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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산철쭉의 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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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환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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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가 성할 때 찾아가 본다. 일림산? 남들은 다 아는 산이지만 나는 생소한 산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다.
사실 출발시각이 너무 일러서 뭐 이렇게 일찍 가나 했다.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간다고 해서 신청은 했는데 그들은 한 명도 안 왔다. 언제 만나 볼까? 기약도 없다.
오랜만에 미선이를 만나서 반가웠다. 명선도 왔다. 버스는 긴 시간을 달려서 일림산 입구에 도착했다. 초입에 버스 주차장이 있고 위에는 소형 주차장만 있어서 버스가 올라가는 것을 통제한다. 사람만 데려다주기로 하고 올라갔다.
버스에서 내려 복장을 갖추고 화장실을 들리고 잠시 올라가 다리 앞에서 단체 사진을 담았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편백나무숲이다. 의외로 등산객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삼각산도 아닌데 웬 사람들이 이리 많아!’하고 혼잣말을 하니 옆에 있는 사람이 따라 한다.
편백나무숲 길이 곧 끝나니 미선이가 하는 말이 “짧네!” 한다. 그래서 긴 것이 좋으냐고 하니 한 대 친다. 계곡의 물을 보고 미선이가 퐁당 하면 좋겠다고 한다. 시원하게 작은 물줄기가 내려가고 있다.
산기슭 건너편 길로 들어서면 길은 완만해지고 야자나무 열매껍질로 만든 멍석을 깔아 놓았다. 우리나라 참 부자다. 산길에 멍석을 깔아 놓고 다니니 말이다
길이 완만하고 멍석 위를 걷고 있으니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막 돋아나는 연초록의 새싹에 햇살이 내려앉으니 그 빛이 마냥 싱그럽기만 하다. 살포시 다가가 어루만지고, 품고, 눈빛을 나누고, 이야기 하고 싶은 풍경이다.
삼거리 길이 나타났다. 쉼터로 가는 길이 있고 정상으로 가는 길이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쉼터 길로 가기에 그리 가도 되냐고 물으니 정상으로 가려면 그리 가란다. 자신들은 쉬었다 가겠단다. 말투를 들으니 동네 사람들이다.
쉼터로 가는 길은 지도에 습지로 표시된 곳이고 데크길이다. 조금 더 올라가니 쉼터로 갔던 길을 다시 만나는 길이 있다. 쉼터 길로 돌아와도 되는 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골치재에 이르렀다. 사자산과 일림산으로 가는 갈림길로 넓은 공터가 있다. 누군가가 골치재 안내판을 보고는 골치가 아파서 골치재인가 보다고 일갈한다.
골치재란 말을 풀어 보면
ㅇ 골치재 : 골(골짜기) + 치(고개, 백제말) + 재(고개, 신라말) = 골짜기에 있는 고개란 말이 되겠다. 또는 깊을 골에 있는 고개란 뜻이 되겠다.
여기는 삼나무를 심어 놓은 길이다. 좌회전해서 일림산으로 오른다. 능선길이라 완만하다. 능선길이 끝나고 오르막이고 경사는 그리 심하지 않다. 그런데 가파른 길과 완만한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이면 다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여기에 올라서면 골치재 작은봉이다. 작은 원두막을 만들어 놓아서 잠시 쉬어간다. 대산 아가씨가 건네준 오이를 먹고 오른다. 힘을 내서 오를 이유가 없다. 잠시 내리막길이다.
한치재로 가는 길 그 중간에 일림산이 있다.
한치재란 말의 의미를 보면
ㅇ 한치재 : 한(크다. 높다) + 치(고개, 백제말) + 재(고개, 신라말) = 큰 고개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서 조금 오르면 전망대 테크를 만들어 놓았다. 마치 거대한 왕릉처럼 봉우리가 봉긋하게 올라와 있다. 그 봉우리를 산철쭉이 덮고 있는데 꽃이 다 졌다. 미처 떨어지지 못한 꽃들이 그 흔적을 보이고 있다. 아쉬움이 크다.
