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9호 우리의 거울 이스라엘의 역사
권두언 - 세상 역사의 마지막 주자인 우리의 거울 역사를 모르는 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지난날에 대한 기록들은 장래의 성공을 기원하는 염원이기도 합니다. 하물며 성경에 기록된 과거 역사와 선조의 경험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복과 화를 선택하는 정도의 교훈이 아닙니다. 성공과 실패의 교훈 정도가 아닙니다. 영생과 멸망의 길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가 현재 사는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야 그 결론들을 맺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시대를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말세를 당한 우리의 경계로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성경은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교회가 보입니다. 우리의 모습들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하여 읽노라면 내가 보이고 우리 이웃들이 보입니다. 세상 역사의 마지막을 사는 우리가 보입니다. 다니엘을 읽고 요셉에 대하여 읽었더니 갑자기 십사만 사천이 보이고 말세의 진실한 성도들이 겪어야 할 시험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저 교훈 정도가 아닙니다. 그 패턴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말세에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더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의 표상과 교훈들과 경험들이 우리를 이 마지막 시대의 증인들로 세우기 위하여 더 많이 기록된 것입니다. 마지막 주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하여, 그들이 성공적으로 경주하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이유가 더 많다는 말입니다.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현대를 지나고 있는 현대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이번 호는 이 중요한 이슈에 대하여 친절하게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발행인 강 병 국 목사
신앙 제1부 - 출애굽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가? 성경 역사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탈출기, "출애굽"의 이야기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리스도인 누구에게나 흥미로운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흥미진진한 출애굽의 이야기는 언젠가부터 타성에 젖은 그리스도인들의 귀에 희미한 동화 이야기쯤으로 치부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이야기일 뿐, 자신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건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인 중 거의 대다수가 진정으로 출애굽 한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놀라운 사건과 역사는 그저 멀리서 메아리치는 희미한 신화 이야기처럼 그리스도인들의 귀에 무의미하게 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떠서 구약에 나타난 이 사건들을 보면, 이 생생한 출애굽의 역사는 바로 지금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과 경험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와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은, 실타래가 서로 엉켜 있듯 우리의 영적인 삶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그 경험들을 비교하여 살펴보며, 교훈과 은혜와 감동을 얻어보자. 1) 출애굽이 다가왔다 약속을 지키시는 미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잊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으로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자손, 곧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낼 메시아를 태어나게 할 하나님 백성의 계보를 잇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요셉이 죽은 후, 요셉을 모르는 왕이 일어나 노예가 되어 오랜 세월을 애굽에서 산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매일 시달리는 고역과 노동 속에서 절망 중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세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 이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조상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요셉이 죽기 전에 그들이 애굽에서 해방될 것을 말한 예언과 약속을 반복해서 형제들에게 말해 줌으로써 쇠퇴해 가는 동포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해방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거의 없었으며, 많은 사람이 낯선 땅으로 이주하는 데 따르는 고난을 겪기보다는, 차라리 노예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을 만족하게 여겼다. 그들은 출애굽을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도 애굽에 너무 밀착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애굽의 삶에 동화되었던, 노예였지만, 자신들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이방 나라에서의 안일함을 더 사랑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혹시 우리도 세상의 재물과 쾌락과 안일함에 노예가 되어 세상에 머물러 있기를 더 좋아하고, 세속적인 습관과 사고방식과 생활에 젖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우리를 흔들어 깨워 해방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믿기는 믿지만,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굴복을 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과 계명대로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따라가기를 선택하지 않는 사람, 반만 하나님께 바쳐지고, 반은 세상을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출애굽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버려야 합니다. 출애굽을 해야 할 시간이 우리에게도 다가왔습니다! 세상과 애굽의 정신과 마음에서 완전히 떠난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마지막에 하늘 가나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2) 열 재앙을 목격하면서 강퍅한 바로의 마음을 돌리고, 오랜 노예 생활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잊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열 재앙을 보내셨다. 그러나 바로는 재앙을 하나씩 당할 때마다 회개하지 않고 더 강퍅해져서, 한층 더 혹심한 재앙을 불렀다. 강들의 근원이 피가 되는 첫째 재앙이 왔다. 그 당시 나일 강의 넘쳐흐르는 물이 온 애굽의 식물과 부의 근원이었으므로 그 강은 신으로 숭배를 받았으며, 애굽 왕은 그 강을 경배하기 위하여 날마다 그리로 갔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어 물 위를 치자, 신성하게 여기던 강물은 피가 되어 고기가 죽고 강에서 악취가 났다. 집안에 있는 물이나 물통에 저장된 물도 역시 피로 변하였다. "그러나...바로가...그 일에도 관념하지 아니하였"다. 그 재앙이 7일간 계속되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둘째 재앙, 셋째 재앙이 잇따랐다. 재앙이 내릴 때마다 그것을 멎게 해달라고 애걸하던 왕은, 재앙만 멎으면 마음이 바뀌어 "내 백성을 가게 하라"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절하였다. 한 가지도 아닌,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도 완고한 왕의 마음을 바뀌게 할 수 없었다. 헌데와 독종의 재앙이 지나고 불이 섞인 우박이 내렸다. 파멸과 황폐가 애굽 땅을 덮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하는 고센 땅만이 황폐를 면했다. 온 애굽이 무서운 하나님의 재앙 앞에 떨었다. 아홉 가지의 재앙으로 애굽은 황폐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과 사제들은 회개하지 않고 그 동안 현저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완강하게 저항해 왔기 때문에 이제 최후의 재앙이 막 내리려 하고 있었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그리스도인 중에도 바로의 마음과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앙이 내릴 때마다, 재앙이 멎기를 간청하던 바로의 태도는 진정한 회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죄를 마음 아파하여 회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초래된 결과만을 후회하던 가룟 유다의 회개와 같은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고 버리며, 정신과 마음이 온전히 새롭게 바뀔 뿐 아니라,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개혁과 변화가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열 재앙의 사건을 통해 또 한 가지 배울 교훈은, 때때로 우리에게도 시련이나 재난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재앙을 애굽 사람들과 함께 당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지긋지긋한 재앙 때문에 애굽 땅이 점점 싫어지고 빨리 출애굽 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우리도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 이 세상이 싫어지고 빨리 하늘에 가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통은, 때로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하고, 세상을 버리고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는 수단과 축복이 됩니다. 