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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순례(제5일)] * 제7구간(안동→ 건지산→ 단호리→ 풍산 수동)
▶ 2020년 10월 14일 (수요일)
* [제3차 낙동강 출행] ― 태풍과 코로나로 인해 멈추었던 낙동강 종주, 다시 시작하다
☆… 낙동강 종주를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 ‘코로나’ 마귀가 아주 물러간 것은 아니지만, 날씨도 점점 차가워지고 일생일대의 사업으로 마음먹은 낙동강 종주를 마냥 미룰 수가 없다. 이상배 대장과 10월 14일 수요일 저녁 안동 풍산에서 만나 다음날부터 같이 종주를 하기로 연락이 되었다. 지난 8월 17일 안동까지 내려온 것으로 따지면거의 두 달 가까이 지체한 것이다.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과 홍수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발길을 멈추었던 것이다.
나는 10월 14일에 이른 아침에 출행을 했다. 이날 안동에서 풍산까지의 구간을 걷기 위해서였다. 이 구간에는 나의 선대(先代)의 유택이 있는 곳이다. 그 묘소를 참배하는 것은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안동 풍산에 살고 있는 족손(族孫) 정택(柾澤)이 나와 함께 동행해주겠다고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여간 고맙고 다행한 일이 아니다. 오정택은, 우리 해주 오문의 4대조 형제 중의 맏이이신 광성 할아버지 후예이고 나는 그 차제인 우성 할아버지의 후손이다. 항렬로 보면 나는 세(世) 자이고 정택은 택(澤) 자이므로 정택은 나의 족손(族孫)이다. 그래서 그를 ‘택손(澤孫)’이라고 지칭한다. 택손은 1957년생으로 안동(정확하게 남후면 검암리 대실)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는데 인천 대우자동차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퇴임 후, 안동 풍산의 고향에 내려와 집을 짓고 2019년 4월 13일에 입주하여 살고 있다. 그는 자질이 총명한 데다 꾸준한 독서를 통하여 역사와 문화에 아주 해박하다.
☆ [낙동강 종주 대장정] 제7구간(안동역→ 풍산 수동) ; 족손 오정택 동행
☐ 2020.10.14. [청량리(07:38)] ☞ 안동역~검암리~낙암정-건지산~단호교~선기산~풍산 수동
* [서울 청량리](07:38, 무궁화호)→ 안동역(11:20) ¶ [안동 임청각-법흥사 칠층석탑]→ [안동중앙신시장](옥야식당 국밥)→ ¶ [안동대교]→ [안동병원]→ 낙동강 강변길(바이크 로드)→ 수하동 삼거리 좌향(-안동시 수하동)→ 실버벨 요양원→ 안동시 광역매립장→ 백호고개→ 34국도 교각 경유→ 개곡리 ☞ [미천 다리 건너]→ [대실] 제방→ 검암교 제방 길→ 도로→ 중앙고속도로(55) 교각 아래→ 낙동강 강변길→ 낙암정→ [건지산 ; 선대묘소 참배]→ [상락대(낙동강생태학습관)](-안동샌드파크캠핑장)→ 풍산 단호로(단호1리)→ 강변길→ 도로-단호교(낙동강)→ 마애리 솔숲공원→ [풍산천-풍산읍]→ *[선기산 ; 선대묘소 참배]→ * [수동] 오정택 안가(安家)
* [안동시 영가대교] ← 동쪽에서 ‘반변천’ 유입(영양 일월산-칠보산 발원-진보 경유)
* [남후면 검암리] ← 남쪽에서 ‘미천’ 합류(의성군 옥산면 황악산에서 발원)
* [풍산읍 하아리] ← 북쪽에서 내려오는 ‘풍산천’ 합류(천등산-조운산 발원 / 풍산읍 경유)
* [풍산읍 안교리] ← 북쪽에서 내려오는 ‘신역천’ 합류(보문산 발원 / 만운지 경유)
[종주코스 참고지도] ☞ 이날 실제로 종주한 구간 거리는 [안동 7층석탑(법흥교 앞) (출발)~풍산 풍남교(도착)] 25.3km
* [지도상 표기 정정] 낙강정→ 낙암정 / [법흥교~안동대교] 낙동강 남로→ [칠층석탑~안동대교] 낙동강 북로(육사로)
☆… 오전 7시 38분, 서울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 타고, 오전 11시20분, 안동역에 도착했다. 역 대합실에 예의 ‘족손(族孫) 오정택(吳柾澤)’(이하 ‘澤孫’이라 칭한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실 그는 20년 전, 1991년 신미보(해주오씨대동보)를 간행할 때 인천에서 몇 차례 만났지만, 이후 따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오늘 참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다. 아담한 키에 명민하고 자상한 사람이다. 그도 벌써 60이 넘었다. 그러나 눈이 밝고 매끄러운 말씨는 변함이 없었다. …
반갑게 만나 인사를 나누고, 택손(澤孫)의 안내로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臨淸閣)으로 향했다. 이번 안동의 낙동강 종주의 시작은, 낙동강을 앞에 둔 임청각으로 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 임청각 주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은 1911년 일제 강점기에 가산을 처분하여 간도로 망명, 독립운동으로 활동했던 분이다. 국난의 위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典範)을 보여주신 애국지사이다. 일생을 구국의 열정으로 헌신하셨다.