은순이를 불러서 사진에 담았다. 환하게 밝게 웃는다. 꽃잎이 떨치고 간 자리를 은순이의 옷의 색상이 꽉 채운다. 옆에 큰꽃의아리가 꽃을 하얗게 피웠다. 반갑다.
옆에서 휘파람새 소리가 들려온다. 저 소리를 좀 들어보라고 해도 도통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나만 감동이야!
(큰꽃의아리)
여기를 내려서면 키를 훌쩍 넘는 산철쭉이 터널 길을 만들어 놓았다. 와~ 여기에 꽃이 있었으면 얼마나 멋질까?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스틱을 딛는 것이 아니라 두 개를 한 손에 움켜잡고 가는 것을 보고는 한 초로의 남자가 스틱 하나 달란다. 그래서 줬다. 잠시 오르다가 삼거리에서 일행을 만났는지 땅에 털썩 주저앉으며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래서 스틱을 도로 달라고 해서 정상 쪽으로 올랐다.
옛날 아가씨들을 만나야 사진에 담을 텐데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잡목이 하나도 없이 산철쭉이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왜? 이 산의 이름이 일림산(日林山)일까? 인터넷을 찾아보면 “해를 가릴 만큼 숲이 우거진 산”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정상을 보면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도 숲이라고는 없다.
그리고 왜? 이산에는 산철쭉이 이렇게 많을까? 바닷가라 바람이 너무 세서 큰 나무가 자랄 수 없었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팔봉산을 가보면 큰 나무도 잘 자란다.
아마도 바람과 토양의 복합적인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이 산의 토양은 약간 강한 산성토양임이 분명하고 산성토양을 좋아하는 산철쭉이 이 산에서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다시 일림산(日林山)으로 돌아가서 한자로 해석을 한다고 쳐도 한자는 목적어가 뒤에 있으므로 “태양이 숲을 비춘다. 또는 덮는다”로 해석을 해야 맞을 것 같다.
그 의미를 굳이 새긴다면 해가 숲 위로 잘 드는 산 정도가 되겠다. 그렇다면 세상에 그런 산이 아닌 곳이 별로 없다.
일림과 비슷한 발음의 우리말을 찾는다면 “이르다. 일어난다. 이름, 이물” 등이 있다. “이”는 앞이란 우리의 옛말이다. 이로 유추해 볼 때, 앞산 또는 일어선 산, 앞에 우뚝 일어서 있는 산이란 의미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정상은 가운데가 올라온 밭 같다. 아이스케이크 장사가 소리 높여 소리를 지르고 많은 사람이 아이스바를 입에 물고 있다.
바다인지 호수인지 섬인지 육지인지 흩어져 있는 풍경을 바라본다. 손에 닿을 뜻 잡힐 듯한 풍경을 내려다보니 너무 좋다. 동공은 커지고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이런 맛에 산에 오른다.
거기다기 일림산의 일(日)인 햇빛이 온 세상에 밝게 내려오니 어둠이 하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모든 것이 밝고 빛나고 아름다움이다. 꽃은 젖지만, 새싹은 돋아나니 너무 벅차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아름다움 중의 하나가 성장감(成長感)이다. 이 새싹은 우리에게 무한한 성장감을 준다.
성장감이란 뭔가 자라는 것을 느끼는 감정이다. 아기가 자라고, 새싹이 자라고, 사랑이 자라고, 돈이 자라고 할 때 느끼는 행복감을 말한다.
아기가 첫걸음을 떼는 순간의 성장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성장감의 행복을 준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성장감이 사라진다. 그래서 행복을 느끼려면 뭔가 성장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찾아야 한다. 하다못해 상추라도 심어서 자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정상석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섰다. 일행이 있다고 은근슬쩍 끼어드는 사람들이 많다.
