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희성의『일본의 정토사상』에 대한 서평
1. 만남과 희열
책을 덮고 나서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읽은 것은 오랜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학과 신학이 시공을 넘나드는 가운데 일본불교의 백미 중의 하나인 신란(親鸞, 1173~1262)의 사상을 휘몰아치듯 파고드는 치열함을 통해 참으로 오랜 만에 지적인 희열을 맛보았다는 느낌이었다. 비교종교학은 현대일본에서 최고의 불교사상가로 손꼽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가 마지막으로 작업해보고 싶었다는 학문이다. 그가 생전에 이 저술을 읽었다면 이러한 느낌을 공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학과 신학은 시공을 넘어서 있는 학문이다. 역사적으로 시공을 초월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서로를 외면하듯 태생부터 격리되었던 사상이 현대라고 하는 이 시대에 먼 옛날부터 알고 지내고 있었던 것처럼 서로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서양문명의 두 기둥, 즉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가운데 후자의 사상에 해박한 한 한국학자가 일본불교의 가장 큰 종단인 정토진종(淨土眞宗)을 낳은 신란과의 만남을 이렇게 점잖게 그리고 융숭하게 대접하면서도 혼란없이 주선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지금은 일본불교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필자로서도 흐뭇하기만 하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먼저 가까운 일본불교에 대한 우리학계의 연구수준, 신학에 대한 편견을 여전히 떨치지 못하는 우리 불교학자들, 용광로와 같은 한국의 종교상황 속에서 타자에 대한 폭넓은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 종교인들 등등.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거울처럼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주는 활자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다. 이제 평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이러한 감사함에 대한 사족에 불과하다는 것을 먼저 부기해 두고자 한다.
2.『일본의 정토사상』의 전개
이 책은 1999년도에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미 영문으로 미국에서 출판된 것(영문 제목-Understanding Shinran : a Dialogical Approach)을 저자의 말대로 약간의 수정과 함께 직접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한국인이 영어로 쓴 것을 한국어로 옮겼다는 것만으로도 학문 세계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미국학계 내의 학문 주제에 대한 자유분방함이 한국사회로 역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저자처럼 순수하게 동참하는 한국 학자들의 노력이 사실 한국의 인문학이 개방의 길로 가도록 애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증거이기는 하다. 단지 한국학계가 처해 있는 학문적 권력의 문제에 또 하나의 힘으로 작용하지 않기를 바랄 뿐.
본 저서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머리말
제1장 이도(易道)
제2장 범부 신란(親鸞)
제3장 신심(信心)
제4장 신심에 근거한 삶
제5장 상(相)과 무상(無相)
서평 :『일본의 정토사상에 대하여』(Jan Van Bragt)
저자는 먼저 머리말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대화로부터 출발했음을 밝히고 있다.인간의 문제에 있어서 진정한 이해란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진정한 대화란 자기 자신의 입장과 신념없이는 불가능하다.(p.11)고 한다. 삶이든 학문이든 대화를 견지하고자 하는 자세는 모든 이해의 근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종교만이 최고라고 보는 현실에 있어서는 어떠한 대화의 자세가 필요한 것일까. 그는 이에 대해자신의 신앙이 위협받을 정도의 진지한 자세로 타인의 신앙을 깊게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애당초 위협을 받을 만한 자신의 신앙과 입장이 없는 사람은 결코 진지한 대화의 주체가 될 수 없다.(同)고 한다. 이러한 언설에는 많은 것을 회고하게 만든다.
이미 타계해 고인이 된 신학자 변선환 목사가 종교다원주의를 설파하다가 결국 종단으로부터 축출을 당한 사건은 당시 사회로부터 그의 종교간 대화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낸 것이었다. 또한 저자의 제자로 강남대학교의 전직교수였던 이찬수 목사가 종교간 대화에 열정을 불태운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제명당한 사건이 얼마 전에 일어났고, 이에 대해 대법원으로부터 학교 측의 부당함이 선고되었음에도 여전히 길거리의 학자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 언설이 종교간 대화의 현실적 금기를 깨는 듯한 발언으로 무겁게 다감 옴은 왜일까.