* [안동 임청각(臨淸閣) 탐방] ― 독립운동가 석주(石洲) 이상룡 고택
임청각(臨淸閣)은 안동시 법흥동 맑은 낙동강을 마주보고 있다. 임청각은 1515년(중종 10) 형조좌랑을 지낸 고성(固城) 이 씨 ‘이명’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 칸만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의 하나인 이 집은 독립 운동가이며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생가이며, 그의 아들과 손자 3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임청각은 우리나라 보물 128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문
임청각 안채
‘用’자가 가로 누운 듯한 구성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남녀와 계층별로 매우 뚜렷한 공간 구분을 이루고 있어 건물의 위계질서가 매우 분명함을 알 수 있다. 별당 형식의 정자인 ‘君子亭’(군자정)은 임청각의 사랑채로서 그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이다. 이 정자 내부에는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이 지은, 아름다운 자연에 심취한 시편들이 걸려 있다. ‘臨淸閣’(임청각)이라는 당호는 퇴계(退溪) 이황의 친필로, 도연명의「귀거래사」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에서 ‘臨淸’을 따온 것이다. 영남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이 집은 그 앞에 맑은 낙동강이 흐르니 자연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중앙선 철로가 바로 앞을 지나가, 방음벽을 설치하여 낙동강을 조망하는데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여간 아쉽지 않다.
정침(正寢) 군자정(君子亭)
*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 1911년 서간도로 망명,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김흥락의 제자로서 의병 운동에 참가했으나, 50세 무렵인 1907년경부터 교육의 역할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 협동학교 설립 및 대한협회 안동지회 창설, 시국 강연 등을 벌였다. 유인식, 김동삼이 이때부터의 동지들이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대한협회가 해체되자, 신민회의 해외 독립기지 설치 방침에 동조하여 1911년 이상룡은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그를 포함하여 동생 이봉희(李鳳羲, 1868~1914)와 맏아들 이준형이 일가를 거느리고 서간도 횡도촌으로 옮겨 갔다. 처남인 김대락(金大洛, 1845~1914)도 함께 했다. 당시 횡도촌에는 이미 1910년 강화학파 정제두의 6대 종손인 정원하(鄭元夏, 1855~1925)가 가장 먼저 망명하여 자리 잡은 이래, 이건승(李建昇, 강화학파 이건창의 종제), 홍승현(홍문관 교리) 등이 뒤를 있고 1910년 12월, 서울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6형제 일가가 국내에 있던 재산은 처분하고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횡도촌으로 망명했다.
이상룡과 이회영 등은 망명한 인사들과 함께 독립 운동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 조직과 부속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 설치에 참여했다. 경학사는 이듬해 ‘부민단’으로, 1919년 3·1 운동을 기점으로 한족회로 발전된다.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무장 항일운동가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모두 만주 지역 항일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 이상룡은 만주에 군사 기구인 군정부를 설립했다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치되자 이를 지지하고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했다. 서로군정서 책임자로서 1921년 남만통일회를 개최하여 서간도 일대의 독립 운동 단체를 통합, ‘통군부’를 수립했다.
* 이상룡 지사는 임정의 초대 국무령(國務領)이었다. 1925년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사퇴하자,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령이자 제3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갈등이 계속되고 내각을 조직할만한 세력을 모으지 못하자 1926년 1월 임시정부 수반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이후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 나뉘어 있던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2년 지린[吉林]에서 병사했다. 1990년 9월 하얼빈에 있던 유해를 대전 현충원으로 모셔왔고, 1996년 다시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상룡(李相龍)의 집안은 이회영(李會榮), 허위(許蔿)의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 그를 포함해 두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조카 세 명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외숙은 의병장 권세연이며, 처가 역시 소문난 독립운동 가문이다. 민족의 수난과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분이다.
☞ “나라를 잃기는 쉬우나 나라들 되찾기는 백 배 천 배 어렵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말씀이다. 대문 맞은편, 중앙선 방음벽에 걸려있는 휘장에 씌어 있다. … 아아,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떤가. 무능하고 불온한 문재인 정권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정을 농단하여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 선생의 뜨거운 말씀을 접하고 오늘 날의 우리나라 상황을 생각하니 너무나 걱정스럽다!
* [안동 법흥사지 칠층석탑] ― 대한민국 국보 제18호
임청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높은 탑이 보인다. 바로 법흥사지 ‘칠층석탑’이다. 이 칠층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塼塔)이다. ‘전탑(塼塔)’은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을 말한다. 탑의 높이는 16.8m이고, 기단의 폭은 7.75m이며 단층기단에 7층의 몸돌[塔身]을 차츰 크기를 줄여가며 쌓았다. 이 탑이 자리하고 있는 일대가 법흥동인 점을 미루어,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법흥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외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이 절터에는 고성 이씨(固城李氏) 탑동파 종택이 있다. 기단을 시멘트로 덧발라 보수한 것이 아주 보기에 좋지 않았다. 일제가 보수한 것이란다.
이 탑은 기단(基壇)과 탑신부(塔身部)와 탑두부(塔頭部)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현재 탑두부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고 상륜부(上輪部)는 유실되었다. 기단부에는 네모꼴로 팔부중상(八部重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한 판석이 축조되어 있으며 팔부중상과 사천왕상의 조각수법에는 서로 차이가 있다. 각층의 지붕에는 기와를 이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는 목탑이 전탑보다 앞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안동의 역사서인『영가지(永嘉誌)』에는 ‘조선 성종 18년(1487)에 고쳐졌고, 당시까지 법흥사가 3칸 정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 [고성(固城) 이씨 탑동파 종택] ― 법흥사 절터에 세운 사대부 가옥
종택의 본채는 조선 숙종 30년(1704)에 좌승지 이후식(李後植)이 지었고, 북정은 영조 51년(1775) 진사 이종주(李宗周)가 지었다고 한다.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정자와 연못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나중에 방앗간채, 사랑채, 외양간채가 더 지어졌다. 사랑마당에는 연못이 있고 안채의 동쪽에는 3칸 크기의 사당이 있다. 안채 정면 8칸, 측면 6칸으로, 높은 자연석 축대 위에 세워졌다. 이 집은 숲이 우거진 야산과 계곡에 흐르는 물을 건물과 잘 조화시켜 사대부 가옥의 전통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임청각이나 고성 이씨 종택은 모두 중앙선 철로 건설로 인해 방음벽이 설치되었고 그로 인해 낙동강과는 단절된 공간이 되어 버렸다. 배산임수의 아름다운 저택이 강의 조망이 막혀 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도로와 철로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안동역이 곧 이전되면 이 중앙선 철로가 안동의 서부로 옮겨지게 된다. 높다란 방음벽을 철거되면 원래의 환경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 [점심식사 ; ‘옥야식당’] ― 안동 중앙신시장 안에 있는 이름난 맛집이다. 소고기 우거지선지국밥인데 양도 풍성하고 맛도 깊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식사를 했다.
