덮고 잠시 동안 묵상하다가 좀 더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뜻 없이 다시 성경을 열었지만 읽지는 않았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또
한 번 페이지를 히브리서6장으로 넘기고 바람이 그치자 거기에 그대로 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읽자 그때 하나님의 성령이 방 안으로 들어와 저는 환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환상 가운데서 순백의 흰 옷을 입은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막 갈아엎은 밭으로 가서 알곡을 심었습니다.
맑은 날씨였고 아침에 씨가 심겼습니다. 그런데 밤늦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와서 몰래 흰 옷 입은 사람이
심은 사이사이에 씨를 더 심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갔습니다. 해와 비가 그 땅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알곡이 나왔습니다. 그 알곡은 아주 보기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후 가라지도 나왔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랐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땅에서 똑같은 자양분을 섭취했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해와
비를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은 놋 빛이 되고 식물들은 모두 축 쳐져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밀이 고개를 들고 하나님께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라지도 목소리를 높여 비를 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왔습니다. 그러자 밀이, 이제는 힘이 넘쳐 목소리를 높여서
"주여 찬양합니다."하고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는 소생한 가라지도 고개를 들고 "할렐루야"하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캠프 모임과 그 환상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씨 뿌리는 자와 씨의 비유, 히브리서6장이 혼합된 청중 가운데서 영적인 은사의 분명한 표명들—그때 모든
것들이…놀랍게도 확실해졌습니다. 흰 옷을 입은 씨 뿌리는 자는 주님이었고, 검은 옷을 입은 씨 뿌리는 자는
마귀였습니다. 세상은 밭이었습니다. 씨들은 사람들이었는데, 선택된 자와 버리운 자들이었습니다.
둘 다 똑같은 자양분과 물과 해를 섭취했습니다. 둘 다 기도를 올렸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 위에 해와 비를 동시에 내리셨습니다. 그들 둘이 똑같은 축복을 받았고 둘
다 똑같은 표명들을 가졌다고 해도, 하나의 커다란 차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 씨에 속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7:21~23절에도 답이 있습니다. “21.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예수님은 그들이 오직 성령의 표명을 통해서 사람들이 성취할 수 있는 권능을 행했음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시 타락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악하고 거듭나지 않은 배교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탄의 씨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 표명이 성령으로 태어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의 증거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진짜 표명은 성령이
큰 역사를 행하시는 증거임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적으로 개인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 증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많은 표명들을 행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은 증거는 저
옛날 우리 주님의 시대에 증거로 삼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 증거는 여러분이 살고 있는 시대에 주어진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말씀에 대해서는 강조하셨지만, 이적에 대해서는 결코 중요하게
강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말씀을 받기만 한다면 이적들은 자연히 뒤 따라 올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이 밧모 섬에서 환상을 본 후 이백 년이나 지난 버가모
시대에 사람들이 말씀으로부터 굉장히 멀리 표류해 나갈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표류는
그들로 암흑시대로 들어가게 하리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태초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방법은 먼저 말씀을 떠나는 것이었음을 아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말씀을 떠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버가모에 있는 교회에게 그리고 사실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말씀이다. 너희 가운데 신성이 거하길 원한다면 말씀을 환영하며 영접하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말씀)은 나에 대한 계시이니라. 나는 말씀이다. 그 사실을 꼭 명심하라!”
전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서 말씀으로 충분히 감명을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렇죠? 모든 기도는 그분의 이름으로 드리며 그렇지 않으면 응답은 없습니다.
요한1서5:14.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진 확신이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께서
우리말을 들으신다는 것이라. 15.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우리말을 들으시는 줄 우리가 안즉 또한
우리가 그분께 구하여 청원한 것들을 얻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하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엔 오로지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예레미아 애가3:37.주께서 어떤 일을 명령하지 아니하셨는데도 그것을 말하여 이루어지게 할 자가 누구냐?
그렇습니다. 만약 그것이 말씀 가운데 없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말씀
가운데 없다면 구할 수 없고, 그분의 이름으로가 아니면 간구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나오는 군요. 예수(이름)
는 말씀(뜻)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성경 말씀으로
기록하신 이 말씀들을 여러분들이 그것을 믿음으로 여러분을 삶 속으로 받아들일 때, 여러분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6장63절에서 그분의 말씀은 생명이라 말했는데, 생명은 그분입니다.
요한복음14:6."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로마서8:9...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분의 사람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그는 영이고 생명입니다.
그게 바로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태어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입술에 올려놓는데 그것은 신성이 말씀하실
때와 똑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 장애가 되는 모든 산들은 없어져야 하고 사탄은 그 사람 앞에서는 설 수가
없게 됩니다. 만약 저 옛날 버가모 교회가 그들 가운데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의 계시에 붙어 있기만 했더라면,
그 암흑시대에 하나님의 권능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날, 교회가 믿음 안에서 말씀으로
돌아온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다시 교회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의심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저는 주님을 찾고 있었는데 성령이 제게 펜을 들어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쓰려고 펜을 쥐자, 성령이 교회를 위한 메시지를 제게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말씀과 신부와 관계있는 메시지입니다.
내가 네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재생산의 법칙은 각 종(種)은 각기 자기의 종류대로 낳는다는 것이다.
창세기1:11절에 나오듯이,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씨 안에 있는 생명은 줄기로 들어가 다음엔 열매를 맺었다.
그 동일한 법칙은 오늘날 교회에도 적용된다. 교회를 시작했던 씨는 나와서 처음의 씨와 같이 되는데 그것은
같은 씨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날에도 진짜 신부교회(그리스도의 씨)는 머릿돌에 이를 것이고 신부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감에 따라 신부교회는 슈퍼 교회, 슈퍼 민족이 될 것이다. 신부 대열에 든 그들은 너무나
그리스도와 닮아 그와 동일한 모습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와 신부는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표명할 것이다.