저자는 가다머(H. Gadamer)의 지평융합이라는 말을 통해 이에 대한 정당성을 역설(力說)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선언으로만 다가올 뿐 현실에서는 무기력함을 느낀다. 하지만 부당한 금기는 언젠가 깨져야 할 것으로 누군가는 말해야 된다는 선구적인 학자의 양심을 보게 된다. 다른 저서에서 스스로 종교다원주의자(『보살예수』, 2004)라고 고백하는 모습은 종교적 권력이 난무하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희생의 댓가를 치루는 예언자처럼 들린다.
그리고 저자는 불교에 대한 매력으로서세속적 가치를 철저히 부정하고 마음을 비우는 그 청정성과 속세로부터의 자유에 매혹되었기 때문(p.12)이라고 한다. 이어뼈아픈 자기 부정과 세계부정이 없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될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同)고 한다. 이것은 사실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에 속한다. 불타(佛陀)가 세속을 벗어나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지만 세속으로 다시 돌아옴은 깨달음의 의미가 세상을 벗어나서는 무의미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후에 발달한 선종의 입전수수(入廛垂手)는 이러한 불타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의도하는 말에 대한 오해는 말아야 할 것이다. 세계 내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가치를 온전히 보장받기 위해서는 의문의 과정을 통한 현실에 대한 반성이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성인들이 이러한 로드맵을 반드시 한 번쯤은 거쳤기 때문이다. 신란에 대한 매력 또한 그가 이러한 자기반성과 참회를 통한 진리에의 접근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언가 신학의 일관된 주제를 저변에 깔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신란의 사상을 대할 때, 그리고 그가 대화의 상대로 지목하고자 할 때 가장 염두에 둔 것은초월과 부정(p.17)을 가장 깊이 체험한 인간이라고 한 점이다. 신란 사상의 핵심인 사후정토의 구원관이 바로 신학의 핵인 초월의 사상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근대 정토진종의 학자였던 카네코 다이에이(金子大栄, 1881~1976)나 소가료진(曾我量深, 1875~1971)은 이러한 초월적인 정토세계를 부정하는 바람에 자파에서 말하는 이안심(異安心), 즉 이단으로 쫓겨났던 것이다. 이처럼 신란교학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문제가 신학과 상통한다는 점은 저자의 가장 매력적인 대화의 틀이자 전제가 되었던 것이다. 저자는신란에게는 인간의 신앙이 제아무리 깊다 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결코 정토가 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인간 죄악의 문제는 결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同)고 하는 것은 이를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그리스도교가 일본사상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와 인간을 향한 예언자적 부정과 초월의 정신이다.고 한다. 대담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근대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릴리전(Religion)을 종교(宗敎)로 번역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逆說)적인 일이다. 중국에서 불교의 종(宗)을 의미했던 종교(宗의 가르침)가 초월성을 근원으로 하는 서양의 릴리전으로 대체되었다고 하는 것을 저자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동서양 문명의 만남은 이미 타자를 자가화하는 과정에서 깊은 대화의 씨앗을 심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결론에서 보겠지만 저자가 이 저술을 통해 신학자로서 자신의 신학의 지평을 넓히고자 고민하는 문제를 들고 몸을 낮춰 타자의 세계를 깊이 이해해가면서 스스로의 결핍을 채우려고 한 자세와 의도는 높게 평가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저술의 의도를 간파했으니, 다음 장으로 넘어가 본론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3. 신란(親鸞)의 세계
저자는 제1장 이도(易道) 편에서 자력으로 깨달음을 성취하는 성도문(聖道門)에 반해 타력에 바탕한 왕생정토를 지향하는 이행도(易行道)를 주장하며 일본에 처음으로 정토종을 세운 호넨(法然, 1133~1212)의 정토세계에 대해 논한다. 천태종에서 수학한 호넨 자신이 그 가르침에 승복하지 못하고 오로지 염불을 통해 정토극락을 갈 수 있다고 한 믿음을 세운 사건으로 인해 기존의 종교권력과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수(專修)염불이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서 기성교단의 부패와 권력쟁투와 자연재해의 다발로 인한 말법사상의 횡행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사건은 이미 일본불교사에서는 정설로 기술되고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호넨이 가져온 신종교 운동은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특히 수행보다는 신앙의 강조와 이로 인한 승속, 즉 출재가 구별의 무의미(p.44)를 들고 있다. 이러한 것을 초기 기독교의 교회와 유사한 자발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신앙공동체와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저자는이제 종교적 메시지는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 아니라 남녀노소의 구별이나 사회적 신분의 차이, 그리고 도덕적 공과나 종교적 위계, 지식의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전해지게 되었다.(p.45)고 한다. 이를 서양의 종교개혁에 비견하고 있다. 저자는 호넨이 이행도를 내세운 것만이 아니라 제자 신란이 호넨의 신종교 운동에 함께 연루되어 유배를 갈 때, 스스로를 비승비속이라 하고 결혼을 단행했다고 하는 데에서도 정토신앙의 민중성을 간파하고 있다.
