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문희봉
나는 인연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탄탄하고 견고하게 이어주는 동아줄이다. 한번 엮어진 동아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어떤 귀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헤어짐의 찬란한 시간도 과감히 버린다. 인연이 그리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랴. 인연도 나이를 먹으면 무엇이 될까. 가을이면 하얗게 핀 메밀꽃이 따가운 햇살에 눈이 부시다. 누굴 그리워하는 걸까?
살다 보면 만나지는 인연 중에 참 닮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비슷하다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과는 인연줄이 닿아 있을 것이다.
한 번만 보아도 그가 갖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속마음을 감추려는 아픔과 절망까지 다 보이는 사람이 있다.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처럼 향 맑은 촉기가 어려 있다. 지칠 대로 지친 가랑잎 같던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그가 지닌 영혼이 너무나 맑고 투명하기에.
아마도 전생에 무언가 하나로 엮어진 게 틀림없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명주실처럼 윤기 있는 늦가을의 햇볕과 같은 것이고, 검정 우단에 보석 몇 알 흩어진 듯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하다. 쥐어짜다 만 빨래 같은 몸과 마음을 지니지 않았기에 내가 좋아할 것이다.
깜짝깜짝 놀랍기도 하고 화들짝 반갑기도 하고 어렴풋이 가슴에 메이기도 한 그런 인연을 살다 보면 만나게 된다. 백정도 칼을 버리면 부처가될 수 있다 했다. 그때는 얼마나 기쁜지 삶의 희열이란 이런 것이겠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단 속내가 훨씬 다른, 그래서 더 마음이 가고 더 마음이 아린 그런 사람이 있다. 서리 내린 다음의 나뭇잎이 하루 사이로 달라지듯 늙음으로 치닫는 나이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래서 둘 사이는 더욱 견고해진다. 처음에는 밤길에 만난 절벽 같은 사람이었지만 지내다 보니 그 속내에는 얼마나 부드러운 것이 많이 들어있었던가. 그런 사람을 보면 소나기 만난 송아지 뛰듯 기분은 하늘을 난다.
그러기에 사랑은 어렵고 그리워하기엔 목이 메고 모른 척 지나치기엔 서로에게 할 일이 아닌 것 같고 마냥 지켜보기엔 그가 안쓰러워 보듬어 가며 그런 하나하나에 마음을 터야 하는 사람, 그렇게 닮아 버린 사람과 살다 보면 내가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시린 바닷바람이 소금 냄새를 풍기듯 인정 많은 사람은 달콤한 향을 발산한다. 인생이 살다 보면 한 번은 넘어진다. 그렇다고 포기는 안 된다고 두 번 세 번 나에게 용기를 주던 사람과의 인연을 생각한다. 그런 사람의 가슴에는 잘 구워진 고구마 맛 같거나 눈 오는 날 구들장 온기 같은 정이 듬뿍 들어 있다. 정호승 시인의 말대로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감사함을 통하여 부유해진다.
그렇다. 애정만 있다면 차돌을 맹물에 삶아 먹어도 맛있는 것이 된다. 신 살구 알 냄새도 난다. 남의 손톱 밑에 가시 든 건 알고, 제 등에 둥창 난 건 모르는 사람은 인정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다. 항상 백정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과 사랑을 표현하는 솜씨가 서툰 사람과는 인연을 맺기가 어렵다.
첫댓글 월간 수필문학 202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