교파들은 이것을 생산해낼 수 없다. 교파들은 자신의 신조와 말씀과 섞인 독단적 교리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런 혼합 행위는 잡종 품을 만들어낸다.
첫째 아들(아담)은 하나님의 말해진 씨이자 말씀이었다. 그는 자신을 재생산하려고 신부를 받았다.
신부가 그에게 주어진 이유는 그를 재생산하기 위함인데 하나님의 아들을 또 만들어 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타락했다. 그녀는 혼합 행위로 말미암아 타락했다. 그래서 그를 죽게 만들었다.
둘째 아들(예수)은 역시 하나님의 말해진 씨이자 말씀이었는데 아담처럼 신부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가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 그녀도 타락하고 말았다. 아담의 아내처럼 그녀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살 것인지 아니면 말씀을 의심하여 죽을 것인지 시험을 받았다. 그녀는 의심했다. 그녀는 말씀을 떠났다.
그녀는 죽었다. 말씀의 참된 씨의 적은 무리로부터 하나님은 사랑하는 신부를 그리스도에게 주실 것이다.
그녀는 그의 말씀에 있어 처녀이다. 그녀는 사람이 만든 신조나 독단을 전혀 모르므로 처녀이다.
신부의 일원들을 인하여 또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그 처녀 안에 표명되리라 약속하신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
약속의 말씀이 처녀 마리아에게 왔었다. 하지만 그 약속의 말씀은 표명되기 위한 하나님 자신이었다.
하나님은 표명되어졌다. 그 당시에 하나님은 직접 행했고 처녀 안에 자기 자신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셨다.
마리아에게 그 메시지를 가져온 것은 한 천사였다. 하지만 그 천사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사야9장6절. 그(예수)는 마리아가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때 그에 관해 쓰여졌던 것을 다 이루셨다.
처녀 신부의 구성원(지체)들은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들은 그분과 동일성을 가질 것이다. 그는 그들의 머리이고
모든 권능은 그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몸의 지체들이 머리에 복종하듯이 그분에게 복종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조화를 잘 보라. 예수는 아버지가 먼저 보여 주시기 전에는 결코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다.
요한복음5장19절. 이 조화는 이제 신랑과 그의 신부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그의 생명의
말씀을 보여주고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결코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 것도 그녀에게
해를 입히지 못한다, 죽음도, 씨가 심겨지면 물이 그것을 다시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의 비밀이 여기 있다.
말씀이 신부(마리아 속에 있던 것처럼) 안에 있다. 신부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녀는 그리스도가
말씀을 가지고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이름으로 말씀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그녀는 "주께서 가라사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나면 말씀은 성령에 의해 소생되어 이루어지게 된다.
심겨져 씨가 물은 받는 것처럼, 그것은 그 목적을 달성하면서 자라나서 완전한 추수에 이르게 된다.
신부의 대열에 든 그들은 그의 뜻만을 행한다.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못한다. 그들은 `주께서 가라사대'를
가지든지 아니면 가만히 있는다. 그들은 그들이 행하며 그분 자신의 말씀을 이루는 데는 하나님이 꼭 필요함을
알고 있다. 그(예수)는 그가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그의 일을 다 마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신부 안에서
신부를 통해서 일하고 계신다. 신부는 그 사실을 아는데 여지 것 그가 지금 행해야 하는 특정한 일들을 하실
때가 아니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 특정한 때를 위해 남겨 두셨던 그 일을 신부를 통해 이루실
것이다. 이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일어나라. 우리의 약속의 땅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여호와 구세주"란 뜻이고 그는 바울이 첫 지도자로서 왔듯이 교회에 올 마지막 시대의
지도자를 나타낸다. 갈렙은 여호수아 편에 서 있었던 사람들을 나타낸다.
기억해라, 하나님은 처녀 이스라엘을 그의 말씀으로 시작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뭔가 다른 걸 원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정하신 때가 오기 전에는 이스라엘을 움직이지
않으셨던가 또는 그들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지 않으셨던가를 잘 보아라.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압력을 가하며, "그 땅은 우리 것이니 가서 취합시다. 여호수아, 당신은 이제 끝장입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당신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었던 권능이 이젠 없어요.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 즉시 행하곤 했었는데, 그런데 지금 당신에게 뭔가 이상이
생겼어요."하고 말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였고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약속들을 기다렸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주시는 명쾌한 결정을 기다렸고 움직일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손에 완전한 지도권을 주셨는데 여호수아가 말씀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신임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일은 이 마지막 날에도 반복될 것이다.
똑같은 문제, 똑같은 압력들이.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이 능한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는
특이하게 출생했는데 그는 애굽으로부터 아브라함의 씨를 구원하기 위한 적시(適時)에 태어났다.
모세는 애굽에서 머물며 제사장들과 성경 구절을 두고 논쟁을 벌이거나 싸움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이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광야에 가 있었다. 하나님께선 모세를 광야로 부르셨다.
그 기다림은 모세 쪽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백성들 때문이었다.
모세는 백성들이 이해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다음에 주의 말씀이 임한 엘리야가 있다. 그가 진리를 다 전하고 미국 이세벨의 선구자인 옛날의 그 무리들이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하나님께선 엘리야를 불러내시고 선지자와 하나님이 주셨던 메시지를 거부한
그 세대에 재앙을 내리셨다. 하나님께선 그를 광야로 불러냈고 엘리야는 왕이 부르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나가자고 설득하려던 자들은 죽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의 충성스런 선지자에게 환상으로
말씀하셨다. 그러자 숨어있던 그는 나와서 이스라엘에게 다시 말씀을 가져왔다.
