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 4 - 4 - 수요일 날씨 : 쎈바람
그제 가고 오늘 가고 자꾸자꾸 갑니다.
난생 처음 갔을 때 익숙하게 다가왔던 남사예담촌
들락거릴수록 점점 더 새롭게 다가오는 남사예담촌
남사리로 가기에 앞서 남명조식선생 기념관을 방문합니다.
산천재의 남명매를 올려다 보다가
양산살이 부러졌습니다.
"바람아 쫌!"
남명매를 보았으니 정당매, 원정매를 보러갑니다.
아, 시간이 빠듯하니 정당매는 막쌀하고 원정매가 있는 남사예담촌으로 갑니다.
참, 혹시 아세요? 남사예담촌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입니다.
"백조야 쫌! 60이 뭐꼬...
한량이 다그칩니다.
그 때 트럭이 백조를 추월합니다.
"저 앞, 트럭을 따라가라... 그래 인쟈 됐다 시속 100은 돼야지"
좀 달린다 싶더니 또 60입니다.
"트럭을 따라가라니까!"
한량은 성마른 소리를 냅니다.
"트럭 아까 옆길로 빠졌는데...."
"잉? 그라믄 저 승용차를 따라가라"
승용차도 사라지고 백조는 또 60입니다.
"쪼옴!"
이제 백조는 한량이 '쫌'이라고 외치면 자동으로 악셀을 씨게 밟습니다.
남사예담촌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을의 안내도를 봅니다. (이틀 전에 왔을 때 차타고 지나쳐서 이동하느라 못 봄)
650년 매화나무라...... 원정 하즙이 심은 원정매가 650살이란 말이군요.
작년에 650이었단 말인지, 재작년에 650이었단 말인지, 십년 전에 650이었단 말인지 알 수가 없네요.
원정공의 손자가 심었다는 감나무가 600살!
그런데 감나무앞 안내판에는 700살이라고 뻥을 쳐놨던데. 그냥 모조리 싹다 <육백년이 넘은 것들>이라고 합시다.
원정매가 있는 곳으로 가겠으니 날 따라와요
주차장 옆 안내도가 잘 그려져 있고
안내도 옆, 이정표가 아주 잘 세워져 있었네요.
원정매를 보려면 <사양정사>로 가면 됩니다.
진주방면에서 자동차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요 담배점빵 골목으로 쏙 들어가면 됩니다.
기웃거리지 말고 쪽 바로 갑시다.
<'육백년이 넘은 것들' 이라고 하기로 했던 감나무>
원정공의 손자로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문정공 하연(1376∼1453)이 7세 때 심었다고 합니다.
백조가 어린 감나무를 흉내냅니다.
하씨고택 안,
원정매 한송이에 꿀벌이 달라붙어 꿀을 채취하고 있습니다.
혼자 언제 저 많은 꽃 속의 꿀을 다 딸까요 꿀벌, 일복이 터졌습니다.
원정매 꽃잎은 홑겹이 아니군요.
"이 나무가 일본종이라누만"
백조가 어디서 들은 소리를 안까먹고 있다가 들먹입니다.
원정매는 고사하고 (어느 겨울에 동사했다는 설이 있음)
곁가지가 자라올라 꽃을 피웠고
떨어진 씨 또한 싹을 틔워올려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따가 집으로 돌아간 한량이 가군에게
"있제 원정매가 겨울에 얼어죽은 거래" 라고 까바쳤다가
가군으로부터 한소리 들었습니다. "늙어죽은 거지 동사는 무신."
아, 한량은 가군앞에만 서면 무뇌아가 되고 마는 듯한 묘오한 감정에 휩싸이고 맙니다.
오륙백년이 넘었으니 오만가지 말들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지사겠지요.
원정매가 하씨고택에 있으니 <하씨매>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하씨댁의 감나무와 마주보고 있는 사양정사로 가 봅시다.
"이리오너라~"
잠깐! 올 때마다 홍살을 댄 솟을대문이 화알짝 열렸더라고요.
가암지르지 말고 조용히 들어가요.
흐음~ 자주 들러다보니 이젠 내 집같아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자로 된 제목의 사진이 있습니다.
저 한자 내용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1935년대 가족사진이라고 합니다.
액자에 넣어져 벽에 걸려 있습니다.
"흐음~ 아녀자들은 다 후두까냈고만..."
계재의 초상화와 계재의 생을 다룬 강동욱 기자의 글 역시 액자에 넣어져 벽에 걸려있습니다.
