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절복을 해야 할까요?
절복이라는 말은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파절굴복(破折屈伏)’을 말하는 것이며 방법(謗法)인 ‘사법사사(邪法邪師)의 사의(邪義)’를 파절하여 조복(調伏)하고 그리고 전부 ‘정법정의(正法正義)의 공덕’에 의해 말법 만년의 사람들을 구제하여 성불시켜 나가는 행위입니다.
생각해보면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시 어느 분의 절복에 의해 오늘날 대성인님의 본존님을 수지하여 이 정법의 공덕을 나의 몸에, 나의 가정에 확고하게 구축하여 나타낼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도 ‘절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하는 것은 이미 여러분들은 깊이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들은 왜 절복을 행해야 할까요?
이것은 매우 간단한 것 같지만 쉽사리 이 중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실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달 교학부터 ‘절복의 대사(大事)’에 대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부처의 본회(本懷)에 맞추기 위해
니치칸상인은 ‘보은초문단’이란 책 속에 말씀하시기를 송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저작된 ‘대승기신론필삭(大乘起信論筆削)’이라는 책의 글을 인용하시어 ‘부처의 본회에 맞추기 위해’라고 절복의 중요한 점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 ‘대승기신론필삭’에는 부처가 교법(敎法)을 남기는 뜻은 전홍(傳弘)하고 전전(展轉)해서 사람을 제도하여 대과(大果)에 이르게 하는 데 있느니라’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수량품(壽量品)’에 시호양약 금류재차 여가취복 물우불차[(是好良藥, 今留在此, 汝可取服, 勿憂不差) : 이 좋은 양약을 지금 남겨서 여기에 둔다. 그대는 취하여 복용하여라. 낫지 않는다고 우려하지 말지니라)]’라고 최고의 양약인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대법을 남겨두신 그 부처의 근본 뜻인 것입니다.
말법인 오늘날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종조 니치렌 대성인께서 말법 만년의 사람들을 위해 총여(總與)의 대어본존을 건립 하신 그 뜻인 것입니다.
대성인님의 이 불의(佛意)는 묘법을 말법의 사람들에게 전하여 넓히고 전전해서, 다시 말하면 「오십전전(五十展轉)의 원리」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에게 ‘법(法)’을 전한다. 그 파문이 또 다음 사람에게로 전해 나간다는 「오십전전(五十展轉)의 원리」리에 의해 사람을 제도하여 일체의 사람들을 교화해서 대과에 이르게 하고 성불을 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설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전연(傳演)하지 않는다면 즉 절복을 하지 않는다면 ‘부처의 본회에 거역한다’는 것을 설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로 알지어다. 만약 전연(傳演)할 때는 부처의 본회(本懷)에 맞느니라”(문답집 438쪽)라는 지남을 니치칸상인은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복이야말로 부처의 본회에 맞는 수행이기 때문에 ‘유화인욕(柔和忍辱)’이라는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사(事) 행한다’는 부처의 본회에 맞는 거동이기 때문에 절복의 일행(一行)이야말로 가장 크고 최고의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 오십전전(五十展轉)의 원리
불법에서는 ‘오십전전(五十展轉)’이라고 해서 정법(正法)의 훌륭함을 듣고 기뻐하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는 원리가 있습니다.
『법화경(法華經)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제18』에 이렇게 설해져 있습니다.
석존 멸후(滅後)에 법화경의 설법을 듣고 마음속 깊이 환희하고 귀의(歸依)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자기가 마을에서 떨어진 산골이나 도시로 가서 각자 능력껏 가르침을 말한다.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똑같이 환희해서 귀의하고 다른 곳에 가서 법화경의 가르침을 이야기한다.
그때, 들은 사람이 환희해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 법화경을 이야기해 주고 수희(隨喜)시킨다…. 이렇게 계속 전하여 50번째 사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오십전전’의 ‘오십(五十)’이라는 것입니다. ‘전전’이란 ‘구르며 돈다(순화한다)’는 뜻으로 ‘차례로 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50번째로 법화경을 듣고 수희한 사람의 공덕이 얼마나 대단한 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맨 처음에 법화경을 듣고 기뻐하며 귀의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한 공덕은 더욱 대단하겠지요.
한사람씩 전해져서 49명이 도중에 개입되었으니 50번째로 들은 사람은 기쁨도 공력도 엷어지겠지요. 연못에 돌을 던져 생기는 파문도 넓어져 감에 따라 점점 약하게 됩니다. 그런데 법화경의 공덕이 엷어진다 해도 당연히 50번째 사람의 그 환희의 공덕은 대단히 큰 것입니다.
대성인님은 50번째 사람의 환희는 엷어진 것 같지만 석존재세시 활약했던 그 훌륭한 제자들의 공덕보다도, 부처의 멸후에 법화경을 전해 듣고 50번째로 환희하는 사람의 공덕이 백천만억배 크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최초에 수희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사람의 공덕은 얼마나 클까요? 묘법을 듣고 기뻐하며 남에게 말하는 공력(功力)이 얼마나 큰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