그 다음엔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선구자요. 그 당시 능한 선지자였던 침례자 요한이 있다.
요한은 아버지가 다니던 제사장 학교엘 가지 않았고 바리새인들의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어떤 교파로도 가지 않고 하나님이 불러낸 광야로 들어갔다.
요한은 주님께서 “메시야(구세주)가 가까웠다.”고 외치면서 그에게 그 메시지를 가지고 보낼 때까지 머물렀다.
이제 성경적인 경고를 한 번 보기로 하자.
고라가 일어나 그 능한 선지자를 대적했던 때는 하나님이 입증해 주셨던 모세의 때가 아니었더냐?
고라는 모세를 논박하며 자기도 백성들을 이끌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았으며 다른 이들도 모세처럼
신성한 계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라는 모세의 권위를 부인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참 말씀을 듣고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에게 입증을 받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내가
말하건데 그 백성들은 고라와 그의 반박에 편승했다. 고라는 성경적인 선지자가 아니었지만 다수의 백성들은
그들의 지도자와 함께 고라 편에 섰다. 오늘날 고라의 경우처럼 금송아지 음모를 가진 전도자들과 얼마나
흡사하냐! 고라가 백성들에게 좋게 보였듯이 그들도 사람들에게 좋게 보인다.
그들은 이마에 피를 손엔 기름을 강대상엔 불덩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여자 목사를 인정하며 여자들이
머리를 자르고 바지와 짧은 옷을 입게 놔두고 그들의 신조와 독단적 교리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간다. 그것은 그들 안에 어떤 종류의 씨가 있는지 보여 준다. 그러나 백성 전체가 모세에게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건 아니었다. 택함받은 자들은 모세와 함께했다. 똑같은 일이 오늘 다시 벌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떠나고 있지만 일부 사람들은 말씀에 머무르고 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기억해라.
가라지는 불살라지기 위해 단에 묶여져야 했다. 이 배역한 교회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태워질 준비로 함께
더욱 더 가까이 묶여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밀은 주인에게로 한데 모아질 것이다. 이제 나는 네가 여기서
아주 주의 깊게 이것을 보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말라기4장이 이루어지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그 말씀은 선지자 말라기에 의해 말해진 성령이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그것에 대해 언급하셨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두번째 오시기 직전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쯤에는 성경
모두가 성취되어져야 한다. 말라기의 그 사자가 올 때 이방인의 경륜은 그 마지막 교회 시대에 있을 것이다.
그 사자는 꼭 말씀과 함께 할 것이다. 그는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도록 성경 전체를 다룰 것이다.
그는 뱀의 씨에서 시작해서 늦은 비에 있을 사자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교파들은 그를 거부할 것이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아합의 때부터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합의 통치 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말라기의 선지자가 나타나는 곳인 미국 바로 여기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자유로이 경배하고자 애굽을 떠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다윗과 여러 왕들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와
나라를 세우고 다음엔 뒤에서 지시하는 이세벨을 아내로 둔 아합을 왕위에 올린 것처럼 미국도 똑같이 행했다.
우리 조상들은 자유로이 경배하며 살고자 이 땅을 찾아 떠났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했다.
워싱턴과 링컨 같은 유능한 자들이 세워졌지만 잠시 후엔 그들보다 뒤떨어진 사람들이 이 적합한 사람들의
자리를 계승했고 곧이어 뒤에서 조종하는 이세벨 같은 여자를 아내로 둔 아합 같은 자가 대통령석에 앉혀졌다.
그런데 말라기의 그 사자가 와야 할 때는 바로 이와 같은 때이다. 그리고나서 늦은 비가 내릴 때 갈멜산의
판가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말씀 가운데 있는지 보려면 자세히 지켜보아라. 요한은 말라기3장에 나오는
선구자였다. 그는 이른 비를 심었고, 그의 시대의 조직들에게 거부당했다. 예수님은 오셔서 변화산 판가름을
보이셨다. 그리스도의 두번째 선구자는 늦은 비를 위해서 심을 것이다. 예수님은 교파들과 신조들 사이에서
판가름이 될 것인데 그의 말씀을 지지하고 그의 신부를 휴거로 데려가려고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판가름은 갈멜산이었고 둘째 판가름은 변화산이었고 세 번째 판가름은 시온산일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와 요한이 사람들로부터 격리하여 은둔하고 있던 이상한 행동은 많은 사람들을 혼돈케 하였다.
그들은 그것이 그들의 메시지가 거절당했기 때문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씨는 뿌려졌고, 파종은 끝났다.
심판이 다음 차례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한 표징으로서 그들의 임무를 마쳤다, 그래서 심판이 다음에 있었다.
계시록13:16절에 의하면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으려면 짐승이 손이나 이마에 표를 요구하기 때문에
신부는 말씀전파를 멈춰야만 할 것이다. 교파들은 그 표를 받을 것이다, 받지 않으면 말씀전파를 못하게 된다.
그 다음에 어린 양이 그의 신부를 휴거로 데리러 오고 그 큰 음녀를 심판하게 된다.
그런데 모세가 어떤 특정한 일을 위해서 태어났지만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해 주는 은사를 받기
전에는 모세는 그 일을 할 수 없었음을 기억해라. 모세는 광야에 가서 기다려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때를 정해
두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를 되돌려 보내기 이전에 어떤 특정한 바로가 왕이 되어 있어야 했고, 백성들은
생명의 떡을 위해 부르짖어야 했다. 이것은 우리의 시대에도 적용된다. 우리시대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무리들이 이적들을 행하고 있어 지금은 말씀 또는 하나님의 성령의 진정한 감동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든가, 아예 모르면서도 이적만 구하는 세대가 우리 시대이다. 그들은 피와 기름과 불을 보면 기뻐한다.