강동욱 기자의 글을 한 자 한 자 키보드로 두드려 보았습니다.
<계재 정제용의 초상화- 왕실화가 작. 정씨문중후손이 경상대 도서관에 기증 >
[강동욱 기자와 함께하는 경남문화유산 답사기]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에 사양정사가 있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냇물이 사수인데 사수 남쪽에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정사의 주인은 계재 정제용으로 그는 생전에 삼장면 석남촌에 '존도재' 라는 집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는데 손자 정종화가 이 곳으로 옮겨 확장을 하면서 '사양정사'로 이름붙인 것이다.
계재 정제용은 영일 정씨로 고려충신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다.
포은의 손자인 설곡 보가 세조 때 한명회의 미움을 사서 사형을 당하려다
충신의 후예이기때문에 사형을 면하고 단성으로 내려와 살았다.
이후 합천으로 옮겼다가 학포 정훤이 진주로 이주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계재의 선조 학포는 1588년 합천에서 출생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광해군의 폭정에 휩쓸리기 싫어 합천에서 대평으로 옮겨와 이곳에서 정자를 지어 고산정이라 하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인조 때 조정에서 조봉대부 영산현감으로 천서하였으나 고사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낸 선비이다.
계재는 1865년 진주 덕산동 석남리에서 가헌 석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헌공은 효행으로 동몽교관에 증직되기도 했다.)
계재가 태어난 석남리는 현재 산청군 삼장면 석남리로 대원사 근처 마을이다.
어릴 때부터 일반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진귀한 과일을 얻으면
반드시 부모에게 드리고 나머지는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기가 먹는 법이 없었다.
7세에 모친을 여의고 부친의 엄격한 가르침을 잘 따랐으며 부친이 병이 들었을 때는 2년 동안 시중하며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상을 당했을 때는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아침 저녁으로 단정히 앉아 중용 맹자 등을 독서하는 것으로 일상을 삼았으며
집 근처 경치좋은 곳에다 존도재를 지어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 존도재가 지금 남사의 사양정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존도'는 중용의 '존덕성이도문학'이란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말미암는 것" 이란 뜻이다.
군자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한 것이다.
광대함을 지극히 하고 정미함을 다하며 고명함을 다하고
중용을 따르며 옛 것을 잊지않고 새로운 것을 알며
후함을 돈독히 하고 예를 높여야 군자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계재의 학문의 지향점이 곧 군자 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재는 일찍이 정자 아래에 매화 한그루를 심고 스스로 '매암거사'라고 불렀다.
후에 꿈속에서 퇴계와 회재선생을 모시고 강론을 열심히 하고 깨어보니
'활발진원'이란 네글자가 생생히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호를 퇴계의 '계'자와 회재의 '재'자를 따서 '계재'라고 지어
두 선생을 받들고 따르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계재는 후산 허유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후산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면우 곽종석을 찾아가 못다한 학문에 정진했다.
교유한 선비로는 계남 최숙민, 물천 김진호, 노백헌 정재규, 복암 조원순 등이었는데
계남과 복암에게서 학문에 관한 질정을 많이 했다.
1898년에 후산 허유를 따라 청곡사에 수개월동안 머물면서 ' 남명선생 문집 중간'의 일을 도왔다.
이때 강우지역의 많은 선비들을 만나 학문에 관한 질정을 했다.
또 남사에서는 이 지역 선비들이 '향음주례'를 행할 때 면우 곽종석을 배알했다.
1900년 여름에는 애산 정재규, 계남 최숙민, 우산 한유, 송산 권재규 등과
대원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근사록'을 읽었다.
계재는 조상을 섬기는 정성이 남달랐다.
우선 포은 선조의 연보를 알기 쉽게 별책으로 묶는데 다소 소략한 부분이 있었다.
1898년 계재는 부친의 명에 따라 연보를 증보해 별책으로 묶은 것이다.
학포 선조 연보 역시 계재가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문집이 완성되지 못한 까닭에 책으로 나오지 못해 안타깝게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회봉 등 선비들과 '주자여류'를 중간하면서 1년 동안 시종일관 이 일에 참여했다.
1901년에는 백곡의 구산촌으로 옮겨 구산서당을 짓고 기거를 하면서
약헌 하용제, 백촌 하봉수, 우산 한유, 회봉 하겸진등 벗들을 모아 시사를 결성하기도 했다.
2년 후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면우 선생이 일경에게 체포되자 서울로 올라가 부당성을 널리 알렸으며
이어 대계 이승희가 감옥에 갇히자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천하의 의리가 다 없어졌구나"라고 했다.
