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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데나리온의 약속
말씀/마태복음 20:1-34
요절/마태복음 20:13, 찬송가/375장
우리가 지난주에 신앙공동체인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관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다 같은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지만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것 때문에 서로 비교하게 되고 갈등이 생깁니다. 더구나 우리 안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갈등하고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에 교회공동체가 시끄러워집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싫어서 아예 교회에 나가는 ‘가나안’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해결방법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통해서 해결의 답을 찾기를 기도합니다.
1장, 한 데나리온의 약속(1-16)
1-16절까지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출발은 19장입니다. 영생을 얻기 원하였지만 부자 청년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자신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렸는가를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영광을 약속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느니라.”(19:30) 이 말씀이 비유의 끝에 또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비유는 왜 이런 일이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연세대 슬로건이 ‘the first and the best’입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가장 먼저 시작했고, 그러니 가장 최고다. 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시작하면 좋은 위치를 선점하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은 사실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전혀 없는 일도 아닙니다. 구글이 검색엔진을 세계에서 22번째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전 세계 검색엔진 1위입니다. 또 회사에서도 같이 출발했는데, 아니 후배였는데 아무개는 계속 승진하며 올라갑니다. 그래서 선배인 누군가는 아무개 밑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안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일 때문에 힘든데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생기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비유를 보겠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커다란 포도농장을 가진 주인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일꾼을 구하고자 이른 아침에 시장에 나갔습니다. 시장에 가면 하루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일찍부터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일꾼이 필요한 사람이 와서 필요한 만큼 사람을 뽑아 데려갑니다. 그러면 일꾼은 하루 일을 해서 품삯을 받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늘 있는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시장에 가면 인력사무소라는 곳이 있는데, 이런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곳입니다.
아무튼 보통 새벽 5시부터 인력시장이 열립니다. 주인은 새벽 일찍 시장에 나가서 일군들과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려와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볼 때, 그들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제3시 오전 9시에 다시 시장에 나갔습니다. 보통 이 시간이면 새벽부터 일자리를 구하러 나왔던 사람들이 다들 일자리를 구해서 일하러 갔을 시간입니다. 또 이 시간에 일하고 있다면 새참 먹는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이 주인은 시장에 가서 보니 장터에서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자리를 얻지 못해 오늘은 공친 날입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집에는 빈손으로 갈 수가 없어, 그냥 장터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튜브를 보면 이런 사람들은 보통 인력사무소 옆에 있는 편의점 의자에 앉아 불안한 눈빛으로 스마트 폰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주인은 이들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새벽부터 나와 있던 일꾼들을 뽑으면서는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아침 아홉시에 나와서 뽑은 일꾼들에게는 일 한만큼 주겠다는 품삯을 약속했습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일꾼들도 하루치 품삯을 다 받을 것이라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일꾼 구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제 6시인 낮12시 또 제 9시인 오후 3시에도 시장에 나가 일꾼들을 구해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만큼 주인의 포도원은 크고 일군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일꾼 구하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제 11시에도 시장에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오후 5시로 일을 끝낼 시간입니다. 야간작업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일꾼을 뽑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때까지 장터에 서 있는 이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여기에는 이들에 대한 주인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루 일을 한다는 것은 곧 그날 하루 먹을 것을 버는 것입니다. 일을 하지 못하면 품삯이 없고, 품삯이 없으면 당장 먹고 살 것이 없습니다. 손가락을 빨아야 합니다. 그만큼 일자리는 절박합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일자리를 얻고자 새벽부터 인력시장에 나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사람들, 하나 둘 일자리를 구해서 떠났습니다. 하지만 아뿔싸 자신들을 불러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왜 안 불러주었을까요? 무거운 짐을 날라야 하는 곳에서는 힘 좀 쓸 것 같은 사람들만 뽑았습니다. 삽질이 필요한 곳에서는 군대에서 삽질 좀 해 본 사람만 뽑아갔습니다. 또 이런 저런 기술이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저렇게 뽑혀서 갔습니다. 그러나 체격도 별로이고, 그렇다고 이런 저런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 이들은 끝내 일자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하루 종일 시장에서 혹시라도 심부름이나 또는 작은 짐이나 옮기는 일이라도 생길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제 빈 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주인은 이들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품삯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제라도 자신들이 품꾼으로 뽑혔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을 것입니다. 가서 짧은 시간이지만 열심히 하면, 주인의 눈에 들어, 오늘은 공치지만 내일은 뽑히지 않을까?라는 기대 가운데 포도원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해가 저물었습니다. 이제 하루 품삯을 정산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먼저 온 자부터 시작하여 정산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주인은 어떻게 정산을 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제 십 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제 11시, 오후 5시에 온 자들은 작업복에 땀도 배지 않았습니다. 포도원 농장에 오후 5시에 도착해보니, 작업장 반장이 ‘아저씨들, 이리 오세요. 여기 농약 통에서 농약을 받아다가 각자 20kg 등짐에 들고 가셔서 농약을 좀 뿌리주세요.’라는 작업 지시를 받습니다. 작업반장에 지시 받고, 농약통에서 농약을 20kg 받고 하다보니, 한 10-20분 가량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결국 일한 시간은 4-50분으로 1시간도 채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농약 뿌리는 일 좀 하려고 했더니, 해가 져서 일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정산 할 것도 없습니다. 1시간도 일하지 않았으니, 1/10 데나리온만 주든지 아니면 포도 몇 송이씩만 주고 들려 보내도, 사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한 일이 없는 이들에게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의 품삯을 주었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삯을 받았으니, 이것은 순전히 은혜입니다. 주인은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이들은 주인이 베푼 은혜에 감격하여 돌아갔습니다.
