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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둑 예 찬
청주여고 교사 金 應 斗
성자 천지도야, 성지자 인지도야(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완전한 성(誠)은 하늘의 도요, 성(誠)에 이르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중용>
바둑은 시(詩)이다.
시는 본디 작가의 온갖 체험과 자각의 밀도를 고백하고, 작가 자신의 내면적·외면적 실체를 함축적으로 묘사해 주며, 나아가 하나의 진화적 인간으로서의 극치에 도달하고자 하는 고뇌(苦惱)의 산물이다. 모르면 모르되, 바둑 또한 각 개인의 단련과 성찰의 농도를 상징하고, 그 사람의 사상과 개성을 은유해 주며, 결과적으로 하나의 창조적 인간으로서의 완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작(勞作)의 결정체이다. 시와 바둑은 모두 인생을 표현하고, 삶을 새롭게 해석하며, 마음에 와 닿는 정서와 낭만, 꿈과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전제에서, 시는 독자와의 영적인 대화나 이심전심의 교감이기를 갈구하고, 바둑은 기우(棋友)와의 애틋한 밀어나 흥미진진한 수담(手談)이기를 염원한다.
시에 부류가 있다면, 바둑엔 각자 나름의 기풍(棋風)이 있고, 시에 주제가 있다면, 바둑엔 명국(名局)을 지향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으며, 시에 매끄러운 연결과 강조가 있다면, 바둑엔 자연스런 돌의 흐름과 기합(氣合)이 있다. 또한 시에는 음조, 바둑엔 색조가 있다. 색조로써 관찰할 때의 바둑은 진실로 오색 찬란한 별세계임이 분명할 터인 즉, 바둑의 골격을 이루는 색은 흑·백·황의 삼색이니, 흑(黑)은 검은 돌, 어둠, 현묘, 백(白)은 흰 돌, 빛, 순결, 황(黃)은 누런 바둑판, 흙, 수확 등을 지칭하고, 바둑의 정신을 이루는 색은 적·청의 이색이니, 적(赤)은 붉은 피, 불, 정열, 청(靑)은 푸른 꿈, 물, 이성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둑을 종종 오로(烏鷺)의 싸움에 비유함은, 오색 중에서도 흑과 백이 으뜸인 소치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편의 시가 그 구성방식에 있어서 기승전결로 이루어지듯, 일국의 바둑은 크게 포석(布石)·중반(中盤)·종반(終盤)의 세 단계로 나뉘는 바, 그들을 어떻게 관련시키고 어떻게 매듭지으며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시에 있어서도 바둑에 있어서도 공히 성패와 영욕을 가름하는 관건이 된다.
시와 바둑에는 당연히 걸작이나 역작도 있고, 졸작이나 습작도 있다. 불성무물(不誠無物)이라고 하듯, 어느 누구에게도 시작(詩作)은 자유이되 모두가 시가 될 수 없음은, 바둑을 둔다고 해서 다 바둑이 아님과 같은 이치이다. 시의 본령이 아는 단어의 단순한 나열이나 한갓 미사여구의 구사가 아니고, 정곡을 찌르는 함축성과 압축된 언어이듯이, 바둑의 본질은 맹목적으로 두고 보는 무미건조한 수나 또는 무조건 많이 둘수록 좋다는 식의 다다익선이 아니고, 현재의 국면에 가장 적합한 착점(着點)과 폐부를 찌르는 맥점(脈點)이라 할 것이다. 일상을 통해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쓰고자 의욕하는 부단한 노력이 선행된 연후가 아니면, 과연 시다운 시, 인구에 회자하는 시를 남길 수 없는 것처럼,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자강불식을 지속하고 매수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결의가 전제되지 않고는, 결코 바둑다운 바둑, 충실한 내용의 바둑을 둘 수 없을 것임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정녕, 시상에 가장 부합하는 표현으로서의 시어를 찾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이상적으로 형상화하고 승화시키기 위해, 숱한 시행착오의 고된 작업을 감수하며 밤낮으로 고심하여 마지 않는 시인의 경건한 삶의 태도는, 보다 능률적인 착수(着手)를 위해 장고·숙고해야만 하는 기사(棋士)의 피땀 점철된 노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울러, 시인에게 필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사물을 얼마나 예리하게 보고 얼마나 솜씨 있게 묘사하는가 하는 감각과 시재(詩才)이듯이,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형세를 얼마나 정확하게 보고 얼마나 적절하게 대응하는가 하는 판단과 기재(棋才)이다. 그러므로 안도(眼到)와 심도(心到)를 두루 구비한 지자만이 장차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시와 바둑에 있어서의 지고지선의 목표는 천의무봉과 같은 위대한 경지에의 다다름인 까닭에, 완벽주의는 있어도 적당주의는 없고, 선시선종(善始善終)은 있어도 용두사미는 없다. 다양성은 있어도 획일성은 없으며, 정도는 있어도 사도는 없다. 시대를 초월하는 진정한 시나 일세를 풍미하는 훌륭한 바둑에는 창조의 고통과 희열, 고도의 암시와 복선, 그리고 향기와 여운이 있다. 바둑의 품격(品格)은 기사의 인격(人格)에 비례한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바둑이 단지 흥미 위주의 통속적인 오락이나 그저 승부만을 가릴 뿐인 흔한 유희가 아니라, 차라리 의미심장한 하나의 도(道)이자 보다 고차원의 예술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따라서 바둑은 기도(棋道)이며 또 기도(棋道)로서 오래 빛날 것이다.
