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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41. [역경의 열매] 정인찬 <1-20> 어려서 부모님 여의고 하나님 아버지 위로받아
잃은 것보다 더 큰 것 채워주셔… 역경 이기고 목회·교수 생활에 큰 힘
정인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총장이 26일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학교 총장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웨신대 제공
내가 태어난 곳은 ‘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경남 통영이다. 통영은 경치가 아름다워 한국에서 살아도 외국에서 사는 기분이 들었다. 고기잡이가 잘돼 인심이 좋았고 통영의 나전칠기 장롱과 김밥은 전국 제일이다. 또한 유명한 문학가와 시인이 많이 나온 고장이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월남한 가족들이 자기가 태어난 북한 고향땅을 그리워하는 것같이 말이다.
나는 1942년생이다. 아버지 정상용과 어머니 김복덕의 장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공부하게 하셨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어머니와 결혼했고 유영학원에서 교사로 일했다.
부모님 덕에 다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런 다복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지신 것이다. 내 나이 5세 때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머니마저도 그 뒤를 따라가셨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 고모 사촌 등 대가족 틈에 끼어 살게 됐다.
이후 수년간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아이들이 가장 부러웠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니 외로웠던 것 같다. 그런데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이다. 교회학교에서 매주 예배를 드렸다. 여름성경학교 때 재밌게 놀고 찬송을 부르며 성경말씀을 배운 기억이 난다. 특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읽는 성경 구절이 참 좋았다. 그런 설교와 찬양이 나올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울다가 예배를 마친 기억이 난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육신의 아버지는 내게 오지 못한다. 그래 슬퍼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참 아버지로 모셔야지.’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아니 기뻤다. 지금 돌이켜보면 더 좋은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할머니는 나를 보고 “네 아버지는 집안에 큰일이 생기면 그 일을 해결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인찬이 너를 꼭 법대에 보내 검사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검사를 지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영혼을 책임지는 목사가 됐다.
나는 부모를 잃었으니까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분의 더 큰 뜻과 섭리를 깨닫고 나니 잃은 것보다 더 큰 것으로 채워주셨음을 새삼 느끼고 살고 있다. 역경을 이기는 도약이 된 것이다. 목회자나 교수생활을 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이것저것 채워주시는 하나님. 잃은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성숙이 아닌가 싶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 [역경의 열매] 정인찬 <1> 어려서 부모님 여의고 하나님 아버지
* [역경의 열매] 정인찬 <2>'울지 않는 아이' 사랑으로 울린 하나님
* [역경의 열매] 정인찬 <3> 빼앗긴 유산… 중·고등학교 때 등록금 못 내 벌서
* [역경의 열매] 정인찬 <4> 사업하는 신학교 동기 고액 가욋일 제안에 솔깃
* [역경의 열매] 정인찬 <5> 신학대 강의 듣고 흔들리던 믿음… 주님 만나 회복
* [역경의 열매] 정인찬 <6> 체중 미달에도 기적같이 군종목사 합격
* [역경의 열매] 정인찬 <7> 군목 마치고 흑암 세력이 지배하는 작은교회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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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정인찬 <20·끝> '역경'을 '꽃길'로 걷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장애인과 함께하는 설교] 임금의 잔치에 초청된 자 2018-10-05. 마22:1-14
약력=△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석사,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 박사 △국제개혁신학대학원대 총장, 미주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세계선교협의회(KWMC) 대표회장, 미국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 휴스턴한인교회 담임, 세계성령중앙협의회 대표회장, 백석대 목회대학원장, 백석신학대 학장 역임 △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총장, 국제독립교회연합회(WAIC) 연합회장, 새창조교회 담임
***[역경의 열매] 정인찬 <2>‘울지 않는 아이’ 사랑으로 울린 하나님
할아버지 댁에서 살았지만 늘 외톨이, 교회 권사님 돌봄과 주님 말씀에 치유
정인찬 총장(오른쪽 두 번째)이 지난해 입학한 신학대학원 학생들과 함께한 모습.
다섯 살 어린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할아버지 집에서 살았지만 늘 외톨이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큰어머니 때문이다. 큰어머니는 자신의 자녀는 살점이라도 떼어줄 정도로 잘 돌봤다. 그러나 친자식이 아닌 나는 온갖 구박과 냉대를 받았다. 큰어머니의 차별은 어린 내게 정말 큰 고통이었다.
큰어머니는 조금만 잘못을 해도 매를 들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울지 않았다. 벌을 주고 아프게 때려도 울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사망한 뒤 흘린 많은 눈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더 흘릴 눈물이 없어서였을까. 여하튼 신기하게도 내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매를 맞을 때마다 사촌형제들이 빨리 도망가라고 했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그래서 ‘울지 않는 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지금 생각하면 울지 않는 아이라기보다 울음을 참았던 것이다. 도망가지 않고 울지도 않으니 벌은 더 세게 받았고 매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참을 만큼 참다가 도망가다시피 간 곳이 바로 동네 교회다. 그곳엔 박 권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성경에서 강도만난 사람을 돌봐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내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셨다.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용돈도 주시고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그분도 홀로 사셨다. 하루는 내게 큰 인물이 되라고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정말 좋은 분이었다. 교회에 가면 박 권사님을 만나 돌아가신 부모 생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목사님 설교 중에 “육신의 부모가 너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너를 버리지 않으시며 성령님은 어머니 같이 돌봐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은 부모를 잃고 슬퍼서 우는 눈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박 권사님의 돌봄의 사랑 때문에 운 것이다.
‘울지 않는 아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나는 울고 있었다. 벌을 서고 매를 맞을 때 울지 않겠다는 얼음장 같은 굳은 결심은 하나님 사랑 앞에, 박 권사님의 관심과 돌봄 앞에 녹고 말았다.
차별 대우와 모진 체벌 등으로 인한 나의 상한 마음은 치유됐다. 역경을 이기는 힘은 내 의지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이 말씀은 목회를 하면서 늘 묵상하는 말씀이다. 만일 내가 부모를 잃지 않았다면 어떻게 고독하고 외로운 고아와 과부로 살아가는 교인의 아픔을 알았을까. 특히 교회에서 ‘돌봄 목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홀로된 사람을 돌보는데 양약이 됐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그랬다. 내게 역경은 필요한 아픔이었다. 부모를 잃은 일, 가족 간에 왕따를 당한 일,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 어린 내게 견디기 어려운 역경이었지만 목회하는 데는 내공이었고 역경의 열매였다. 삶을 단련해 정금을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이기지 못할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연단시켜 주의 증인으로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레슨으로 믿고 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3> 빼앗긴 유산… 중·고등학교 때 등록금 못 내 벌서
큰아버지가 사용… 교복·체육복도 못 사, 원망하는 대신에 이 악물고 공부
정인찬 총장이 지난해 웨신대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면서 내게 살던 집과 상당한 재물을 남겨 놓으셨다. 하지만 나는 당시 물려받은 재산을 관리하기엔 너무 어렸다. 큰아버지는 부모와 내가 살던 집을 팔아 사업자금으로 사용했다. 패물과 돈까지 모두 그렇게 썼다.
당시 할머니가 큰아버지에게 “앞으로 우리 인찬이가 공부를 해야 하고 결혼할 자금도 필요하니 꼭 유산을 돌려주라”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할머니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큰아버지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어느 날 잠결에 큰아버지가 하는 대화를 엿들었다. 큰아버지는 자식들과 맛있게 음식을 먹으며 “너희는 공부나 잘해. 평생 뒷바라지해줄게”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문득 부모님과 예수님 모습이 떠올랐다. 주님의 세마포를 찢어 나누고 주님을 죽이려 했던 그들이 연상됐다.
큰아버지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내게 학교 등록금은 물론 책이나 교복 한번 사준 일이 없다. 초등학교는 등록금이 없으니 그냥 다녔고 중·고등학교 때는 등록금을 못내 벌을 서야했다. 교무실 앞에서 손들고 있기 일쑤였다. 몇몇 선생님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셨는지 출석부로 머리를 때리며 한마디씩하고 지나갔다.