애굽에 열 재앙이 내린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 다시 이 세상과 악인들에게 7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상관없이, 자신을 죄로부터 지키며, 순결하게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칠 재앙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앞이마에 받은 사람들은 어떤 무서운 재앙과 재난 속에서도 구원을 받고 안전하게 환난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 제2부 - 유월절의 경험이 찾아왔는가? 1) 순종의 시험이 이르다 두렵고 떨리는 밤이 찾아왔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밀리에 전달된 출애굽의 지시를 듣고 이제 막 날이 밝으면 애굽을 떠날 차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통과해야 할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의 목숨을 건짐 받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불신하고 순종하지 않으므로 애굽 사람과 함께 멸망을 받든지 하는 순종과 선택의 시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긍휼이 많은 분이시다. 만일 애굽 사람들이 그들의 수확물과 양 떼와 가축 떼의 손실을 보고 회개하였더라면 그들의 자녀는 멸망 당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나라가 하나님의 명령을 완강하게 저항해 왔기 때문에 이제 최후의 재앙이 막 내리려 하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출 11:4~5). 이 선고를 집행하기 전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애굽을 떠나는 데 대한 지시와 아울러 특별히 다가오는 재앙에서 어떻게 보존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시도 주셨다. 백성은 이 명령을 순종함으로 그들의 믿음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야 했다. 참된 믿음에는 항상 순종과 행함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사람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야 한다. 모세가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준비하신 것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을 때에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출 12:27)였다. 그들은 과연 모두 다 순종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인가? 우리가 배우는 교훈 믿음은 순종을 동반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얻고 생명을 보존할 방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시해 주셨지만, 그 일을 대신 해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명령과 지시를 순종하고 행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지만, 그 보혈의 피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고, 죄를 버리고 회개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강제로 들어오셔서 죄를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죄를 버리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사랑은 순종을 낳습니다. 예수께서 은혜로 다 구원해주시므로 우리 편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가르침과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는 않지만,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는 우리의 행한 행위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유월절에 행한 일유월절 어린 양 유월절은 기념인 동시에 표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사실뿐 아니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인간들을 죄의 속박에서 해방하시기로 되어 있는 더 큰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희생 제물로 바쳐진 새끼 양은 "하나님의 어린양" 곧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피를 바르는 일 유월절 양을 죽이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했다.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하였다. 그것처럼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가 각 영혼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온 세상을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사실뿐 아니라 우리 각자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속죄 희생의 공로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사용된 우슬초 피를 뿌릴 때에 사용된 우슬초는 정결케 함의 상징이었는데, 그것은 문둥병자와 죽은 사람을 만져 부정하게 된 사람들을 정결하게 하는 데 쓰였다. 고기를 먹는 것의 의미 어린 양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고 온전하게 준비되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실 하나님의 어린 양의 뼈도 하나도 꺾이지 말아야 하였다(출 12:46; 요 19:36). 그리고 그 고기는 먹어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께로부터 영적 능력과 영양을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한다. 하나님 아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소화해서 그것이 생활과 행동의 원동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속에 생명이 없다. 쓴 나물과 무교병 어린 양의 고기는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는데, 쓴 나물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때의 고통을 회상하기 위함이었다. 무교병을 먹는 것 역시 깊은 뜻이 있었다. 유월절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어야 했다. 그것처럼, 죄의 누룩도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영양을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없어져야 한다. 이제 곧 멸망시키는 천사가 온 애굽 땅을 지날 것이었다.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이스라엘 백성은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행동하였다. 내려진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한 가정 단독으로 하든지 다른 가정과 어울려 하든지, 모든 가정에서 흠 없는 새끼 양이나 새끼 염소를 잡아, 우슬초 묶음으로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서 밤중에 다가올 멸망시키는 천사가 그 집에 들어오지 않게 해야 하였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2~13).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진 지시를 다 행한 후에, 이스라엘 각 가정은 마음을 졸이며 준비하고 있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멸망의 천사가 문에 발라진 피를 살피는 두려운 심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구운 고기를 무교병과 쓴 나물과 같이 그 밤에 먹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다. 왜 그랬을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지시를 순종했다. 가족의 제사장인 아버지는 피를 문설주에 뿌리고 가족들을 집안에 다 모았다. 백성은 두려움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었고, 장년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자의 심장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두근거렸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죽음을 관장하는 천사가 방문하지 않았다. 구주의 보호 표인 피가 그들의 문에 발려 있었으므로 멸망시키는 천사가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밤중에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광대한 애굽 전토에 걸쳐 각 가정의 자랑거리인 장자가 죽어 넘어졌다. 슬퍼하는 자들의 비명과 통곡 소리가 온 하늘을 메웠다. 이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던 바로의 교만은 땅에 떨어졌고, 그는 "밤에…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고 하였다. 한밤에 일어난 하나님의 두려운 기적의 역사를 보고, 모두 입을 벌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세상에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애굽에서 탈출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머뭇거리며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면 지체 없이 그 부르심에 응할 수 있도록, 빨리 잘 걸어나갈 수 있도록, 허리에 띠를 띠고 서 있어야 합니다. 죄의 고통과 죄를 상징하는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으며... 우리는 마음의 문설주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고, 주님의 말씀과 보혈을 먹고 마시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자유를 얻기 전에, 곧 성취될 큰 구원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보여야 했습니다. 피의 표적이 그들의 집에 있어야 했으며, 그들은 자신과 가족들을 애굽 사람들과 분리해 그들의 집안에 불러 모아야만 했습니다. 