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여승과 고양이 -
얼마 전 낙하실험을 한다고 어린 초등학생이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뜨린 벽돌에 고양이 집을 만들던 여인이 맞아 숨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밑에 사람이 있는지 알고 던졌든 모르고 던졌든 이 아이에겐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며 고양이만 보면 그 날의 악몽을 되살아나 괴롭힐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도 고양이를 보면 잊히지 않고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49재를 보문동에 있는 보문사에서 지냈는데 친척과 온 가족이 다 법당에 들어가 제사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나는 미션 스쿨에 다녔는데 체플과 성경 시간을 통해 주님을 영접했고 부처에게 절하고 예불을 드리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생각해 집안 어른들에게 불효자식 이라는 욕을 먹으면서도 그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나 홀로 절 마당을 어슬렁거리다 궁금하기도 해서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스님의 독경 소리에 맞춰 온 친척과 형제들이 합장을 하고 법당 안에서 빙빙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와 눈이 마주쳐 미안한 마음에 다시 마당으로 내려가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무슨 의식이 그렇게 많은지 도무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기다리다 지루하기도해서 법당 뒤로 돌아가 절 구경을 하며 평평한 돌 위에 앉아 있는데 저 쪽에서 어린 비구니가 고양이와 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보다 두어 살 쯤 어려 보이는데 참으로 예쁜 어린 비구니였습니다.
지금도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 삭발을 하고 주인공으로 나왔던 아주 예쁘던 강수연보다도 더 예쁘게 생각되어 집니다.
고양이와 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면서 가만히 살피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수줍음이 많던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이내 고개를 돌리곤 했습니다.
그녀도 스님들만 있던 절 뒷마당에 자기 또래의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학생이 있는 것이 신기했는지 멀리 떠나지 않고 내 앞에서 알짱거리며 고양이와 무슨 말인지 주고받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 으로만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너 누구니.
어디서 왔니.
근데 참 예쁘고 어린 네가 어떻게 승복을 입은 스님이 된 거야?
어느새 아버지 49재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채 말 없는 대화를 나누 며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함께 놀던 고양이가 어린 스님의 손을 벗어나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를 잡으려 뒤쫓아 가던 예쁘고 어린 스님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내 귀를 의심케 했습니다.
“너 이리와. 안 오면 죽여 버릴거야!”
아니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사찰에서, 더욱이 청초한 꽃같이 예쁘고 어린 스님의 입에서 그런 험한 말이 튀어 나오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험한 말 때문에 지금도 그 때의 일이 잊히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한 것이 쑥스럽고 부끄러운지 그 예쁘고 어린 스님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고양이가 간 쪽을 향해 달려가 몸을 숨겼습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스님이 사라진 모습을 새기며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겼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녀는 스님이 되었을까.
아니 스님이 아니고 그냥 승복만 입고 있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학교에 다닐 나이에 이 절에 왜 그렇게 있는가.
6.25 전쟁 통에 부모님이 폭격으로 돌아가셔서 고아가 되어 이 절에 오게 되었나.
아니면 얼굴이 그렇게 예쁜 걸로 보아 어머니도 미인임이 분명한데 유명한 요정의 기생으로 소설 속 얘기처럼 맺지 못할 사랑으로 태어나 기르지 못해 이 절에 맡겨진 것 아닌가.
등 등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윽고 제사가 끝났는지 법당 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어른들을 따라서 아쉬운 마음으로 절 문을 나섰습니다.
그 후에 장성하여 절 옆을 지나다 구경삼아 잠간 들른 적이 있지만 다시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차를 타고가다 보문사 근처를 지나갈 때면 그 때의 일이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그리고 어린 스님의 그 후의 생이 궁금해집니다.
혹시 파계하여 영화 속 강수연처럼 모진 삶을 살고 있지나 않는지.
아니면 좋은 남자 만나 아들 딸 잘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어쩌면 개종해서 기독교인이 되어 열심히 주님을 찾고 있지 않을까.
또 내 이웃에 살면서 내 곁을 스쳐 지나가 버렸는지도 모르지.
지금은 고매한 스님이 되어 참선에 정진하며 득도한 보살이 되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건만 모든 답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이지요.
만약에 내게 풍부한 상상력과 글재주가 있다면 풀어서 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 어리고 예쁘던 비구니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고희를 훌쩍 넘긴 할머니가 되었겠지요.
불가에선 옷깃을 스쳐도 오백겁의 인연이 있다고 하는데 육십여 년 전 짧은 순간의 추억이 이리 생생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지금도 청순하게 예쁘던 그녀가 구부정한 등허리와 패인 주름 속에 세상 번뇌 감추고 부처님 앞에 백팔배로 마음 다스리며 목탁 소리 맞춰 독경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간 사람이여, 넘어선 사람이여, 피안에 간 사람이여, 피안에 완전히 넘어선 사람이여 진리의 깨달음이여, 영원하라, 행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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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고대 안암병원에 진료차 갔다가 다음 검사까지 세시간 정도의 틈이 있어 병원 근처에 있는 보문사를 찾았다.
60여년 전의 일이 엊그제 같이 생생한데 세월이 많이 흐르고 절 모습도 옛 정취가 사라져 전혀 다른 곳에 온 것 같아 諸行無常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 아래는 며칠 전 보문사에 들러 담은 사진.
아버지 49제를 지낸 대웅전. 그 때는 꽤 크게 보였는데.....
일가친척들이 49제를 드리는 동안 저 문쪽으로 나가 어린 여승과 만났는데 그 때도 그 문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린 여승이 고양이와 놀던 곳으로 전에는 맨땅 이었는데 지금은 보도블록이 깔리고 건물이 세워져 옛날의 자연스런 정취가 사라졌다.
어리고 예쁜 여승이 고양이에게 욕을 한 후 얼굴을 붉히며 달아나던 법당 뒷 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