“예끼 이놈.” “너 뭐 잘못했지.”
억울했다.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떠올랐다. “예수님의 고통이 지금 내 고통보다 더 크셨을거야.”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다행히 성적은 전교에서 최상위권에 들었고 장학금으로 등록금을 면제받았다. 교복 사 입을 돈이 없었다. 체육복도 없어 체육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운동하지 못하고 벌을 섰다. 선배가 쓰던 헌책을 물려받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문교부장관배 문예대회가 열렸다. 시와 수필, 소설 부문에서 당선되면 상패와 상금을 주는 행사였다. 나는 ‘기원’이라는 시와 ‘울지 않는 아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문예부문 대상을 받았다. 받은 상금으로 교복을 맞추고 책과 체육복을 샀다.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여러 다른 방법으로 내 필요를 채워주고 계셨다.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야했다. 고모가 “큰아버지에게 입학금과 등록금을 달라고 해라. 안주면 법적 투쟁을 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나는 돈 때문에 큰아버지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런 일들을 초월하고 있었다.
가난은 실로 고통이었다. 그러나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는 성경말씀이 간증이 됐다. “우리 주 예수 외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내가 배설물로 여기노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됐다.
돌이켜 생각하면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사는 데 불편할 뿐이다. 매순간 재물이 부하고 죄 짓는 것보다 가난이 낫다는 것을 깨달으며 살고 있다. 가난할 때 비굴하지 않았고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실천했더니 하나님께서 내 삶을 온전히 책임지셨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4> 사업하는 신학교 동기 고액 가욋일 제안에 솔깃
“사명 배반하고 딴 길로 가느냐” 새벽 기도 중 꾸짖는 음성 들려
정인찬 총장(왼쪽)이 지난해 경기도 용인 웨신대 안에 있는 새창조교회에서 교인들과 함께 축복기도를 드리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에 입학했다. 환란을 지나 천국에 입성하는 기분으로 신학대 교정을 밟았다. 그러나 순탄한 길만 열린 것은 아니었다.
1학년을 마칠 무렵, 조금 친해진 동기생이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 동기생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사명이 있거나 기도응답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부모가 교회 장로와 권사인데, 우리 가정에 목사 한 사람을 배출할 사명을 받았다며 자기를 신학교에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적성이 맞지 않아 다른 대학에 가서 경영학을 전공해 큰 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있고 몇 달이 지났을까. 그는 자기가 서울 무교동에 회사를 차렸는데, 앞으로 국내 제일의 해외근로자 경영센터가 될 것이라고 했다. 3일 뒤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에 직원이 많았다. 비서가 나를 사장실로 안내했다. 그는 회전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비서가 내가 왔다고 보고하니 그제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독일이나 미국 등에 광부나 간호보조사의 해외취업 알선, 해외 이민 수속 등을 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 고졸 출신이나 학원에서 간호학을 공부한 여성을 간호보조사로 해외에 내보내는 일이 성행할 때였다.
국내 취업이 어렵다거나, 해외에 나가 살고 싶고, 돈 벌고 싶은 사람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이런 것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내게 해외에서 외국사람이 오면 통역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또 영어로 된 문서를 번역해 달라고 했다. 이 일을 해주면 신학대 동기이고 하니까 일반회사에서 받는 것보다 3배 이상의 월급과 차량 등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문득 돈을 먼저 벌어 교회개척 자금을 마련한 뒤 안정된 가운데 신학공부를 계속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걱정이 되기도 했다. 새벽 미명에 교회 기도실을 찾았다. 그날따라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였다. 2시간쯤 기도했을까. 갑자기 “사명을 배반하고 딴 길로 가느냐”라는 음성이 들렸다. 깜짝 놀랐다. 회개의 눈물이 한없이 나오고 이내 통곡을 했다. 그리고 기숙사에 돌아와 그 친구에게 전화했다. 그랬더니 친구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평생 후회할 것”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수년 뒤 신학교 졸업반 즈음에 그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사기혐의 등으로 직원들과 함께 구속됐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물질로 성공할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 했지만 난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때 사명을 버리고 물질의 미혹에 빠졌더라면 평생 후회가 아니라 영원히 후회했을지 모른다. 물질 때문에 사명을 저버리지 않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갈 6:7∼10) 매순간 시험을 이기는 관문을 통과해야 그리스도를 위한 생애가 시작됨을 깨달았다.
그 친구는 신학대 동기들이 목회자가 돼 거의 원로목사로 추대받을 즈음에 목사안수를 받고 못다 한 하나님의 사명 완수를 위해 달려가고 있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5> 신학대 강의 듣고 흔들리던 믿음… 주님 만나 회복
‘그동안 신앙관 바꾸라’ 강의에 충격… 하지만 성령 체험하고 신앙 공고해져
정인찬 웨신대 총장이 지난 5월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축도하고 있다.
신학대에서 공부하면 믿음이 돈독해지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도 더 확실히 믿어질 것이라는 기대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강의 내용은 기대와 달랐다.
J교수님이 강의 첫날부터 교실에서 하신 말씀 때문이다. 교수님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믿던 믿음을 다 버려야 한다. 그래야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성경관도 변화돼야 올바르게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교수님의 강의가 더 귀에 쏙 들어왔다.
“믿으면 다 돼요” “기도하면 다 응답받는다”고 한다든지, “방언을 해야 영적인 사람”이라는 식의 고정관념은 버려야 한다고 했다. 이는 신비주의자들이 하는 것이요 비성경적인 신앙이라고 했다. 그리고 성경도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졌기에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다는 식의 성경관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나는 꽤나 놀랐다. 해머로 돌을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
‘그동안의 신앙관을 바꾸라니.’ ‘성경은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굳게 믿고 있고 있는데.’
난감했다. 생각이 많아졌다. 몇 시간 멍하니 있을 때도 있었다. 한 학기 내내 그 교수님의 강의를 듣다 보니 믿음도 사명도 성경관도 변하는 것 같았다. 믿음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아니 병들었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한 경험을 했다. 학교 채플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갑자기 불이 붙는 느낌이 들었다. 힐끔 뒤를 돌아봤다. 가시나무가 학교 뒤편에 있는데, 그것이 환하게 불에 타는 듯 보였다.
문득 그곳에 가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강한 힘에 이끌렸다. 불타는 것 같은 나무 옆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뜨겁게 기도하길 몇 시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다. 귀로만 말로만 듣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번 체험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비둘기 같은 평안함이었다. 그동안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겪은 고통을 극복하고 예전의 신앙심이 회복됐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참 하나님으로 믿어졌다. 성경도 전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졌다. 이후 나의 신앙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을 때도 진보적인 학자들의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내 마음과 성경관을 돈독히 할 뿐이었다. 결코 탈선하지 않았다.
신학은 있으나 신앙이 없다는 말이 있다.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비평도 많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 말씀을 인간의 언어나 생각으로 가르치는 가르침은 많은 성도를 타락케 만든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사람은 그 말씀이 마음 안에서 역사한다.(살전 2:13) 변질된 사람의 교훈은 변질된 지도자를 만든다. 하지만 변화된 지도자는 많은 사람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병, 즉 사명자로 만든다.
누가 가장 설교를 잘하는 사람인가. 누가 성경을 가장 잘 가르치는 스승인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하는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만 우리는 변화받을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6> 체중 미달에도 기적같이 군종목사 합격
연대장, 알코올 중독 아들 새사람 만들어주자 세례 받고 전군 신자화 앞장
정인찬 총장이 2015년 10월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에서 열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좌담회’에 참석해 토론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준배 권태진 소강석 목사, 정 총장.
