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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마리아의 새벽
운곡 조이무
어머니를 역사 속 인물이 아닌 한 인간으로 불러내다
조마리아 여사를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로만 그리지 않으려 했다. 아들의 사형선고를 전해 듣는 순간, 그분도 먼저 가슴이 무너지는 평범한 어머니였을 것이다.
아들을 살리고 싶은 모성과 아들의 뜻을 지켜 주어야 한다는 신념이 충돌한다. 나는 바로 그 갈등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작품의 사건을 전개하는 부분에서 자식의 죽음과 어머니의 입장에서, 한 어머니가 자신의 슬픔을 역사적 결단으로 바꾸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1910년 2월하순, 중근이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소식이 진남포 어머니 조마리아 에게 당도했다. 이날따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넓지 않은 골목의 먼지를 말아 올리듯이 세차게 불어온다. 부듯가에서 석탄을 나르는 인부들의 구령소리가 늦게까지 들렸고, 바다 먼곳에 정박한 배는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정적을 깨운다. 세상은 어재외 다르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사꾼은 좌판을 등지고 뛰어다닌다. 다만 우리 집 앞에는 아침부터 낮선 사내 하나가 서성거렸다. 나는 창호지에 비친 그 수상쩍은 첩자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일본 순사인지, 순사에게 고용된 끄나풀인지 알 수는 없었다. 큰아들 중근이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부터 우리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담장이 더 생겼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면면은 모두 저들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몇일 전 내가 평양에 다녀온 일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안병찬 변호사를 찾아가 중근이의 변호를 부탁하고 돌아왔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집으로 찾아와서 비슷한 질문을 여러번 반복하여 물어본다.
어미가 아들의 거사를 미리 알고 있었느냐 등, 계속해서 사건전의 행방을 수습하려 되풀이 한다. 공범을 찾기위해 혈안이 되어 집의 구석 구석을 살피고, 함께 모의한 자의 행방을 묻곤한다. 그들은 아들의 뜻을 캐묻는 척 하면서, 실은 나의 두려움을 확인하려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중근이가 밤낮으로 나라일을 걱정했다고 떳떳하게 큰소리로 말했다. 국채를 갑자며 집안의 패물을 내놓았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고, 매사에 옳고 그름을 따졌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헌병 끄나풀 한놈이 빈정대면서 물었다. 그래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 한 나라를 죽이려 한 인간을 죽인 것이 살인이더냐? 그날 이후 우리 집앞을 지키는 그림자가 하나더 늘었다. 나는 방문을 닫고 아랫목에 앉았다. 남편 태훈이 세상을 떠난 후로는 집안의 크고 작은 결정은 거의 내 몫이 되었다. 자식들은 하나둘 나라의 일에 뛰어 들었고, 나는 떠나는 등을 붙잡는 대신 행장을 챙겨주었다. 집안일은 생각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고 격려하며 말한 사람도 나타났다.
그 말을 하던 날에는 미처 몰랐다.
끝까지 싸운다는 말의 끝에 흰 명주 한 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어머니
정근이가 봉투하나를 내밀었다. 뤼순의 소식이었다. 일본 법정이 중근에게 붙인 죄명은 살인 이었다. 그러나 중근이는 자신이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처단한 것이라며 일본 법정의 재판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판결문 봉투를 내려놓았다.
형님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정근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변호사들은 항소해야 한다고 합니다. 형님이 마음을 바꾸시면 혹시..
정근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살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라는 말이 방안을 떠 돌았다. 입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렸다.
어느 어미가 아들을 살리고 싶지 않겠는 가?
나는 순간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평양이든 뤼순이든, 일본법정이든 감옥이든 찾아가 중근이를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 배로 낳았으니 그의 목숨도 내 것이라고, 나라가 무엇이고 대의가 무엇이기에 늙은 어미보다 먼저 아들을 데려가느냐고 묻고 싶었다.
만약 중근이가 항소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순간, 일본은 그의 의기를 한낱 살인사건으로 기록할 것이다. 대한의군의 전쟁은 개인의 원한으로 축소되어지고, 하얼빈의 총성은 죄인의 발악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앞으로 같다.
옷장 맨 아래에는 오래 전부터 보관해 둔 흰 명주가 있었다. 국체를 갑는데 보태려고 은장도와 은가락지, 은귀거리까지 내놓았지만 이 천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누구에게 입힐 것인지 정하지 않은 채, 다만 집안에 큰일이 생기면 쓰려고 간직해 둔 것이었다.