말씀 가운데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어떠한 이적이든지 심지어 비성경적인 것까지도 신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경고하셨다. 그는 마태복음24장에서 마지막 때에는 두 영이 너무
비슷해서 오로지 택함을 받은 자만이 속임을 받지 않을 것이므로 그 두 영을 구별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네가 어떻게 영들을 구별할 수 있느냐? 말씀으로 시험해 보기만 하면 된다. 그들이 그 말씀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악한 자에게서 난 자들이다. 악한 자가 첫번째 신부를 속였듯이, 그는 이 마지막 시대의 신부를 신조를
통해 혼합시키거나 단순히 말씀을 벗어나 신부에게 적합한 어떤 이적을 따르게 함으로써 속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말씀보다 이적들을 위에 두시지 않았다. 이적들이 말씀을 따르게 되어 있다.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그를 위해 먼저 떡을 구우라. 주의 말씀에 따라 말했던 것처럼. 그녀가 말씀이 말한대로
순종 했을 때, 적절한 이적이 일어났다. 말씀으로 먼저 오라, 그리고나서 기적을 지켜보라. 씨인 말씀은 성령에
의하여 에너지를 받는다. 어떻게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가 말씀의 일부만 믿고 일부를 거부할 수 있겠느냐?
이 마지막 날의 하나님의 진정한 선지자는 말씀 전체를 선포할 것이다. 그런데 교파들은 그 선지자를 싫어할
것이다. 그들을 독사들이라 일컬었던 침례 요한처럼 그의 말들은 거센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정된 자들은 들을 것이며 휴거에 준비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의
왕가의 씨는 그와 함께 말씀을 꼭 붙들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예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의 사자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때에 나타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지금은 마지막 때이다.
이스라엘이 고국에 돌아와 있기 때문이다. 말라기에 의하면 그는 이제 금세라도 올 것이다. 우리가 그를 보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한 자일 것이다. 그는 지적 될텐데(말씀 안에서 지적된다, 계시록10:7) 하나님은
그의 사역을 입증하실 것이다. 그는 엘리야가 그랬듯이 진리를 전할 것이고 시온산 판가름에 준비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할텐데, 그들은 진리라고 여기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성경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가 와서 그것을 반대할 때,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진실한 목사들조차도 그 사자를 이해하지 못할텐데,
너무도 많은 것이 속이는 자에 의해 하나님의 진리라고 칭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림의 선구자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외쳤던 것처럼, 그도 의심할 여지없이, "영광가운데 오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외칠 것이다. 그는 이 일을 할 것이다, 요한이 택함받은 자들에게 진리의
사자였던 것처럼. 이 자도 택함받은 자들과 말씀으로 거듭난 신부들에게 마지막 사자가 되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칭찬하시다.
계시록2:13.내가 네 행위를 알고 또 네가 거하는 곳을 아노니, 즉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안디바가 나의 신실한 순교자가 되어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한 그때에도
나의 믿음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련된 일곱 사자들 각자에게 말씀하신 동일한 말입니다.
이 말은 두 포도나무(참과 거짓)에게 말했기 때문에, 이 말은 한 무리의 마음에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
주겠지만, 다른 한 무리의 마음속엔 공포를 일으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행위와는 관계없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할지라도,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행위 또는 행동들을 자연스럽게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3장7절의 말씀에서. 말씀하셨듯이,
7....아무도 너희를 속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행동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우며.
이 절이 뭔가를 의미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행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3:11.샘이 같은 곳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내느냐?
로마서6:2.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마태복음12:33.나무도 좋게 하고 그것의 열매도 좋게 하든지 나무도 썩게 하고 그것의 열매도 썩게 하든지
하라. 나무의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오 독사들의 세대야, 너희가 악하니 어찌 선한 것들을 말할 수
있느냐?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느니라. 35.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보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보고에서 악한 것을 내니라. 그런데 말씀으로 태어난 사람은 말씀의 열매를 생산해 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1:23.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
그의 생활의 열매 또는 행위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씨 또는 생명에서 나온 산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들은 성경적인 행동들일 것입니다. 이 진리가 버가모 시대에 대적하게 될 텐데 얼마나 대단한 고발입니까?
거기에 비할 수 없는 분이 서 계시는데 그의 손에는 양쪽에 날선 예리한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또한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다. 사실 말씀은 지금도 심판하는 중에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과 마음속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자들로부터 육적인 자들을
자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읽고 알게 하는 살아 있는 편지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읽고 아는 살아있는 편지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 만약 자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면,
말씀을 이루십시오. 누가 자기가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지 궁금하게 여긴다면,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는 그 칭찬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옛적에도 표준이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표준은 없고 다른 다림줄은 없습니다.
세상이 앞으로 한 분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을 받게 되듯이 그분의 말씀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누가 그가 어떻게 해 낼지 알고 싶다면, 야고보가 제시한 대로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들여다보라.” "내가 네 행위를 안다." 그분이 거기에 말씀을 가지고 서서 그가 그들을
위해 제시한 청사진에 비추어보며 그들의 삶을 조사하실 때, 그는 분명히 그들이 전에 있던 자들처럼 불의한
자들의 핍박을 견뎌내고 있었고, 여전히 기쁜 마음으로 주님에게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흡족해 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때때로 어려웠지만 그들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분을 섬겼고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포도나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슬프게, 그들은 말씀에 근거한 삶을 거절했고, 이제는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들은 그들이 빠진 깊은 데를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내 이름(예수)을 굳게 잡아 "우리가 누구에게 가오리까? 당신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셨나이다.!"