정상인증 사진을 담고 봉우리에서 내려와 뒤돌아본다. 대부분 산의 모습은 앞뒤가 다른데 이산은 거의 똑같다.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고 있다. 어디 끼어들 자리가 없어서 경순이와 옥선이 이렇게 셋이 자리를 잡았다. 옥선이가 올방개묵을 쑤어오고 장떡도 부쳐왔다. 경순이는 두부전을 부쳐왔다. 나는 박스케익을 잘라 가져왔다. 맛나게 먹었다.
어디선가 또 휘파람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이 새의 노래와 두견이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남국의 정취가 묻어난다.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나만 좋은가? 노래는 다시 얘기해 보자!
점심을 먹고 내려오다가 뒤돌아서서 봉우리를 보니 펑퍼짐하던 봉우리가 여기서는 봉긋하다. 그래서 아기씨의 젖가슴 같다고 하니 야단들이다. 왜? 남의 느낌을 강요하는가?
한치재로 가고 발원지로 가는 길에서 발원지 계곡 쪽으로 내려섰다. 보성강 발원지라고 도랑 같은 곳에서 물이 흐르고 있다.
(보성강 발원지)
계곡으로 내려서면 편백숲이다. 편백나무 하면 피톤치드의 대명사이다. 사실 피톤치드는 소나무에서 더 많이 풍긴다고 한다. 다만 편백나무는 목재에서 그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
편백숲이다. 쭉쭉 뻗은 나무가 시원하게 서 있다. 이런 모습도 사람들에게 성장감을 준다. 내가 하지 못한 어떤 것을 이룬 것 같은 모습 그 모습이 나였으면 하는 마음이 기분을 좋게 한다. 옥선이가 참 좋단다.
숲을 나와서 단체 사진을 담던 곳을 지나 도로를 따라 내려왔다. 꽃잔디에 앉은 산제비를 보고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꼬막정식으로 밥을 먹었다.
한 상 푸짐하게 잘 나왔다. 간장게장이 다들 입맛에 당기는데 리필을 해 주지 않아 서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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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는 보고 싶은 사람만 꼭 보세요.
한류가 뭔가 궁금하면 꼭 보세요.
한 번에 보지 말고 여러 번에 나누어서 보세요. 여러 번 보세요. 그러면 느끼고 행복의 길이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녀는 왜? 환장하는가? 그들은 왜 환장하는가?
우리는 한때 서양의 문물을 빨리 배워서 잘 사는 것이 목표이었었다. 서양의 문물을 잘 배운 사람이 잘 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모든 것은 열등한 것이 되었고, 숨기고 싶은 것이 되었고, 자랑스러울 것이 없는 것들이 되었다.
(인터넷 사진)
지금도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해외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음식은 특이해서 입맛도 특이하다. 우리 음식은 발효식품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고추장 김치를 몰래 가지고 나갔다. 외국 음식은 대부분이 굽고 튀기는 것이라 느끼하다.
호텔 방에서 혹은 호텔 식당 한 귀퉁이에서 이것을 몰래 먹었었다. 그러면 입맛이 개운했다. 그러면 가이드가 질색했다.
그러면서 했던 말이 세계에서 한국 사람이 1%도 안 된다. 이런 데 여러분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 옳으냐 여러분이 세계에 입맛에 맞추는 것이 옳으냐? 하면서 제발 고추장 들키지 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 어느 호텔에 가도 웬만하면 김치가 다 있다.
그때는 상상도 못 했던 말이다.
얼마 전에 멕시코 대통령이 BTS의 멕시코 공연을 늘려달라고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사실 나는 BTS의 노래를 한 곡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그래서 별것을 다 뉴스에 쓰네 하면서 참 한심한 대통령이 다 있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BTS는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바꾸는 메시아이다. 너무 종교적 색채가 심한가?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아니면 미륵불! 아무튼, 그렇다. 나만 몰랐다.