나는 명주를 꺼내 아랫묵에 펼쳐 놓았다.
희고 고요한 명주천에 중근이의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을 닮은 점 일곱 개를 지니고 태어나, 응칠이라 불리던 아이었다. 마당에 뛰어다니다 무릅이 깨져도 울지않던 아이, 잘못된 일을 보면 어른에게도 물러서지 않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이제 서른을 갓 넘긴 몸으로 뤼순의 감옥에 부당한 사형 선고를 받고 앉아 있었다. 가위를 가져오너라
정근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무엇을 하시려구요
네 형에게 보넬 옷을 지을 것이다.
옷이라니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근이도 곧 알아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와 희망의 끈이 사라졌다.
어머니 아직 형님은 살아 계십니다.
살아있으니 지어보내는 것이다. 죽은 뒤에는 어미가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 나는 재단 가위를 들었다. 쇠붙이의 찬 기운이 손바닥 깊숙이 스며들었다.
중근이를 낳던 날에도 가위가 있었다. 산파는 핏줄을 자르고 아이를 내품에 안겨주었다. 그때의 가위는 한 생명을 세상에 내보냈다.
오늘의 가위는 그 생명을 다시 세상 밖으로 떠나보내려 하고 있었다.
가위 날이 흰명주에 닿았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자르지 못했다. 손등이 떨렸다. 방안에는 아무소리도 었었지만 내 귀에는 갓난 아이의 울음이 들렸다.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말하는 것은 독립운동가 조마리아의 몫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정근아 내일 아침 일찍 네 형에게 가거라
예, 어머니
그리고 어미의 말을 한자도 빠뜨리지 말고 전하여라
나는 명주 위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마치 멀리 갇혀있는 아들의 가슴에 손을 얹는 것 같았다. “항소하지 말라 하여라 옳은 일을하고 받는 형벌이니,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으라 하여라”.
그 말을 자식 앞에 하고 목구멍 않쪽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나는 그것을 삼키고 마지막 말을 이었다. 이 어미에게 하는 “마지막 효도라고 전하여라“. 정근이가 고개를 힘없이 숙이며 무릎위로 눈물 한방울이 떨어졌다.
나도 울고싶은 마음이 복받쳐 올라온다. .
대신 가위에 힘을 주었다.
서걱
흰 명주가 갈라졌다.
탯줄이 끊어진 자리에서는 아이가 울었지만, 수의를 짓는 천이 갈라진 자리에서는 어미이기에울 수 없었다.
바깥에는 진남포의 바람이 닫힌 문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그집 안에서 잘려나간 것이 흰명주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한 어미가 제 목숨보다 귀한 아들을 잘나내어 조국의 역사속으로 보내고 있었다.
바느질을 통해 어머니의 내면으로 들어가다
국경을 건너는 조마리아“
흰 명주와 바늘, 실, 등잔불을 중심으로 조마리아의 내면을 드러내고자 했다. 흰옷을 짓는 일은 겉으로 보면 조용한 바느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한 땀 한 땀에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이 담겨 있다.
조마리아의 애국심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밥을 짓고, 옷을 만들고, 자식에게 바른 길을 가르치는 생활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흰옷은 단순한 수의가 아니라,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이자 말 없는 유언이다.
중근이가 죽은 뒤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중근이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아들의 시신마저 어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어디에 묻었는지도 밝혀 주지 않았다.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데, 내 아들은 돌아갈 흙조차 갖지 못했다.
나는 진남포의 마당에 서서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처마 밑에 매달린 빈 광주리가 흔들렸다. 중근이에게 수의를 지어 보낸 뒤부터 바느질 상자에는 흰 실 한 타래가 겨우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실을 버리지 못했다.
중근이의 몸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에게로 이어진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의 끈같았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으로 모든 일이 끝날 것이라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일본은 중근이를 죽이면 하얼빈의 총성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총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소리는 살아남은 가족의 발밑으로 옮겨왔다.
일본 경찰은 우리 집을 더욱 집요하게 감시했다. 찾아오는 사람의 이름을 적었고, 어린 손주들의 행선지까지 물었다. 진남포에서 하루를 더 머무는 일은 감옥의 담장을 한 칸씩 높이는 것과 같았다. 그해 5월, 나는 마침내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둘째 정근이에 지시했다.
