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과 공 동 체 라 면?
2012-10
깊어져가는 가을 속으로
박병민 목사(새터공동체)
얼마 전의 김기덕 감독의 영화,「피에타」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돈을 따를 때에는 불행을 불러들이는 자초지종 꺼리들의 이어짐이 될 것이라고 그려가고 있다. 바로 영화 피에타는 사람의 끝없는 욕심의 악한 속성을 말하려고 들었다. 피에타라는 뜻은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시체를 무릎 위에 놓고 애도하는 마리아를 표현한 주제’이다. 중세 말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 회화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의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이 모습의 대표적인 예이다. 영화를 제작한 김기덕 감독은 역시 한때 신학을 공부한 이력이 있으며, 이전 작품들에서도 종교적인 주제를 줄곧 표현해왔던지라 영화 피에타에 기독교인들의 관심이 모아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는 일반 기독교의 구원관과는 그 모습이 사뭇 다르다. 그렇지만 다르다고 해서 우리들이 그것을 배격하기 보다는, 무엇이 다른지 비교할 수 있는 장이 되었으면 한다. 피에타의 주인공인 강도는 끔찍한 방법으로 채무자들의 돈을 뜯어내며 살아가는 남자로 이 영화는 자본주의적 착취구조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어느 날 자신이 ‘엄마’라며 찾아온 여자는 “돈이 뭐에요”라는 강도의 질문에 의미심장한 답을 들려준다. “돈,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 사랑 명예 폭력 분노 복수 죽음......,” 영화 피에타는 돈이라는 소제를 통해 사람의 악한 속성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다른 것을 따르게 될 때 불행에 이르게 됨을 알 수 있다. 어느 교회학자는(차정식 교수 - 한일 장신대), “이 영화의 주된 목적은 자비, 용서, 구원 같은 것이 아니라, 굳이 그 대답을 묻는다면, ‘자속(自贖, Self-redemp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선생님은 어려운 말씀으로 표현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代贖)에 익숙한 기독교인들에게 자속은 낯 설은 말이 아닐 수 없다. 대속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혹은 나 자신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제물(祭物)로, 희생물로 드려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믿음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그럴 때 우리들은 그 분이 들여진 공로(功勞)에 의하여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살아가게 되는 것을 교회에서는 “거듭남”이라고 표현을 하게 된다. 이에 비하여, 아니 반한다고 표현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낯설고 생소한 말 “자속(自贖, Self-redemption)”의 뜻을 그 교수님은, 유대교 랍비 전통에서 극단적인 경우 자신의 목숨을 던져 스스로부터 죄를 씻어내는 일이 있었다. 성서 속에서의 삼손이나 가룟사람 유다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고 얘기 하면서, 행동하는 교회학자 독일의 디트로히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에서 보듯,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만병통치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책임져야할 부분도 십자가로 전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속의 개념을 포용할만한 학문적 상상력이 있다고 한다면 한국교회는 사회로부터 신뢰를 다시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뒤이어서 말을 한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 본위로 왔어야 될 기독교가 낳은 산물이라고 말하더라도,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다른 방향에서 이지만 언뜻 들어오는 생각은 “스스로”라는 말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우리들이 왕을 세우겠다고 생떼를 써대며 나오게 된다(사무엘상 8:1-22). 모든 것의 근본과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학개 2:8). 그리고 땅땅거려대는 그 땅도 그 분 것이라고 말하신다(레위기 25:23). 그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누가복음 20:25),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