1906년 가을 학포선조의 고산정이 화재를 만났다.
계재는 여러 집안 사람들과 의논하여 이듬해 봄 중건을 하고 기문과 상량문을 지어
학포의 학덕을 기렸다. 뿐만 아니라 산천재 세심정 등 남명선생의 유적지를 모두 중수를 하여
낙성을 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니 조상과 지역의 선현들을 숭모하는 마음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재는 명리를 구하지 않았다.
학무에 정진하면서도 새로운 학설을 말하기 보다 옛 선현들의 남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자 했다.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주자를 배우고자 하면 퇴계를 따라아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병석에 눕자, 자제들을 불러놓고 "몸을 단정히 하는 것이 학문하는 뜻"이라 가르치고,
이어 "머리를 동쪽으로 하라"고 하면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43세였다.
기자가 사양정사를 방문했을 때 존도재, 구산서실의 현판이 그대로 걸려있었다.
계재의 학문정진의 길을 보는 것같았다. 덕산에서 백촌으로 옮겨와 당파를 초월해
지역 선비들과 학문을 논했던 계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끝-
사대부가의 깊은 규중 규수가 되어 봅니다.
"얘 백조야 하도령이 말하길 오늘 밤 초생달이 나뭇가지에 걸릴 때 월담을 할 거라는구나. 청소는 잘 했겠지?"
"예에 아씨 하다마다예~ 아주 파리가 미끄러져서 낙상을 할만치 맨질맨질 쓸고 닦았습니더."
할일도 얼추 끝나씬께 어디 시일 기이~ 나가볼까..... 백조는 궁리합니다.
"그래? 어디 울매나 깨끔하이 닦았는고 보자 음~
아주 좋아 이만하면 봉놋방을 차려도 좋겠구나."
한량규수 돈독이 오릅니다.
"아니 백조야 이것이 무엇이냐.
쓰고 난 물건은 고 때 고 때마다 제자리에 딱딱 갖다두라고 몇 번 을 얘기해!"
망측하게도 한량은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채에서 지엄한 노마님 놀이를 합니다.
"에이 참! 한량아씨도... 잔소리는, 이따가 또 쓸건데 뭣하러 제자리 제자리 타령인고
에구 마실이나 어여 가보자. 안채 선명당에 정도령이 왔을래나....."
"저어... 정도련님 히히 저 왔어예 백조가예....."
<백여년 수령의 정씨매>
"아, 도련님 어쩜 내한테 눈길 한 번 안주고 천리향 앞에서 정씨매만 끄적기리고... 흑흑~"
저 도령은 이곳 마을 주민이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이곳으로 놀러왔다가 이곳이 너무 좋아 그만 보따리를 쌋다는군요.
"도련님 매화만 기리쌋지 말고 제 얼굴도 좀....."
<정씨매>
정도령이 거들떠도 아니보자 속이 썩을대로 썩은 백조는 이번에는 삐죽삐쭉 엉덩이를 흔들며
최씨고가로 마실을 갑니다.
그렇게나 찬란한 등불같이 고왔던 목련이 이틀만에... 점점 소등됩니다.
<230년 수령의 최씨매와 45년 연령의 한량>
최씨매를 감상하고 안채쪽을 흘깃 보니
이틀 전에 꼭 닫혀있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빨리 빨리 가보실까요 날이면 날마다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올 때마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랍니다."
안채를 살펴보기 전에 뒷간가서 용변부터 보고요
최씨고가 안채입니다.
이봐요~ 이봐~
안채에는 없는게 없습니다. 우물, 텃밭, 닭장, 소우리, 아랫것들의 죄값을 주던 형틀에....
디딜방아, 맷돌, 돌확..........
있는 것 없는 것 죄다 높은 담 안에 들여 놨으니
이건 뭐 밭에 고추 호박 따러간단 핑계로 대문 밖을 나설 수가 있나......
정도령 이도령집을 기웃거릴 수가 있나....
방앗간 간다고, 뽕따러 간다고 건너마을엘 갈 수가 있나 뒷산엘 갈 수가 있나 미칩니다 미쳐요.
우물이나 동네가운데 있으면 물길러 간다 하고 나선 길목에서 님하고 마주치기나 해보제.....
최씨견입니다.
"니 팔자가 상팔자니라"
한량은 요즘 날마다 날마다 꽃구경에 팔자가 늘어졌습니다.
한량팔짜 개팔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60입니다.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