* [낙동강 종주 제7구간] ― 안동 낙동강변 ‘육사로’를 지나, 안동병원 앞에서 첫발을 내딛다.
☆… 낮 12시 30분, 안동대교를 건너 안동병원 앞을 통과했다. 안동댐에서 부산 하구둑-을숙도까지는 총 389km의 ‘자전거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안동에서부터 낙동강 종주는 이 ‘바이크로드’를 이용하여 나아가게 된다. 안동댐에서 법흥교(임청각)까지의 강변길은 ‘석주로’, 법흥교에서 안동대교까지의 강변길은 ‘육사로’이다. 이 구간은 지난번에 걸어 내려왔으므로 … 오늘은 안동대교 건너 안동병원 앞 강변도로 가장자리의 보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택손’과 함께 걷는다. 얼마쯤 내려가니 강가에 팔각정이 있다. 간이 ‘안동보’가 설치되어 있어 물이 철철 넘쳐흘렀다. 안동대교 아래는 누런 강물이 가득히 고여 있었는데, 그것은 이 봇둑이 물을 가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간이 안동보
안동의 강남 ‘무수무’ 앞 도로, 오고가는 자동차 소음을 피하여 제방도로 아래 강변공원[무주부 꽃가람공원]에서 이어지는 자전거 길을 따라서 걸었다. 그리고 공원이 다하는 지점에서 다시 도로 위로 올라와 걸었다.
☆… 갈림길이 이르렀다. 직진을 하면 낙동강 물돌이 안에 있는 안동시 수하동으로 가는 길이요, 왼쪽으로 가면 백호고개를 넘어 ‘검암리’로 가는 길이다. 우리의 예정된 코스인 백호고개로 가는 길을 택하여 걸었다. 오르막길의 중간, 산에는 터널을 뜷고 또 산을 절개하여 철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중앙선 안동역 구간을 도시 외곽으로 돌리는 공사이다. 지금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안동역을 외곽으로 이전하게 된다. 실버벨 요양원 - 안동시 광역매립장 앞을 지나, 백호고개를 넘는다. 산으로 난 완만하게 올라가는 2차선 아스팔트 고갯길이다.
중앙선 철로 공사
고개를 넘어 검암1리 마을길을 따라 들어갔다. 가구 수가 많지는 않으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마을길을 지나, 무릉-개곡리에서 검암교-단호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가로질러 제방으로 나아갔다. 마을 앞의 들판은 벼가 익어 누른 황금빛 눈부신 장관을 이루고 있다. 아, 벌써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그 들판을 가로질러 옛날의 마을로 통하는 미천의 작은 콘크리트 다리를 건넜다. 미천은 의성의 황학산에서 발원하여 단천(면)-남후(면)를 경유하여 이곳 검암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
검암리 산 아래 새로 새로 지은 기와집들
검암리 황금들판
미천
제방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산곡(山谷) 사이에 마을이 있다. 택손이 그곳을 가리키며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대실 마을’이라고 했다. 지금 함께 걷고 있는 택손이 성장하고 결혼해서 30살 가까이 살았던 마을이라고 했다. 안동 권씨가 많이 살았다. 마을 앞 황금빛 들판이 펼쳐져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택손은 어린 시절 이곳 미천에서 물놀이도 하고 고기도 많이 잡았다고 했다. 그때는 은어가 많았다고 했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밤이면 더위를 피해, 차가 다니지 않는 이 다리 위에서 잠을 자기도 했단다.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 감회가 새롭다. … 그 아래쪽에 현대식 콘크리트 검암교가 있다. 마을 앞을 지나는 미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삼각주 모래밭이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대실 마을과 미천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지난날을 회고했다. 고향은 언제나 애틋한 정감이 서려 있는 곳이다. 마을 앞 제방을 따라 내려가 검암교 앞에서 낙동강 본류의 제방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이크로드’ 낙동강 종주 이정표가 있다. 부산 낙동강 하구둑으로부터 336.7km를 새긴 화강암 표지석이다. 여기서 약 890리, 이 거리는 바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멀리서 본 대실마을 전면(前面)
☆… 제방 길을 걸어서 나아가니 2차선 도로를 만난다. 차들이 다니는 도로의 가장자리를 걷는다. 왼쪽은 벼랑의 산 아래 논에 누런 벼가 익어가고 있고, 오른 쪽은 낙동강 강안의 버드나무, 억새가 무성한 모래톱이다. 도로 가까이의 논에는 벼가 알차게 익어서 풍성하다. 그리고 길가에는 청순한 들국화가 소담하게 피어 길손을 환하게 맞아주었다. 길고 긴 도로를 따라 한 굽이 지나고 나니 멀리 눈앞에 황량한 민둥산이 바라보인다. 원래 민둥산이 아니라 산불이 휩쓸고 간 결과라고 했다.