멸망의 천사, 심판의 천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유월절의 경험을 하고 계십니까? 당신에게도 유월절의 경험이 찾아왔나요? 신앙 제3부 - 인생의 홍해를 건너며 배우는 경험 1) 앞길을 인도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동이 트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출발해야 했다. 그들은 희망에 부풀어 고센 땅으로 모여들었다.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이 그들과 함께" 출발했다. 놀라운 출애굽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나라를 가로질러 가나안으로 직행하는 길을 택하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진로를 홍해 연안을 향하여 남쪽으로 인도하셨다. 성경은 그들의 앞길을 친히 인도하시는 자비롭고 자상하신 하나님에 대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출 13:21)라고 묘사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도자께서 자신을 불기둥과 구름기둥 속에 숨기시고 그들과 동행하고 계셨다. 구름기둥은 불타는 폭염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고, 냉기와 습기는 목이 타고 끓는 사막에서 그들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밤에는 그것이 불기둥으로 변하여 그들의 진영을 비춰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게 해주었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만일 우리가 영적인 휘장을 들어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도받았으면 하고 바라던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는 길, 그리고 지금 당하는 경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최선의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 속에 자신을 감추신 채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시던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곁에 함께 계셔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십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이해하기 어렵게 보이더라도, 그 길은 우리를 위한 맞춤형의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홍해를 건너는 경험 히브리 사람들은 해변에 진을 쳤는데, 그들 앞에는 바닷물이 전혀 건널 수 없는 장벽처럼 넘실거리고 있었으며, 옆에는 험준한 산이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은 저 멀리에 대군의 전위대같이 보이는 번쩍이는 갑주와 움직이는 병거들을 보았다. 부대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전속력으로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를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급히 모세에게로 달려가서 불평들을 터뜨렸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1, 12).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무리를 여호와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훈련과 자제력이 부족한 그들은 난폭하고 분별력이 없었으며, 머지않아 애굽인들의 수중에 빠질 것으로 생각하고 우는 그들의 울부짖음과 통곡 소리는 요란하고도 처절했다. 그러나 애굽 군대가 가까이 접근해 올 때, 구름기둥이 장엄한 모습으로 하늘로 치솟아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애굽 군대 사이에 내려왔다. 흑암의 장벽이 쫓기는 사람들과 쫓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자,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의 진영을 더는 분간할 수 없어서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는 희망이 되살아났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마른 육지 위를 걷는 것처럼 바다를 통과했다. 부지런히 그들이 지나가는 동안 물은 양편에 벽같이 서 있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마병들이 다 그 뒤를 쫓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출 14:23).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자, 노호하며 먹이를 삼킬 것처럼 으르렁대던 쌓였던 물이 쏴 소리를 내며 급히 합쳐져서 애굽 군대를 그 침침한 깊은 물 속으로 삼켜 버렸다.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들은 감격하여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깊은 바다의 파도소리 같은 장엄한 찬송이 이스라엘의 큰 무리에게서 일어났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인도를 받는 부녀자들이 소고와 춤으로 이 노래에 화답하였다. 멀리 광야와 바다 너머까지 이 즐거운 노래의 후렴이 울려 퍼졌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주시는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홍해 바다를 만납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그 홍해 바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섭리로 이스라엘 백성을, 앞에는 바다가 있고 옆에는 산으로 막힌 골짜기로 인도하셔서, 그분의 권능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원수들의 교만한 콧대를 꺾으셨던 것처럼, 우리를 사방이 막힌 어려운 처지로 인도하셔서 우리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 다음, 그 모든 장벽과 홍해를 갈라주시는 것을... 가끔 우리의 생애는 위험에 둘러싸이고, 어떻게 할지 모를 갈등과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앞으로 나가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의 눈으로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없고, 우리의 발이 찬 물결을 느낄지라도, 이 명령을 순종해야 합니다.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망설이고 의심하는 사람의 앞에서는 결단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불신하는 사람에게는 절망을 가져다주지만, 신뢰하는 영혼들에게는 한낮의 광명과 평화로 가득 차게 합니다. 그 길이 비록 뜨거운 사막이나 망망한 바다를 통해 나 있는 길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안전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보다 더 깊은 바다도 가르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니까요. 신앙 제4부 - 광야를 지나며 배우는 교훈 I 1) 마라의 쓴 경험 홍해의 경험은 달콤했다. 그들은 자유를 얻었다는 기쁨에 겨워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그러나 문제는 다시 시작되었다. 여행 도중 사흘 동안 물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준비해온 물은 다 떨어졌다. 뙤약볕에 타는 뜨거운 광야를 지친 걸음으로 걸어가는 그들의 타는 듯한 갈증을 풀어 줄 샘은 어디에고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물이야!..."하는 기쁨의 함성이 들렸다. 이 지역을 훤히 알고 있는 모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마라에는 샘물이 있었지만,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물이었던 것이다. 물을 발견하고 기뻐 급히 샘물이 있는 곳으로 모여든 무리로부터 곧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그 물은 쓴 물이었다. 그들은 신비한 구름기둥 속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기까지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절망 중에서 그들을 그런 길로 인도했다고 모세를 비난했다. 모세는 하나님께 도움을 열렬히 부르짖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출 15:25). 나뭇가지를 던지자 달아진 샘물! 그들은 신기한 마음으로 감탄하며 단물을 마셨다. 불평의 소리는 물 마시는 소리와 함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인생길을 항상 인도하시며, 은혜와 축복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고 주님을 원망하는지요! 그 큰 홍해의 물을 해결하신 하나님께서 그 작은 마라의 쓴 물을 얼마나 쉽게 해결하실 수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쓴 물을 달게 하신 이상한 방법에 주목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나무"를 물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사막이나 광야에서는 유일하게 싯딤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이 나무는 향이 있고 재질이 단단하여 언약궤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물을 달게 하려고 나뭇가지를 넣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죄의 독을 씻기 위해,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해 지신 예수님의 나무 십자가! 네, 그렇습니다! 나무를 쓴 물에 넣어 달게 한 것은, 우리를 죄의 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구속을 상징했습니다. 죄의 독을 제거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 우리 인생이 쓰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 곁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의 인생길을 달콤한 것으로 변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광야의 불신을 지나서 애굽을 떠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준비해 온 양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많은 군중을 먹일 양식을 어떻게 공급할 수 있을까? 