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2일 여독모 독서모임 선정 책 :
<징비록(懲毖錄)> 류성룡 저, 오세진·신재훈·박희정 역해(譯解), 홍익출판사, 2015.
- 역사를 경계하여 미래를 대비하라. 오늘에 되새기는 임진왜란 통한의 기록 -
이 책의 저자 류성룡은 조선 선조(참 무능했던 임금이 40년 동안이나 재직했네)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 수행을 책임지는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으면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황(戰況)과 대궐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살필 수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임금과 주변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굴하지 않고 안동 하회로 귀향하여 후대에게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실을 알리고 교훈을 남기려고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과 임진왜란의 진행상황은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이고, 내가 이번에 새롭게 안 것은??
1. 명나라-왜군의 강화조약을 바라보는 조선의 심정
이 책에 이러한 대목이 있다. (212쪽)
“그들(명나라 이여송과 왜)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듣지 못했지만, 대체로 왕자와 신하들을 돌려보내고 부산으로 철군한 뒤에 화의를 허락하겠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적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청하였으므로 제독은 마침내 개성부로 돌아갔다. 나는 제독에게 글을 올려 강하게 말하였다.
“화의는 좋은 계책이 아니고, 공격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제독이 그 글에 화답하였다.
“당신의 말은 처음에 제가 생각했던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제독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이종탁 친구가 언급한 대로 한국전쟁 때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싸울 힘이 없어 도와주러 온 남의 나라 군대에 의존하면서도 화의는 하기 싫고, 조금만 더 공격하면 적을 완전히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를 도우러 온 저 우방의 군대는 적과 화의를 하여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고...
“명군의 실질적 지휘관인 송응창은 심유경을 내세워 일본군과의 강화협상을 적극 추진했다. 벽제관 전투 패배 이후 사기가 꺽인 북병 출신 제독 이여송은 와병을 핑계로 전투에 소극적이었고, 남쪽 지방 출신의 문관인 송응창은 본격적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며 목소리를 키웠다. 송응창은 일본과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선조의 견해를 무시했고, 선조의 명을 받고 자신을 만나러 오는 신하들을 만나주지도 않았으며, 독단적으로 일본군과 강화협상을 추진했다.” (230쪽)
한국전쟁때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이 휴전회담을 진행하자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정부는 계속 싸워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고 학생들을 내세워 후방에서 데모를 했다. 전선에서 남의 자식이 죽어나가든 상관하지 않고.
우리를 도우러 온 우방이야 자기들의 더 많은 희생을 가져올 것이 뻔한 ‘전쟁의 완전한 승리’보다도 명분 있게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지만 우리는 이참에 적을 완전히 무찌르고 싶은데 전력은 부족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2년 후인 1594년이나 한국전쟁이 나고 3년 후에 휴전협정이 진행되던 1953년이나 너무나 흡사했다.
누가 그랬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는 또다시 반복된다!”고.
2. 임진왜란 보다는 정유재란 때에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에 시작되었으나 조선군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한양과 평양을 빼앗기고 임금은 의주로 피난을 갔는데 명나라 군대가 와서 평양을 탈환하고 명나라와 왜군이 협상을 하여 한양을 되찾았다. 1953년 10월에 선조가 한양으로 되돌아 온 이후에 1594~1596년 3년간은 명나라와 왜군이 계속 협상을 하였고 왜군은 남해안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다가 1597년 1월에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재침략을 명하여 다시 왜군이 몰려오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1597년 7월에 (원균의) 칠천량 해전의 참패는 그 결과가 매우 참담했다. 제해권을 상실한 조선 수군은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아내지 못했고, 왜군은 경상도는 물론이고 전라도로 밀고 들어가 남원성까지 진출해 더욱 가혹한 약탈에 나섰다. 보급로가 생기면서 왜군의 침략과 침투범위는 더욱 광범위해지고 용이해졌다. 전황은 조선에게 더욱 불리하게 작용하였으며 민간인이 입은 피해는 임진왜란 때보다 더 심했다.(258쪽)
왜군은 전주성까지 점령하여 전라도를 맘껏 유린하고 약탈하고 살육을 자행하였다. 왜군은 다시 복귀한 이순신 장군에게 1597년 9월에 명량해전에서 대패하고 나서 뭍으로 올라가서 전라도와 경상도 내륙 곳곳에 진지를 쌓고 장기지배체제에 들어간다. 이 진지를 쌓거나 물자를 나르는 데에는 조선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 나왔듯이) 이들을 붙잡아 와서 먹을 것도 안 주고 일을 시키고 더 이상 일을 못할 정도가 되면 죽이고 다른 사람을 붙잡아 와서 또 일을 시키고...