이러한 호넨의 정토사상은 사실 중국의 정토교가들인 담란(曇鸞, 476~542), 도작(道綽, 562~645), 선도(善導, 613~681)를 통해 발전해온 타력신앙인 정토세계의 체계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호넨의 제자 신란의 정토신앙은 호넨이 미처 다루지 못했던 교학의 문제를 자신의 신앙체험에 바탕하여 끝까지 밀고나가 일본 특유의 정토신앙세계를 완성했다고 하는 것이다. 제2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제2장에서는 신란의 일생을 그리고 있는데 앞에서 이미 짐작했듯이 신앙에 대한 언급, 그리고 이 장에서 등장하는 신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숙업을 통해 쌓아 온 죄업에 대한 자각이 신란의 정토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어가 되고 있다. 기독교 세계와의 유사성, 말하자면 원죄와 이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라고 하는 신앙의 필연성은 저자로 하여금 신란 사상이 신학의 구조를 띠고 있음을 끝임없이 내포시키고 있다.
이를 신학자 바르트(K. Barth)를 통해 저자는 말하게 하고 있다.우리가 종교적 인간의 특이한 죄악성을 인지하고 그 안에 죄가 많은 것을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은총이 많다는 것의 의미와, 하느님의 자비가 죄에도 불구하고 작용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이해할 수 있다.(p.51)고 함으로써 신란이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을 설파한 의도가 악인이야말로 아미타불이 그의 본원을 통해 구제하려고 하는 주 대상(同)이라고 한다. 악인정기설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신란사상의 하나이지만 저자가 이에 주목한 것은 역시 신학의 핵심적 모티브가 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란의 깊은 죄악에 대한 자각이 자신의 사후의 운명에 대한 불안감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 것이다.(p.58)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타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논리이다(p.59)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자연히 자비로운 아미타불의 중생구제를 위한 본원에 더욱 깊이 몰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란의 자각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지만 이미 고대 중기에 일본에 말법이 시작(1052년)되었고, 이 말법시대에는 인간의 기근(機根)이 하열하다고 하는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열한 기근은 성현, 즉 부처가 떠나신지 오래되었으며, 그를 만나 깨달음을 성취할 기연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신학에서 말하는 원죄의 결정론적 사고(p.75)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 결정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타자가 주어가 되지만, 숙업은 나의 무명(無明)에 바탕하여 점점 쌓여온 개개인이 주어가 된 영혼 자신의 역사성에 바탕한 것이다. 부처도 이러한 개인적 정업(定業)은 소멸시켜줄 수가 없다. 이는 개인의 과제이지 절대자의 소관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 불교와 기독교의 결정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숙업은 물론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의 빛이 밝아질수록 숙업의 근원이 되는 무명의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물러가는 것이다. 이를 타자가 일시에 해결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타자는 그러한 가르침을 줄 수 있을 뿐인 것이다. 물론 정토세계는 이를 왕생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불교가 왜 한편으로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가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단지 하열한 근기가 접근하기는 어렵다고 하는 자력의 성도문이라고 정의 내리기에는 보다 다른 차원의 불교교학의 논의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가신란에게는 따라서 선과 악이란 근본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넘어서서 종교적 차원에 속한 문제(同)라고 하는 것에는 일종의 비약이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악은 선과 악이라고 하는 이분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선도 얼마든지 악을 배태할 수 있다는 상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없다고 보는 것도 선악의 개념을 구별지어서 보는 인간인식의 한계가 문제라고 정의내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악의 개념을 떠날 때만이 참된 선, 즉 지선(至善)의 경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일단은 저자의 의도대로 신란의 제자들이 모이는 도량(道場)에서의 모임이 동붕(同朋) 또는 동행(同行)이라고 하는 서민 중심의 평등성이 영적 평등성(p.88)이며, 아미타불의 자비 앞에서 느끼는 죄악성과 은총에 대한 자각(p.89)은 충분히 신학의 