의심이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다시 불평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 그들은 아직은 굶주리지 않았다. 그들의 당장 필요는 공급되었으나, 그들은 음식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살까 하고 장래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많은 군중이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자녀가 굶주리는 광경을 상상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고난에 에워싸이고 그들의 양식이 떨어지게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이 지금까지 그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도록 계획하셨다. 그들은 그들을 속박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멸망시키는 천사가 모든 애굽의 초 태생을 죽일 때에 어떻게 그들 자녀의 목숨이 보존되었는지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홍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장엄한 능력 역시 잊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눈앞에 당면한 불편과 시련만을 보고 느낄 뿐이었다. 얼마나 믿음이 적은 소치인가! 우리가 배우는 교훈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광야 생활의 역사는 세상 끝 날에 사는 영적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광야에서 겪은 여러 가지 경험은, 가나안에 있는 그들의 약속된 안식처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우리 생애에도,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과정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준비 학교에서 지금 잘 배우고 계신가요? 어려운 일이나 난관에 봉착하면, 대부분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그 과정에 대하여 불평합니다. 눈이 어두워져서 그들이 감사해야 할 많은 축복을 보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은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피곤하게 만들 뿐, 시련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근심과 걱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마치 행복은 이 세상의 것들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이 세상 사물을 추구하고 미래를 위해 걱정하며, 재물을 쌓는 데만 정신을 쓰는 것을 보시고, 그 불신에 대해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신 것처럼 우리를 돌보시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믿음과 신뢰는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과 신뢰보다 더 강한가요? 신앙 제5부 - 광야를 지나며 배우는 교훈 II 1) 천사의 떡을 먹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준비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라!" 전대에 지닌 양식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며 불만을 토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아침에 나가보니,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었다. "깟씨 같고도 희"게 보이는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었다. 백성은 이것을 "만나"라고 불렀는데,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민 11:8; 출 16:31)다. 그들은 날마다 한 사람당 한 호멜(약 3퀼트)씩 만나를 거두고, 이것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것을 이튿날 아침까지 보관하면 썩어버렸다. 그리고 땅 위에 남는 것은 모두 햇빛에 녹아 버렸기 때문에 그날의 양식은 아침에 거두어야 했다. 그런데 제 육 일에는 모든 백성이 1인당 두 호멜씩을 거두었다. 왜냐하면, 일곱째 날은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서 그랬다. 여섯째 날에는 만나가 갑절 내렸고, 일곱째 날에는 내리지 않았다. 다른 때에는 저장해 둔 것이 하루를 넘기면 못쓰게 됐지만, 안식일을 위하여 거두는 몫은 달고 신선하게 보존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출 16:35). 40년간 그들은 이 기적적인 식량의 공급으로 하나님의 끊임없는 돌보심과 부드러운 사랑을 날마다 체험하게 되었다. 성경 시편 78:24(KJV)에 보면, 그들이 "천사의 떡을 먹음이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천사의 떡을 먹었던 것이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만나의 뜻은 영어로 "What's this?", 곧 "이게 무엇이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너무나 신기하고 경이로운 양식이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을 먹이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이 세상에 생명을 주러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시는 그리스도를 표상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요 6:48~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만나를 먹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늘의 떡, 곧 예수님의 말씀을 먹는 경험입니다. 매일 진리의 말씀을 먹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임재 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만나는 아침에 내렸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왜 꼭 해가 뜨기 전에 거둬들여야 했을까요? 그것은 아침, 곧 아무 일도 시작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먹고, 주님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주님의 정신과 마음과 성품으로 사는 것이 곧 만나를 먹는 경험입니다. 2) 반석에서 나온 신기한 물 신 광야를 떠난 후 이스라엘 백성은 르비딤에 장막을 쳤다. 이곳에는 물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또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했다. 백성은 흥분하여 모세에게 몰려들어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라고 하며, 화가 나서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1~7)라고 소리쳤다. 격렬한 소요와 분노 속에서 그들은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다. 모세는 곤경에 빠져 여호와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라고 부르짖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물이다! 물..." 모세가 반석을 쳤을 때 바위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생수의 시내를 이루었고, 그것으로 온 백성의 목마름과 기갈이 흡족하게 해소되었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모세가 친 반석은 그리스도의 표상이었습니다. 모세가 친 반석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반석에는 여호와께서 서 계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칠 때 주님께서는 침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벌써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맞으시고 침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물이 모세가 친 반석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하나님에게 맞으며,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사 53:4,5) 상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잃어버린 인류를 위한 구원의 생명수가 흘러나옵니다. 반석을 치자 생수가 나와 이스라엘 백성을 살린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물과 피가 우리를 살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매 맞고 침을 당하신 반석,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3) 성숙을 위한 교육과 배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본격적으로 교육하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대표하고 그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거룩한 나라와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주셔서 가르치고자 하셨다. 율법은 하나님 사랑의 사본이자 현시였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신지 알고, 율법을 지키므로 세상에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는 대표자들이 되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엄숙한 언약을 맺고 하나님을 그들의 통치자로 받아들이기로 맹세했다. 이제 그들은 그분의 지배를 받는 신민이 되었다. 노예로부터 높으신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된 이스라엘! 이제 그들의 믿음과 성품은 성숙한 단계로 올라가야 하였다.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간 모세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초조하게 되었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 물질로 표현된 신들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유지하기 위하여 모세를 의지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 모세는 보이지 않았다. "잡족"과 섞인 무리가 제일 먼저 불평과 초조함에 빠졌으며, 애굽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그들은 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자고 제안했고, 백성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상, 곧 모세를 대신하여 그들을 인도할 어떤 형상을 갈망하였다. 