신학대를 나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 입학해 최우수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이화여대를 비롯한 대학들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꿈은 따로 있었다. 믿지 않는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설교와 전도할 곳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침 군대 갈 시기가 됐다. 그때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군종목사가 돼 많은 장병을 전도해야지.’
군목시험에 응시했다. 필기시험은 합격이었다. 문제는 신체검사. 합격조건은 키 162㎝ 이상, 몸무게 50㎏ 이상이었다. 나는 46㎏, 합격선에 4㎏이 모자랐다.
몸무게를 늘려 달라고 기도했다. 드디어 신체검사장에 도착해 가슴을 졸이며 체중계에 올라섰다. 아니나 다를까. 체중계 바늘은 46㎏에서 멈췄다.
‘떨어졌구나.’
순간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다. 판정관인 대위가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높은 사람에게 전화가 온 것 같았다. 대위의 얼굴이 상당히 경직돼 있었다. 대위는 급히 전화기를 내려놓고 저울침을 보더니 “64㎏”이라고 말했다. 46㎏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내가 “저…, 46㎏인데요”라고 말하니 “군대 안 가려고 거짓말하면 안 됩니다”라고 대위는 큰소리로 답했다. 거짓말은 자신이 하면서 나 보고 거짓말을 한다고 한 것이다. 그때 일은 정말 기적이었다. 나는 훈련을 받고 군목으로 임관돼 연대급 교회로 발령받았다.
연대장의 별명은 ‘멧돼지’였다. 무신론자였는데, 한번은 훈련에 조금 늦었더니 “목사는 적이 대검으로 배를 찌르면 칼이 안 들어갑니까”라고 했다. 참으로 멧돼지 같은 모습이요, 성격이 급하고 말 또한 거칠었다.
하루는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연병장 주위를 걷고 있는데 젊은 청년 하나가 연대장 숙소 옆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 청년은 연대장 아들이었다. 대학에 떨어져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가 돼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맡겨놨다는 것이다. 과외선생을 구한다고도 했다. 나는 ‘옳다, 기회다’ 싶어 연대장에게 “혹시 내가 과외선생을 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교수 경력까지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연대장은 “내 아들 사람 만들어주고 대학에 합격시켜주면 무엇이든지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1년간 열심히 가르쳤다.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하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 성령의 역사로 그 아들은 새사람이 됐다. S대에도 합격했다. 연대장은 연신 고마워했다. 그러고는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장병들 신앙교육을 위해 군종사병을 대대별로 정해주시고 제게 시간을 할애해 주십시오.”
그는 즉시 허락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있느냐”고 또 물었다.
“연대장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남아일언중천금이니 약속은 지켜야지요.”
연대장은 세례공부를 시작했다. 6개월 뒤 그는 1200명의 장병과 세례문답을 함께할 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나를 구원할 이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울었다. 연대장은 진급해 전군 신자화 운동에 앞장섰다. 걸음이 걷는 이에게 있지 않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깊이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7> 군목 마치고 흑암 세력이 지배하는 작은교회 부임
선배 부탁에 방치된 교회 맡게 돼, 기도회 부활·교육관 건립… 성령 회복
지난 6월 웨신대 기독교상담심리학과 학술발표회에 참석한 정인찬 총장(앞줄 왼쪽 네 번째).
의무 복무기간인 3년의 군복무, 군목생활을 마치고 목회를 하게 됐다. 선배가 유학을 떠나며 교회에 나를 추천했다. 한번 주일날 와서 설교를 해달라는 선배의 부탁을 받고 간 곳은 경기도 일산과 백석이라는 마을이 있는 조그마한 시골교회였다.
설교가 끝나자 교회 교인들은 “목자 잃은 양이 됐으니 제발 와서 목회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후 선배는 가족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사실은 이민이었다. 설교할 목사가 없어 계속 설교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주일예배와 수요예배, 금요철야 기도회를 인도하다 보니 ‘이곳이 과연 하나님이 지명해 가라고 한 사명지구나’라는 마음이 들었고 결국 그 교회를 담임하게 됐다.
부임 이튿날 오전 4시30분.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 문을 열었다. 순간 머리카락이 삐쭉 섰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발아래를 보니 큰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머리를 치켜들고 혀를 날름거리며 물기 직전이었다. 아뿔싸. 뱀과 눈이 마주치다니….
눈을 감고 싶을 만큼 두려웠다. 저놈을 잡지 않으면 내가 물릴 것 같았다. 아니면 새벽기도회에 오는 교인들이 물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뱀을 잡을 비장의 무기가 필요했다. 곁눈질로 계속 뱀과 눈싸움을 하며 구석에 있는 삽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저 뱀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이었다. 온힘을 다해 삽을 내리쳤다. “쾅.” 다행히 뱀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뱀은 그 자리에서 쭉 늘어졌고 살려고 버둥거렸다.
사탄을 물리치는 심정으로 죽은 뱀을 김밥 자르듯 동강내 뒷밭에 묻었다. 그리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강단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 기도 중에 흑암의 사탄들이 사라지고 밝은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환상을 봤다. 뱀은 사탄을 암시하는 것일까. 부임한 교회는 흑암과 사탄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교회임을 부임 다음 날부터 알게 됐다. 교회가 있는 마을에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뱀신을 섬기는 자까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임한 교회는 한국교회 초기 복음선교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며, 연세대 설립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 미국 선교사가 친히 세운 교회였다. 장로교회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 중 하나였다. 비록 침체되고 허름한 시골교회였지만 말이다.
교인들의 말을 들어보니 전임 목사는 서울에 사택을 두고 주일날에만 와서 설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새벽예배와 수요예배, 금요철야 기도회는 평신도들이 인도하는 실정이었다.
나는 먼저 중단됐던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수요예배, 금요철야 기도회를 부활시켜 교인들과 함께 전도활동에 나섰다. 국내외 선교와 교회학교 학생 교육, 지역주민 구호활동에 전념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교회와 사택을 다시 짓고 교육관을 만들었다. 300명 넘는 교인이 모이는 버젓한 교회로 성장했다.
교인 중에 마을회장 장씨가 생각난다. 장씨는 기도로 병고침을 받은 뒤 회개하고 새사람이 됐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이었다. 이때 쌓은 목회경험은 50년 뒤 원로목사로 추대될 때까지의 바탕이 됐다. 목회는 실력보다 영력과 능력이 필요하고, 교인들은 말씀과 성령의 검을 가져야 이 세상을 믿음으로 이기며 살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친히 깨닫게 해 주셨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8> 교회 건물 균열되자 더 든든한 교회 세워주셔
새로 부임한 서울 교회 주변 건물 신축, 균열 원인 제공한 건물주 넉넉한 보상
정인찬 총장(가운데)이 2016년 5월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제13회 홀리 스피리츠맨 메달리온’상을 받고 있다.
누구나 위기를 당할 때가 있다. 특히 목회를 하면서 위기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많았다. 시골교회를 잘 부흥시킨 후 서울 H교회에 부임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교회 아래쪽에서 건물 신축을 위한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기존 건물을 허물고 땅을 깊이 팠다. 높이 건물을 올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위쪽 우리 교회 곳곳에 균열이 생기고 흔들릴 정도로 지반이 약화된 것이다. 그러자 안 좋은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교회를 버린 것 같다. 돈도 없는데 어떻게 새로 교회를 얻고 지어 나가느냐.”
위기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캄캄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다니엘40일 작정기도, 수산성의 금식기도,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자고 교인들에게 선포했다. 그렇게 합심기도를 한 뒤 3주쯤 흘렀을까. 신축 건물의 주인이 찾아왔다. 그는 정말 죄송하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저는 교회 집사이고 집사람도 권사입니다. 교회 건물을 새로 지을 수 있는 돈과 함께 보상금까지 드리겠습니다.”
기대 이상의 보상을 받게 됐다. 해외선교사를 파송한 뒤 선교비를 못 보내고, 사례비가 없어 교육전도사를 청빙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 옆에 샀던 땅값도 정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그 돈으로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됐다. 이것 대신 저것을 주시는 하나님,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우리 교인들은 모두 보았고 믿게 됐다.