그들은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열매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숙명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힘과 그분 안에서 성령의 확신 가운데 굳게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증거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알았고 그 이름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들의 혀는 그 이름(예수)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을 불렀고 악을 떠났고 이제 그 이름을 위해서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더 좋은 보다 나은 부활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안타깝게 2세기 때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말들은 많은 이들에게 "삼위일체(Trinity)"로 알려졌고,
세 분 하나님의 다신론은 거짓 교회 안에서 하나의 교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후로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이름은 빼앗겼고 오늘 이 시대에서는 그 이름(예수)대신에 위대하신 한 분 하나님의 직함들이 그 이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변절하여 삼위일체를 품에 끌어안고, 신성의 직함들을
사용하여 세례를 했지만, 적은 양 무리들은 여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그 진리를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고 그를 세신으로 변경해 그의 은혜스러운
이름을 직함들로 바꾸었기 때문에, 그토록 위대한 이름에 동반하는 이적과 기사들이 여전히 그 사람들 사이에
내려왔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정말 그런 기사들이 강하고 놀랍게 표명되었습니다, 물론 거짓 포도나무에게는
아니었습니다. 마틴 같은 사람들은 크게 쓰임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적과 기사와 성령의 선물들로
증거 하셨습니다. 그 이름은 항상 그래왔듯이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으므로 성도들이 말씀과 믿음을 통하여
그분에게 영예를 돌릴 때는 항상 그럴 것입니다.
* 너희가 내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사도행전3장16절에 베드로는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에게 기적이 일어났는지 질문을 받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예수)의 이름을 믿으므로 그(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그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그를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습니다." 보셨죠?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입니다.
예수의 믿음이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인간적 믿음이나 자기의 이름이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온 믿음 안에서 사용된 예수의 이름이” 그런 위대한 역사를 행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 믿음이 여기에서 말씀하신 믿음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은 믿는 자들에게 주셨던 그분 자신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에 대한 혼란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로마서12:3...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신대로 (1절의 각 사람들이란 형제들입니다.)
에베소서2:8.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믿음)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야고보서2: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가지고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이 버가모 시대에 사람들은 구원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대신에 인간화 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은 주께로부터 온다."는 진리에 등을 돌리고—선택하심의 교리를 제쳐두고 교회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말씀은 상관치 않고) 그들의 의견을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제하였습니다, 빠른 속도로 교회는 세상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의 믿음의 분량을 갖고 그 믿음을 삶의 행위에 사용했을
뿐 아니라, 단지 교회에 다님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거짓말하는 자들을 경계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분의 믿음의 분량이 없으면 아무도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동정녀 탄생과 흘려진 피, 교회에 다님, 성찬 참예 등에
찬성하지만, 결코 거듭나지 아니한 지적인(머리로 믿는) 신자들로 가득 차 있듯이, 역시 이 세번째 시대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인간적인 믿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있어야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 안에 영광의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산 믿음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바울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생명을 주고 그로 그리스도인의
승리가운데 계속 살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이름과 믿음에 대한 진리를 살아 있게 했고 그로 인해서
주님에게 축복을 받고 그분에게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
이 형제에 대하여는 말씀 속에도 세상의 역사에도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꼭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미리 아신 바 되었고 주님이 알고 계셨다는 사실로도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살아있는 말씀 속에 기록된
그의 주님에 대한 충실함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예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 사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야고보의 말씀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스데반처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아무도 높이여기지 않았고,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그 이름을
취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행하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을 때, 그는 돌아서지 않을
사람들과 입장을 같이 했습니다. 네, 그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아벨처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증거를 얻었고
(그의 이름이 말씀 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었으나 하나님의 신성한 기록의 페이지 안에서 그의 음성은
여전히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충성된 순교자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가 평강의 왕을 죽였을 때 승리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때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탄이 십자가에서 탈취 당했듯이, 이제 안디바의 피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백 명이
넘는 자들에게 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것이 성령의 찬사의 일부 인 까닭은 이들 용감한 십자가의 군병들이 사탄의 보좌가 있는 방 한 가운데서
사탄을 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두움의 지도자들의 진영 한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과 믿음을 통해
싸움에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칭찬입니까? 다윗에게 갈증을 해소시키는 물을 가져오기 위해
적진에 쳐들어갔던 다윗의 용사들처럼, 이들 믿음의 거인들은 사탄의 지상 요새 영역에 침입하여 말씀을
전하고 권면하여 사망의 그늘 아래 살던 사람들에게 구원의 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보좌와 영역에 관한 이 말이 하나님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칭찬한 말들 중 일부이듯이, 그들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최고의 위치를 얻는 악을 탄핵하기 위해 조치를 취합니다. 버가모(Pergamos): 사탄의
보좌와 거하는 곳. 많은 사람들에게, 이 구절이 진정 역사적이기 보다는 단지 묘사적인 구절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말로 실제이며 역사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버가모는 정말로 사탄의 보좌요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일은 이렇게 벌어졌습니다. 버가모는 원래 사탄이 거했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이 실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그의 본부가 되어왔습니다. 그것은 사탄적 숭배의 발상지였던 바벨론시에
있었습니다. 창세기10:8.구스가 니므롯을 낳았는데 그가 땅에서 강력한자가 되기 시작하였더라.
9.그가 주 앞에서 강한 사냥꾼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아무개는 주 앞에서 강한 사냥꾼인 니므롯 같다,
하였더라. 10.그의 왕국의 시작은 시날 땅에 있는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네이며.
창세기11:1.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그들이 동쪽에서부터 이동하다가 시날 땅에 있는 평야를
만나 거기 거하니라. 3.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는 돌 대신 벽돌을
취하고 회반죽 대신 진흙을 취하며 4.또 이르되, 자,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성과 탑을 세우고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까지 닿게 하며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이름을 내고 이로써 온 지면에 널리 흩어짐을 면하자, 하더라.