많은 군중이 아론의 장막에 모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라고 요구하였다. 소요는 점점 더 커졌다. 맹목적이고 이론에 닿지 않는 광란이 군중을 지배했으며, 대부분 백성이 이 반역에 가담했다. 백성은 금 송아지를 만들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하고 선언했다. 성숙을 이룰 시간에 생긴 얼마나 큰 배도였는가! 우리가 배우는 교훈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믿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는 믿음이 성숙하고 참된 믿음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채우지 않은 사람들이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은 우상입니다. 이스라엘의 배도 보다 더 큰 배도와 우상 숭배가 현대 그리스도인들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재물과 명예와 평판과 자녀가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아직도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당신의 최고의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상을 숭배하는 마음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그들의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섬기기를 거절하며 다른 신을 섬기겠다고 선언한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의 보좌에 않으시지 못하게 하는 우상이 있는지 우리 마음을 오늘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 제6부 - 또 다른 도전 1) 떠나라는 도전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 도착한 후 얼마 동안은 성막 건축을 착공하지 않았다. 거룩한 성소의 건축은 애굽에서 나온 지 제2년째 되는 연초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자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버리시지 않고, 그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성소를 지으라 하시고, 성소에 처소를 정하시어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성소 제도와 성소에 있는 모든 사물에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계획과 청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성소 제도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것을 잘 배웠다. 하나님의 율법 정신과 그분의 뜻을 희미하게나마 이해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자주 나타났던 흰 봉우리와 거룩한 산을 바라보기 좋아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도전이 왔다. 그곳을 떠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여 전진하라는 명령이 왔다. 시내 광야와 가나안 가까운 지방 가데스까지의 거리는 불과 11일간의 여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들이 오랫동안 진 치고 있던 그곳을 거의 마지못해 떠났다. 그들은 안일과 안주를 원했고, 그곳을 거의 그들의 본향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들어가서 정복해야 할 땅,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을 잊어버리면 안 되었었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은 가나안 땅이었지, 광야에 안주하여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나팔수가 보내는 신호에 따라온 진영은 성막을 가운데로 하고, 각 지파는 지정된 위치에서 각자의 깃발을 따라 출발하였다. 그들이 전진할수록 길은 더욱 험해졌다. 군중은 오랫동안 장막을 치고 평안이 있던 뒤라 노중의 위험과 불편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3일 여정 후에는 공공연한 불평들이 들렸다. 불만은 전염되었고 얼마 안 가서 온 진영에 퍼졌다. 그들은 다시 먹을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하였다. 만나를 풍부하게 공급받았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순결하고 거룩하고 행복한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 이 목적에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훈련의 과정을 받아야 했다. 만일 그들이 기꺼이 그들의 식욕을 억제했더라면 그들은 허약과 질병을 모르고, 그들의 후손들은 육체적·정신적 힘을 아울러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제한과 요구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으므로 대부분의 사람은 그분께서 그들이 도달하기를 원하셨던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내려 주시려던 축복도 받지 못했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그리스도인의 길은 안주가 없습니다. 그 길은 끝없이 전진해야 하는 길입니다. 인간의 속성은 안일과 안주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하늘 가나안임을 알면서도, 이 세상에 안주하기를 원합니다. 천막을 치고, 보물을 쌓고, 세상이 주는 재미에 젖어, 정든 세상을 떨치고 일어나 전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더 높은 수준으로 성장시키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과 큰 역사를 담당하는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 마련된 훈련 과정 중에는, 반드시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떠나야 하는 연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일부러 우리가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인생길을 계획하십니다. 그래서 쉴 새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법을 배우게 하시며, 이 세상이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요, 결국 하늘 가나안이 우리가 가야 할 곳이라는 것을 배우게 하십니다. 당신의 생애에도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높으신 훈련과정에 들어간 것입니다. 2) 정복하라는 도전과 두 번째의 방황 이스라엘 백성은 호렙산을 떠난 지 11일 만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멀지 않은 "바란" 광야에 도착해 "가데스"에 진을 쳤다. 그들은 여기서 먼저 정탐꾼을 보내어 그 땅을 탐지하고자 했다. 각 지파에서 뽑힌 열두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의 온 땅을 정탐하고 40일 후에 돌아왔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험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무사히 돌아온 이들을 만나려고 급히 달려나갔다. 정탐꾼들은 두 사람이 메어야 운반할 수 있을 만큼 큰 포도송이를 가져와 그 땅의 비옥함을 보여주었다. 백성은 그처럼 좋은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을 크게 기뻐하며, 그들이 모세에게 보고하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 정탐꾼들은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민 13:17)라는 말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백성은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여호와의 음성을 순종하여, 곧 올라가 그 땅을 점령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의 아름다움과 비옥함을 묘사한 후, 두 정탐꾼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그 땅의 각 부분에 산재하고 있는 강력한 민족들을 열거하면서, 그 도시들은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는 매우 큰 성들일 뿐 아니라, 그 속에 거하는 백성은 강하여 정복하기는 전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 그곳에서 아낙 자손들인 거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하며, 그 땅을 소유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말했다. 정탐꾼들이 사단의 충동을 받아 절망에 빠진 자신들의 불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감상을 말할 때에, 백성의 희망과 용기는 겁에 질려 절망으로 변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의 불신은 회중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그들을 위하여 그렇게 자주 나타났던 강한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게 했다. 백성은 실망과 낙담으로 자포자기하였다. 고민의 통곡과 울음소리가 어지러운 불평의 소리와 뒤섞여 퍼져 나왔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폭동과 공공연한 반항이 신속히 뒤따라 일어났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차지할 수 없는 땅을 약속하여 그들을 기만하였다고 모세와 하나님을 비난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낸 그 속박의 땅 애굽으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한 장관을 임명하기까지 하였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백성의 소란을 진정시키고자, 백성 가운데로 급히 달려나가 쟁쟁한 음성으로,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라고 외쳤다. 그러나 불충실한 정탐꾼들은 큰 소리로 갈렙과 여호수아를 중상하고, 그들을 돌로 치자고 소리를 쳤다. 