설립기반과 유사성을 가져다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신란이 말한 염불행이타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비행비선(非行非善) (p.92)이라고 하는 것이 순수타력이라고 하는 점이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더욱 구심점으로 삼게 하는 타자를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즉 염불행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것을 스승 호넨은 이끌어 내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의미의 회향마저도 신란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아미타불 자신의 진실한 행을 우리에게 베푸는 것인 염불로서의 대행(大行)의 회향이라고 한다. 이를 이어 중생이 정토에 가도록 아미타불이 회향하는 것을 뜻하는 왕상회향(往相廻向)과 신란의 종교체험으로써 미타행원의 19, 20원이 타력의 18원으로 귀결되는 삼원전입(三願轉入)(p.102)이 더욱 타력의 끝에까지 밀고 나갔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석가모니불 이래 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재가신도들에게 초세간적 해탈의 길이 아무런 타협없이 제시되었다고까지 우리는 평할 수 있다.(p.110)고 한다. 그리고 신심의 순간 왕생이 확정된다고 보고,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를 미륵불과 동등한 자(p.116)라고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은 뒤에서 저자가 다시 논하고 있는데 현세에서의 성불 가능성이 성도문적 대승사상에 가깝게 접근한다(p.187)는 교리적 역설에 대해 언급하기까지 한다. 즉 믿음의 순간 퇴보하지 않은 정정취(正定聚)의 무리에 속한다는 것은 초월적 순간이 삶의 한복판에서 실현되는 것(p186~187)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타력과 타자의 힘을 강조하는 것은 이찬수 교수(「한국 그리스도교, 불교와의 일치는 가능한가-길희성 신학의 중심 주제-」)가 지적한 것처럼 길희성 사상의 힘에 대한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교수는 길희성 교수가 신을 설명할 때 힘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에 대해힘이라는 표현 자체가 신학적이거나 신앙적이기보다는 객관적이고 인간적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동시에 힘은 그리스도교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의 속성과 같다는 점에서, 길희성은 신을 성령 중심적으로 이해하고 또 적극 해설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물론 길희성의 이 저서에서는 힘에 대한 언설의 사용은 애써 삼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힘이라는 용어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의미가 위의 신란의 타력과 타자를 설명하는 행간에서 충분히 보여지고 있다. 결국 이러한 신란교학에 대한 타자 중심의 설명은 기독교와 정토교의 만남을 인격적인 것을 통해 승화된 신앙의 궁극적 주재자를 최종적인 제1원인으로서의 자비나 사랑으로 귀결짓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깊이 내포된 것이다. 저자의 비교종교학이 갖는 나름의 현재적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논의를 더욱 심화시킨 제3장 신심(信心)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신란의 신(信)과 행(行)의 문제(p.124), 제18원에 언급된 지심(至心), 신락(信樂), 욕생(欲生)의 문제(p.131), 이종심신(二種深信)에 대한 언설(p.136) 등에 대한 저자의 언급은 많은 신란교학자들의 단골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결론은 결국 염불에 대한 타력신앙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교학체계의 다양한 지주이기도 하다. 염불에 대한 많은 의심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부연된 설명이기도 한 것이다. 예를 들면 저자도 신란의 주 텍스트인『교행신증(敎行信證)』에서 인용했듯이진실로 아노니, 지심과 신락과 욕생은 말은 다르나 그 뜻은 하나이다. 왜 그런가, 삼심(三心)은 이미 의심의 장애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진실의 일심이다. 금강신심(金剛信心)이라 한다. 금강진심은 진실신심이라 한다.(p.145)에서 보듯이 신란의 모든 언설은 오직 흔들림 없는 믿음을 기반으로 염불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결국신심이란 결국 이러한 절망이나 교만을 모두 버리고 타력의 본원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는 지심신락의 마음(p.146)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즉신(聞卽信)에 대해 언급한다.명호는 타력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마음에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우주적인 힘이다.(p.150)고 한다. 신란이 본원을 듣고서 의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듣는다(同)고 함을 문즉신이라고 한 것에 대한 저자의 표현이다. 신란의 철저한 타력의 강조를 저자는 더욱 이끌어 내고 있다. 대보리심도 마찬가지이다. 종래의 의미를 재해석하여 신심이 곧 대보리심(p.154)이라고 한 것까지 말이다.