바둑은 세계(世界)이다.
바둑이 우주(宇宙)의 이치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대로 바둑이 하나의 실존하는 세계라는 설명을 가능케 한다. 천원지방(天圓地方). 바둑판이 네모진 것은 음으로서의 땅의 정적이요, 바둑돌이 둥근 것은 양으로서의 하늘의 운행을 본따고 있다. 바둑판 사우(四隅), 종횡 19로(路), 361호(戶). 네 귀는 춘하추동의 사계절을, 둘레 72로는 72절후를, 361호는 일년의 날수를 의미한다. 참으로 이 얼마나 철학적 발원이며 신기한 일치인가. 바둑판은 기껏해야 가로, 세로 각 40cm의 협소한 정방형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기실 바둑은 가능한 모든 대국의 경우의 수가 십의 몇만 제곱에 해당할 만큼 심오하고 무궁무진한 변화를 내포하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한 지혜로써는 도저히 그 모두를 다 규명해 낼 수 없는 무한한 세계 내지 영원한 불가사의요, 그야말로 대우주에 버금가는 광대무변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동양은 정신문화의 원류이며, 바둑은 동양문화의 정수이다. 바둑은 중국의 요순시대에 발생한 이래 장장 오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맥맥히 전수되어 나날이 번창해 왔고, 특히 총명호학을 자부하던 현인군자와 무위자연에 심취하던 은인지사의 일생의 벗이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 신묘함과 위대함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바둑의 이념은 자유(自由)와 평등(平等)이다. 예컨대, 장기는 겨우 90개의 점과 고정된 포진으로부터 개전하며 기물의 진로가 제한적이지만, 바둑은 무려 361개의 점과 빈 바둑판으로부터 개시하며 기물의 착수가 자유스럽다. 장기는 수십의 기물로부터 점차 사멸 감소하여 마침내 소수의 생존자끼리 국지전으로 다투지만, 바둑은 수백의 기물이 될 때까지 계속 생성 증가하여 드디어 다수의 두 집단끼리 전면전으로 겨룬다. 장기는 고대처럼 왕과 귀족, 평민 등으로 이미 신분과 소임이 결정되어 있는 계급사회를 뜻하지만, 바둑은 현대처럼 모든 사람들의 가치와 기회가 동일하게 주어진 평등사회를 의미한다. 장기는 왕의 투항과 동시에 만사휴의일 따름이나, 바둑은 설령 대마가 함몰했더라도 아직 절망할 단계가 아니다. 물론 바둑돌 중에는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요석(要石)도 있고, 이미 전력을 상실한 폐석(廢石)도 있으며, 끝내 장렬하게 산화하고 만 사석(死石)도 있다. 흔히들 쉽게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논하지만, 실제로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서히 낙오하다가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지고 마는 이름없는 일개 필부가 되기보다는, 가능한 한 생명을 꽃 피우고 큰 뜻을 이루어 만천하에 그 이름을 날리는 일대 영웅이 되어야겠다. 자기가 두는 바둑알 하나하나를 자기의 분신인 양 귀히 여기고, 장차 일국의 동량지재로 키우고자 노심초사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기사이다.