폭도들이 그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죽이려고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나갈 때에, 갑자기 여호와의 영광의 빛이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의 살인 계획을 막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 때문에 그들의 원수를 정복하기 위하여 능력을 나타내실 수 없으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긍휼하심으로 그들에게 단 하나의 안전한 길인 홍해 쪽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하고 부르짖었던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무리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더 방황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자 그들의 고집은 다시 머리를 쳐들었으며, 그들은 광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하나님께서 올라가 그 땅을 취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그들은 그 명령을 거절했고, 이제 그분이 퇴각하라고 지시하였을 때에 그들은 반역적이 되어 그 땅을 점령하기로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나안 정복을 시도하고자 준비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같이하심 없이, 갑옷과 전쟁 무기로 무장하고 싸우러 나아갔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는 크게 참패를 당했다. 그들의 반역적 실험의 결과는 파멸과 죽음뿐이었다. 이제 그들은 또 다른 방황을 위해 광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실한 두 정탐꾼의 보고 보다는, 불신실한 정탐꾼들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무엇이든지 정복할 수 있고 가능하다는 두 정탐꾼의 말보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정복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열 정탐꾼의 말을 더 믿는 것 같습니다. 죄를 이기는 일, 그리고 거듭나서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사는 주제에서도 그렇습니다. 마치 가나안의 거인처럼 심히 크게 보이는 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정복하기 어려운 것이며, 새롭게 거듭나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사는 것 또한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부분 신학자와 목사님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과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믿는 신실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는 생활은 가능하며, 하나님의 능력은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는 새로운 생활을 살도록 변화시킨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늘 가나안 변경에 가까워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은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죄를 승리하고, 그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순결한 생애를 사는 사람만이 하늘 가나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죄를 승리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므로,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음으로, 새로운 마음을 주사 죄를 미워하게 하고 다시는 그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음으로, 아직도 우리는 죄 된 세상에서 고달픈 광야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그리고 믿는 대로 그렇게 죄를 승리하며 사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이 힘든 광야 생활을 빨리 벗어나게 하는 참믿음을 우리 모두 소유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 제7부 - 믿음보다 더한 믿음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그 이유는 성경에 쓰인 기록들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건너 출애굽 시키시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잘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신 기록은,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다. 이 기적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1) 믿음의 발이 가른 강물 가데스에서의 반역을 계기로 광야를 40년간 돌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요단 동편에 진을 치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과 형편없는 패배의 슬픔과 실패의 고통과 뒤이은 회개로 어우러졌던 40년의 광야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것을 배웠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잠들고, 이제는 모세 대신 여호수아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보내신 최초의 기별은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어느 길로 통행할지에 대하여 아무런 지시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이 나아갈 길을 마련하실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믿고 즉시 진군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진군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온 백성은 사흘 동안 먹을 양식을 준비하고 모두 자원하여 그들 지도자의 계획에 따르며 군사들은 전투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과 여리고 성에 도착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저희가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는 일 년 중 봄이었다. 산의 눈이 녹아 내려서 요단강 물이 불어 둑에 넘쳐흘렀으므로, 평상시에 걸어서 건널 수 있던 곳도 건너갈 수 없게 물이 넘치고 있었다. 홍해 바다만큼 큰물은 아닐지라도, 요단강은 이 많은 사람이 건너기에는 불가능한 크고 깊은 물이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던 때와 같이 요단의 물을 갈라주실 것인가?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백성으로 스스로 성결케 하고, 저희 죄를 버리고 외부의 모든 불결함에서 자신을 정결케 하도록 명령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적으로 요단강을 건너도록 뜻하셨다. "언약궤"가 무리 앞에서 길을 인도할 것이었다. 제사장들이 멘 여호와의 임재의 증거인 법궤가 먼저 강을 향해 나아갈 때 그들은 그 뒤를 쫓아야 하였다. 드디어 정한 시간이 되었다. 제사장들이 어깨에 멘 법궤를 선두로 하여 행진을 시작하였다. 백성은 뒤로 물러가 법궤 주위에 약 반 마일가량의 공간을 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사장들이 요단강 둑을 내려갈 때에 모든 사람이 깊은 관심을 두고 바라보았다. 과연 물이 갈라질 것인가? 그러나 물은 먼저 갈라지지 않았다. 물은 그들의 믿음의 발이 강에 들어서기까지는 멎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신뢰하고 발걸음을 떼어 놓아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사장들이 거룩한 법궤를 메고 노한 듯이 물결치는 강물을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그들이 발을 흐르는 물속에 넣자, 갑자기 위에서 흘러내리던 물결이 위로 쏠려 멎고, 아래의 물은 흘러내려 가 강 밑바닥이 드러났다!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 한가운데로 들어가 거기 정지해 서고 이스라엘 전군은 강을 건너갔다. 요단강 물의 흐름을 멈추신 능력은, 40년 전에 저희 조상 앞에서 홍해를 가르신 능력과 같은 능력이라는 사실이 온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백성이 모두 강을 건넌 후, 법궤가 서쪽 강변에 도착하여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자마자" 꼼짝 못하던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강물은 다시 자연스럽게 저항할 수 없는 홍수로 흘러내렸다. 그것은 또 한 번의 기적이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장구한 세월이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의 발은 마침내 약속의 땅을 밟고 있었다. 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할례를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다시 확실하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심장한 표였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하늘 가나안에 가까이 이른,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처음 출애굽을 할 때 홍해를 건너던 믿음보다 더 성숙하고 수준이 높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활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요단강은 홍해가 갈라지듯이 먼저 갈라져 길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요단의 물은 갈라지지 않을 듯이 보이며, 세차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들의 발을 물 가운데 넣을 때까지 흐르는 강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생애에도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것, 믿음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믿음을 활용하여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 올 환난은, 우리가 평안한 때에 배양하고 활용한 믿음으로 견뎌야 합니다. 