장녀 현생이를 명동성당 수녀원의 프랑스인 수녀에게 맡겼다. 아이와 헤어지는 날, 현생이는 내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할머니도 아버지처럼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떠나는 사람의 희망일 뿐, 지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천천히 떼어놓았다.
“살아서 기억하여라.”
“무엇을요?”
“네 아버지가 사람이 미워해서 총을 든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의로운 행동이었다.
현생이는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남은 식구들과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향했다. 품에 넣은 것은 묵주와 몇 벌의 옷, 그리고 중근이의 수의를 짓고 남은 흰실 뿐이었다.
국경을 넘는 날에는 비가 내렸다.
수레바퀴가 진창에 빠질 때마다 모두 내려 수레를 밀었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렸고, 뒤에는 고향이 있었지만, 그 고향에는 우리를 잡으려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연해주의 크라스키노였다.
바람이 거칠고 겨울이 긴 동토의 땅이었다. 말도 풍속도 달랐지만, 그곳에는 나라를 잃고 건너온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보면 말을 낮추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께서 오셨다.”
그 말은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했지만 때로는 눌러 앉혔다.
그들은 내게 슬퍼할 권리보다 의연하게 견디고 강하다는 의무를 먼저 주었다. 나는 아들을 잃은 어미였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나라의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최재형과 연해주 동포들이 중근이의 유족을 돕기 위해 모은 돈과 식량을 보내주었다. 그렇지만, 쌀 한 됫박, 감자 몇 알도 헛되이 쓸 수 없었다. 나는 어린 손주들의 옷을 깁고, 식구들이 먹을 죽을 끓였다. 낮에는 땔나무를 아껴 불을 지폈고, 밤에는 촛불 아래에서 묵주를 쥐었다. 그러나 도움만 받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1911년 봄, 우리는 안창호 선생의 도움을 받아 목릉의 팔면통으로 옮겨갔다. 이곳 역시 나라잃은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아직 사람손이 모자라 일구지 않은 넓은 땅이있는 곳이었다. 정근이는 작은 잡화상을 열었다.
가게에는 성냥과 비누, 바늘, 실, 소금, 말린 생선이 시원치 않게 놓였다. 큰 장사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물건을 팔아도 쌀 한 봉지를 사기 어려운 날이 많았다. 그래도 가게는 식구들의 끼니를 이어주었다. 나는 가게 한구석에서 찾아오는 조선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나라가 이미 망했는데 독립이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체념했고, 어떤 사람은 일본의 힘이 너무 커 상대하기 힘들거라고 충고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독립이 무슨 소용이냐고 나의 의견을 묻는 이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되물었다.
“먹고사는 일이 어렵다고 나라 없는 설움까지 잊을 수 있겠소?”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씨앗은 겨울을 난다고 죽은 것이 아니오. 언 땅 아래에서 봄을 기다리는 것이지.”
나는 가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중근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토 한 사람을 미워하여 총을 쏜 것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서로 침략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랐다고 중근이가 항상 주장하던 동양평화론을 말했다.
그렇게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은 독립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돌아갔다.
1914년에는 다시 니콜리스크로 옮겼다.
그곳에서도 식구들은 잡화상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훗날 정근이와 공근이는 동포들의 도움과 안창호 선생이 보내준 자금을 바탕으로 벼농사에 도전했다.
사람들은 추운 연해주에서는 벼가 자랄 수 없다고 말했다.
정근이는 흙을 손에 쥐고 대답했다.
“사람도 고향을 떠나 뿌리를 내리는데, 벼라고 심지못할 것이 무엇이오.”
첫해의 모는 냉해를 입었고, 물길을 잘못 잡은 논은 말라붙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땅을 고르고 둑을 쌓아 다시 물을 댔다.
마침내 니콜리스크의 들판에 벼이삭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황금빛 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타국의 찬 바람 속에서도 벼는 제 몸 안에 조선의 가을을 품고 있었다. 그 벼는 식구를 먹이고, 독립운동가를 돕고, 나라를 되찾을 날까지 버티게 해줄 생명의 군량이었다. 나는 연해주 각지의 조선인 마을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는 바이칼호 가까운 곳까지 길을 나섰다.
마차를 타고 깊은 숲을 건넜고, 때로는 눈보라 속에서 밤을 보냈다. 산적과 맹수가 나타난다는 말을 들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아드님을 잃고도 두렵지 않으십니까?”
“아들을 잃은 어미에게 무엇이 더 두렵겠소.”