교회 균열이 생겨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더 든든한 교회가 세워지고 보상금도 받게 되자 이젠 다른 소문이 났다. “그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 응답을 받았다.”
교인들도 더욱 기도에 힘쓰게 됐다. 주변 이웃들은 “복 받은 교회”라고 말했다. 새신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좋은 소문이 나야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교회 성장과 부흥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새삼 체험했다.
적잖은 사람들이 위기를 만났을 때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고 실망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그러면 안 된다. 문제를 해결해주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방법보다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함이 옳다.
다윗은 인구조사를 해 자신의 군사력과 권력의 힘을 과시했다. 역대상 21장에 보면 다윗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통해 “내가 이 땅에 3년 기근을 내릴까 3개월 동안 적에게 쫓겨 다닐까 아니면 3일 동안 온 나라에 질병이 임하게 할까 너는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다윗은 “내가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답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때 그 사람의 믿음의 온도를 알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이 벽을 향해 기도했을 때 죽을병에서 15년을 연장해 주신 것같이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신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9> 美서 세운 이민교회 건물 “그냥 주어라” 음성
성도 반대에도 멕시코 교인들에 인도, 더 큰 복 주셔 한인교회 최대 성전 봉헌
정인찬 총장(성가대 아래 강단)이 1995년 6월 미국 휴스턴한인교회에서 새성전 헌당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미국 휴스턴에서 이민목회를 시작했다. 교인이 계속 늘어 예배드릴 장소가 협소했다. 교회 건물을 팔아 새 부지를 구입해 교회를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교회 건물을 복덕방에 내놨더니 며칠 뒤 건물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부르는 값보다 더 쳐 주겠다고 했다. 계약 전에 어디에 쓰려는지 물었다. 도심 건물이라 카바레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강대상이 있는 곳은 춤을 추고 술 마시는 곳으로, 성경공부 장소는 남녀교제 장소로, 교회 입구 주보함과 안내 장소는 돈 받는 카운터로 쓴다고 했다.
아뿔싸. 하나님의 성전을 그렇고 그런 술집 놀이터로 팔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당회를 열어 그 사람에게 팔지 않기로 했다.
일부 건축위원은 어디에 쓰든 돈만 많이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다른 건축위원의 생각은 달랐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술집에 성전을 팔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복덕방에 다른 사람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3일 뒤. 이번엔 멕시코 교인들이 와서 교회 건물을 사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예수 믿는 교인들이 사겠다고 하니 기뻤다. 계약하려고 계약금과 중도금, 잔금을 언제 치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들은 특이한 답변을 내놓았다. 돈이 없어 은행대출을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은행 대출을 받으려면 담보가 있고 신분이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라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시민권과 영주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게다가 모두 불법체류자들이었다. 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갔다가는 어김없이 강제추방을 당할 신분이었던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돈도 없이 교회 건물을 사러 왔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 예배처소를 달라고 기도했더니 복덕방에서 연락이 와서 믿음으로 왔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들의 행동이 말도 안 됐지만 믿음만은 본받고 싶었다. 이튿날 새벽기도 중에 “그냥 주어라. 그냥 주어라” 하는 음성이 들렸다. 주일날 예배 후 당회와 건축위원회에서 교회 건물을 하나님께서 그냥 주라고 하신다고 전했다. 모두 황당해했다.
나는 아버지께서 더 좋은 땅과 건축을 위한 물질을 마련해주실 것이라고도 했다. 그때 건축위원 한 분이 “목사님 아버지가 땅과 돈을 많이 가진 분이냐”고 물었다.
내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마련해주신다”고 하니까 회의를 하다 말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결국 우리 교회는 그들에게 교회 건물을 그냥 내주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도응답을 해주셨다고 매우 기뻐했다.
반면 교인들은 “땅도 없고 예배처소도 없는데 어디서 예배를 드릴 것이냐”고 성화였다. 나는 좋은 예배처소가 있다고 했다. 인근 공원이었다. 공원에서 예배를 드리니 지나는 길손들이 예배에 참석했다. 수개월을 그렇게 예배드렸다.
이후 하나님은 베푼 자에게 더 큰 복을 주셨다. 교회를 신축할 땅을 헐값에 구입했다. 1994년 8월 기공예배를 드렸고, 이듬해 6월 휴스턴한인교회 최대의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다. 한국 사람뿐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 일본 필리핀 아프리카 사람을 위한 예배도 드렸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하나님 영광을 위해 베풀고 헌신하면 하나님은 더 큰 축복으로 갚아주심을 깊이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10> 새 성전 건축 방해, 벽돌담 헐고 철근 훔쳐가
“한국인 싫어” 백인우월주의자들 소행… 거듭 용서하니 회개하고 공사 도와
정인찬 총장(왼쪽)과 지역 인사들이 1994년 8월 미국 휴스턴한인교회 새성전 기공예배에서 시삽을 하고 있다.
미국 휴스턴한인교회 지을 땅을 구입해 건축을 시작했다. 땅을 파고 시멘트로 토대를 놓고 벽돌을 쌓으니 교회 모습이 차츰 드러났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건축현장에 가 보니 담이 서너 곳 허물어져 있었다. 처음엔 벽돌을 잘못 쌓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현장 감독과 공사 인부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누군가 고의로 벽돌담을 헐고 철근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며칠간 이런 일이 반복됐다. 밤중에 일어나는 일이라 속수무책이었다.
교인 중에 태권도 사범들이 당번을 정해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새벽 1시30분쯤 됐을까. 갑자기 청년 3명이 몽둥이를 들고 오더니 쌓아놓은 성전 벽을 허물었다. 철근까지 훔쳐가는 것을 목격했다. 얼른 그들을 뒤쫓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이튿날 보초를 서겠다는 교인들이 많았다. 보초 3일째. 드디어 범인 중 한 명을 붙잡았다. 그의 손목을 묶고 성전 입구에 앉혔다.
“왜 성전을 헐려고 했습니까?”
“한국인이 미국에 와 행세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냥요.”
그랬다. 말로만 듣던 백인우월주의자였다. 더욱이 알라를 믿기 때문에 자기 지역에 교회를 짓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교인들은 건물파괴범이니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나는 갈등이 생겼다.
‘진정 이들을 경찰에 고소해야 하는가. 성경 말씀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는데….’
용서해 주자니 우리를 또 괴롭힐 것이고, 하나를 양보하면 둘을 요구할 것이 뻔했다.
그러나 구원의 방주인 성전을 짓는데 한 영혼부터 줄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아무 조건 없이 그를 용서하고 풀어주었다.
다음 날엔 교회 청년들이 불침번을 섰다. 만약을 대비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백인 청년 3명이 쌓아놓은 벽돌, 성전 담을 헐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가니 두 명은 마을로 도망가고, 다른 한 명은 차를 타고 도망쳤다.
그런데 잠시 후 911소방차와 경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교회 바로 옆길이 사거리인데, 급히 도망을 치던 청년이 청소차와 충돌해 교통사고를 낸 것이다.
이튿날 교통사고를 낸 청년은 병원에 입원했다. 나와 교인들이 심방을 갔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지난번 붙잡혔다 용서해 준 그 청년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용서하는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감동이 되는 대로 뜨겁게 기도했다. 내 손에 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용서해달라고 말했다. 그가 퇴원 후 그를 포함한 백인 청년 3명이 교회를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성전을 헐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성전 짓는 데 벽돌이나 철근 나르기 등 허드렛일을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백인 청년들은 정말 성전을 완공할 때까지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동네 청년 수십 명을 교회로 데려오기도 했다. 교인들은 감사기도를 드렸다. 죄지은 자를 용서해 인종차별의 불씨를 잠재우고 이슬람 신도들을 크리스천으로 전향시킨 하나님의 귀한 역사였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11> 새 성전 완공됐지만 소송당해 큰 곤욕
행패 부리던 교회 관리인 부상당하자 소송…애타게 찾던 증인 판결 직전 출석, 승소
미국 휴스턴한인교회 당회원들. 앞줄 가운데가 정인찬 총장.