그때는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으로부터 얻는 개인적인 응답을 경험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께서 나를 돌보시고 인도하신다는 개인적인 확신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없다는 확신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있어야 환난 때에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혹시 창일한 요단의 물이 넘실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건너기 불가능해 보이는 시련의 물결, 해결되기 어려워 보이는 시험의 강물, 넘어가기에 너무 거세 보이는 높은 파도가 여러분의 앞길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발걸음을 떼어 전진하기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믿음보다 더한 믿음이 전능하신 분의 기적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할례를 받았던 것처럼, 세상의 죄 여행의 역사, 광야 같은 세상이 끝날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표, 하나님의 인을 받아야 합니다. 짐승의 표 환란 때에, 그리고 칠 재앙이 내릴 때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수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수치와 죄와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표를 받은 것처럼, 마지막 환난이 가까운 이 시기에 사는 우리도 우상을 버리고 죄를 승리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지금, 믿음보다 더한 믿음을 배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난공불락의 성을 무너뜨린 믿음 이제 믿음보다 더한 믿음을 발휘해야 할 더 큰 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나안 정복의 제 일보가 되는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의 능력으로써만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의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아"있는 견고한 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다는 보증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분으로부터 그 성읍을 빼앗는 일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군대를 정렬시켰다. 그러나 공격을 가하지 말아야 하였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나팔을 불면서 그 성읍 주위를 일곱 번 돌아야 하였다. 전쟁해도 모자랄 텐데, 그냥 성 주위를 돌기만 하라니!... 이 일 또한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였다. 먼저 대열의 선두에는 무사들이 섰고, 그 뒤를 나팔을 가진 일곱 제사장이 따랐다. 그다음에는 제사장들이 거룩한 영광의 구름에 둘러싸인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행진하였다. 그 후에 이스라엘 군대는 지파마다 깃발 아래 행진하였다. 이 강대한 군사들의 발걸음 소리와 엄숙한 나팔 소리가 산들에 메아리치고 그 소리가 다시 여리고 시가에 울려 퍼졌다. 돌기를 마치자 전군은 조용히 각기 장막으로 되돌아가고 법궤는 성막 안에 전에 있던 자리에 안치되었다. 여리고 성읍의 파수꾼들은 경이와 공포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을 세밀히 감시하고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였다. 이스라엘의 강대한 군대가 성스러운 법궤와 수종 드는 제사장들과 함께 그들의 성읍을 매일 한 번씩 도는 것을 보자, 이 신비스러운 광경은 이교의 사제들과 백성의 마음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성읍을 도는 행렬을 바라볼 때에 두려워하였다. 이스라엘 대군은 엿새 동안 여리고성을 돌았다. 일곱째 날 새벽이 되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를 소집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제 하나님께서 이 성읍을 그들에게 주셨으니,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돈 후에 나팔 소리가 크게 들리거든 큰소리로 외치라고 지시했다. 거대한 이스라엘 대군은 운명지어진 성벽 주위를 엄숙히 행진하였다. 성벽 위에 있는 파수병들은, 첫 바퀴를 돌고 나서 뒤따라 두 번째 바퀴를 돌고, 이어서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바퀴를 도는 모습을 공포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곱 번 돌기를 마친 후 멈추어 서서 나팔들을 불어 온 땅을 진동시켰다. 그러자, 견고한 돌로 쌓은 성벽이 그 거대한 망대와 활 쏘는 구멍 있는 흉벽과 함께 기초에서부터 흔들려 우르르하고 무너져 내렸다! 여리고 거민들은 공포에 질려 움직일 수 없었고 이스라엘 대군은 진군하여 들어가 그 성읍을 점령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것은 믿음보다 더한 믿음의 결과였다! 우리가 배우는 교훈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죄를 승리하는 것도, 시험을 이기는 것도, 유혹을 견디는 것도, 자아를 부인하고 자신의 죄 된 성벽을 제어하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요단강을 가른 기적,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을 한 번의 외침으로 무너지게 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가지면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것은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믿음을 체험하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했으며, 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이해하고,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타성에 젖어, 변화 없이 형식적인 신앙에 빠져 들어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고 경험하며, 그 은혜로 죄를 이기고 새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롭게 된 사람, 죄와 상관없이 순결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꼴 지어진 사람의 이마에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이 쳐질 것이고, 그런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을 맞는 은혜의 시간이 점점 다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품이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성품, 온전하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하는 데에는, 믿음보다 더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가 죄를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남은 자손들은 믿음보다 더한 믿음, 곧 예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리고 성보다 더 큰 죄악의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믿음밖에는 없습니다! 큰 믿음을 가지시는 독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편지 - 아직 보석이 아닙니다 빛이 비치기까지는 아직 보석이 아닙니다 잊히지 않는 아주 어릴 적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했던 기억, 그래서 가끔 떠오르는... 아침이었나 봅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마당 옆에 도랑이 생겨 작은 물줄기가 냇물처럼 쫄쫄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냇물을 가로질러 양편 풀숲에 걸쳐 거미줄이 쳐 있고, 그 위에 빗방울인지 이슬인지 촘촘한 물 구슬들이 맺혀 환한 아침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마치 동화 속 보석 궁전의 진주가 박힌 아치 형 다리처럼 빛나는 보석을 휘황찬란하게 매달은 황금색 거미줄은 아침 내내 눈부시게 빛나 어린 눈을 황홀하게 해주었습니다. 시간이 꽤 지났나 봅니다. 눈을 비비고 낮잠에서 깨어나 다시 보석 궁전을 찾았습니다. 반짝이는 보석 아치 형 다리 위에 동화 속의 작은 공주라도 나타날까 싶어서... 그런데 해가 들어가고 구름 낀 그 흐린 오후 다시 찾은 작은 도랑엔, 빛나던 보석 궁전의 모습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잿빛 거미줄에 회색 물방울만 멋없이 주르륵 달린 것이었습니다. 빛나는 보석은 어디에고 없었습니다. 보석을 뚫고 나오던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던 빛도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빛나던 보석 궁전 대신 폐허 속의 잔재처럼 까만 거미줄만 앙상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눈부시던 아침 햇빛이 사라진 그 흐린 오후, 잿빛 구슬을 달고 있는 깜깜한 거미줄을 바라보고 허망해하며 어린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빛이 없이는 아무것도 보석일 수 없다는 것을... 빛나는 보석 궁전을 잃어버린 슬픔 속에서 어린 생각에 깨달았습니다. 보석도 빛이 없이는 빛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보석을 비추는 빛이 없이는 보석은 아직 보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보석인양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다듬으시는 연단의 손길을 거치면서 거친 원석의 모습이 많이 갈려져 나가 거의 보석이 된 모습으로 빠끔히 얼굴을 내밉니다. 그러나 아직 보석이 아닙니다. 아무리 모서리가 곱게 갈렸어도, 아무리 둥글고 부드러운 모양을 하고 있어도, 아무리 수십, 수천 개의 면을 가진 다이아몬드로 태어났다 해도, 아직 보석이 아닙니다. 빛이 비치기까지는... 아직 빛나지 않습니다. 빛이 오기까지는... 빛이 보석을 관통해 뚫어 중심에서부터 빛이 비쳐 나오기 전까지는 아직 그 보석은 진짜 보석이 아닙니다. 보석 진열장에 전시된 형형색색의 보석들이 빛이 없이 빛나는 것을 보셨나요? 빛이 없으면 보석들은 존재도 없이 관 속에 누운 듯 조용히 있지요. 색깔도 없이, 색채도 없이, 그렇게 깜깜하게... 그러나 일단 불빛이 켜지고 빛이 비쳐 들어가면 보석들은 자신만의 현란한 색채들을 뽐내며 기지개를 켭니다. 아직 보석이 아닙니다. 빛이 비치기까지는... 아무리 멋진 모습을 하고 있어도, 빨강 루비, 불루 사파이어, 초록 에메랄드, 보라 자수정... 아무리 찬란한 색을 지닌 보석이어도, 아직 보석이 아닙니다. 