우리가 접한 서양의 최고의 선물은 자유이다. 자유라고 하면 우리는 뭔가 환상적이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 같은 아주 좋은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여기에 빠져든다. 종교처럼 말이다. 그게 그럴까?
자유는 이 세상에 늘 존재해 왔다. 다만 그 자유를 누가 가지느냐의 문제만 있었다. 북한에도 자유는 있다. 다만 그 자유를 김정은이만 가지고 있어서 문제이다.
서민에게 자유란 어떻게 탄생했을까?
역사이래 서민에게 지속해서 가해진 폭력과 폭압이 새로운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시민의식이 싹이 트고 수많은 투쟁의 결과로 압제자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자유를 얻었고 행복했고 부를 얻었다. 살다 보니 자유가 있는 곳에 심한 경쟁, 성공에 대한 지향, 부자, 쟁취, 소유라는 것이 따라왔다.
서양의 자유 의식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평화 속에 골고루 나누는 자유를 꿈꾸는데 서양은 능력에 따른 자유이다.
(인디언을 굶겨서 죽이려고 들소를 모두 죽임, 인디언 굶어 죽음)
따라서 능력이 되면 걸리지 않으면 남의 물건을 힘으로 뺏어도 속여서 뺏어도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디언을 학살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지는 것은 하나님이 준 크나큰 자유라고 했다. 지금 트럼프식 자유이기도 하다. 폭동이 나면 기회가 되면 가차 없이 약탈한다.
가지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런 자유를 가질 수 없다. 그게 사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지금도 지향하고 강요하는 것들이다. 왜냐!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깐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공한 소수 이외에는 이런 사회에서는 삶의 가치를 잃었다는 것이다.
자유는 누군가의 간섭이 없는 자기 자신의 독립으로 이어지지마는 이것이 길어지니 자유는 어느새 외로움이 됐고 사회적 방치가 되어 어느새 길잃은 영혼이 되어있는 것이다. 방치된 삶을 사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이 특히 서민들이 그렇다. 서양에서 말이다.
(인터넷 사진)
나의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 남을 거리낌 없이 제거하는 것이 남미 사회 멕시코 사회의 현실이다. 미국도 별반 다름이 없다. 조금 낫기는 하다. 남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그럴 뻔했다. 자유! 자유 외치던 사람이 말이다.
그런데 BTS의 노래는 이렇게 방치되고, 소외되고, 경쟁에 지치고, 허물어진 인간의 마음에 용기를 주는 노래이다. 요즘 서양의 가사는 경쟁과 욕설과 섹스를 말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BTS의 노래는 “너는 소중해” “다시 할 수 있어!” “우리 함께 해!”라는 나를 이해해 주고 나를 배려해 주는 노래라고 한다. 이제까지 못 나고 버려지고 외톨이가 되었던 “나”라는 사람을 알아주고 용기를 주고 배려해 주고 안아주는 노래이다.
그러니 환장할 노릇이다. 이제까지 없던 내가 살아난 것이다. “나”라는 존재를 소중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나는 BTS의 노래를 한 곡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남들이 그렇다고 분석해 놨다. 지금에 와서 새삼 BTS가 존경스럽다. 참 위대한 사람들이다. 인류의 마음을 흔들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영향 때문에 미국의 어느 석학은 한국어가 30년 후에 세계 7대 공용어가 된다고도 한다. 그때 태어날 걸 세계여행하기 편하게 말이다.
멕시코 공연이 끝난 후 멕시코 대통령이 BTS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공연이 멕시코 젊은이에게 범죄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찾아가게 했다고 말이다.
텍사스 공연을 마치고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빠지고 쓰레기도 남김없이 치우고 자를 떠났다고 한다. 거리에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제까지 미국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왜냐 쓰레기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티켓을 산 사람의 자유이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자칫 범죄에 휘말릴 수 있는 일이었다.
이들에 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고 배려라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BTS가 한국 문화가 세계인의 정서를 바꿔 놓고 있다.