5.주께서 사람들의 자녀들이 세우는 성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시니라. 6.주께서 이르시되, 보라, 백성이 하나요,
또 그들이 다 한 언어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이 상상하여 하고자 하는 어떤 일도
막지 못하리라. 7.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고 8.이처럼 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널리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성 세우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성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널리 흩으셨더라.
바벨은 바벨론의 원 이름입니다. 그것은 혼잡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함의 아들 구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유능한 사냥꾼이었던 그의 아들 니므롯의 지배 아래서 세력과 영광을 갖춘 왕국이 되었습니다.
창세기11장의 이야기와 세상의 역사에 의하면, 니므롯은 세 가지 일을 성취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원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 종교를 퍼트리기를 원했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이름을 내기를 원했는데, 그것도 이루었습니다. 그의 성취들이 그토록 중대한 것들이어서
바벨론 왕국은 전 세계 정부 가운데 금으로 된 머리라 불리어습니다. 그의 종교가 으뜸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성서가 이사야14장과 계시록17~18장에서 그것을 완전히 사탄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로 증명이 됩니다.
그리고 역사를 참조해 우리는 그것은 온 세상을 침략했고, 비록 사람들의 언어에 따라 각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신들의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모든 우상 숭배 체제와 신화 주제의 기본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와 자기 추종자들을 위해 이름을 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 시대가 지속되는 동안(예수께서 형제들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때까지) 비록 니므롯과는 다른 이름이지만 또 그가 원해 숭배 받았던 사원과는 약간씩 다른 사원에서지만 그는 경배와 존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다른 나라들의 역사들을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버가모가 바벨론의
사탄적 종교의 자리가 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고대 세속적인 기록들을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 정보의 중요한 출처들은 이집트와 그리이스의 기록들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집트는 갈대아인들
로부터 과학과 수학을 받아들였고 그리고 그리이스가 이집트로부터 그것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이 과학들을 가르치는 걸, 맡고 있었고 이들 과학은 종교의 일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바벨론 종교가 이 두 나라 안에서 세력을 잡고 있었는지에 대한 열쇠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할 때마다, 예정된 시간이 되면 정복국의 종교가 피정복국가의 종교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이스인들이 바벨론 사람들과 똑같이 십이궁지의 표시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그리이스인들에게 다신론에 대한 지식을 전해 주었다는 사실이 고대
이집트의 기록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비밀들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퍼졌는데, 로마와 중국과
인도에서 모습을 나타냈고 우리는 심지어는 북미와 남미에서도 똑같은 기본적인 숭배를 발견하게 되는
지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고대 역사는 바벨론 종교가 틀림없이 지구상의 최초의 사람들이 가졌던 원 종교가
아니었다는데 대하여 성경과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최초의 믿음에서 떨어져 나온 첫 번째 종교였지만
그것은 원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윌킨슨이나 몰렛 같은 역사가들은 고대 기록들로부터 결론적으로 한 때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지존하시고 영원하며 보이지 않고 그의 입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생기게 말씀하시며,
성격은 자비로우시고 선하시며 의로우신 분인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항상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왜곡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린 사탄이 사람들이 진리를 거절하게
하려고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더럽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탄은 항상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며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처럼 경배를 받으려고 해왔기 때문에, 경배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겨서 높아지려 사탄은
하나님으로부터 경배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는 분명 전 세계에 걸쳐 자기의 종교를 퍼뜨리고자 하는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확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며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마음이 어두워져 더럽혀진 종교를
받아들여 조물주가 아니라 피조물을 경배하게 되었다.” 명심하십시오. 사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었습니다.
역사는 불변하는 진리의 편에 섰던 셈의 자손들은 진리에서 떠나 마귀의 거짓말을 믿던 함의 자손들과 완전
대립 상태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깊이 토론할 시간은 없습니다. 다만 두 가지 종교가 있었고 두 개만이
있었고, 악한 것이 세상에 널리 퍼졌다는 것을 알도록 소개했을 뿐입니다. 유일신론은 바벨론에서 다신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마귀의 거짓말과 마귀의 비밀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비밀들에 대항하며
일어났습니다. 사탄은 이제 진실로 이 세상의 신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주님이라고 믿도록 하여
속인 사람들로부터 강제로 경배를 얻어냈습니다. 다신론적 종교는 삼위일체 교리로 시작됐습니다.
“삼위(세 인격체) 안에 계신 한 하나님(One God in three persons)” 이론이 생긴 것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참 이상한 것은 현대 신학자들이 이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명확하게 그들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사탄에게 속아서 여전히 신성 안에 삼위(세 인격체, three persons)를 믿고 있습니다. 그 교리에 대한 권위가
있는 성경 구절을 하나라도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 함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세 하나님의 기본 개념에 연관된
사단의 경배를 드리는데 비해서, 셈의 자손들 중 어느 한 줄기도 그와 같은 것을 믿었다거나 그와 같은 형태에
연관된 어떤 의식적인 경배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신성 안에 세 분이 계시다면,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분인
하나님이시니" 라고 믿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셈의 자손인 아브라함은 창세기18장에서 두 천사와 함께 하신 일위(한 분)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삼위일체는 어떻게 표현되었습니까? 그건 오늘날 로마에서 표현되듯이 정삼각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상하죠? 히브리인들은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가 맞습니까? 히브리인들입니까?
바벨론 사람들입니까? 아시아에서 한분 안에 계신 삼위 하나님의 다신론 사상은 몸 하나에 머리가 셋 달린
형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분은 세 지성적 존재로 표현됩니다. 인도에선, 마음속에서 세 가지 형태로 된 한
신으로서 그를 표현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훌륭한 현대 신학입니다.