빛이 색채를 발할 수 있도록 비춰주지 않으면... 아무리 진리를 많이 알아도, 아무리 말씀이 머릿속에 촘촘히 새겨져 있어도, 아직 보석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비밀", 곧 "영광의 소망"이신 그분이 없이는... 아직 보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마음에 비치기 전까지는... 아직 우리는 보석이 아닙니다. 그 빛 항상 마음속에 살아 비춰주지 않으면... 아직 우리는 진짜 보석이 아닙니다. 빛이 비치기까지는... 바이블 맨에게 물어보세요 - 세대주의와 비밀휴거는 무엇인가요? "감람산 위에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던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주님의 대답에 나타나 있는 분명한 암시는 주의 재림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들이 말세에 많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말세가 된 지금, 주의 재림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기독교계에 들어왔다. 오늘날 수백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검토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기독교계에 엄청난 교리적 혼동의 요인이 되고 있는 신학적 질문이 하나 있는데, 그 질문은 세상 끝에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법으로 이 땅에 임하실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수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비밀리에 공중 재림하실 것이라는 가르침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소위 휴거(rapture)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휴거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환란 이전에 의인들만 비밀리에 살짝 들어 올리셔서 그들이 환란을 통과하지 않게 해주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휴거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지구에 일어날 엄청난 충돌 사고들을 예상하고 있다. 비행기 조종사와 버스와 자동차 운전기사들이 갑자기 들려 올라 가게(비밀 휴거) 되면 굉장한 사고들이 연발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공상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꽤 많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휴거론은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또는 미래주의를 지지하는 목사들에 의해서 전파되고 있는 예언 해석과 접목되어서 여러 가지 모양의 오해와 혼란을 빚어내고 있다. 이제, 먼저 비밀 휴거론자들이 만들어 놓은 종말론의 시나리오를 대략 살펴보자. A)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비밀 휴거 시나리오 비밀 휴거 시나리오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전개된다. 다니엘서 9장 25절에 나오는 70주일에서 마지막 70번째 주일에 해당하는 1주일(7일), 즉 7년을 사이에 두고 그리스도께서 각각 다른 모양으로 두 단계에 걸쳐서 재림하신다. 첫 번째는 7년 환란이 시작되기 직전에 비밀리에 공중에 강림하셔서 부활한 죽은 의인과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아무도 모르게 공중으로 끌어 올려가는 비밀 휴거가 있다. 그런 다음 곧이어서, 지상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제사 제도를 회복시키고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에 앉아서 자기를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가증한 일을 행하고, 7 재앙을 내리기 시작한다. 이에 자극받아서 아랍과 아프리카 동맹세력이 일어나고, 러시아와 그 동조세력들이 개입하여 대결한다. 이렇게 위기가 고조된 상황 속에서 드디어 유대인들이 회심하여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은 복음전도자로서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돌이키는 대역사가 전개되는 한편,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 위기가 고조에 달하게 된다. 이때에 예수께서 공개적으로 지상에 재림하셔서 전쟁을 끝내시고 다시 유대인 위주의 천년 왕국을 이 땅 위에 세우신다는 것이 세대주의자들이 가르치는 종말론의 시나리오이다. 이러한 비밀 휴거론에는 다음과 같은 8가지 주장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8가지 주장이 모두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 B) 비밀 휴거론에 포함되어 있는 8가지 주장
- 소리 없이 일어나는 휴거
그리스도께서 공중에서 교회를 휴거 하시는데, 이 사건은 구원받지 못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즉, 그리스도의 비밀 공중 재림과 함께 휴거가 아무런 소리 없이 일어난다. - 비가시적으로 일어나는 휴거
휴거는 비밀리에 일어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 살아남는 악인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휴거하실 때, 악인들은 지구에 살아서 존재하게 된다. - 환란 전에 일어나는 휴거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마지막 시대의 환란이 닥치기 전에 의인들을 휴거하신다. - 예수 재림의 2단계론
예수 재림은 2단계로 일어날 것인데, 첫 번째 단계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비밀 휴거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실제적이고 공개적으로 지상에 강림하신다. - 7년의 간격
2단계로 나누어진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는 7년이라는 시간 간격이 있다. -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비밀 휴거 사건
이후에 지상에 나타남 그리스도의 비밀 휴거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 이루어지며,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세상을 장악한 후, 7년간의 환란에 돌입한다. - 악인들을 위한 두 번째 기회를 줌
휴거 때에 악인들은 지상에 남아서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마음을 바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된다. 위에 언급한 8가지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확증될 수 있는 것들일까요? www.askbible.net에서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비밀휴거의 8가지 문제들을 하나씩 순서대로 성경에 비추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www.sostv.net에서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9호에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Did you know? - 미리 기록된 세상 역사 요즈음 지구 환경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현재 점점 올라가는 기온의 상승 때문에 남 북극의 빙하들이 녹아내리게 되어 모든 대륙이 물에 잠기게 되어 자멸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정 반대로 이 지구가 다시 빙하 시대로 돌아가 (진화론자들의 가정) 모든 생태계가 완전히 멸종당하게 될 것이라는 학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천문학자들은 우리 지구가 하늘을 떠다니는 혜성과 부딪치게 될 확률이 점점 커지면서 언젠가 가까운 장래에 혜성과의 충돌 때문에 옛날 공룡들을 멸종시켰던 똑같은 위기가 다시 한번 이 지구를 흔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내는 공상 과학 영화들에서는 핵폭탄으로 자멸된 지구 위에 소수의 생존자가 연명하는 장면들이 흔히 등장하는가 하면 외계인의 침입에 의하여 지구가 시달리는 이야기들이 인기의 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사는 지구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도 이 지구는 엄청난 속도로 우주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이 지구는 운전기사 없이, 정처 없이 어디론가 달려만 가고 있는 외로운 항성일까요? 아니면 창조주께서 계획을 가지시고, 섭리대로 지구의 역사를 정확한 목표를 향하여서 운행하시고 계신 것일까요? 누가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고 있습니까? 100년 후에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10년 후에 우리는 어떠한 세상에서 살게 될까요? 과연 우리의 후세대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하고 확실한 해답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로 그 기독교의 하나님께서 이 지구의 역사를 당신의 뜻을 따라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경 속에 들어있는 예언들입니다. 예언이 그 말씀 그대로, 정해진 시기와 사건 속에서 정확하게 이루어져 나가는 사실을 목격하게 될 때에, 인생의 한 치 앞도 내다보거나 예견할 수 없는 인간들로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무한하신 능력, 그리고 우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광대한 우주 속에 내팽개쳐진 고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지구의 역사를 운영하고 계시며 당신의 뜻을 따라 끝마치실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한가지 예언 즉, 지구 역사의 흐름에 대하여 미리 계시하여 주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연구해 보도록 하십시다. 그 예언은 다니엘 2장과 7장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잘 디자인 하셔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지구 상의 역사의 흐름도 당신의 구원의 역사에 따라 잘 계획 되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모스 3장 7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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