중근이는 뤼순의 감옥에서 죽었지만, 그의 말은 연해주의 논과 장터와 조선인 마을을 돌아다녔다. 나는 가는 곳마다 그 말을 심었다.
일본은 중근이의 무덤을 감추었지만, 무덤을 찾지 못한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을 씨앗처럼 품고 국경을 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씨앗이 타국의 언 땅에서도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다는 사실을..
흰옷을 짓는 밤
아들의 죽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으로 넓어지다
시선을 안중근 한 사람의 죽음에서 조마리아와 남은 가족들의 삶으로 확장했다. 아들이 순국한 뒤에도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조마리아는 연해주의 낯선 땅에서 생계를 꾸리면서도 독립운동의 뜻을 이어가야 했다.
조마리아의 위대함은 슬픔이 없었다는 데 있지 않다. 슬픔을 품은 채 다시 밥을 짓고, 사람을 돌보고, 나라의 미래를 생각했다는 데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은 가난한 사람의 사정까지 헤아려 주지 않았다. 바람은 판잣집의 틈을 찾아 칼날이 되어 들어왔고, 사람들은 입김으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는 낮에는 독립군 가족들의 옷을 기웠고, 밤에는 자금을 품고 다닐 작은 주머니를 만들었다.
돈은 늘 부족했다. 모아 둔 돈이라고 해 보아야 며칠 치 양식값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쌀 한 줌을 덜어 팔고, 삯바느질로 받은 동전 몇 닢을 보태 독립운동가들에게 건넸다. 어떤 날은 돈보다 미안함이 더 컸다.
“이것밖에 없소.”
내가 손바닥 위에 동전을 내 놓으면 젊은이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마리아 여사님, 이것 밖에가 아니라 이것까지 주신 것이지요.”
그 말은 위로였지만 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나라를 되찾는 일에 어찌 ‘이것까지’라는 말이 있어야 하는가. 있는 사람은 남는 것을 내놓고, 없는 사람은 목숨에서 한 조각을 떼어 내놓는 것이 그 시절의 독립운동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로 소식을 전하러 갈 때는 말보다 침묵이 필요했다. 일본의 밀정들이 장터와 역 주변을 서성였고, 낯선 사람의 눈길 하나도 함부로 지나칠 수 없었다. 나는 연락문을 치맛단 안쪽에 꿰매고 태연한 얼굴로 길을 나섰다. 겉으로는 늙은 여인이었지만, 치맛단 속에는 국경을 넘는 조선의 숨결이 숨어 있었다.
바이칼호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얼어붙은 호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과 땅이 모두 흰빛이라 어느 쪽이 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동행하던 청년이 발을 멈추고 물었다.
“어머니, 조선은 어느 쪽에 있습니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네가 걸어온 쪽에도 있고, 앞으로 걸어갈 쪽에도 있다.”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눈 위에 찍힌 그의 발자국이 내 발자국과 나란히 이어졌다. 나라를 잃은 사람에게 조국은 지도에만 있는 땅이 아니었다. 함께 걷는 사람의 발자국 속에도 있었고, 쓰러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손에도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허름한 숙소에 몸을 누였다. 그러나 나는 잠들지 못했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흰 무명옷 한 벌을 꺼냈다. 독립군 청년에게 입혀 보낼 옷이었다. 옷감은 얇았고 손가락은 추위에 굳어 바늘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바늘이 몇 번이나 손끝을 찔렀다. 붉은 피 한 방울이 흰 천 위에 떨어지려는 순간, 나는 얼른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흰옷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이미 나라의 옷에는 너무 많은 피가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늘을 다시 들었다. 한 땀은 떠나간 아들을 위해, 한 땀은 이름 없이 죽은 젊은이들을 위해, 또 한 땀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조선의 아이들을 위해 놓았다. 바느질은 느렸지만 마음은 멈추지 않았다.
날이 밝을 무렵, 마침내 흰옷 한 벌이 완성되었다. 나는 옷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래 바라보았다. 그것은 평범한 옷이 아니었다. 돌아오지 못할 사람에게 입히는 갑옷이었고, 겨울을 견디게 하는 어머니의 살갗이었다.
나는 옷 안쪽에 작은 주머니를 하나 더 달았다. 그 속에 독립자금 몇 닢과 짧은 글을 넣었다.