가을의 정취 - 낙동강 억새꽃
부산 낙동강 하구둑까지 336.7km …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가을의 정취 - 낙동강 들국화
삼거리에서 바라본 건지산(갈골[葛谷] 뒷산) - 대형산불로 인해 민둥산이 되었다
택손(澤孫)이 그 산들을 가리키며 지난봄 4월에 있었던 안동의 대형 산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중앙고속도로, 중앙선 열차가 지나는 인근의 산들이 근 3일 동안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택손은 당시 인천에 있었는데 고향의 친구가 사진을 찍어 보내주고 또 TV뉴스를 보면서 가슴을 졸였다고 했다.
2020년 4월 25일 오후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 등 일대의 수많은 산들을 태우고 일부 마을에 산불이 덮쳐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긴급 대피하기도 하였다. 산 가까이 있는 민가 4채가 화재로 소실되기도 했다. 당시 한국철도공사는 오후 9시부터 안동역~의성역 열차 운행을 일시 중지하였다. 거대한 산불로 인하여 한국도로공사는 오후 5시 40분에 중앙고속도로 남안동IC∼서안동IC 구간 양방향 차량 운행을 차단하였다. 한편 인근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병산서원(屛山書院)도 화재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문화재 보호에도 비상이 걸렸었다. 당시의 기사가 이렇게 전한다.
4월 25일, 산불은 이날 오전 기준 산림 200ha(경북도 추정) 가량을 태우고 계속 번지고 있는 중이다. 주변의 주택도 여러 채 불에 탔다. 산불을 피해 현장 주변의 남후면 주민 200여 명이 근처 공공시설이나 안동 시내로 긴급 대피했다. 이번 산불은 지난 24일 오후 3시 39분께 안동시 풍천면 인금리 야산에서 시작해, 25일 낮에 약간 잦아들었다가 오후부터 강풍을 타고 다시 확산되었다. 산불이 계속 번지자 안동시는 남후면 고하리와 단호2리, 무릉리, 검암리, 개곡리 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화재의 현장인 풍천은 낙동강은 남쪽에 있다. … 풍산은 낙동강 북쪽 지역이다.
25일 낮 12시경 주불 진화가 완료됐던 풍천면 인금리 인근 산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다시 번지고 있다. / 산림청 제공
25일 늦은 밤 경북 안동시 남후면 고하리(갈골)에서 전날 발생한 산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안동시 인근 전역에 재확산하고 있다. / 연합뉴스 TV
그런데 이어서 택손이 전하는 말을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낙동강 풍산대교를 건너온 중앙고속도로[55번]는 고하리와 단호리 사이를 지나가는데 시야에 다가온 단호리에 있는 큰 산(갈골 뒷산)이 바로 선대의 묘소가 있다는 ‘건지산’이다. 아, 그 산불의 현장이 바로 선대 조상의 산소가 있었다! 산불을 주로 소나무 등 큰 나무를 타고 지나가는 바람에 산소는 직접 불길이 닿지 않았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동산불의 보도를 TV뉴스로 걱정스럽게 본 적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그 대형 산불이 조상의 묘소가 있는 산에서 일어났다니 참으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 오후 2시 25분, 어담과 단호리-풍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이정표]를 지났다. 우리는 풍산 쪽 낙동강변을 따라 올라가는 도로로 나아갔다. 도로는 건지산 자락, 낙동강 벼랑 사이에 있다. 옛날에 택손이 검암리 대실마을에서 강 건너 풍산의 수동[해주 오씨 세거지]을 오갈 때 이곳이 벼랑길[비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널찍한 도로가 났다고 했다.
고갯마루로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본 낙동강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절벽을 휘감고 돌아가는 물굽이가 유연하게 S자를 그리며 이어지고 강 건너 풍산의 황금빛 들판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동쪽으로 강의 상류를 바라보면 가까운 강안에 검암습지가 펼쳐져 있고 그 위로 중앙고속도로의 풍산대교가 지나가고, 저 멀리 안동의 서쪽으로 우회하는 34번 국도의 현수교 스타일의 서안동대교가 보이고, 우리가 지나온 검암리 들판도 바라다 보인다. 도로의 고갯마루에 이르자 <안동유교문화길 103km> 지도 안내판이 있고 오른쪽 강안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임도를 따라 50m 정도 내려가니 한 채의 아담한 정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 인근에서 가장 낙동강 풍경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낙암정(洛巖亭)이다.
유장한 곡선의 낙동강 풍경
앞에 보이는 다리 풍산대교(중앙고속도로), 멀리 보이는 현수교가 서안동대교(34번 국도)
* [낙동강 낙암정] ― 건지산 자락 낙동강 절벽 위에 지어진 그윽한 정자
낙암정(洛巖亭)은 조선 문종 1년(1451년) 흥해 배씨인 낙암(洛巖) 배환(裵桓)이 처음 지은 정자이다. 순조 13년(1831)에 고쳐지었고, 그후 고종 18년(1881)과 1955년에 수리하였다. 배환은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1351~1413)의 아들로 태종 1년(1401)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사헌부 감찰, 병조좌랑 등을 거쳐 황해도·전라도·충청도 관찰사를 하였으며, 판진주목사가 된 후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건물은 낙동강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낙연 언덕 위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막돌기단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좌측 온돌방 쪽에는 사각기둥을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의 누각형식 건물이다. 조선시대 전형적인 정자 양식으로 그 원형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대청상부의 교묘하게 구성된 천장과 양측에 출입하기 위한 쪽마루가 특이하고 누 아래 기둥이 짧은 특징인데 이는 의도적으로 변형한 것으로 추정된다.
