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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54-62)
말씀을 무시하고 기도를 멀리하고 자신을 과신할 때 언제든지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리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과 자신의 영적인 거리는 얼마나 되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주와 함께 가겠다고 장담하더니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는 연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54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54-62)
본문은 이제 감람산에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진행됩니다(마 26:57). 베드로이 부인에 대한 누가의 서술은 간결하고 독특합니다. 그의 서술은 전반적으로 베드로의 부인보다 예수님의 예언 성취에 초점을 둡니다. 가룟 유다의 고발로 체포되신 예수님께서는 무장한 사람들의 손에 포박된 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1)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54-55)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가야바의 집으로 심판을 받으시려 끌려가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서 따라고 있었습니다. ‘따랐다’는 마지막 순간에도 신실한 제자로 살려는 마음이 드러나지만, ‘멀리서’ 따르는 데서 두려움에 떠는 연약한 모습이 부각 됩니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지만, 결국 예수님의 긍휼로 돌이켜 죽기까지 따를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뜰에 모여 불을 피우고 있었고 베드로도 그들 중에 있었습니다(55).
(2)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56-60)
멀찍이 따라왔던 베드로는 추위 때문에 사람들 틈에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빛에 베드로의 얼굴이 드러났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안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예언했던 대로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첫 번째 부인에서는 문을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외쳤고, 베드로는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했습니다. 두 번째 부인에서는 남자가 ‘너도 그 무리 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고 부인했습니다.
두 번째 부인 후 한 시간이 지나고, 세 번째 부인 장면이 이어졌습니다. 다른 사람이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주장하며 갈릴리 사람이라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반박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때 닭이 울어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부인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조금 후에’, ‘한 시간 후에’, ‘즉시’ 등의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부인 사실만을 간결하게 전달하며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3) 회개하는 베드로(61-62)
61-62절은 베드로의 회개를 언급합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이 구절은 누가복음에만 언급됩니다. 여기 사용된 동사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청중을 권고할 때에 나타납니다(7:9,44; 9:55; 10:23; 14:25; 23:28). 베드로는 주께서 돌이켜 자기를 보았을 때에 그의 부인을 예견한 주의 말씀을 상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몹시 슬퍼하며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의 회개를 야기한 것은 주의 말씀이었습니다. 그의 부인을 예견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는 통곡하며 돌이켜 회개하였습니다.
심문과 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63-71)
주의 능력은 예언의 성취로 드러납니다. 배반이 성취되었다면 회복도 그럴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기억하고 말씀대로 형제를 굳게 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은혜는 우리 인생의 그림을 얼마든지 다시 그릴 수 있게 합니다. 죄인 향한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기억하고 다시 행해야 합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63-71)
누가는 관점을 베드로에서 예수님께로 옮깁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공회 앞에서 신문을 받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인정하며, 인자가 하늘의 권능을 가진 분임을 선언하십니다. 이로 인해 공회는 예수님을 모독한 혐의로 정죄하고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합니다.
(1) 조롱당하신 예수님(63-65)
본문 이외에도 누가는 예수님께서 조롱당하신 일을 여러 번에 걸쳐 서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과 그의 군인들(23:36-39). 십자가에 달린 죄수(23:39)에 의하여 멸시와 조롱을 당하십니다. 누가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기사를 베드로의 부인 기사 이후에 배치하는데, 마태와 마가는 두 사건을 별개로 다루고 베드로의 부인을 사실에 입각하여 담담하게 서술합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군인들에 의해 폭력으로 고통당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예수님을 가두고 지키는 자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때렸습니다(63).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면서 선지자라면 때린 자가 누군지 맞춰보라고 놀립니다(64). 이 외에도 여러 말로 욕을 쏟아부으며 모독했습니다(65).
예수님께서는 군인들의 모욕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도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2) 공회 앞에 서신 에수님(66-71)
66-71절은 산헤드린 공회에 소환되고 재판을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인들에게 모욕과 구타를 당하고 나서 날(니산월 15일 혹은 유월절 아침)이 밝아오자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 소환됩니다(66). 공회의 첫 번째 질문은 예수의 정체에 대한 것으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지 묻습니다(67a).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정체를 밝혀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므로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67b-68).
예수님께서는 인자에 관한 내용으로 대답합니다.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 인자는 다니엘 7:13-14,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는 것은 시편 110:1에 근거합니다. 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지만 부활과 승천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나라와 권세를 받으실 것입니다(단 7:13-14; 시 110:1).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산헤드린 공회와는 비교될 수 없는 하늘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24:51; 행 2:33; 3:19-21; 7:55-56).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심판하고 있지만 진정한 재판 권한은 인자이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공회원들은 왕이 보좌에 앉아 통치권을 위임받는 장면을 묘사한 시편 2:6-7을 떠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편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나의 왕’,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공회원들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즉 왕(=하나님의 아들)인지 묻습니다(70).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나를 말하고 있다’라고 모호하게 반응하십니다. 적대적인 질문자들의 올무에 걸리지 않고 그들의 판단에 맡기십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단정 지어버립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그리스도 왕’이라고 주장한 이유로 예수님을 고발하는 장면(23:2)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질문한 것이 의도적이었음을 입증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는 혁명을 시도하는 행위입니다. 이 정도의 주장으로도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고발할 요건이 됩니다. 그래서 공회는 더 이상 증거를 수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초기 교회와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고난받는 종으로서 낮아져 모욕당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할 대상은 세상 권력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의지할 대상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된 후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부인과 예수님의 고난이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두려움에 떨며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의 연약함과 예수님의 사랑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진정한 믿음과 회개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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