세계 역사의 변화 발전을 자체내의 모순과 모순의 극복 내지 지양으로 해석하는 변증법적 정반합의 법칙은, 흑백(黑白)으로 차원을 달리하고 서로 한 수씩 교대하는 바둑돌들이 착점과 더불어 첨예한 갈등을 보이며, 질서와 혼돈으로부터 또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향한다는 말과 동어반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쪽의 소강상태가 저쪽의 혈투를 암시하고, 현재의 냉전이 장래의 열전을 기필한다. 사방에서 군웅이 할거하고 분주히 형세를 다투던 중, 불세출의 패자가 두각을 나타내고 만인의 신망을 얻어 천하를 통일한다. 한갓 소아에 집착하여 대아를 망각함은, 오늘날 세계사의 조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방향의식을 상실한 채 정저와(井底蛙) 식의 구태의연한 행동양식을 고수함으로써, 마침내 세계사의 조류를 이끌고 가는 세계인의 대열에서 자연도태하고 만다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세계의 역사가 진보하는 것이라면, 그 역사의 추진력은 몇몇 유명한 소수인의 힘이 아니라, 세계의 도처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무수한 원소로서의 다수인의 힘이 세계사의 조류라는 가상의 축상의 일점으로 수렴하여 생기는 것이며, 바둑의 원동력은 한두 개의 놀라운 귀수(鬼手)나 묘수(妙手)의 힘이 아니라, 바둑판 사우, 종횡 19로 위에서 매순간 새로운 질서를 향해 끊임없이 작용하는 모든 바둑돌의 총화(總和)와 합심협력(合心協力)일 뿐이라고 확신함이 당면한 선결과제이다.
대저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바, 기재출중(棋才出衆)함은 금상첨화 내지 화룡점정이요, 지능의 우수성과 사고의 유연성을 널리 과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사는 반상(盤上)에서 가위 절대권능의 창조주(創造主)나 무소불위의 통치자(統治者)로 군림할 수 있지만, 덕과 능력이 부족하거나 민심과 유리된 때에는 기껏 일장춘몽에 머물고 말 우려가 없지 않다. 소위 독불장군 또는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는 것도 이 세상이 남과 더불어 사는 곳이기 때문이므로, 지나치게 외곬이거나 고지식하기만 해서는 매우 곤란하다. 즉, 주관의 결여나 몰개성도 문제이지만, 너무 자기중심적인 독선과 아전인수격인 독단만 가지고는 성공과 출세가 요원하다는 말이다. 명심보감에 굴기자 능처중(屈己者能處重)이고 호승자 필우적(好勝者必遇敵)이라고 갈파한 것은, 결국 역지사지(易地思之)와 기변지교(機變之巧)를 체득하고 양보와 대타협을 실천하라는 뜻이리라. 바둑에서도 최선을 추구하는 완벽성은 필수적이지만, 부득이한 경우 차선책을 수용하는 융통성이나 시국과 형편에 따르는 탄력성 또한 더없이 소중하다. 따라서 아무리 고성능의 컴퓨터라 할지라도 바둑에서만큼은 인간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바둑이 하나의 엄연한 세계라면, 바둑통에 담겨진 저 많은 바둑돌은, 함께 때를 기다리면서도 타인과 더불어 결코 일치와 반복이 있을 수 없는 천태만상의 개개인의 집결(集結)이고, 지금 바둑판에 착점하는 이 중대한 바둑돌 하나하나는, 영겁 속에 잠시 태어나 일생을 통해 엄숙한 선택을 계속하며 일희일비하되, 다시는 과거로 회귀할 수 없는 고독하고 안타까운 일개인의 투영(投影)이다. 그리고 일보를 전진하여, 도전과 응전이라는 명제 아래 일거수 일투족마다 만인대 만인의 투쟁을 회피할 수 없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표지(標識)로서의 이 세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두 개의 투혼으로써 승부를 결정지을 수밖에 없는, 기예(技藝)와 기예(技藝)의 각축장으로서의 바둑의 세계에 있어서도, 우리가 의지할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의지(意志)뿐이다. 바둑은 철저히 외유내강과 자업자득의 세계인 것이다.