낙동강 강안 가파른 절벽에 세워진 낙암정은 주변의 송림과 어울려 아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주위는 고요하여 한낮의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신발을 벗고 조심스레 누각의 쪽문을 통하여 정자의 난간에 앉았다. 발아래 유장한 낙동강이 휘어져 돌아가고, 강 건너 누렇게 익은 풍산 들녘이 시야에 들어온다. 택손이 미리 준비한 풍천 막걸리와 안주, 군고구마를 꺼내 놓았다.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조손(祖孫)이 마주 앉아 막걸리 한 잔을 마셨다. 시원한 막걸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 기운에 온몸에 번진다. 택손이 준비한 군고구마는 달고 고소했다. 낙동강 강안의 풍경과 고즈넉한 정자 위에서, 길손의 느끼는 정취가 더없이 그윽하고 편안했다. 그렇게 잠시 주인 없는 정자에 앉아 망중한의 시간을 보냈다.
* [선대(先代)의 묘소] ― 아아, 화마가 휩쓸고 간 건지산
☆… 잠시 동안 머문 낙암정의 정취를 뒤로 하고 도로를 건너 바로 건지산으로 올라갔다. 택손이 앞장서서 가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거기 높은 산록에 선대(先代)의 묘소가 있어 참배하고자 함이었다. 건지산은 지난 봄 대형 산불로 인해 그야말로 아주 초토화 되어 있었다. 이후 6개월이 지난 지금, 산불 뒤처리를 하는 작업이 한참이었다. 불에 탄 나무를 모두 베고 나서, 그 가파른 산록에 포크레인으로 임시도로를 내고 그 급조한 도로를 통해서 큰 트럭이 그 나무들을 아래로 실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길가에 나무를 분쇄하는 기계가 굉음을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그 나무가루 먼지가 자욱하고 소음이 진동하는 작업장에는 불에 탄 나무를 싣고 내려온 트럭과 분쇄한 나무가루[목탄]를 실어 나르는 트럭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 우리는 대형 차량이 지나가는 도로를 따라 산을 올라갔다. 안내를 맡은 택손이 앞장서서 산을 오르고 있다. 하늘은 멀쩡하게 맑고 푸른데, 아, 팍팍한 산길, 폐허가 되어 있는 산을 오르는 황량함이 온몸을 더욱 무겁게 했다. 건조한 날 풀썩풀석 먼지가 일어나는 길이었다. 깊은 마음의 고통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리고 울컥 눈물이 났다. 일단의 산 능선에 올라, 다시 산의 허리를 타고 나아갔다.
선대의 묘소는 건지산 7부 능선,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제일 위에는 나의 6대조 ‘佐(좌)자 秀(수)자’ 할아버지 내외분이 나란히 모셔져 있고, 그 능선 아래쪽에 5대조 ‘和(화)자隆(융)자’-‘和(화)자達(달)자’ 형제의 내외분 묘소가 차례로 자라잡고 있다. 택손[柾澤]이 윗대부터 차례로, 준비한 과일을 상석(床石)에 진설하고 술을 올리고 큰절을 올렸다. 나와 택손은 모두 화융(和隆) 할아버지의 후손이다. 택손은 맏이 광성(光成)조 후손이고 나는 차자인 우성(佑成)조 후손이다. 낙동강의 지킴이, 대구대 오세창 박사는 화달(和達)조의 후손으로 나와 12촌간이다.
여기 건지산에 산소가 있는 화융(和隆)조 아래의 광성(光成)조와 우성(佑成)조의 산소는, 모두 이곳에서 낙동강 건너 풍산 수동의 선기산 선영에 모셔져 있다. 광성(光成)조 후예는 주손(冑孫)을 중심으로 안동 풍산 수동에 세거하고 있고, 나의 고조인 우성(佑成)조 아래 재영(在泳) 증조께서 일찍이 이곳 안동에서 문경의 산양 옥산으로 이주해서 살았으므로, 그 동안 세대 간의 간격이 멀어지고,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서로 통교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결국 서로 소원하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문경 옥산의 주손(冑孫) 천석이 풍산의 우성(佑成) 고조의 상석을 시설하고 한두 차례 다녀가기는 했지만 나와 대부분의 옥산 후예들은 증조 윗대의, 우리 우성(佑成) 고조를 비롯한 안동 상계(上系) 조상의 묘소를 찾아보지 못했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낙동강 종주를 ‘가족사적 참회록(懺悔錄)’이라고 말한 바 있다.
6대조 통훈대부 사복시정 계화공(좌수공) 쌍분의 상석 - 通訓大夫海州吳公佐秀之墓配淑夫人寧海朴氏雙墳
5대조 和隆 할아버지 / 和達 할아버지 / 和隆祖 배위 醴泉 林氏 墓所(위에서부터 아래로)
☆…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내리는 선대의 묘소 앞에서 한참 동안 망연자실(茫然自失) 서 있었다. 주변의 산록이 산불로 인해 황량한 민둥산이 되어 있는데, 그 동안 한 번도 찾아보지 못한 불초(不肖)한 후손이 되었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 산을 내려오면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안동 쪽의 풍경은 나의 타는 마음과는 달리 맑고 정결한 가을 색을 띠고 있었다.
화마가휩쓸고 간 민둥산 - 가운데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 [단호리 낙동강 상락대] ― 안동 김씨, 중시조 김방경 공의 유적지
☆… 오후 4시 건지산에서 내려와 큰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단호리로 가는 길은 아주 완만한 내리막길이었다. 조금 내려오면 오른쪽 강안에 상락대(上洛臺)를 중심으로 낙동강생태학습관 건물과 잔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밝은 가을 햇살이 내리는 강안의 풍경은 가을 색이 완연했다. 상락대(上洛臺)는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 공이 이곳에서 무예를 연마하였는데, 그는 안동에서 태어나고 안동에서 묻힌 안동 김 씨[先金]의 중시조이다. 안동 김씨는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의 두 갈래가 있다. 안동 김씨에 대해서는 뒤에 상술할 것이다.