갑자기 한류라고 하니 어리벙벙하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가치 없고 국제 수준에 떨어져서 숨겨야 한다고 했던 일들이 갑자기 국제적 호감의, 존중의,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한류라고 하니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을 잘 만들어서 노래를 잘 해서 등으로 해서 해석하는 데 그 이면에 있는 한국인의 정서라고 한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아직 이것을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들이 공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양 것만 공부했지 한국 것은 공부한 적이 없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찾아낸다. 그 찾아낸 것을 보면 이렇다.
한국 문화에는 치유, 공감, 존중, 동행(함께), 열정, 안정, 평화 같은 정서가 있다고 한다. 자신들이 이제까지 가지지 못했던 정서이고 인간의 기본 정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생각했던 성공 성취 돈과는 거리가 멀다.
이 모든 것을 짧은 지면에서 설명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보면 식당에 가서 무엇을 주문하면 바로 가져다준다. 우리는 당연하지마는 외국 식당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외국 식당에서 추가 주문하면 한세월인데 우리는 바로 준다. 이것이 자신을 존중해서 바로 가져다주는 것으로 느낀다. 또 맞는 말이다. 자기를 존중해 주니 마음의 안정을 얻고 자신을 인정해 주니 마음의 치유가 된다. 놀라운 일이다.
빨리 안 가져다주면 속이 터지고 자신을 무시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더러운 기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빨리 가져다 달라고 줬던 돈이 팁의 출발이라고 한다.
우리는 말을 걸면 웬만하면 말을 들어주고 대화 상대가 되어준다. 서양은 예약하고 말을 걸 때도 미리 양해를 얻어야 한다. 함께 있으니 외로움이 날아간다. 서양인이 그렇게 느끼고 우리는 그런 거 모른다. 늘 있는 일이니 말이다.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하고 흥에 겨우면 우리는 떼창을 한다. 함께 하는 것이다. 일본인은 조용히 듣는다. 가수와 관중에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
서양도 춤은 추어도 떼창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었는데 외국에서도 한국 가수가 노래하면 떼창이 기본이 되었다. 우리는 함께 하는 동행인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등산문화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온 것이 어찌 보면 인류가 살아가는 기본적인 삶이고 행복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버리고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고 있다. 그게 대부분 돈일 것이다.
행복은 이미 우리 곁에 있는데 자꾸만 다른 것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느낌, 감정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자? 행복도 엄격히 말한다면 이 좋은 느낌이다. 이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 한국어에는 풍부하다. 서양말에는 별로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 good뿐이다.
느낌 감각의 표현 중에 일부인 의성어 의태어를 보면 영어는 36개 프랑스어는 약 20여 개라고 한다. 한국어는 무려 4,600개라고 한다. 예를 들면 깡충깡충, 말랑말랑, 살금살금, 토실토실, 복슬복슬, 따끈따끈 등이 있다.
그녀는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왔다.” 와 “천천히 다가왔다.”가 있다. 그 느낌이 다르다. 서양 언어에는 “천천히 다가왔다.” 밖에 없다.
우리는 과거 이런 말을 두고 논리적이지 않다고 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서양 언어는 거래언어이고 우리 언어는 감성의 표현언어이다. 그렇다고 우리말이 논문을 못 쓰고 거래를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언어는 남에게 없는 감성의 표현이 풍부하게 있고 삶의 느낌은 팍팍 느끼게 하는 언어이다. 서양 언어는 이것을 죽었다 깨도 못한다.
서양의 어느 사람이 한국어를 알고 자신들은 감정의 표현을 1/10도 못하고 살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억울해했다고도 한다.
외국인이 한국어 여기에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참 멋진 언어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 30년 후에 세계 7대 공용어가 된다고 하니 기대해 본다.
이렇게 멋진 언어를 쓰는 그대가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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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행복은 한국에 있어요,.
10여년전에 다녀온 기억나네요 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