미국 휴스턴한인교회 새 성전은 잘 완공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는 소송을 당해 큰 곤욕을 치렀다.
사연은 이랬다. 새 신자가 왔는데 그는 관광비자로 미국에 입국했다. 한국에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이 생겨 미국에서 살기를 원했다. 계속 새벽기도와 주일예배, 철야기도에 참석해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나는 그를 돕겠다는 마음이 생겨 이민변호사를 찾았다.
변호사는 불법체류자 단속이 심해 어려우나, 한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가 미국 기관에 취직하면 비자가 연장되고 영주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교회에 돌아와 당회원들과 상의했다. 그리고 변호사가 알려준 대로 가능한 작게 교회 관리인을 구한다는 신문광고를 냈다. 그런데 한 멕시코인이 교회를 찾아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사를 하고 “어떤 일로 왔느냐” 물으니 자기는 미국 시민권자인데 관리인에 지원하려고 서류를 갖고 왔다고 했다.
미국은 취직할 때 미국 시민권자가 우선순위이고, 그 다음이 영주권자다. 만약 불법체류자를 법에 따르지 않고 쓰면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수 없이 그 멕시코인을 관리인으로 채용했다.
사실 교회 안에 자원봉사자들이 많아 관리인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 그 형제를 돕기 위한 일이 틀어지고 있었다. 얼마 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관리인이 된 멕시코인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일도 잘하지 않고 월급만 많이 요구했다. 게다가 나만 보면 돈이 없다며 100달러를 달라고 졸라댔다.
“교회는 자비를 베푸는 데가 아닙니까. 목사님은 사랑을 베풀어야하지 않습니까.”
교인들이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술을 먹고 예배를 방해하기 일쑤였다.
한 번은 수요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내 앞을 가로막더니 “100달러만 도와주세요”라며 행패를 부렸다.
옆에 있던 안수집사가 보다 못해 그를 내게서 떼어 놓고자했다. 그랬더니 그는 체격이 건장하고 술에 취한 터라 그 안수집사를 벽으로 ‘확’ 밀고 넘어뜨렸다. 그리고 교회정문 유리창을 문으로 착각해 그대로 나가다 부딪혀 얼굴이 깨졌고 바닥에 넘어져 피를 흘렸다. 911을 불렀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됐다. 별로 다친 곳이 없어 몇 시간 뒤 퇴원했다.
그런데 며칠 뒤 그는 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청구금액이 무려 20만 달러(약 2억원)였다.
교인들은 금식하며 기도했다. 변호사가 안수집사를 넘어뜨릴 때 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봤다면 증인으로 나설 수 있고 소송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말해줬다.
증인이 딱 한 사람 있었다. 국제결혼을 한 미국인인데 아내를 데리러 와서 교회 화장실에 다녀오다 그 장면을 본 사람이었다. 그 미국인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연락이 통 안됐다.
결국 법정에 섰다. 판사가 판결을 하려는 순간, 우리 교인 한 명이 “목사님, 여기 증인이 왔다”고 소리를 치는 게 아닌가. “어떻게 법정까지 왔느냐”고 물으니 그는 “3일전 가벼운 교통사고가 나서 연락이 안됐다. 오늘 이 재판을 받기 위해 달려왔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를 증인으로 세웠다. 판사는 증언을 듣고 멕시코인은 교회 관리인에서 해임됐다. 오히려 그에게 벌금 1만 달러(약 1000만원)를 내라고 판결했다. 이후 그 불법체류자는 교회에 취직됐고 영주권도 얻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인간의 두뇌로는 계산이 안 나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12> 땅주인 마음 돌려 기도원 짓게 해주신 하나님…
그의 아들과 계약 서명 직전 “안 판다” 함께 손잡고 기도 끝나자 “팔겠다”
하나님의 은혜로 매입한 농장 땅에 지은 휴스턴한인교회 실로암기도원 모습.
교회당을 잘 건축해 봉헌예배를 드렸다. 또 하나의 과제가 있었다. 세계선교센터와 양로원, 청소년수련장, 기도원 건립 목표를 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먼저 땅이 필요했다. 여러 복덕방에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 한 복덕방에서 115만㎡ 농장이 싼값으로 나왔으니 한번 가 보자고 했다.
당회원, 건축위원들과 함께 그 농장을 방문했다. 내가 비전과 환상을 통해 그리던 바로 그 땅이었다. 호수가 7개나 있는 가나안 같은 옥토였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땅을, 왜 싼값으로 팔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의문은 곧 풀렸다. 그곳에 도착하니 50대 미국인 부부가 나와 이렇게 소개했다.
“이 땅은 아버지가 경영하던 농장인데 연세가 많아 물려주셨습니다. 저희 부부는 의사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이곳에서 요양하고 있고 농장관리가 힘들어 로스앤젤레스 별장에 가서 살려고 합니다.”
복덕방 사장이 계약서를 작성하고 ‘막’ 서명을 하려는데, 승용차 한 대가 도착했다. 차의 차창문을 열고 한 노인이 “스톱, 스톱(Stop, Stop)”이라고 외쳤다. 영문을 모른 채 서명을 멈추고 기다렸다. 그의 얼굴은 경직돼 있었다.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에게 호통을 쳤다.
“농장을 관리하라 했지 누가 팔라 했느냐. 안 판다. 손님들은 돌아가십시오.”
복덕방 사장은 갑작스런 일에 놀라 연신 “미안합니다”라며 “다음에 다른 곳을 보여줄 테니 돌아가자”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보여주신 이 땅을 포기할 수 없었다. 순간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 마음에 불같이 와 닿았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지’ 하는 결심이 섰다. 그래서 에이벨이란 이름을 가진 아버지 손을 붙잡고 기도하자고 청했다.
“하나님. 지금까지 이 땅은 먹고 죽을 양식을 생산하는 농장으로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하오니 에이벨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일에 동참케 하시고 이 땅을 하나님의 동산으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했다. 손잡은 사람들이 “아멘”이라고 답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 에이벨도 침례교회 집사였다.
기도가 끝나고 에이벨에게 “아멘이라고 답했지요”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이 땅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동산으로 쓰시길 원하신다. 팔겠느냐”고 물으니 “팔겠다”고 답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복덕방 사장에게 계약서를 작성하라고 했고 서명을 받아냈다.
그곳에 함께 갔던 교인들은 믿기 어려운 이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1년 뒤 이 농장 땅에 선교센터를 건축했다. 에이벨을 초청해 축사를 하라고 했다.
그는 교인들 앞에서 “내가 그곳에 갈 때는 절대 그 땅을 안 팔려 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난 뒤 팔겠다고 답한 것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간증했다.
그랬다. 인간의 정신이 아니고 하나님 정신이 들어가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지금 그곳에 석유가 나와 재정적 도움을 주고 우리가 꿈꾼 건물을 짓고 있다. 꿈은 이뤄진다. 믿음에서 나온 비전은 한계를 깨고 기적이 일어남을 매순간 확인하며 살고 있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13> 능력 있는 교육전도사 채용 “돈이냐, 사람이냐” 고민
급여 문제로 반대 심했지만 임명, 청소년부 부흥 이루자 모든 게 풀려
정인찬 총장이 담임목사로 재직한 미국 휴스턴한인교회의 주일예배 모습.
한인교포들에게 “왜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됐느냐”고 질문하면 1순위가 “자녀교육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녀교육 책임지는 교회’라는 표어를 걸고 한인교회 목회를 했다. 이 일을 담당할 교육전도사를 구하기로 했다. 여러 명이 지원했다. 모두 미국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 3년을 마친 교역자들이었다.