‘살아서 돌아오너라. 그러나 네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네 뜻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밖에서는 새벽바람이 문을 흔들었다. 나는 문고리를 붙잡고 한동안 서 있었다. 문밖에는 끝없는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제 두렵지 않았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누군가는 봄에 입을 옷을 지어야 했다.
그 일이 내 몫이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봄
수의의 완성이 아니라 정신의 시작
나는 아들의 죽음을 장엄하게 꾸미기보다, 흰옷을 접는 어머니의 손을 조용히 보여 주고자 했다. 그 손에는 체념과 결의가 동시에 들어 있다.
흰옷은 아들의 생을 마감하는 수의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새로운 정신을 낳는 씨앗이 된다. 조마리아가 마지막 매듭을 짓는 순간, 안중근의 육신을 위한 옷은 완성되지만 그의 정신은 후대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독립은 총을 든 사람만이 이룬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쓰러진 뒤에도 밥을 짓고, 옷을 꿰매며, 뜻을 이어 간 사람들의 손이 함께 이루었다. 조마리아의 바늘은 작고 가늘었지만, 그 바늘이 꿰맨 것은 한 벌의 수의만이 아니라 찢어진 시대와 민족의 마음이었다.
세월이 흘러 내 머리 위에도 바이칼호의 눈처럼 흰빛이 내려앉았다. 수많은 사람이 떠났고, 그 가운데 돌아온 사람보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아들의 얼굴도 세월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졌지만, 그가 남긴 뜻만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사람들은 더러 내게 물었다.
“아들을 잃고도 어찌 견디셨습니까?”
나는 그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자식을 잃고 견딘다는 말은 옳지 않다. 견디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에 매일 다시 앉는 것이다. 울음을 삼킨 자리에서 밥을 짓고, 편지를 쓰고, 옷을 꿰매며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다.
나는 아들을 나라에 바쳤다고 말했지만, 실은 아들을 버린 적이 없었다. 중근이는 감옥에서도 내 아들이었고, 형장의 이슬이 된 뒤에도 내 아들이었다. 다만 나는 한 사람의 어머니로만 울 수 없었다. 울음소리가 너무 커지면 뒤에 선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흔들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바느질하듯 속으로 꿰맸다. 한쪽에는 어머니의 슬픔을 놓고, 다른 쪽에는 나라의 내일을 놓았다. 두 조각이 쉽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늘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멈추면 아들의 죽음이 한 집안의 비극으로만 남을 것 같았다.
해방이라는 말은 훗날 사람들의 입에서 봄꽃처럼 피어난다. 그러나 그 봄은 저절로 온 것이 아니었다. 이름 없는 이들이 얼어붙은 길 위에 남긴 발자국, 굶주린 사람들이 내놓은 동전 몇 닢, 감옥에서 쓰인 편지, 어머니들이 밤새 지은 흰옷이 모여 겨우 밀어 올린 계절이었다.
나는 그 봄을 끝내 온전히 보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씨앗은 자신이 피울 꽃을 보지 못한다. 다만 어두운 땅속에서 썩어 다음 생명의 길을 열 뿐이다. 나와 내 아들, 그리고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제 내 손에는 바늘이 없다. 그러나 내가 놓았던 바느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세대와 세대를 잇고, 자유의 소중함을 자식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의 손에서 그 바느질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음속에서 아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중근아, 네 몸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네 뜻은 돌아왔다. 네가 꿈꾸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 나라를 지어 가고 있구나.’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보았던 눈도, 바이칼호를 덮었던 눈도, 고향의 지붕 위에 쌓이던 눈도 모두 같은 빛이었다. 나는 문득 오래전 밤에 지었던 흰옷을 떠올렸다.
그 옷을 입고 떠난 청년이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누군가는 그 옷을 입고 겨울을 건넜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또 다른 사람이 걸었을 것이다.
독립은 한 영웅이 홀로 세운 깃발이 아니었다.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길을 떠난 사람들과, 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말없이 옷깃을 여며 준 사람들의 공동 작품이었다.
나는 그 가운데 이름 작은 어머니로 남고 싶다.
아들의 죽음을 자랑하지 않고,
내 슬픔을 훈장으로 삼지 않으련다.,
다만 겨울 속에서 봄에 입을 흰옷 한 벌을 지었던 사람으로.
등잔불은 꺼졌지만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나는 완성된 옷을 두 손으로 들어 새벽빛에 펼쳐 보았다. 흰 천 위에는 피도,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얼룩들이 모여
마침내 한 나라의 새벽을 밝히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