바둑은 인생(人生)이다.
무릇 인생은 언제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부여된 조건이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며, 무한한 가능성으로서만 그 존재의의를 발견한다. 인생은 한 편의 시. 결자해지의 원칙과 비결정론적 인과율이 지배하는 불가해한 영역으로서의 인생은 정녕 우리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목적하는 바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삶의 진행방향이 어제가 아닌 내일에 있는 것이라면, 바둑 또한 일수불퇴(一手不退)와 미래지향이라는 연유만으로도 우리의 삶에 직결된다. 만인이 주지하는 바, 바둑은 인생의 축도. 인생처럼, 출발점은 동일하나 경험과 지식을 축적한 자가 앞서기 때문에, 두려운 미지의 시공이기는 하나 슬기로써 극복 가능하기 때문에, 또한 각자의 시각과 접근법이 다를 수밖에 없는 미로학습이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그의 실력이 해결하기 때문에, 바둑은 한층 아름답고 그보다는 선한 것이며 그보다는 오히려 참된 그 무엇이다.
인생이 고고지성 이후 유년으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각 개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따라 고저장단의 신비한 파동을 가지고 순간순간마다 변화하는 것처럼, 바둑 또한 흑의 제일착 이후 수가 거듭될수록 끊임없이 성장하고 진화하는 무정형의 생물이며, 그것을 두는 사람의 단련과 성찰, 가치관을 변수로 하는 하나의 함수이리라. 청운의 뜻을 품고 불모의 땅을 옥토로 가꾸는 초반(初盤), 용전분투하고 묘기백출하며 권모술수를 다하는 중반(中盤), 최후의 승리만이 참된 승리임을 믿기에 더욱 분발하고 선수(先手)와 반집을 다투는 끝내기, 피아의 전과를 확인하는 계가(計家), 이윽고 온갖 영고성쇠의 이치를 터득하고 반추하며 돌을 쓸어 담는 감개무량한 종국(終局) 등은 너무도 인생의 모습과 닮았다. 다만, 인생은 일회적이고 연습을 불허하므로 실패가 치명적인 반면, 바둑은 반복적이고 연습을 허용하므로 설령 이 판을 놓치더라도 다음 판에서 만회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말하자면, 바둑은 잠시 인생의 보편적인 지식과 숙명적인 한계를 초월하여, 첫수로 화점(花點)이나 소목(小目)을 선호하는 상식 대신 외목(外目)이나 고목(高目) 또는 천원(天元)에 두는 파격이 가능하고, 호전적으로 변신하여 끊임없이 도발을 감행하거나 생사존망을 걸고 건곤일척의 싸움을 전개하는 모험이 충만하니, 우리는 그것을 바둑의 삼매경(三昧境) 또는 반상의 호연지기(浩然之氣)라 부를 것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 것을 소중히 익혀 새 것을 안다. 오늘날처럼 불확실성의 시대에 결코 현재에 안주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절차탁마하고 일신 우일신(日新又日新)함으로써, 미래의 모든 다양한 가능성에 대비한다. 과거의 전통과 보수로부터 배운 바를 소화시키고, 현대의 새 것과 미래의 진보에 접목시킨다. 따라서 바둑은 동서고금에 통하니, 수백년 전의 기사와 같이 대국하고 수백년 후의 기사와 같이 호흡할 수 있다. 고수들의 기보를 연구하고, 그들의 수법을 암기하며, 차츰 모방과 적용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전인미답의 신수(新手)를 창조해 낸다. 그리고 그러한 공부로부터 자연히 생성되는 심안(心眼)은 마침내 능히 오십수 백수까지 내다볼 수 있는 선견지명을 부여한다. 물론 전문기사에게는 수졸(守拙), 약우(若愚)로부터 좌조(坐照), 입신(入神)에 이르기까지 피나는 노력 이외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절대적이지만, 대다수의 일반기사에게는 천재성보다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옳다면, 투철한 목표의식과 실천의식이 없는 자에게는 인간승리나 고진감래와 같은 좋은 귀결이 있을 리 만무하다. 우리의 인생이 무(無)에서 출발하여 훗날 아름다운 가치와 찬란한 업적을 남기듯, 바둑은 공(空)에서 시작하여 종내 비범한 수와 자랑스런 대국을 남기게 된다. 바둑을 잘 둔다는 것은 하늘의 은총이며 운명의 축복이며 생활의 윤택이다. 우리의 삶이 서로서로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각자 나름대로의 삶의 기준과 행동양식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른 궤적을 그려 나가야 하듯, 바둑에 있어서도 정석(定石)이나 기리(棋理), 격언(格言)이나 기훈(棋訓) 등은 결국 하나의 도구로서의 역할에 그치고 말 뿐이다. 그리하여 기사는 어떤 상황에 봉착하더라도 충분히 임기응변의 수를 둘 수 있고, 그 때 예상되는 과정이나 수순(手順)을 착오없이 제시할 수 있으며, 나아가 철저한 책임의식 아래 묵묵히 전심치지하고, 강인한 승부근성 아래 오로지 전력투구하는 승부사적(勝負師的)인 정신자세를 바둑의 요체로 삼는다고 할 것이다.