일본에서는 우리가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머리 셋 달린 커다란 부처가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들 중 가장 계시적인 것은 1.아버지 하나님을 상징하는 늙은 남자의 머리, 2.아들을 의미하는, 비밀리에
"씨“를 상징하는 하나의 원, 3.새(비둘기)의 두 날개와 꼬리, 이 셋이 하나로 합친 형태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신성 안에 계신 삼위(세 분), 참된 삼위일체
교리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동일한 것을 로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자 제가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실제로 마귀와 그를 경배하던 자들이 믿음의 아브라함과 자손들보다 계시된 진리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탄을 경배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현대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에 대해 말할 때 우리에게 말하려고 애쓰는
부분입니다. 이제부터는 이것 한 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이 기록들은 사실이며 이것은 사실이라는 것을요.
사탄은 거짓말쟁이고 거짓말을 만든 조상이며, 그가 어떤 빛을 가지고 올 적마다 그것은 여전히 거짓말입니다.
사탄은 살인자입니다. 그의 삼위일체교리는 많은 사람을 멸망시켜왔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멸망시킬 것입니다.
역사에 의할 것 같으면 한 아버지와 한 아들과 성령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변화에 소요되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탄은 그것들을 진리로부터 한 번에 한 단계씩 취했습니다.
그 진화된 신성의 개념은 이제 1. 영원하신 아버지,
2. 인간 어머니 안에 육화된 하나님의 영,(이것은 뭔가 생각해 보게 하지 않습니까?)
3. 그 성육신의 열매인 신성한 아들이,(여자의 씨) 되었습니다.
마귀는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간접적인 방법을 제외하고 보면, 아직 자신에 대한 경배를 얻지
못했는데, 그래서 그는 점점 더 사람들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의 비밀들을 통해 마귀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위대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들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들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조용한 가운데서 경배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나타냅니다. 실제로 그것은 전부가 아니라면, 될 수
있는 한 많이 하나님을 무시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교리는 또한 전 세계에 퍼졌고 오늘날에는 인도에 여러분은
그 위대한 창조주, 침묵하는 신에게 바친 신전이 놀랍게도 몇 개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자 아버지를 경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경배의 대상물로서 "어머니와 아기"에게 경배가 기울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이시스(Isis)라는 어머니와 오시리스(Osiris)라는 아들의 결합이
있었습니다. 인도에는 이시(Isi)와 이스와라(Iswara)였습니다. (이름조차 비슷한 것을 보십시오.)
아시아에서는 씨빌리(Cybele)와 디오이우스(Deoius)였습니다. 로마와 그리이스에서도 비슷했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엘가서 마돈나와 머리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아기를 발견하고
놀랐을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형상은 얼굴 생김새의 차이를 제외하고 바티칸에 있는 것과 판 박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원 어머니와 아이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바벨론의 원 여신이자 어머니는 쎄미라미스(Semiramis)
였는데 동쪽 나라들에서는 리어(Rhea)라고 불렸습니다. 양팔로 아들을 안고 있는데, 그 아들은 애기지만 크고,
힘이 세고, 잘 생기고 특히 여자들을 사로잡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에스겔8:14에 그는 담무스(Tammuz)라 불렸습니다. 고전주의 작가들 사이에는 박카스(Bacchus)라 불렸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에게는 니누스(Ninus)였습니다. 팔에 안겨 있는 아이로 그려지고, 하지만 위대하고 강한 남자로
묘사되고 있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가 "남편이자 아들"로서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직함들 중
하나는 "어머니의 남편"이었으며 그 둘이 이스와라와 이시로 알려져 있는 인도에서는 그는(남편) 아내의 가슴에
안겨 있는 애기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니누스가 성경에 나온 니므롯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와 창세기를
비교함으로써 확증할 수 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이렇게 말했는데, "앗시리아의 왕인 니누스는 정복욕에 고대의
온건한 생활양식을 바꾸었다. 그는 주변 국가들에게 전쟁을 일으킨 첫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앗시리아에서부터
리비아까지 모든 나라를 정복했는데 이들은 전쟁의 기술을 알지 못했다." 디오도루스는 말하길, "니누스는
역사에 언급된 앗시리아 왕들 가운데 가장 윗대의 인물이었다. 호전적인 성품을 가진 그는 많은 청년들에게
가혹하게 전쟁 기술을 훈련시켰다. 그는 바벨론에 아무 도시도 없을 때, 바벨로니아를 정복했다."
그래서 우리는 니누스가 바벨론에서 위대해지기 시작했고, 바벨을 세우고 앗시리아를 정복하여, 그 나라의 왕이
되었고 그리고서 사람들이 전쟁 기술을 모르고 폼페이우스가 말했듯, 온건하게 살고 있던 다른 나라 영토들을
삼키기 위해서 나아갔음을 봅니다. 그런데 니므롯의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창세기10장에서, 성경은 말하길
10.그의 왕국의 시작은 시날 땅에 있는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네이며 11.그 땅에서 앗수르가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봇 도시와 갈라와. 그런데 번역가들은 앗수르를 명사로 번역하는 실수를 범했는데, 그 말은 동사입니다.
갈대아 말로 그말은 “강해지려고”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강해짐으로써 (그는 고도로 훈련시킨 최초의 군대를
만듦으로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군대와 함께 시날 땅으로 가서 나라들을 정복했고 니느웨같은 도시를 건설했던
사람은 니므롯(Nimrod)이었습니다. 니느웨라는 말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고, 오늘까지도 도시의 잔해 물들 중
으뜸된 것은 님루라드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니누스가 누군지 알아보았으므로 이제는 그의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에 의하자면 그의 아버지는 바벨론의 창시자인 벨이었습니다.(여기서 그가 전체
움직임을 시작했다는 의미로는 벨이 그것을 세웠지만 아들인 니누스가 그것을 다지고 처음으로 왕이 되었다는
사실 등은 주목해 볼만한 점입니다.) 그러나 성서에 따르면 니므롯의 아버지는 구스였습니다.
