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에는 ‘저주 받은 걸작’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붙는다. 1982년 개봉 당시 시각적 효과와 주제의 선명성에서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암울하고 비관적인 분위기 탓인지 제작비도 못 건질 정도로 참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수식어는 이 영화의 또다른 제목처럼 들린다.
<블레이드 러너>가 참패한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에 가려진 탓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전편을 통해 계속 쏟아지는 구질구질한 비와 묵시론적인 분위기의 2019년 LA보다는 신기하고 친근감을 주는 ET와 환상적인 우정과 꿈이 피어나는 현재의 LA를 선택한 것이다.
<토탈 리콜>의 작가인 필립 K 딕(1928~1982)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블레이드 러너>는 상당히 운명론적인 영화다. 인간생명에 대한 원론적인 외경심을 복제인간 리플리컨트가 제기한다. 4년의 수명을 거부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창조주(제작사)를 찾아 지구로 도망쳐온 4명의 리플리컨트와 그들을 죽이려는 전문사냥꾼(블레이드 러너) 릭 딕커슨(해리슨 포드)의 인간 대 비인간의 대결이 대강의 줄거리다.
그러나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대결구도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 인간인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다. 릭 딕커슨이 사랑한 레이첼(숀 영·사진)이 결국 리플리컨트였다는 사실과 나아가 릭 딕커슨마저 리플리컨트라는 암시가 이런 의문을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는 릭 딕커슨을 용서하는 리플리컨트(룻거 하우어)의 초탈한 모습에서 더 진정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영화는 과연 인간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하는 원론적인 질문으로 바뀌면서 극의 완성도를 더욱 높인다.
인조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 생명을 향한 갈구가 생명창조에 도전한 인간의 방종과 무책임을 대비시켜 인간문명의 비인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보기 드문 SF영화다. 먼지구름에 싸인 밤같은 도시, 눅눅하게 내리는 산성비와 우주식민지로 떠나지 못한 도태된 인간군상, 왜색풍의 미래도시 LA가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그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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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E․T>와 동시에 개봉돼 흥행 경쟁을 벌이다가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관객들은 현실도피적인 <E․T>의 유토피아를 어둡고 비관적인 <블레이드 러너>의 디스토피아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이 영화를 ‘저주받은 걸작’의 명단에 올려놓은 이들은 컬트영화광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이 영화는 공간의 혼성모방pastiche과 시간의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으로 특징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징후를 보여주는 일종의 교과서였다.
2019년, 3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검은 비가 내리는 로스앤젤레스의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혼성모방으로 채워져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이주해온 다양한 인종들, 코카콜라와 일본 여자의 광고판, 용의 형상을 한 네온사인, 그리스․로마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건물, 마천루 위에 자리잡은 고대 이집트의 피라밋, 로스앤젤레스는 또한 후기산업사회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햇빛이 없는 지상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지상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는 부르조아들, 편리한 문명의 이기 옆에 널려 있는 쓰레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주의는 모든 것을 소모하고 황폐화시켜 버린다. 25살에 늙은이가 되어버린 세바스티안은 발전의 속도가 가속화해 시간과 공간의 압축현상이 일어나는 후기 산업사회와 닮아 있다.
복제인간 레플리컨트의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시간의 연속성을 경험할 수 없고, 따라서 ‘나’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는 레플리컨트의 상태는 정신분열증이며, 그들은 자신의 기원을 찾아 지구로 온다. 과거의 기억과 역사를 증명해 주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사진과 어머니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라는 슬로건으로 만들어진 레플리컨트는 진짜와 가짜, 현실과 상상, 원본과 카피의 구분이 없어지는 단계로 진입하는데, 이것은 장 보드리야르의 모조품simulacra과 원본 없는 복제simulation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해석에 성서에 대한 패러디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더하면, <블레이드 러너>는 더욱 복잡한 텍스트가 된다. ‘자본가이자 과학자인 타이렐이 레플리컨트를 만들고 4년의 수명을 주었다’는 내러티브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일정한 수명을 주었다’는 메타 내러티브로부터 온 것이다. 레플리컨트 로이는 아버지 타이렐을 찾아서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요구한다. ‘섭리는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는 대답에, 로이는 타이렐의 눈(오이디푸스처럼)을 찔러 죽인다. 로이는 레플리컨트를 제거하는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를 살려주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이미지로 죽어간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복제인간은 ‘인간은 무엇이며,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르네상스 이후부터 계속된 논의를 확신에서 의문으로 바꾸어 놓는다.
1992년, <블레이드 러너>는 감독판으로 다시 개봉됐다. 1982년판과의 차이는 데커드를 레플 리컨트라고 암시하는 부분이었다. 그 결과, 낯선 공간에 타자를 던져놓고 그들이 악전고투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그려온 리들리 스콧의 영화 계보에 따라서, 영화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더 많아졌다. 타자 레플리컨트가 낯선 공간 지구에 찾아와서 패배하는 이야기로 영화를 읽는 것은 포스트 식민주의를 논의하는 1990년대엔 더욱 적합한 해석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