이러한 신심중심의 신란교학은 결국 임종시를 기다려 임종염불에 의해 왕생극락한다고 하는 기존의 가르침마저도 극복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현세에서신심의 확정과 이에 따른 왕생의 확정이라고 하는 관념으로써 신란은 이와 같은 전통적 정토신앙의 미래지향적 구원론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p.160)고 한다. 저자가 여기에서 더욱 물음을 던지는 것은 이러한 신란의 교설은 결국칼뱅(Calvin)의 구원 예정론과도 같이, 신란의 타력결정론적인 신심 이해는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한, 순전히 우발적인 구원 개념을 낳을 수밖에 없다.(p.168)고 본 것이다. 즉신란의 타력 결정론적인 신앙관의 배후에는 구원의 절대적 객관성과 소여성(所與性), 그리고 확실성에 대한 갈망이 놓여 있다.(p.177)고 한다. 신앙 율법주의(p.179)까지 언급하는 저자는 여전히 부처와 중생 사이의 긴장감, 그리고 부처의 초월성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으며, 결국은 불교의 성도문으로의 회귀가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저자의 신학적 관심에서 촉발된 것이다. 굳이 인간을 창조해 놓고 구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현실적 시련을 주고 그 인간이 믿음의 품안으로 들어오도록 기다리는 신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라고 하는 점이다. 여기에 신란이 자신 내부에서 끝까지 파고들었던 믿음의 문제에 동질의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인간과 신, 믿음과 신앙의 대상 사이에 있어야 될 긴장이 더욱 양 세계의 신앙이 현실적으로 기능하며 파수공행하는 보편적 신앙의 건강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의문이 바로 다음 장에서 신심에 근거한 삶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된다.
제4장에서 처음부터 저자는 신앙의 본질을 솔직히 털어 놓고 있다.종교적 메시지가 약속하는 구원은 인식적으로 혹은 존재론적으로 초월적 세계이다.(p.181). 본 저서를 관통하는 불교세계를 정토불교에 한정시키고 있긴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불교는 정토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천태나 선을 비롯, 법상, 유식, 화엄, 진언 등등의 여러 종파가 있다. 이들도 때로는 정토세계를 자기화하며 이러한 자신의 교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반드시 모든 불교종파가 현세의 자기부정을 통한 초월적인 논리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초월이 아닌 무아나 연기에 바탕한 자신의 공성을 회복하는 것으로써 타자로부터가 아니고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옮을 인식하는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이 꼭 선종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정토에 대한 인식이 세 가지로 갈라지는 것도 그러한 연유이다. 이미 아는 바처럼 내세정토는 물론, 상적광토나 정불국토가 있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 여기에 최고나 최선의 정토를 만드는 길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이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 사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저자는 신란이 현실의 도덕성의 문제를 의식해서 현세의 10가지 이익을 강조(p.187~188)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역시 중요한 것은 신심은 신자들에게 정정취에 들게 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게 하는 10번째가 가장 중요하다(同)고 한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선의 돈오와는 구별을 지어 신심을 얻는 순간 왕생을 얻는다(p.191)라고 하는 가르침이 이생에서의 열반이 아니고 내세에서의 해탈, 깨달음이라고 한다. 즉 미래적 해탈에 대한 현재적 보장(p.194)이라고 한다. 이러한 논리가 이 장의 저변을 덮고 있다. 몰트만(J. Moltman) 신학의 종말론의 의미를 통해구원의 미래적 차원과 초월성을 무시하는 대가는 진정한 신앙의 포기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미래란 단순히 미래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 주면서, 아니 심지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면서 현재에 작용한다.(p.208)고 한다. 이는 구원의 종교가 갖는 현실의 도덕성과도 연계된 문제이다.