지원자 중에 마음에 ‘쏙’ 드는 교역자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능한 젊은이였다. 그는 이력서에 ‘마약 술 음행 게임 등 온갖 세상유혹에 빠져 타락한 학생 및 젊은이를 돌이켜 진실한 크리스천을 만드는 것이 사명’이라고 썼다. 글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초청해 설교를 듣고 직접 청빙위원들에게 추천했다.
그와 인터뷰도 진행했다. 다 좋았다. 그런데 한 가지 급여가 문제였다. 자기는 의사나 변호사, 회계사 등 다른 일을 할 수 있는데 주의 종이 됐다며 그에 맞는 예우를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급여조건은 담임목사인 내가 받는 사례비의 두 배였다. 상담비와 교육 자료비, 심지어 카페에서 음료 마실 돈과 교통비, 대외활동비까지 청구했다.
교인들은 아쉬워했다. 신앙도 사명도 이력도 모두 좋았는데 말이다. 청빙위원 중 한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청소년부를 맡아 부흥시킨다 해도 담임목사 급여의 두 배를 주며 교육전도사를 쓸 수 있느냐”며 극구 반대했다. 당시 우리 교회는 새 성전을 지은 직후라 재정이 넉넉하지 않을 때였다.
밤새 고민했다. ‘돈이냐 사람이냐’ 선택을 해야 했다. 급여 청구액을 생각하면 괘씸한 생각이 들고 삯꾼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능력과 의지를 보면 우리 교회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당시 많은 한인 청소년들이 탈선하고 타락하고 있었다. 심지어 한 장로의 아들은 친구와 마약범으로 잡혀 감옥에 잡혀있는 상황이었다. 기도 중에 빌립보서 4장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기도 끝에 교육위원과 청빙위원들 앞에서 그를 교육전도사로 채용하자고 설득했다.
반대가 심했다. “담임목사가 교회 재정은 생각하지 않고 인사를 한다”고 불만을 표출하며 교회를 등지는 교인이 잇따랐다. 하지만 나는 그 교역자를 교육전도사로 임명했다. 불량 청소년의 영혼을 불쌍히 여긴 것이다. 두 달간 교회 재정이 휘청였다. 불평하는 교인이 더 많아졌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임명된 전도사는 청소년부를 크게 부흥시켰다. 특히 한 청소년이 알코올 마약 게임 등에 빠졌으나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됐다. 그 청소년은 열심히 공부했고, 교회학교 보조교사도 맡게 됐다.
그 청소년의 부모는 자기 자식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청소년사랑 학부형회’를 조직해 활발히 활동했다. 또 교육전도사의 급여를 부담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니 그 교역자를 쓰는 일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교인과 교회를 멀리했던 교인들도 돌아왔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기쁜 일이 생긴다. 영혼을 사랑하면 필요한 물질은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원리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14> 흑인 폭동으로 교포 상점 피해… 기도·대화로 수습
흑인 지도자 대부분 교회 출석 교인 “우리는 한 형제” 곧 얼싸안고 화해
휴스턴한인교회 담임목사 시절, 갓난아이에게 축복기도를 하고 있는 정인찬 총장.
‘자녀교육을 책임지는 휴스턴한인교회’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올곧은 기독교 신앙교육에 전념하니 많은 어린이들이 몰려왔고 교회학교가 급속히 성장했다. 유치원도 설립했다. 어린이들이 나오니 고구마 줄기에 고구마 딸려 나오듯 어른들도 교회를 찾았다. 또 중·고등부와 청년들이 성령으로 변화되면서 교회 각 조직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교회가 성장하니 다른 상급도 주어졌다. 신설 연합기관인 미주한인기독교총연합회 초대 대표회장에 선출된 것이다. 50여개 주의 한인교회를 대표하는 자리였다. 사실 나는 교단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나를 각 지역 연합회장들이 추천했다. 결국 이 직책을 맡게 됐다. 어깨가 무거웠다. 미주 한인교회 간 협력과 연합, 세계선교 활성화, 이단·사이비 척결, 심지어 한인사회의 각종 문제에까지 관여했다.
취임식 때 “연합회 대표회장을 명예로 생각하지 않고 멍에로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낮은 자세로 교회와 이웃을 섬기겠다는 의미였다.
임기 중에 큰 사건이 발생했다. 1992년 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방화와 폭력, 절도가 횡행하는 무정부 상태가 된 것이다. 백인경찰들이 과속으로 운전하다 도망치던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을 붙잡아 마구 구타한 사건이었다.
이 일은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보도돼 흑인사회에 공분이 일었다. 하지만 법원은 폭행을 가한 백인경찰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인종차별과 경제적 박탈감에 시달려 온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분노는 백인뿐 아니라 애꿎은 한국계 주민들에게도 향했다. 이 폭동으로 55명이 죽고 2000여명이 다쳤으며, 특히 한국계 주민들의 상점과 주택의 피해가 컸다.
흑인들은 한인들이 자기 마을에서 상점을 오픈해 돈을 벌면 큰 도시로 나가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차별대우를 한다고 했다. 미국 내 한인들의 입지와 생계를 넘어 생명까지 위협을 받았다. 과격한 한인들은 총을 구입해 맞대결을 하기도 했다.
미주기독교총연합회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를 당부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푯대로 삼았다.
다행히 흑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었다. 총 대신 하나님 사랑의 복음으로 접근했다. 폭동 며칠 뒤 연합회 임원과 한인사회 지도자들은 흑인 지도자들을 만났다. 먼저 죄송하다고 했다. 또 흑인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흑인 마을에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부금을 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흑인들을 품은 것이다.
설득을 거듭했다. “비록 인종과 피부색은 달라도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가 아니냐”며 끌어안고 기도했다.
흑인 지도자들은 한인 목회자들의 이런 행동과 도움에 큰 감동을 받았다.
“오! 하나님. 우리는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저희들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번엔 흑인들이 사과했다.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이 일로 한인과 흑인들은 차츰 가까워졌다. 정부나 경찰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교회가 나서 해결한 것이다. 하나님 사랑이 문제의 답이 된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15> 차세대 선교사 발굴 위해 한인세계선교협 창설
선교사 재충천 돕고 선교대회 개최, 집회서 청년들 마약·총 버리는 역사 체험
정인찬 총장(안수 기도자 왼쪽)이 지난 8일 경기도 부천 순복음부천교회에서 열린 ‘국제독립교회연합회(WAIC) 제10회 목사안수식’에서 기도 드리고 있다. 정 총장은 WAIC 총회장을 맡고 있다.
미주한인기독교총연합회 결성 후 시급한 문제는 ‘세계선교’였다. 컨트롤타워가 필요했다. 선교사 훈련 및 재교육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차세대 선교사 발굴 및 육성이 절실했다. 그래서 몇몇 뜻있는 목회자들과 함께 한인세계선교협의회(KWMC)를 창설했다.
당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선교사들이 많았다. 또 기독교 적대 국가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억울하게 붙잡히거나 순교를 당해도 마땅히 도울 기관이 없었다. 안식년이 돼도 갈 곳이 없는 선교사도 있었다. 선교사 자녀를 돌볼 단체도 찾기 어려웠다.
KWMC는 어려움을 당한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기로 했다. 또 안식년을 맞은 선교사를 위한 재충전 사역을 펼치기로 했다. 선교사 자녀를 돌보는 일도 KWMC 사역 중 하나였다. 4년마다 세계선교대회도 열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사역들은 녹록지 않았다. 교회와 성도의 참여와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재정이 없으면 그런 계획들은 탁상공론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기도 끝에 내가 담임하는 휴스턴한인교회가 먼저 거액의 선교헌금을 냈다. 이 일의 결과는 아니지만 나는 KWMC 대표회장에 선출됐다. 미주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에 이어 또 하나의 멍에를 지게 된 것이다.