인생에는 의미있고 보람있게 살고자 하는 자기완성(自己完成)의 목표가 있고, 바둑에는 가장 우수한 기보를 역사 속에 남기고자 하는 가치창조(價値創造)의 목표가 있다. 우리네 인생이 이미 예정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은, 바둑이 지금 이 한 수에 의해서 전혀 다른 한 판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그러므로 인생이나 바둑이나 모두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항상 목표를 향해 일심정진하되, 특히 기회를 잘 포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인생이 순식간에 승패가 결판나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고 순위가 뒤바뀌는 장거리 경주와 비슷하듯이, 바둑은 한두 번의 접전으로 자웅이 결정되는 단기전이 아니라, 수백수를 겨루는 동안 때로는 욱일승천하고 때로는 의기소침하며 부침과 반전을 거듭하는 장기전이라 할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순천자존(順天者存)하고 역천자망(逆天者亡)하듯, 바둑은 지나간 과거사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변화하는 파동으로서의 현상을 치밀하게 파악하며, 수렴하는 함수로서의 미래사를 정확히 예측할 줄 아는 거시안적인 세계관만이 우승열패(優勝劣敗)를 나누는 척도가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것이다.
바둑은 멋이다.
일견하여 여기저기 단순하게 놓여진 듯 하면서도, 실은 적절하게 상호작용하는 바둑돌의 절묘하고 유기적인 모양, 상대방으로 하여금 여유를 허락지 않는 박력, 조화와 균형 또는 두터움을 위주로 하면서도, 때로 요처를 선점하기 위해 과감히 손빼기하는 발빠른 행마, 난국을 타개하는 한 수와 그에 수반되는 치밀한 수읽기, 대마의 사활과 궁도 관계, 일발필도를 노리는 급소와 맥, 환격과 자충수, 치중과 후절수, 수상전과 공배, 소위 축머리, 사석작전, 회돌이 등 무엇 하나 멋지지 않은 것이 없고, 이는 곧 바둑이 멋이라는 가설을 살과 뼈처럼 입증하는 것이다. 옛부터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일컬어 왔을 만큼, 바둑은 풍류와 운치가 뛰어나고 흡인력이 강하며 가히 점입가경이다. 더구나 과학성과 합리성을 지닌 최고의 두뇌 스포츠이기 때문에, 바둑은 매력적인 취미요, 대표적인 여가선용이요, 영속적인 삶의 활력소이다. 바둑엔 파죽지세와 허장성세가 있고, 속전속결과 완급조절이 있으며, 금일의 득의양양과 후일의 권토중래가 있다. 국후 복기(復棋)에서의 패기만만한 무용담과 기상천외한 수단이 있고, 현자의 천려일실과 우자의 천려일득이 있다. 회자정리에 따라 이제 지기(知己)와 작별하되, 곧 괄목상대하는 모습으로 다시 만나리라는 가슴 설레는 기대가 덤으로 남는다. 역시 바둑은 멋이다.