상락대에서 바라본 낙동강 풍경 그리고 풍산의 황금들판
고려시대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은 문무를 겸비하여 16세에 관직에 나아가 고종, 원종, 충렬왕 때 서북면 방어와 민생 해결에 진력, 장수와 행정가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도원수로 두 차례 일본을 정벌하였고 대몽항쟁의 국난에서 어려운 나라를 지켰다. 64세에 최고의 관직인 첨의중찬 상장군이 되고, 72세에는 광정대부 삼중대광 상장군이 되었고, 84세엔 상락군 개국공으로 식읍 일천호와 함께 충렬공(忠烈公) 시호를 받았다. 왕명으로 건립된 신도비가 녹전면 구송리에 있고 강 건너 회곡리에는 대산 이상정이 쓴 유허비가 있으며 지금까지 그 후손이 살고 있다. 녹전면 죽송리 묘소에서 출토된 지석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12호로 지정되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었다. 이곳 상락대(上洛臺)는 공이 벼슬에 나아가기 전 조부 김민성 공의 지도로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던 곳으로, 지금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으며 절벽 아래 자생하는 부추는 충렬공이 심었다고 전한다. 상락대에는 2012년 가을 안동 김씨 대종회에서 세운 '충렬공 탄신 800주년 경모제전 기념시비'가 있다.
福州 / 金方慶
山水無非舊眼靑 산수는 옛 모습 그대로이고
樓臺亦是少年情 누대 또한 소년시절의 정경일세
可憐故園遺風在 애틋다! 고향에 옛 풍속이 남아
收拾絃歌慰我行 거문고 울려 내 가는 길을 달레네
‘福州’(복주)는 고려시대 안동(安東)의 이름이다. 상락공 김방경 공이 1281년 일본 쓰시마를 정벌하고 돌아와서 고향 안동에 들러 옛날을 회고하여 지은 시이다. 현재 안동 영호루에 게시되어 있다. 상락대에서 옆으로 내려가면 단호샌드파크캠핑장이 있다. 상락대에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니 누렇게 벼가 익은 들판이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 [단호리 낙동강 제방길] ― 황금빛 들판, 눈부신 억새꽃
☆… 오후 4시 22뷴, 다시 큰 길로 나와 걸었다. 단호1리 마을 앞을 지난다. 마을 안쪽에는 한우(韓牛)를 키우는 축사도 있고 옹기종기 농촌의 집들이 모여 있었다. 동네 앞, 길 건너편에는 과수원이 연이어 있는데, 거기에는 가을 햇살을 받아 붉게 읽어가는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누렇게 벼가 익은 논길을 따라 낙동강 제방 길로 들어섰다. ‘바이크 로드’로 조성된 제방길은 아스콘으로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곧게 뻗어 있는 길은 길고 멀었다. 길 가장자리에 자전거길 이정표가 있다. [→ 상주보까지 61.3km] 2차로의 자전거 길은 일자(一字)로 쫙 뻗어 있어 그 원근법의 초점이 아득하게 보였다. 안동댐에서 22km에서 지나왔다는 이정표도 있다. 오른 쪽 낙동강 강안은 모래톱에 온갖 풀들이 우거져 있고 강줄기 저만큼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왼쪽의 들판은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황금빛 벼들이 오후의 맑은 햇살을 받아 넉넉한 풍년을 구가하고 있는데, 돌아다보니, 안타깝게도 저 멀리 산불로 인해 나무가 없는 건지산의 모습이 실루엣처럼 보인다. 길가에는 뽀얀 억새가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서 가을의 정취를 더했다. 제방 길이 끝나고 아스팔트 도로에 접어들었다.
* [단호교를 건너] ― 마애리 ‘석조 비로자나불상(石造 毘盧遮那佛像)’
☆… 오후 5시 13분 단호교 앞에 이르렀다. 강폭이 넓어 다리는 길었다. 이제 가을 해는 서산마루에 걸려 마지막 여린 햇살을 지상에 뿌리고 있었다. 단호교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누런 황토색이다. 홍수가 지난 지 한참이나 되었는데 아직 물색깔이 누런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다리를 건너면 아름다운 솔숲공원이 있는 마애리이다. 마애리에는 석조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길에서 오른 쪽으로 살짝 들어가면 장대한 소나무가 몇 그루가 있는, 작은 잔디공원이 있다. 거기에는 두 기의 묘지도 있는데 그 안쪽에 불상이 있다. 안동시 풍산읍 마애리 ‘석조 비로자나불상(石造 毘盧遮那佛像)’이다.
