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꽃 2007-02-06 조회 : 180
이 글은 피곤에 지쳐 밤늦게 힘겹게 쓰는 개인 글입니다.어제 신문기사에 내 애제자 광호의 가슴아픈 사연이 실렸기에 내 흔적을 남기고자 쓰는 글이니 관심 없으신 분은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92년초 였던 것 같았다.고학으로 서울 모대학 최고학부를 다니던 내가
북에서 내려온 보트피플 가족 김만철씨의 막내아들 광호를 처음으로 만나던 해였다. 광호는 당시 중3이었고,광호의 절친한 친구로는
국내 유명그룹 회장의 손자 신모군이 있었는데,나는 그 두명의 개인교사로 있을 때였다.
당시 광호네 집은 꽤나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신변불안 때문인지 이사를 자주 하는 편이었고 항상 주위에 누군가가 김만철씨 부부를 보호해 주기 위해 남녀가 있었던 것 으로 기억된다.
광호에게 북한생활 얘기를 물어보면 될 수 있으면 안할려고 피했던 것 같다.한국생활에는 잘 적응이 안되어서 그런지 일본과 미국 얘기를 자주했고,항상 꿈은 우주과학에 있었고 스티븐 호킹박사를 존경했다.
광호는 성적이 매우 우수한 편이어서 서울 과학고에 입학 하기를 희망
했으나,당시 과학고 입학기준이 중1-중3까지 성적중 국영수가 90점에서 한과목이라도 낙제를 하면 원서를 쓸 자격이 없었다.광호는
당시 중1성적에 영어가 87점이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 되는데 그것 때문에 서울 과학고에 원서를 쓸 수가 없었다.아마도 어린
마음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광호는 평범한 고교에 진학 하는 것을 포기했다.그리고 개인교사였던 내
인생을 따라 할려고 많은 질문을 던졌던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워낙 극빈 집안 출신 이라서 고등학교를 중퇴해야 했고, 독학으로
검정고시후 정규대학을 졸업하고 한이 서려서인지 대한민국 최고학부를 오기로 다니고 있었다.
그런 나를 광호는 무척 따랐던 것 같다. 내대학 캠퍼스에도 놀러왔고,신모군과 볼링도 무척이나 많이 치러 다녔다.당시 광호와 신군의 볼링수준은 선수급이었는데 에버리지가 170-180까지 넘나들었으니 가히 칭찬할 만 했다.
그 두학생을 1년6개월쯤 참 열심히 가르켰고 그결과 신군은 경기고에 입학후 미국유학을 떠났고,광호는 고교입학을 포기하고 내가 사는 동네옆 독서실로 찾아와 나와같은 길을 걸을려고 검정고시 공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잣집 아들이 왜이런 길을 택하느냐고 애써 만류도 해보았지만 목숨건
탈출을 시도한 김만철씨의 아들답게 광호는 주관이 확실한 어른 같은 아이였다. 반대로 나는 광호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사업에
실패한 후 강단과 모든 책과 필을 접고 또다시 뼈저린 고난의 행군으로 미싱공으로 바닥을 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극빈이라서 왠만한 고통에는 면역이 되어 있었지만,이 시절
만큼 내 인생에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열심히 벌어 놓았던 재산을 한번의 실패로 다 날려 버리고,공동 화장실을 쓰는
월셋방에서 처자식과 생활을 했으니 정말 비참했다.그래도 광호에게는 매일 웃으며 대했으니까 광호가 나의 그런 힘든 처지를 알턱이
없었다.
3-4개월후 난 미싱을 완전습득 하고 개인공장을 내고서야 광호에게 내가
블루칼라길로 인생을 바꾸었다고 얘기를 했고,광호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까 우리공장의 전화가 통화
하기전에 지직거리며 항상 이상 했었는데, 내가 광호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기관에 의한 도청을 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해 9월에 광호는 고1나이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고,광호의 꿈은
캘리포니아 주립대(UCLA)물리학과에 입학하는 것이었다.한국에서 검정고시 정도의 학력으로는 UCLA(캘리포니아주립대)입학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광호는 같은해 11월인가 UCLA의 옆에 있는 산타모니카 대학에 입학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그당시 광호는
일단 산타모니카 대학에 입학후 UCLA에 편입학 하겠다고 나하고 약속하고 내곁을 떠났다.어드미션이 그렇게 빨리 나올줄은 미쳐
몰랐다.누군가가 힘을 썼던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기사에는 광호가 UCLA를 졸업 했다고 기사화 되었다.참으로 대단한
친구다.생각대로 현실을 다스리고 있는 인간승리라고 말할 수 밖에는 없다.