그러나 바둑의 최대의 멋은 다름아닌 승부(勝負)에 있다. 부언한다면, 바둑에 있어서의 승부야말로 바둑의 압권이자 백미라 할 것이다. 승부를 포함하지 않는 바둑이란 목적 없는 삶 이상으로 미처 상상하기조차 곤란하다. 눈물 젖은 식사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속속들이 알 수 없듯이, 처절한 승부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바둑을 깊이있게 이해할 수 없다. 바둑은 언뜻 보면 상대방과의 겨룸이지만, 기실 자기자신과의 겨룸이라는 성격이 더 강하다. 경적필패(輕敵必敗) 완비불패(完備不敗)라, 과연 위기십결(圍棋十訣:不得貪勝, 入界宜緩, 攻彼顧我, 棄子爭先, 捨小取大, 逢危須棄, 動須相應, 愼勿輕速, 彼强自保, 勢孤取和)은 바둑의 지표임을 자랑할 만하다. 어떤 대결, 어떤 전투에서도, 자신감이야말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첩경이며,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나 침착을 유지하는 평정심이야말로 패배하지 않는 제일의 요소이다. 허허실실로서의 바둑에서, 하수는 욕심과 단견, 소탐대실로 이전투구하고, 상수는 자제와 관조, 심모원려로 용호상박한다.
바둑은 결국 사필귀정이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당연하면서도 숙연한 산술급수적 논리가 통용되는 격물치지의 세계이다. 바둑은 정중동(靜中動)이고 암중모색(暗中摸索)이며 유능제강(柔能制剛)이다. 노골적이거나 단도직입적인 수로는 성공을 기약하기 어렵다. 바둑이 나아갈 길을 기도(棋道)라고 할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승부를 겨냥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면, 바둑은 부단히 노력하는 시인으로서, 투쟁하는 세계인으로서, 거시안적인 세계관을 지닌 자만이 승리한다. 물론 승부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지나치게 기리와 원칙에 얽매이는 이상론자보다는, 발상이 자유롭고 우형도 감수하며 끈질기게 버티는 현실론자가 우세하다. 자고로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百勝) 또는 유비무환(有備無患) 무비유환(無備有患)이라 했듯이, 사전에 용의주도하게 잘 대비해 두는 사람은 십중팔구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승패는 병가의 상사라 했으니, 승자는 겸허하고 패자는 반성할 줄 아는 성숙된 인격이 요청된다.
참으로 바둑을 일파만파라 할까, 우여곡절이라 할까. 승부처에서 기막힌 묘수일발로 기사회생하고 불각의 실수일착으로 급전직하하며 끝내 형세를 역전시키고 마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까닭에, 바둑은 역동적이고 멋이 있으며 더욱 음미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즉, 바둑은 수백에 달하는 많은 돌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이라는 성격을 견지하는 가운데, 때로는 일촉즉발이란 표현처럼 사소한 수순의 전후로 경천동지와 상전벽해를 초래하고, 때로는 일순간의 방심으로 사면초가와 일패도지에 직면하는 등의 일대 사건도 허다하므로,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영화보다 더 짜릿하다. 특히, 인생은 새옹지마요 바둑은 기칠운삼(技七運三)이란 말처럼, 실력의 우열이나 형세의 유불리가 그대로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는 예가 적지 않기 때문에, 바둑은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하다는 역설도 성립할 수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만물은 유전(流轉)하는 것이며, 절대불변하는 실체는 없다. 요컨대, 바둑의 승부란 최후의 반패를 이어 종국에 다다를 때까지 줄곧 요동하는 것으로서, 바둑이 유리할 때 일거에 승세를 굳히는 간명한 진행이나 두텁게 가일수해 두는 예지, 백중지세일 땐 견실과 불패를 중시하는 중용지도(中庸之道), 비세일 땐 기자절야(棋者切也)라 기회를 엿보아 일단 끊고 천하를 판가름내는 일전을 도모할 줄 아는 담력,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국면에서도 결국 묘수와 수순을 발견해 내는 집중력, 대마가 빈사지경일 때 기필코 활로를 찾거나 옥쇄를 각오하고 패(覇)로라도 한껏 버틴다는 식의 투지와 피땀 등을, 가히 유전하는 삶으로서의 역전보에 아로새길 수 있는 참멋을 아는 용자(勇者)가 아니고는 다음을 맹세하지 못한다.
「나는 승리를 탐하는 욕심으로 서둘기보다 불패(不敗)를 향하는 무심(無心)으로 인내하고 기다리며, 시종일관 전심전력을 다하는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승부사(勝負師)로서 싸운다.」
<360-210>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청주여고 교사 김응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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