이때 기도 중에 받은 하나님 말씀이 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이다.
나는 이 말씀에 힘입어 KWMC 사역을 하나하나 실천해나갔다. 차세대 선교사 발굴에 온 힘을 쏟았다. 활동적인 기업가로 대학생선교회(CCC)를 창설한 빌 브라이트 박사를 초청해 ‘미주 청소년 성회’를 개최했다. 브라이트 박사는 세계적 복음전도자인 친구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기독교 복음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
첫날 집회에서 브라이트 박사는 참석한 젊은이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주의 귀한 복음의 도구로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뜨겁게 기도를 한 뒤 청소년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오늘 집회 참석자 중에 담배를 가진 사람은 속히 주머니에서 꺼내 강단으로 던지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 둘 담배를 꺼내 던졌다. 그 다음은 마약, 그 다음은 칼, 그 다음은 총을 던지라고 했다. 놀랍게도 총을 가진 청소년도 여러 명 있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던졌으니 죄와 사단의 도구로 쓰던 몸을 던지라고 했다.
그들은 강단으로 뛰어나와 눈물을 ‘펑펑’ 흘리며 회개기도를 드렸다. 이날 거듭난 청소년이 1000여명에 달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서원했다.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였다. 집회에 참석한 청소년은 물론 그 부모와 소속 교회들은 KWMC 사역에 동참했다. 그 덕분에 KWMC 재정이 넉넉해졌다. 지금도 KWMC 본부가 뉴욕에 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역사만 믿고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16> “고국 신학교서 목회자 양성, 하나님의 뜻”
한국의 신학교 설립자 제안에 고민… 반대하는 교인들 뒤로하고 학장 맡아
정인찬 총장(오른쪽)이 1998년 미국 휴스턴신학대학 학위수여식에서 축하인사를 하고 있다.
휴스턴한인교회 목회와 미주한인기독교총연합회, 한인세계선교협의회 등을 통한 선교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작은 신학대를 설립해 목회자를 양성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연합기구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연계해 통일선교대학도 세웠다. 선교의 뜻을 가진 사명자들이 이 대학을 찾았다. 내가 담임하는 휴스턴한인교회는 아낌없이 대학에 투자했다. 수료자들은 북한선교와 이슬람선교 등에 적극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B교단 총회의 ‘목사·장로수련회’에서 3일간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영성이 충만한 교단이 되고 싶다며 거듭 요청을 했다. 며칠 뒤 태평양을 건넜다. 수련회 기간 내내 기도하며 말씀을 증거 했다. 은혜가 넘쳤다. 수련회 마지막 날은 저녁도 굶고 금식하며 말씀을 전했다. 그 이튿날 묵고 있는 호텔로 전화가 왔다.
B교단의 B대학 설립자 J목사였다. 그는 자신의 대학에 꼭 방문해 달라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J목사의 사모가 수련회에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받고 남편에게 귀띔했던 것이다. 인사만 나눌 생각으로 J목사를 만났다.
J목사는 “개별교회 목회도 중요하지만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교 사역은 더 중요하다. 우리 대학에서 목회자를 양성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의 요청이 계속됐다.
“한 교회에서 100명의 양을 돌본다고 하나, 능력 있는 목회자 한 사람을 배출하면 100명을 넘어 1000명, 1만명의 양을 돌본 셈이 됩니다. 목회자 100명, 1000명을 배출하면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와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 섭리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입장이 난처했다.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년이 된 것도 아니고 무슨 말로 교인들을 설득하나. 어떻게 하면 고국에서 목회자 양성을 할 수 있을까.’
그의 거듭되는 제안에도 선뜻 확답을 하지 못했다. 그랬더니 “안식년이라도 얻어 한국에 와 잠시 학교에서 중직을 좀 맡아 달라. 하나님의 뜻인 것 같다”라고 말하는데 그만 마음이 ‘스르르’ 녹고 말았다. 그의 말 가운데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열정이 느껴졌다.
나는 “기도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 도착한 뒤에도 기도 중에 주의 종을 양육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자꾸 마음을 두드렸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12명의 제자를 양육하고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는가.’
교회 당회에서 내 생각을 말했더니 교인들은 “절대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교인들은 내가 혹시 고국에 돌아 갈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기도 끝에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교인들을 설득했다. 교인들은 “우리를 밟고 가라”며 성전바닥과 사택 앞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그들의 눈물과 간청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한국 B대학 신학교 학장과 목회대학원장을 맡았다. 이렇게 ‘인생 2막’은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17> 맡은 신학교 성장에 호사다마… 아내 암 진단
‘왜 절망하느냐, 내가 있지 않느냐’ 음성, 주님을 의사로 모시고 기도… 완치 기적
지난해 12월 생일을 맞은 정인찬 총장(오른쪽)이 아내 지명선 사모(오른쪽 두 번째)와 함께 경기도 용인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새창조교회에서 케이크 촛불을 끄고 있다.
30년 가까이 살던 미국 이민생활을 접고 고국에 돌아왔다. B대학에서 신학대 학장과 목회대학원장직을 겸임했다. 우선 신학대학원을 살리는데 전념했다.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교계 인사들의 협력으로 신대원 정원은 배로 증원됐다. 입시 경쟁률이 3대 1을 기록했다. 경쟁력이 있는 신대원으로 급성장한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나. 갑자기 아내가 속이 쓰리고 옆구리가 자꾸 면도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호소했다. 개인병원을 찾았다. 내과분야에서는 유명 전문의였다. 전문의는 꼼꼼히 아내를 진찰하더니 “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권했다. 곧바로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엑스레이를 찍고 조직검사를 실시했다.
검사결과가 나오자 담당의사가 나와 아내를 불렀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담당의사의 얼굴이 경직돼 있었다.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으로 보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췌장암 말기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하시고 준비하세요.”
적잖이 놀랐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남의 병은 많이 고쳤는데, 기도 받으러 온 많은 성도를 치유했는데….’
막상 아내가 죽는다고 하니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힘부터 빠졌다. 하지만 믿을 건 하나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며 기도하는데 어디선가 음성이 들렸다.
‘왜 절망하느냐. 내가 있지 않느냐. 내가 능히 내 아내의 병을 고쳐 줄 것이다. 믿느냐?’
순간 해머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가능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임이 믿어졌다. 기도 끝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치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말씀과 성령의 검으로 치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주님을 의사로 모시고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매달렸다. 믿을 건 기도밖에 없었다.
먼저 성경 말씀을 암송했다. 출애굽기 15장 26절 말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니”, 시편 118편 17절 말씀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그리고 누가복음 1장 38절 말씀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등이다.
병원치료도 열심히 받았다. 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구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렇게 기도하고 차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 달 뒤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하니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기적이었다.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 아내처럼 몸이 아픈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것 같았다. 아내를 다시 얻은 느낌이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심을 굳게 믿는다.(롬 4:17)
***[역경의 열매] 정인찬 <18> 웨신대 총장 제안받고 하나님 뜻 기도로 구해
주님의 섭리 느끼고 결국 이직 결정… 본관에 기도원 세워 신앙으로 부흥
정인찬 총장이 21일 경기도 용인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에서 학교 발전방향을 설명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국생활은 차츰 안정을 찾고 있었다. 열심히 B대학의 성장을 이끌었다. 원로목사 추대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특별한 일이 발생했다. 유수 대학의 총장직 제안을 받은 것이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웨신대)였다. 고마웠다. 하지만 막상 10년 넘게 열심히 일한 학교를 떠날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름 일 잘하는 교수 및 학장으로 소문나 있었다.
웨신대 경영책임자는 학문이 깊고 목회 경력이 많은 분이 자기 대학을 맡아야 한다며 거듭 총장직을 제안했다. 결심은 쉽지 않았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 중에 성경 말씀이 펼쳐졌다.