저자가 신란이 목회자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신심과 도덕의 현세적 책임(p.210)이 강조되며, 여기에 인간의 자기부정과 참회(p.221)가 개입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왕생정토한 구원자의 중생구원에 대해 신란은 아미타불이 우리를 위해 베푸는 행위로 본 환상회향(還相廻向)으로 달리 표현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환상회향의 개념이 윤리적 헌신을 위한 확실한 동기와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까 의문을 제기한다. 신란의 비관적인 인간적 도덕능력에 대한 견해가 윤리사상의 한계(p.227)라고 보고 있다. 깨달음은 왕생 이후에나 있기 때문에 먼저 왕생에 대한 신심이 간절해야 하므로 그것만이 유일한 자비심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신란사상의 출발점이자 아킬레스 건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환원되어 돌아오는 정토신앙의 한계를 저자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정토신앙이 초월적 세계를 가지는 한, 늘 겪게 되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비록 신학도 이 문제에 많은 고민을 해왔을 것이고, 여전히 현대적인 고민으로 보인다. 사실 신학이 인간의 현실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환경과 생태문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며, 현실적인 발언권마저 쇠퇴해가는 현실을 보면, 범지구적인 윤리와 도덕의 결함을 메꾸어줄 수 있을지 회의가 들기도 하다. 초월신앙의 한계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이 아무리 예토(穢土), 즉 오염된 인간계라고 할지라도 여기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사는 수많은 생명이 있다. 이들이 함께 공생하는 이 지구 전체의 문제는 종(種)을 넘어서서 유대하는 가운데 현실세계의 변혁에 대한 긍정적 확신이 서지 않는 한 파멸로 가는 수밖에 없다. 초월의 세계를 현실로 이끌어 오는 힘이 과연 신학이나 정토불교는 가지고 있을까. 필자도 저자와 같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4. 신학과 정토불교의 만남
이제 마지막 장인 제5장 상(相)과 무상(無相)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저자는 정토신앙의 궁극적 목표는 다른 형태의 불교와 마찬가지로 깨달음과 열반에 있지만 단지 다른 것은 사후 정토에 왕생하여 성취하는 것을 믿는 점이라고 한다. 그리고 결정적 차이는 타력신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저자가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정토라고 하는 방편적인 상(相)으로서의 정토가 역사적으로 점점 실재론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p.239). 그리고 신란에 의해 이러한 완전히 탈신화한 정토는 일체의 상을 초월하는 세계를 추구하는 대승사상 일반의 갈등의 문제로 돌아온다고 한다(p.247). 저자는 이러한 두 세계, 즉 상과 무상을 이어주는 정토의 이야기와 깨달음의 세계를 이어주는 고리를 자비에서 찾는다(.p248).
그리고 이를 방편법신(方便法身)과 법성법신(法性法身)으로 대비시키고 법성법신으로부터 무한하고 막힘이 없는 빛의 형상을 지닌 아미타불이 방편법신으로 출현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아미타불을 무상의 불의 세계와 상의 세계인 중생계, 열반과 생사, 깨달음과 번뇌의 세계를 매개해 주는 매개자, 즉 기독교의 중보자로 보고 있다.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의 말을 빌려 정토진종의 아미타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p.251).
이러한 아미타불에게 왜 진리계와 현실계를 중재하는 역할로서 해석하는가 하는 점은 신란을 통해 밝힌다. 정토종사들에 대한 언급 가운데에서 아미타불의 본원을 석가불이나 스승 호넨 보다도 먼저 언급하는 것은 존재론적 매개가 역사론적 매개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259). 이는 상에 묶여있는 중생들로서는 도저히 무상의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없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무한한 광명에 의한 자비의 힘이 작용한 것이라고 한다.
저자의 의도는 여기에 있다. 기독교의 구원론적 드라마를 펼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차이와 문제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 자신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라는 점, 둘째는 그리스도를 왜 유일신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로 두어야 하는지 설득력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하느님 안에 애당초 자기 분열 내지 분화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 분화의 성격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를 고민한다. 셋째는 절대의 자기부정으로 나타난 존재인 아미타불이 무상의 세계에 속한 존재라면 예수는 역사적 세계에 속한 존재라는 것이다(pp.263~265).