그 이후부터 광호는 미국에서도 가끔씩 내공장에 전화를 했지만,서로 통화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만난 적도 없었다.공장생활을 그만둔지가 꽤 오래 되었고 전화번호도 여러번 바꼈으니까 더이상 연락이 닿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 조간(조선일보)에 김만철씨 가족의 어려운 처지와 광호의 꿈을 이뤄가는 기사가 실렸다. 애처러움과 감회가 서로 교차하며 옛날 생각에 쓴웃음을 지어본다.
사선을 넘나들며 위험을 감수하는 자와 행복에 겨워 그들이 지켜주는
행복조차 느끼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바보스러움을 공격하는 못난자들....광호는 "하버드대도 갈수 있었으나 돈이 없어서
못갔다"는 김만철씨의 아픈 마음과 탈북으로 광명을 찾았으나 사기꾼들에게 속아 모든 돈을 날려 버리고 몇년째 컨테이너 생활을 하고
있다는 김만철씨 부부의 비참한 현실...김만철씨는 남해땅 일만 오천평을 기도원에 기부했으나 그분이 어려울때 그들은 김만철씨를
외면해 버리는 종교집단의 이중성..
이것이 현실이고 더러운 자본주의의 한 측면 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이런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앞을 보며 열심히 살아가는 광호를 생각하면 반듯한 탈북청년의 심성이 세상을 밝게 해주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현재 광호는 고시원에 기거하면서 서울대 박사과정에 재학중 이라고 한다.
그 옛날 내가 했던 것처럼 고시원에서 자며,돈을 벌어 학교를 다니고,몸이 아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도 우는 것이 아니라고
,남자는 절대 태어나서 세번만 울어야 한다던 어른들 말씀을 지키고자 무한히 흐르는 눈물을 닦아 버렸던 그 지긋지긋 했던 가난과의
투쟁의 계절에 빠져있는 모양이다.
광호야 모든 것을 이겨 내고 크게 우뚝 서리라 믿는다. 난,근10년을 속칭 공돌이 생활로 이를 악물고 살았다.살아본 결과는 그래도 인생이 즐거웠고 살만하고 노력한 만큼의 댓가는 있더란 것이다.
하나씩 차근차근히 이뤄나가면 꿈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내가 당시
사업은 부도가 났어도 인생은 부도가 나지를 않아서 항상 너를 만나면 즐거울 수 있었다.그리고 언젠가 너가 나를 찾아 주기를
바랐는데,살아 있으니까 이렇게 만날 기회도 오나보다.내가 내일 서울대로 가서 너를 찾아 보마.반드시 바른 인생을 택해서 살아
가기를 바라고 가난한 학생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기를 소망한다.
첫댓글 잘봤어요 참 좋은글이군요...
근데 혹시 이글의 저자분이 하이젠베르그님 아니신가요?
김만철씨 아들 분은 저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할 겁니다. 분야가 약간 비슷해서 한다리 건너서 알만하더라구요. 옛날에 제가 한국에서 대학원다닐 때 서울대에 있는 친구들이 간혹 언급하더라구요. 글쓴 분은 김광호씨를 과외했다니까 나이가 좀 많겠지요. 92년도쯤에 대학 다녔다니....저는 그때 북한에서 고등중학생이었죠.
아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ㅎㅎ
아무튼 잘보구 갑니다 그리고 저는 같은 탈북자로써 님이 너무 멋지고 자랑스럽네여...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으셧다니... 님같은 분들이 탈북자들중에서 많이 나왔으면 좋겟어여 물론 저는 그렇게 될것같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ㅎ
부끄럽네요. 아직 갈길이 먼데...
지금 이뤄 놓은신것만도 대단 하십니다.
글 잘 보았어요...이땅에 와서 생활하는 탈북자들중에는 정말 생각외로 마음고생, 생활고로 고통받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자본주의경제를 비롯하여 여러분야를 모르다보니 사기를 엄청 당하고,,,지어는 북에선 굶어죽는 사람은 있어도 자실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저의 아파트 단지내에서도 두명이나 자살하는 비극이 있어서 정말 가슴이 아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