3. 선조가 의병 활약을 폄하하다
임진왜란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조선이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해전에서 이순신의 존재와 북상하는 왜군의 후미를 괴롭힌 의병의 활약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선조는 의병의 역할을 제대로 평가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공신 책봉을 할 때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공신인 선무공신 명단에 의병장의 이름은 없었으며, 일등공신에 이순신, 원균, 권율 같은 관군의 장수들만 선정되었을 뿐이다. 특히 칠천량 해전의 패장인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책봉한 것은 선조와 대신들의 선무공신 선정이 얼마나 불공평했는지를 보여준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 같은 의병장들이 선무공신에 선정되지도 못했고 그중에서도 김덕령 같은 의병장은 선무공신에 선정되기는커녕 역모죄로 몰려 고문을 받다가 죽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선조는 전란의 와중에도 무책임했던 기득권 인사들의 행동을 미화하고,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와 자신을 호종(扈從)하며 국체를 지켜낸 사대부의 공로를 강조했다. 선조는 명나라 군대를 '나라를 다시 세운 은혜'를 베풀어준 은인이라고 포장했고, 조정 중신들은 선조가 전란을 극복하고 나라를 지킨 임금이라고 치켜세우며 묘호에 '조'를 붙일 것을 건의했다. 선조는 한양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고도 한양을 버리고 도망갔고 (이것도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과 똑같다)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고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자신들의 책임을 이런 식으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명나라는 조선을 살려준 은인의 나라가 되었고, 이는 이후로도 변화하는 국제 관계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친명배금 정책을 유지하는 단초가 되어 40년 후에 병자호란을 당하게 된다. (333쪽)
4. 동인과 서인의 당쟁:
황윤길과 김성일이 책의 앞부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에 선조가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을 일본에 보내 일본 정세를 알아보게 했는데, 황윤길은 반드시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일본전황을 급하게 보고 했지만 김성일은 그런 정황을 보지 못했다고 엇갈린 보고를 했다. 선조는 김성일의 말을 믿고 대비를 하지 않았다.
선조가 황윤길의 말을 믿었다 하더라도 조선은 대책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그 때 조선은 쓰러져가는 환자처럼 허약했고 가난했다. 기본적인 체제만을 유지한 채 당쟁으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나라였다. 선조가 황윤길의 말을 믿고 싶어도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김성일의 말을 믿은 것은 아닐까? 이건 내 생각이다.
이 사례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 당쟁의 병폐를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것인데, 4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정치판에도 여전히 국익보다는 오로지 이러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볼 일이다.
5. 이렇게 명나라에게 도움을 받아서 겨우 조선이라는 나라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주면서 국력을 소모한 것도 있고 해서 명나라는 오랑케인 여진족의 나라인 청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고, 명나라가 비틀거리고, 명나라가 도움을 청하자 조선은 은혜를 갚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임금인 광해군은 중립외교로 명-청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했는데, 인조반정에 의하여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임금이 들어서서 명나라 편을 들다가 청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40년 만에 조선은 또다시 엄청난 전화(戰禍)에 휩싸이고 임금이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붙잡혀가고...
그러고 보니 우리 민족은 지금껏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 본 적은 없고 침략만 당한 한편으로는 착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허약하고 불쌍한 민족이다.
이러다가 결국에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징용-징병-위안부로 끌러가고 붙잡혀 고생하고 죽고, 그래도 나름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지만, 결국은 연합군의 덕에 해방되고, 나라는 남과 북 둘로 갈라지고, 한국전쟁에서 서로 싸움을 하고, 또 외세가 개입하고 휴전을 하고...
6. 이런 것들이 다 우리가 못나고 모자라서 그렇게 된 것인데... 그런데!!!
우리나라가 작년 2018년에 공식적으로 인구가 5천만 명이 넘고 국민소득이 3만달라가 넘는 50-30클럽에 7번째로 들어서는 나라가 되었다고 이번 달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다음으로 한국! 저 다른 나라를 보면 오래전부터 조상 덕을 보며 잘 살고 있었으며 이미 발전된 그런 나라들인데 신흥국으로서는 우리나라가 최초이다!
대한민국이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외국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지금은 다른 나라에 원조를 주는 나라로 변신한 세계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이는 엄청난 이야기다. 잘 살아보자고 함께 꾸었던 꿈이 현실로 되었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다. 우리들 어렸을 때의 그 가난하고 꾀죄죄하고 시절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깨끗하고 질서 있고 안락하고 편리하고 빠르고 풍족하고 오래 살고 많이 배우고 많이 소통하며 살고 있는 이러한 발전이 실감이 안날 정도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그동안 많이 괴롭히고 무수한 피해를 주었던, 그럼에도 우리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넘사벽)처럼 느껴지던 일본을 많이 따라 갔다는 데에 희열을 느낀다. 한참을 앞서가던 일본이 1990년 이후 ‘잃어버린 20년’ 동안 빌빌댈 때 우리가 바짝 I.T.와 반도체 조선 화학...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하게 되었다. 지금 방탄소년단(bts)으로 대표되는 한류의 바람은 이러한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국민의 열정과 창의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본은 국민소득이 4만 달라 정도라 하지만 구매력과 활력은 우리나라 보다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일본의 아베 정권은 한국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인기를 유지해 가고 있고! 한 때 너무나 잘 나가서 기고만장했던 일본의 불행이 우리에게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그동안 우리 국민은 너무나 열심히 일을 잘 했고 다른 민족이 해 내지 못했던 성과를 이룩해 냈다.
이 <징비록>이라는 ‘역사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참으로 거룩한 민족이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 땅에서 저러한 고난 속에서도 참 모질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이렇게 나라가 부흥하였고 우리가 이렇게 태어나서 아옹다옹하며 열심히 잘 살고 있다. 류성룡 선생이 저 <징비록>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주려 했던 역사적인 교훈 - 역사를 경계하여 미래를 대비하라 - 이 어쨌든 이 땅에서 어느 정도 잘 구현되고 있는 것 같아 자부심과 함께 많은 위안이 된다. 너무나 훌륭한 재상(宰相)이셨던 류성룡 선생도 그리고 온갖 고생을 많이 하셨던 모든 우리 조상님들도 하늘나라에서 우리 후손들을 보고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다. 우리가 미래에는 더 잘 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