이 불상은 팔각연화대좌(八角蓮花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불상이다. 오랫동안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하다. 나선형의 머리카락의 머리에 살상투가 낮게 솟아있으며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정연하다. 신체는 결가부좌한 모습이 균형을 이루어 단정한 모습이다. 가슴에 모은 지권인(指拳印)의 두 손은 작은 듯하면서 단정한 신체와 잘 조화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으로 몸에 밀착되어 신체의 윤곽이 잘 드러나고 배 부근에 띠 매듭이 잘 표현되어 있다. 두 손에 걸쳐 평행 옷 주름이 조각되어 있다. 길상좌를 한 무릎은 안정감이 있고 힘이 있다. 팔각연화좌인 대좌의 상대는 앙련(仰蓮)이며, 중대는 각 면에 보살상이 조각된 대석과 복련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말에 유행한 석조 비로자자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제작 연대는 9세기 경으로 추정한다. 경상북도 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 [단풍이 고운 강변공원, 마애리 솔숲] ― 마을 앞, 황금빛 들판
☆… 길 건너 낙동강 강안에는 마애리 선산유적 전시관과 잔디가 정결하게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야외 공원이 있다. 가을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무들이 물 고운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른쪽 들판은 알곡이 여문 벼들이 금빛 들판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을 조금 지나면 장대한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장관이다. 이른바 마애리 솔숲이다. 강 넘어 서산에 해가 떨어지고 날을 금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풍산천이 낙동강에 유입한다. 이곳 풍산읍 하리리에는, 풍산천이 안동 북쪽의 학가산(870m)-조운산과 천등산(575m) 사이의 계곡에서 발원하여 풍산읍을 경유하여 이곳 낙동강에 합류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방 길을 따라 올라가면 풍산읍이다.
* [풍산 수동 선기산(船基山)] ― 해주 오문의 선영, 고조(高祖) 내외분 묘소
□ 이번 낙동강 종주는 나의 생명(生命)의 뿌리를 찾아 가는 여정이다. 낙동강 유역, 풍산(豊山) 수동(水洞)은 해주 오(吳)씨 벽성군파(碧城君派) 지파의 집성촌이다. 12대조 (贈)호조참판 ‘득봉(得奉)’ 할아버지는 한성판윤을 지낸 13대조 벽성군(碧城君, 파조) ‘치(致)’자 ‘운(雲)’자 할아버지의 셋째 아드님으로 안동 오문(吳門)의 입향조(入鄕祖, 1624년)이다. 그러므로 풍산읍 수곡2리[增壽]와 수동(水洞)은 해주 오씨 벽성군(碧城君) 지파 사은공(沙隱公) ‘득봉(得奉)’ 할아버지 이래 누대의 조상의 유택이 있는 곳이다. 특히 증수(增壽)는 ‘득봉(得奉)’ 할아버지 아드님인 11대조 송암공(松菴公, 諱 恬(염), 일명 謹守) 할아버지 후손들의 세거지요, 나의 추모지향이다. 그러므로 나의 12대조 사은공으로부터 8대조(휘 茂자 昌자)까지의 묘소가 증수촌(增壽村) 산야 명당 도처에 산재해 있다. 특히 증수[수곡2리]는 송암공 할아버지께서 병자호란의 치욕에 통분하여 처향(妻鄕)인 풍산으로 낙향(落鄕)하신 후(1636)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하시니 우리 해주 오문의 400년 세거지요, 집성촌이다.
풍산 수동(水洞)은 10대조 ‘慶자 希자’(죽청처사, 윤증尹拯 작호) 할아버지의 둘째 아드님인 9대조 ‘善자 維자’ 할아버지 후손들의 200년 세거지이다. 그 후예인 7대조(휘 俊자 道자)께서 증수에서 이곳 수동으로 옮겨 오셨기 때문이다. 수동에는 6대조 계화공(季華公, 佐자 秀자) 할아버지의 장자인 5대조 ‘화(和)’자 ‘융(隆)’자 할아버지의 장자 광성(光成) 할아버지의 장자가 계속 이어져 학영(學泳)-춘모(春模)-혁환(赫煥)-세술(世述)-형석(亨錫, 1930)에 이어, 현재는 아들 승택(承澤, 1961, 동국대 교수)이 주손(胄孫)을 승계하여 문중 발전에 힘쓰고 있다.
나는, 5대조 화융(和隆) 할아버지의 차자(次子)인 고조 우성(佑成) 할아버지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世系)는 5대조 화융(和隆)-[고조] 우성(佑成) -[증조] 재영(在泳)-(二子) [조부] 인모(麟模)-([장자) [선고] 수환(壽煥)-[나] 세동(世東, 尙洙), 그리고 나의 아들 현석(賢錫)으로 이어진다.
풍산 수동(水洞)에는 나의 직계 고조 ‘우성(佑成)’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다. 나의 증조 재영(在泳) 할아버지는 문경시 산양의 옥산으로 옮겨와 자리 잡고 살았으니, 산양 옥산 선영에는 증조[在泳], 조부[麟模]의 3형제, 아버지[壽煥] 3형제분이 모셔져 있다. 나 세동(世東, 尙洙)은 벽성군파[파조 碧城君 致雲] 13세손 이다. 지금 풍산 수동에는 인천에서 살아온 족손(族孫) 정택(柾澤)이 고향[水洞]에 내려와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 낙동강 여정(旅程)에서 ‘족손 柾澤’의 안내를 받아, 뿌리 조상의 묘소와 고조[佑成] 할아버지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다.