나는 그전부터 독도(獨島)에 가고 싶었다.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말을 얘기하는 일구월심(日久月深)이라는 말은, 글자에서 비쳐지는 그림처럼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간다는 모습을 담고 있다. 오늘 이 가을날들은 어느 깊어진 곳에 담겨져서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나 태어나 투사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내 지역 충청도에 머무르며 살아가고 있다. 충청도를 얘기하는 청풍명월(淸風明月)에 담겨져 있으니, 청정지역처럼, 그리고 청정무구(淸淨無垢)의 청정수처럼 맑고 깨끗함을 띠고 싶다. 그리고 청정(淸靜)처럼 맑으면서 또한 고요했으면 더욱더 좋겠다. 그래서 시인 김현승은 “가을의 기도”에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친구들과 달 초순에 우리 마을에서 떨어진 하늘물빛정원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둘러있는 동료들 곁에서 상용이 목사님은 무슨 노닥거림 속에서, 내가 영적으로 맑은 사람이라고 친구들에게 지칭하듯 얘기를 한다. 아니다 나는 그가 그런 것 같다. 그의 이름이 ‘상용(相容)’이라고 할 때에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표현이 될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과 바라보면 그 분과의 공동체, 사람들과 서로 보게 되면 그들과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 ‘상용(相用)’이면 서로 쓰고 쓰여지는, 섬김의 동거동락(同居同樂)의 공동체가 된다. 나는 맑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쥐구멍과도 같았던 선지자 다니엘이 깃들여있었다던, 그 사자굴이 보여 지는 것 같았다. 이 친구가 나를 궁지의 포효하는 저 사자굴 가운데로 밀어 넣고 있구나. 우리는 장에 가는 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하늘물빛정원 속을 거니는 것은 더더욱 못된다. 아니 어쩌면 긴 막대기로 구정물 속을 휘저어대듯, 탁류(濁流) 속을 허우적대고 있다. 시인 조병화 선생은 “천적”이라는 시에서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라고 말을 한다. 그 분이 자신의 눈 속에 들어온 태만한 자화상을 봐가며 읊어대는 소리인가? 자신과 싸워야 되는 나 자신. 가을처럼 홀로 떠있는 독도를 여러 사람들과 무쳐져서 우리 부부는 다녀왔다. 독도 속에서였지만, 그 섬은 결코 홀로의 외로운 섬이 아녔다. 성서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8). “대중 속의 고독”이라 했던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하던가? 이것을 들여다보는 우리들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왜냐하면 우리들은 공동체라는 말이 옆에 있기 때문이다. 모여든 무리를 보면서 예수께서 말하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는 말 속에서(마태복음 12:50), 고독(孤獨)함들이 모여져서 묶음이 되고, 묶음의 다발들이 모여저서 군중이 되고, 대중도 되고, 색 바랜 민중들도 되는 것이다. 요새는 사람들이, 김홍신의 인간시장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로 대두시켜가고들 있으니, 나무를 보기보다는 넓은 숲을 보는 맹점 속에서 살아가고들 있으니 슬픈 세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자들은 커다란 나무들임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흐름배기 올챙이들 쯤으로 생각들을 해대니...... 그래서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는가?하고 인구조사를 하는 지도자에게는 어려움이 뒤 따르게 된다(사무엘하 24:1-7). 셈 레빈슨의 시 아름다움의 비밀에서는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해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고 싶으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으면 네 음식을 배고픈 사람들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해라. 기억해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너 자신을 위한 손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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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예성만 김진구 박성찬 조창봉 이은주 지명수 권희숙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이삭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새터공동체가 위치한 곳은 신평리 밤나무골입니다. 2012년 10월 13일 토요일에 초현교회 유영삼 목사님과 교우들이 밤을 줍기 위하여 공동체에 오셨다가 차량운전으로 같이하여 주셔서, 안쪽 마을인 성당2리 마을 입구에 자리한 이안하우스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전동휠췌어와 걷기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은, 가을들녘을 벗 삼아 한들한들 거리는 바람결 속을 함께 걸으며 돌아왔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금성교회.충전교회.그리스도의집(옹인숙.금산파리바게트.6회).신평교회.정이삭.주식회사EG(이광형).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2인).최영애.금산읍교회(김철우.2회).라홍채.박종만.이은주.충남공동모금회.진명구.채윤기(박현실).수영교회.충남도청도로교통과(4인).김기홍.양오석.대덕교회.산돌교회(최태준).주식회사에스원금산지사(김광호외5인).금산한국전력(곽태근).신건태.임영호(고은성.금산용진).반석전원교회.김재범(서대리).초현교회(유영삼.2회).금산경찰서청렴동아리회(17인).오정교회(최세영).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정인구외1인).변화복지원(변일섭).최영관(신평리).오미순.반석교회(신평리.2회).신성삼외1인(오정교회.한남프라자안경원).주식회사한밭(권오철외1인).신흥교회(성호경.이권종).김용환(최정숙).알즈너대전세움대리점(김종국).김종성가족.새내교회(박완철).금산군모란회(7인).조정리교회(이정애)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