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아니할 것이라.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어미새 사랑
근간에 텔레비전의 볼거리로 어미새의 아기새 사랑을 추적한 프로가 있었다. 1년 여에 걸친 추적 끝에 찍어낸 이 다큐멘터리는 조물주가 인간에게 숨겨온 비장의 섭리를 폭로해주는 것만 같아 감동적이었다. 인간세계의 자식 사랑도 천차만별이듯 새 세계의 새끼 사랑도 천차만별인데 암수(자웅)의 자태나 색채와 목청의 미추가 새끼 사랑과 함수관계가 있다 한다.
이를테면 꿩이나 공작 같은 수컷이 예쁜 새들은 암놈 꼬시는데만 혈안이요 새끼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쁜 아빠이게 마련이고 반대로 도요새 같은 암컷이 예쁜 새는 암컷이 방탕녀로 수컷이 알을 품고 먹여 길러야 하는 나쁜 어미이게 마련이라 한다. 암수에 밉고 꼽고가 없는 새들은 새끼 사랑에 더불어 협조적이고, 인간 세계를 그렇게 똑같이 닮을 수 있나 싶어진다.
빙판에서 사는 펭귄은 어미새가 알을 낳을 때 아빠새 두 발 위에다 낳는다. 펭귄의 발에는 털이 나있기에 얼음의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일단 알을 받으면 아빠새는 부화할 때까지 60일 동안 꼼짝도 못하고 서있어야만 한다. 물론 먹이를 구하러 갈 수도 없다.
그동안 어미 펭귄은 유한 마담처럼 유유히 그 앞바다를 헤엄치며 부화할 새끼에게 먹일 유아식을 뱃속에 저장한다. 새끼가 알에서 깨어나면 어미새는 그동안 뱃속에 저장해둔 먹이를 반추하여 새끼에 먹이면서도 굶주림으로 아사 직전인 아빠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아빠 펭귄은 비틀거리며 바닷가로 다가가지만 한 두번 넘어지길 거듭하면 일어날 기운이 없어 조용히 죽어간다. 아빠 펭귄은 새끼 사랑의 순교자다.
뉴기니의 극락조는 수컷의 등위에 알을 낳아 부화할 때까지 업고 이슬만 마시며 날아 다닌다. 부화 와 동시에 새끼를 날려 보내고 아빠새는 기진하여 추락해 죽는다고 한다. 어쩌면 요즈음의 아버지들처럼 돈만 벌어다대고 권위는 증발하고 없는 부친부재 현상을 펭귄이나 극락조의 아빠새가 풍자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번 다큐멘터리에서 감동을 받은 생태로는 목청이 좋은 뼈꾸기의 탁란을 들 수 있다.
게을러서 알을 낳고 살 저들의 둥지 하나 짓지도 않으면서 암수가 사랑하는 것은 좋아라해 남의 것에 알을 낳아 부화시키는 새가 있다. 뻐꾸기는 저의 알 색과 같은 알을 낳는 꾀꼬리나 오목눈이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 놓는다.
미련한 어미새들은 제 알인 줄만 알고 품어 부화시킨 후에도 먹여 기르니 뻐꾸기를 기소한다면 주거불법점유에 모친사기죄가 적용된다. 요즘 미혼모나 불륜이 파생시킨 영아유가 급증하고 있다던데 세상은 바로 뻐꾸기 세상이 돼가는 것 같고, 인간 사회가 진화한다 해도 오십보 백보임을 실감게 하는 어미새의 새끼 사랑이다.
○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는 자에게
한 거부가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아주 어릴 때 아내가 죽었다. 아내가 죽자 그 아들을 보살펴 줄 가정부 한 사람이 그 집에 들어 오게 되었다. 아들이 죽자 마음이 아픈 거부도 곧 뒤따라 죽게 된다. 그런데 그에게는 친척이 전혀 없었다. 그 막대한 재신을 유산으로 남겨 줄 만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유서조차 발견할 수 없었으니 당국으로서는 그의 재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거리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아무래도 그의 재산을 모두 국고로 넘겨야 할 것 같았다. 마침내 주 정부에서 그의 재산
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살던 저택과 개인 소지품들을 경매에 부치기로 했다.