☆ [始祖] …[1세] *吳仁裕 -[2] 周裔 -[3] 民政 -[4] 札 -[5] 昇 -[6] 孝純 -[7] 延寵 -[8] 潘 -[9] 成式 -
[10] 溥(부)-[11] ②明禮 -[12] ②湘 -[13] ②永會 ☆ [파조] [14] 碧城君 致雲 -[15] ③得奉-16] 謹守 - [17] 慶希— [18] ② 善維 — [19] 茂昌 —[20] 俊道 —[21] ② 佐秀 - [22] 和隆 -[23] ② (고조) 佑成-
☆ [24세] (증조) 在泳 … [문경 옥산 입향조]
* [25세] ① 碩模- [26] ① 元煥- * [27] ① 吳世萬- [28세] ① 吳天錫(대구) ② 峻錫- [29세] 龍澤
* [25세] ② 麟模- [26] ① 壽煥- * [27] 吳世東(尙洙)(서울)- [28세] 吳賢錫
* [25세] ③ 榮模- [26] ① 植煥- * [27] ① 吳世喆(善喆)(장호원 송산)- [28세] 吳邰錫
☆…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자 사위가 금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계절이 깊어지면 가을 햇살이 귀하게 느껴진다. 택손이 택시를 불러 수동으로 향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수동 선기산에 있는 선영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풍산천 하리리 제방 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 풍산읍으로 건너가는 하리교와 우동교 앞을 지난다. 차는 풍산읍에서 건너오는 상리1교, 경상북도 북부청사 앞에서 우회전 924번 지방도로(풍산태사로→안동)로 들어섰다. 선대의 선영이 있고 택손의 집이 있는 수동(水洞)으로 가는 길이다. 선기산 발치에서 차를 세웠다. 여기, 해발 150m의 선기산(船基山)은, 낙동강 건너 건지산에 모셔져 있는 6대조 ‘和(화)자 隆(융)자’ 할아버지 아래 광성(光成)조 후예들의 묘소와 나의 고조 우성(佑成)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해주 오문의 선영(先塋)이다.
☆… 아주 완만한 산 언덕에 산소가 있다. 얼마 전에 별세한 주손(冑孫) 형석(亨錫) 공 내외의 묘소를 비롯하여 여러 묘소들이 있다. 산등성이를 타고 숲 속으로 올라가면 화융(和隆)조 맏이인 광성(光成)조 내외의 묘소, 그리고 조금 더 들어가면 나의 고조 우성(佑成)조 내외의 묘소도 있다. 산소 주위에 울창한 나무들이 둘러싸여 잔디가 거의 자라지 못해 흙이 그대로 노출되어 보기에 좋지 않았다. 후손으로서 부끄러움과 함께 산소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자책감이 들었다. 동행한 택손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 문경 옥산의 후손들이 주손인 천석을 중심으로 산소 정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지당한 말이다. 지난 추석 전에 대구의 준석이 와서 산소 벌초를 하기 위해서 다녀갔다고 하니 고맙기 그지없다. 그 사이 날이 많이 어두워졌다. 산을 내려오면서 택손이 도로 건너 울창하게 숲이 우거진 무산(霧山)을 가리킨다. 거기 산허리에 8대조 ‘俊(준)자 道(도)자’ 할아버지 묘소가 있다는 것이다. 날이 너무 어두워 다음 기회에 참배하기로 했다.
* [풍산 수동, 족손 오정택 안가(安家)] ― 이상배 대장, 족질 두석, 족손 정택 그리고 나
☆… 오후 6시 30분, 풍산읍 수1동 족손 정택(柾澤)의 안가에 도착했다. 안에서 일을 보던 손부가 현관 밖으로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오늘 오후 양산에서 올라온 이상배 대장이 풍산읍을 경유하여 수동에 도착했다. 이 대장은 낙동강 종주를 기획하여, 8월 3일 태백 황지에서 종주를 함께 시작한 장본인이다. 봉화 현동-안동 구간은 개인적인 일정이 있어 함께 하지 못했는데, 이제 내일부터 풍산-삼강-상주보-낙담보까지 낙동강 종주를 함께하기 위해서 합류한 것이다.
택손의 안가(安家)는 2층으로 단아하게 지은 양옥으로, 집의 규모가 넉넉하고 아주 정결한 분위기이다. 실내는 모두 원목을 사용하여 산뜻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잔디가 깔린 널찍한 마당 건너편 열린 창고에는 각종 장비와 농기구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 [명민하고 해박한 족손 오정택] ― 우리 집안의 선영을 지키는
1957년생인 정택은, 오늘 우리가 지나온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대실마을에 태어나 거기서 성장하고 결혼을 했다. 그 후 상경하여 인천의 대우자동차(지금의 GM코리아)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했다. 퇴임 후, 그는 이곳 조상의 선영이 있는 풍산 수동에 집을 짓고 안착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맏딸만 결혼을 하고 나머지는 직장 생활을 하며 인천의 본가에서 생활하고 있다. 택손 내외가 가끔 인천을 오가곤 한단다. 이번 추석에도 자녀들이 있는 인천에서 지내고 왔다.
족손 정택(柾澤)은 자질이 총명하고 동양 고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독서를 통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역사와 지리, 인물 탐구 등 인문학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다. 이번에 안동에서 풍산까지 함께 걸으며 내가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깨우쳐 주었다. 특히 우리 해주 오씨의 족보와 세계(世系)의 흐름을 모두 꿰고 있어서 그를 통하여 우리 집안의 상세한 내력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안동문화권의 모든 인맥과 학문 등에 많은 정보와 자료를 가지고 있다. 2층 다락방의 넓은 공간에 많은 책들이 서가를 채우고 있었다. 그의 독서력과 탐구력을 돋보이게 하는 공간이었다. 그 동안 자주 통교가 없어 몰랐던 사실들을 그를 통해서 많이 깨닫게 되었다. ‘정택은 우리 집안의 보배’다.
☆… 손부(孫婦)가 정성스레 저녁상을 차렸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에 따끈한 국, 거기에다 맛깔스러운 안동 간고등어조림, 그리고 구수한 제육볶음과 싱싱한 채소, 갖가지 나물반찬 등이 상을 가득 채웠다.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주손 형석의 아우인 두석(斗錫, 1946) 공이 우정 자리를 함께 하여 매우 반가웠다. 나에게 생질이 되는 이상배 대장, 족질 두석, 족손 정택 그리고 나, 넷이서 환담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처음으로 만난 자리지만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안동에서 출발하여 건지산을 오르내리면서 풍산까지 걸어왔던 노고가 그대로 풀리는 느낌이었다. 참으로 따뜻하고 뜻 깊은 밤이었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