그리고 저자는 스스로 정토신앙을 통해하느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이제 과감히 탈신화화되어 세상과 인간을 위해 스스로를 부정하는 사랑의 하느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할 것(p.266)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다른 방식의 의문을 제시한다.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그 자체가 과연 인류 구원의 힘을 지닌 것인가, 아니면 그 배후에 있는 영원한 실재 자체의 힘인가?(p.270)만약 법성법신 그 자체에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법성법신이 중생을 위해 스스로를 부정하고 제한하여 방편법신으로서 구원의 드라마를 펼칠 수 있겠는가?(p.271)그리고 결론을 내린다.사랑과 자비야말로 궁극적 실재로 하여금 그 자체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고 죄악 세상에 거하는 인간으로 향하게 하는 힘(p.272)이라고 한다. 즉 궁극적 실재 자체가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진리를 인식하는 방식이 하나는 아미타불의 화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로 이해되었다고 본다. 저자의 의문은 이렇게 결말을 맺고 있다.
그는 다른 저서인『보살예수』에서는 예수와 대승의 보살에 대해 과감하게 이야기 한다.저는 예수님이 불교 문화권에서 탄생했다면 틀림없이 자비로운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리라 상상해 봅니다.(p.196) 그리고하느님의 사랑이란 인격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만물의 보편적인 존재원리입니다. 공(空)은 사랑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사랑은 공의 인격적 언어입니다.(p.210)라고까지 선언한다.
이러한 결말을 보면서 기독교가 왜 로고스, 즉 말씀의 종교인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성서가 진리의 언어화라고 하는 가장 기초적인 개념에 근거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학에 정통한 학자가 정토불교의 세계를 이렇게 신학적 언어로써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은 무언가 언어의 마술에 앞도당하는 느낌이다. 진리와 역사와 현실 속에서 타력의 정토신앙, 릴리전이 갖는 거대한 힘에 끌려들어가는 힘을 느끼게도 한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힘에 끌려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원심력이 있음을 또 한편으로는 감지하게 된다. 정토신앙에 있어 그 믿음이 아미타불의 자비의 힘에 근원한 것이라면 모든 인간은 그러한 무조건적인 자비에 왜 흠뻑 젖어들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또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무량광불의 은혜처럼 무한히 비추고 있다면 왜 인간은 이를 즉자적으로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여전히 신의 사랑과 진리적 자비가 우리의 삶을 어느 한 순간 포착하지 않음이 없을텐데 실존의 인간은 여전히 질투와 싸움으로 지새지 않는 날이 없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대량살상은 물론이며 이제 지구적 차원의 인류와 자연 모두가 공멸로 치닫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인류 최후의 목격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한 20년 전 미국의 ABC 방송 드라마에서 가상 핵전쟁을 무대로 특집 드라마를 만들었다. 살아남은 몇 사람이 무너진 교회 지붕 아래에 모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큰 은총을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했을 때, 그럼 죽은 자들에 대한 은총은 어떤 은총이라는 말인가 하고 되뇌인 적이 있었다. 인간의 고통도 물론 우주의 근원이신 사랑과 자비의 발로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세계에서는 왜 상대화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고통이 따른다. 나에게는 자비로운 일이 상대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는 인간의 한계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저자의 글은 필자에게도 많은 것을 느끼게 했으며 이처럼 많은 의문을 일으키게도 했다. 궁극적으로는 지상의 화합과 인류의 참된 삶의 질서를 위해 외치고 있다는 그 의도는 충분히 간파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거대한 종교의 산맥인 기독교와 불교를 초대해 참된 만남을 주선하고 그 대화에 진지하게 귀기울이도록 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 하나 세부적인 논의와 반론도 제시하고 싶었지만 그 거룩한 의도에 숨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자력이라고 하는 불교의 다른 세계를 통해 왜 정토만이냐라고 말하는 것도 예의에 맞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불교의 역사 속에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철저히 자각하게 하고 저자가 말하는 부정의 철학을 전개한 선의 맥도 있음을 저자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이러한 면에서 신학은 정토만이 아니라 선과의 만남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연 그 최초에 하나님이 지구와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는데 그 최초의 목격자가 누구란 말인가 하는 점에 주목한다면 말이다. 이는 어쩌면 불교학을 전공한 학자가 신학을 공부하여 이제는 이쪽으로부터 저쪽으로 접근해 가는 모범을 보일 차례가 아닌가 한다.
|
첫댓글 잘 봤습니다.
이런 여정을 통해 새로운 시대 새로운 법들이 나오겠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