8."구스가 니므롯을 낳았는데"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함이 구스를 낳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집트의
문화에서 보면 벨은 헤르메스(허메)라 불리웠고 헤르메스란 "함의 아들"이란 뜻인데, 역사에 따르면 헤르메스는
우상숭배의 훌륭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신들의 통역자였습니다. 그를 칭한 또 다른 이름은 머큐리였습니다.
(사도행전14장11~12절를 읽어 보십시오.) 히기누스는 벨, 허메, 머큐리 등으로 다양하게 알려진 그 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조브(Jove) [로마 역사에 앞선 히브리인들의 여호와]의 나라에서
도성과 법 없이 모두 한 가지 언어를 말하며 살았다. 그러나 머큐리(벨, 구스)가 인간들의 말을 통역한
(통역자는 헤르메뉴테스라고 불리운다.) 후로, 그 인물은 나라들을 분류했다. 그래서 불화가 시작되었다."
히기누스는 여기서 보건대 벨 또는 구스, 니므롯의 아버지는 원래 사람들을 진실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신들의 통역자"로서 사람들에게 다른 형태의 종교를 취하도록 권고한 주모자였습니다.
그는 그들로 실제로는 그의 아들이 지은 탑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이 권고는 인간에게 혼란과 분란을 가져온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통역자이며 교란자"였습니다. 구스는 그때 다신 체제의 창시자였고 인간이 인간에 의해
신격화되었을 때, 물론 신들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스는 벨이라 불리웠습니다. 그런데 로마 신화에서
벨은 야누스였습니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모습과 사람들을 혼동케하여 "흩어지게"하는데 사용한 막대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비드(Ovid)는 야누스가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을 썼는데, "고대인들은
나를 혼돈(chaos)이라 칭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구스는 유일신론에 반대하는 반역자의 시조로서
고대인들 사이에 벨, 벨루스, 헤르메스, 야누스 등등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신들로부터 계시와 해석들을 전달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 사람들에게 분리와 혼동을 주어 사람들을 흩어놓게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다신론이나 다신 숭배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또한 "신들의 아비"라는 직함이 주어졌던 구스라 이름 한 사람을 언급한 것도 찾아봤다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여기서 고대 신화들의 오래된 주제는 신들이 자신들을 인간으로 동일시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그것이 조상을 숭배하는 풍습이 시작된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상 숭배에 대해 알아보고자 역사를 한 번
조사해 보아도 될 것입니다. 글쎄, 구스는 아버지 아들 영의 세 신을 숭배하는 것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모두 동등한 세 신들을. 그러나 그는 여자의 씨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한 여자와 그녀의 씨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니므롯이 죽자 실현되었습니다.
그의 아내인 쎄미라미스가 그를 신격화하고, 자신을 아들의 어미인 동시에 신들의 어미로 만들었습니다.
(로마 교회가 마리아를 신격화한 것과 똑같이. 그들은 그녀가 죄도 없고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녀(쎄미라미스)는 니므롯을 "제로아시타(Zeroashta)"라 불렀는데, 그 뜻은 "여자의 약속된 씨"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그 아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곧 뱀을 밟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 자였습니다. 그들은 그녀를 "하늘의 여왕"이라 불렀습니다.
그녀를 신성시했습니다. 오늘날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예수의 육적인 어머니인 마리아가 불멸의 존재로 승화되었다가 이제 1964년 9월로 바티칸 공회는 마리아에게
그녀가 소유하지 않은 자격을 주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녀를 "메디아트릭스 마리아"
"모든 신자의 어머니 마리아" 또는 "교회의 마리아"라고 부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에 바벨론 적 조상 숭배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로마 교회(카톨릭)의 종교입니다.
조상 숭배가 바벨론에서 유래되었을 뿐 아니라 자연 숭배도 바벨론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바벨론 신들은 태양과 달과 기타 등등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자연에서 으뜸되는 대상은 빛을 주고 토양에 열을
주고 인간에게는 하늘에 있는 불공으로 보이는 태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최고신은 바알이라고 불렸던 태양신이
되었습니다. 종종 태양은 불꽃 고리로 묘사되었고 곧 그 불꽃 주위에는 뱀이 나타났습니다. 오래지 않아 뱀이
태양의 상징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경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마음에 있던 소원은 완전히 이루어
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 숭배를 받았습니다. 그의 보좌가 세워졌습니다. 이제 말씀에서 이탈되어 이교도들이
된 거짓 신자들은 그에게 절했습니다. 거기 버가모 에서는 살아있는 뱀의 형태로 숭배를 받았습니다.
이제 살아있는 뱀의 형태로 상징된 선악을 아는 나무는 이브를 꼬였을 뿐 아니라 인류의 다수를 미혹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바벨론이 사탄의 자리였는데, 버가모가 사탄의 위가 되었습니까? 다시 해답은 역사에 있습니다.
바벨론이 미디아와 페르시아에게 함락되었을 때, 제사장이자 왕인 앗탈루스(Attalus)는 그 성에서 도망쳤습니다.
앗탈루스는 제사장들과 초기의 신성한 비밀들을 가지고 버가모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로마 제국 밖에다
그의 왕국을 세우고 마귀의 보살핌 아래서 번성했습니다. 이것이 바벨론 종교사와 버가모로의 이주에 대한
매우 간략한 개요입니다. 물론 많은 의문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더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빛을 던져주기 위해 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말씀을 배우는데 도움이 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 2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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