갓난 아이 때부터 그 아들을 길러온 가정부도 이제 나이가 들어 꽤 늙었다. 그러나 그 거부의 집에 들어가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나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가난했다. 돈은 없었지만 그녀는 그 경매를 보러 갔다. 그녀가 갖고 싶은 것이 꼭 하나 있었다. 그녀는 가구라든가 비싼 양탄자 같은 것은 살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집 벽에 걸려 있는 그림, 그 아들의 그림을 갖고 싶었다. 그녀는 그 아들을 사랑했다. 비록 인척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그 소년이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그림이 경매에 부쳐지자 아무도 그것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몇 백원만 내고 그녀가 그것을 샀다. 그것을 사서 집에 가지고 왔는데 벽에 오랫동안 걸려 있었던 것이라 아주 더러웠다. 그녀는 그 사진틀 뒤를 뜯어 유리를 꺼내면 깨끗이 닦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진틀을 뜯어내자 무슨 중요한 서류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그 서류를 변호사에게 갖다 주었다. 변호사는 그녀에게 그 동안 어렵게 지니시더니 이번에는 일이 아주 잘 풀리는가 봅니다. 이 사람이 그 그림을 살 만큼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다 넘겨 주겠다는 유서를 써 놓았군요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하실 것이다. 아멘.
○ 사랑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 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마 22:37-40).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예수님은 최고의 은사로 사랑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표현에는 헬라어로 '에로스 '(성적 인 사랑)와 '스트로게(가족혈족에 대한 자연적인 사랑), '필리아'(친구에 대한 우정의 사랑), '아가페'(자기 부정적이고 기꺼이 자기를 남에게 주는 사랑)가 있는데,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에로스나 스트로게, 필리아의 사랑을 포괄하는 지고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함이 올바르게 될 때 이웃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증표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요 14:15-23)말씀 하셨습니다. 아멘.
○ 사랑의 절정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인이 다섯 살과 세 살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철길 가에 있는 신발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기 때문에 안고, 업고, 공장으로 출근하여 공장 안에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부인은 일을 했습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두 아이들이 엄마 몰래 철길로 나갔습니다. 철길에서 조약돌 치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고 놀고 있을 때 기차가 달려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애들이 없다는 소리에 엄마가 뛰어나가 보니 철길에서 놀고 있고 있었습니다. 쏜살같이 달려가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 낸 순간 기차가 곧바로 엄마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후 두
형제는 고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어른이 된 후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라고.
그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몇 백원을 받으며 일했던 그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굶고 아이들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던 그것이 아닙니다.
그 기찻길에서 놀고 있던 두 아이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그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정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찬송 작사자 하버겔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주느냐'라고 읊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기 때문입니다. 아멘.
요한일서 4:8-10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은 매우 강합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자녀를 구하기 위해 상해를 입거나 심지어 목숨을 버리는 등의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성애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매우 강합니다 고목 위에 앉아있는 독수리를 보았습니다. 그 독수리는 강변에 있는 어미 거위와 약 10마리 가량의 아기 거위들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아기 거위 한마리가 무리에서 이탈하자 독수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급습하여 채어 갔습니다.
그 즉시 어미 거위는 독수리를 쫓아 공중으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로 독수리를 물었습니다. 어미 거위는 독수리가 아기 거위를 놓을 때까지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강합니다!
그러나 모성애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치시는 법이 없으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더 강합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분의 놀라우신 사랑을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 엄마 노예의 죽음
어떤 선교사가 임지로 가는 도중에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되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가까이 가보니 아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그 엄마기가 주인을 보고 주인님, 나도 아들과 함께 사 주십시오. 저희 모자가 함께 가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하며 애원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안돼"하며 아들만 끌고 가는데 그 엄마는 생명을 내걸고 함께 사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엄마도 울고, 아들도 울고.... 한번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던 그 선교사는 주머니의 모든 돈을 털어 그두 모자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선교사가 풀밭에서 비명을 지르고 넘어졌다. 실신이 된 선교사의 뒷발에 독사의 이빨 자국이 나 있자 엄마 노예가 입을 대어 독을 빨아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거의 죽었던 선교사가 일어나 보니 독기를 입으로 빨던 엄마 노예는
얼굴이 퉁퉁 부어 죽어 있었다. 엄마 노예는 자기를 사 준 그 고마운 선교사,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 자유를 준 이 선교사를 위하여 사망의 독을 입으로 빨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나의 생명을 건져 주신, 아니 우리 가족 전체를 살려 주신 예수님을 위해 살 수 있을까?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