창세기 24장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리따운 여성 리브가를 만나 결혼하는 이야기였다. 아브라함의 종은 라반과 브두엘을 만나 동생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달라고 청원했다. 라반과 브두엘은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답했다.
리브가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리브가는 “가겠나이다”하고 가니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업으로 물려받았다.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됐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통로가 되고 복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나도 그런 믿음을 원했고 따랐다. 웨신대 총장 초빙 제안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는 줄로 믿어 가부를 말할 수 없었고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B대학에 사표를 내지 않고 다른 대학으로 가겠다는 말도 못 꺼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미 웨신대 이사회는 나를 총장으로 결정하고 취임 날짜까지 잡았다. 하나님께서 내 이직을 고속으로 밀고 나가심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웨신대로 떠나기 전, B대학 설립자 J목사에게 경위를 설명했다. J목사는 만류했다. 하지만 결국 이직으로 결론을 냈다. 며칠 뒤 많은 사람의 축복 가운데 퇴임식을 갖고 웨신대로 향했다.
당시 웨신대는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또 학생 모집이 잘 안 돼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영성회복과 신학의 정체성 정립이 절실했다. 교수·직원·동문 간 연합과 일치에 나섰다. 신설 교과목을 선정하고 부서별 활성화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하나 난제들을 풀어 나갔다.
본관 건물 3층에 기도원을 만들었다. 실력 있는 목회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새창조 신앙’으로 학교 부흥을 꾀했다. 새사람이 돼야 한다는 뜻이었다. 변질된 신학교육과 한국교회를 바꾸고 살리겠다는 사명감으로 부지런히 일했다. 대학교회인 새창조교회 담임도 맡았다. 한 생명을 귀히 여기는 생명목회를 강조했다. 그러자 학교가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재정 형편도 나아졌다. 대학 평판이 하루하루 달라졌다. 학교에 대해 잘못 알려진 점도 있었다. 하지만 영성을 강화하고 내실을 다져야겠다는 일념으로 학교를 운영하니 그런 소문도 하나둘 사라졌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은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롬 11:36) 이 말씀이 나의 삶과 신앙, 학교 사역의 지침이다.
***[역경의 열매] 정인찬 <19> 숱한 산고 끝에 성경대백과사전 햇빛
방대한 작업·재정난 극복 1979년 완간… 평신도들이 대거 구입 3만5000질 팔려
정인찬 총장이 22일 웨신대 도서관에 있는 성경대백과사전을 가리키며 제작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경은 성경대백과사전을 편찬할 때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대학교수로 일하거나 목회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괜찮은 교회의 청빙 요청도 있었다.
그런데 내게 또 다른 사명이 주어졌다. 그것은 성경대백과사전 편찬이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는 ‘선교대국’으로 불렸다. 성도 수가 1200만 명이고, 목회자가 20만 명이 넘는다는 소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할 성경대백과사전 하나 없었다. 시중에 성경해석 사전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사전(dictionary)이지, 종합적으로 성경을 분석한 백과사전(encyclopedia)은 아니었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성경대백과사전이 적지 않게 나와 있었다.
성경대백과사전을 출판하는 것이 한국교회를 위해 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출판하기로 뜻을 정했다. 그러나 출판하려면 성경학자들의 참여가 필요했다. 이 부문에 뛰어난 신학자들을 찾았다. 드디어 그분들과 모임을 갖고 나라별 사전을 구입해 번역을 시작했다. 원고비를 전달했고 기간 내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워낙 바쁜 분들이라 그런지 제시간에 탈고하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많은 부분을 내가 홀로 번역하고 편집해야 했다. 편집 전문가들에 맡겨 열두 번이나 교정을 봤다. 하지만 틀린 곳들이 간혹 나왔다. 5년여 동안 원고 받고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원고가 방안에 가득했다. 원고더미 속에서 잠을 청했다. 불면증에 시달렸다. 치아가 흔들리고 눈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고통은 그래도 참을만했다. 이번엔 재정난에 부딪쳤다. 사전을 완성하려면 수억 원의 돈이 더 필요했다.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출판사 K사장과 함께 책을 팔러 다녔다. 모두 8권이 나와야 완간인데, 한 권이 나오고 예약을 받으려니 의심하는 분이 많았다. 계약 파기가 속출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교회 목회자들을 찾아 예배 후 광고시간을 얻어 사전 출판의 동기와 필요성을 호소했다. 다행히 평신도들이 책을 예약했다. 당시 교회들마다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이 많이 진행되던 시대였다. 그래서 성경해석 참고서, 곧 성경대백과사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평신도들이 사전구입을 신청했다. 1979년 드디어 8권을 완간·출판했다. ‘펑펑’ 눈물이 나왔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무려 3만5000질이 팔렸다. 상상하기 힘든 기적이었다.
목회자와 평신도들 사이에서 “이 성경대백과사전을 보고 성경을 바로 알게 됐다”거나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했는지 회개했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길 잃은 항해사가 나침반을 가진 것 같다며 찬사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감사했다.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주 안에서 수고한 것은 결코 헛되지 않음도 성경대백과사전을 편찬하면서 깨달았다. 역경은 뒤로 물러갈 미끄럼틀이 아니라 위로 올라갈 계단이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정인찬 <20·끝> ‘역경’을 ‘꽃길’로 걷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교단 문제 등 딛고 학교 나날이 성장… WAIC 총회장 선출 등 영광도 잇달아
정인찬 총장이 23일 경기도 용인 웨신대 교정에서 일평생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평탄하지 않은 목회와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으나 돌이켜보면 하나님이 꽃길을 만들어 걷게 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웨신대 총장을 맡아 학생모집을 하고, 인사 경영 등을 감당하는데 힘든 일들이 잇따랐다.
“힘든 자리였다”고 고백한 역대 총장들의 말이 실감났다. 퇴출교수 문제, 학교의 정체성을 흔든 또 다른 웨신대 설립의 건, 교단 문제 등 갈등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곤 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교직원들에게 ‘새창조신학’과 ‘생명목회’라는 양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날아오르자고 호소했다.
본관 3층에 기도원을 만들었다. 신학대에 무슨 기도원이냐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호응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차츰 기도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또 영성의 필요성을 깨달은 교직원이 늘어났고 학교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대학원대 가운데 제법 학생 수가 많은 학교가 됐다. 교수도 충원했다. 더 감사한 것은 50년 목회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휴스턴한인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된 것이다.
대학교회인 새창조교회를 설립했다. 내겐 ‘목회 2모작’이었다. 하지만 나이 들어 맡은 설립목사 역할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라는 말씀을 붙들고 교회를 섬기고 있다.
교단 문제가 발생했다. 학교가 발전하려면 기존 교단에 속하는 게 좋지 않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교단정치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기도 끝에 국제독립교회연합회(WAIC)에 가입했다.
WAIC는 박조준 갈보리교회 원로목사가 1995년 설립한 단체다. 복음적 가치를 바탕으로 교회와 목회자 간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교회연합과 일치를 통한 차세대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회연합체다. 이단을 척결하고 신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 점이 특징이다. ‘오직 성경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오직 은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이 정립한 다섯 가지 신앙고백 ‘5대 솔라(Sola)’를 바탕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난달 말 WAIC 총회장에 선출됐다. 개인적으로 이 단체 총회장에 선출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변질된 한국교회를 바로 잡아보겠다는 작은 소망을 갖고 있다. 아울러 침체된 한국교회를 다시 역동적으로 살릴 하나님의 역사를 연구하는 신학자가 되길 원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WAIC가 한국교회의 새 역사를 이끌 것으로 믿고 있다. 인생을 뒤돌아보니 역경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런 역경이 내게 필요한 아픔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내 인생과 목회의 끝이 되길 소원한다.
‘역경의열매’ 연재를 마치려한다. 미천한 사람이고 부족한 글임에도 지면을 흔쾌히 내 준 국민일보에 고마움을 표한다. 부디 이 글이 독자 여러분의 신앙성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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