한편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 본, 다른 품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와! 주인 정말 대단하다.”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자신들이 받을 품삯을 잽싸게 계산했을까요?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와 그럼 나는 세시에 와서 세 시간 일했으니, 적어도 두 데나리온 이상을 받지 않을까? 나는 정오와 와서 6시간 일했으니 적어도 세 데나리온은 받지 않을까? 무엇보다 가장 먼저 포도원에 들어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습니다. “와 오늘 땡잡았다. 대박이다. 잘하면 일주일치 품삯을 하루 만에 벌겠구나! 야호!” 아무튼 다들 기대와 흥분으로 설렜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들의 계산과 달리 모두에게 다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하루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지만 이들은 감사보다 원망과 불평이 가득했습니다. 그 이유를 말합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들의 원망은 상대적으로 생각해 볼 때 타당하게 보입니다. 이들이 옳고 주인이 불공평하고 잘못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인이 늦게 온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고 "우리 주인은 참으로 은혜와 자비가 풍성한 분이시구나." 라고 생각하며 주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주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새벽부터 포도원에 와서 하루 종일 뜨악 볕에서 일했습니다. 뜨거운 뜨악 볕에서 일하느라 허리도 아프고 온 몸에 땀에 젖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다 끝날 때 쯤 와서 그냥 기웃거린 사람들과 똑 같은 품삯을 주니 화가 난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주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화가 났을까요?
어찌보면 주인이 경영을 잘못한 것입니다. 늦게 온 품꾼들에게 은혜를 베풀려면, 먼저 온 품꾼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계산해서 주고 돌려 보낸 후, 안 보이는 곳에서 주었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 먼저 온 품꾼들이 보는 앞에서, 늦게 온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주어 이 문제가 생기게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이런 식으로 포도원을 운영하면 누가 새벽부터 와서 일하고자 하겠습니까? 이거 소문나며, 다 오후 5시에 올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무노동 무임금, 성과금과 같은 것들을 정해서 경쟁을 시켜가며 일을 시킵니다. 그렇다고 먼저 온 사람의 불만은 타당한 것입니까?
주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주인은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이들에게 처음 약속한 것은 한 데나리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한 데나리온의 약속대로 주인은 이들에게 정확히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지킨 주인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더구나 주인은 무엇을 말합니까?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은 이들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주인이 처음 온 사람들의 품삯을 빼어서 나중 온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도 아닙니다.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 뜻대로 나눠 준 것입니다. 그것도 한 시간 밖에 일하지 못한 자일지라도 불쌍히 여겨서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하루를 기쁨으로 잘 마치게 했습니다. 주인은 선을 베풀었는데, 오히려 이를 악하게 여기고 불평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 대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십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나중 된자, 먼저 된 자는 누구를 말할까요? 또 이들이 먼저 되고 나중 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나중 된 자는 말 그대로 나중에 온 자입니다. 별로 수고하지 못한 자입니다. 먼저 된 자는 비유에 나온 대로 새벽부터 와서 하루 종일 수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나중 됩니까? 이들은 먼저 와서 수고를 하고 약속대로 품삯을 받지만 주인에게 감사보다 불평과 원망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 된 자들은 일한 것과 상관없이 받은 품삯으로 주인에 대한 감사가 넘치고 그 은혜를 깊이 간직하기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 약속한 한 데나리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영생에 대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부자청년이 얻고자 했지만 얻지 못한 것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께서 부르신 자들에게 이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이 구원과 영생을 똑같이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주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과 영생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데, 구원과 영생만 주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트러블이 생기는 가장 큰 원인은 비유를 볼 때에, 내가 수고하여 받은 것과 다른 사람이 받은 것을 비교하는데서 오는 원망이요, 불평이요, 갈등입니다. 한마디로 본문에서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 온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절대성을 상실하고 상대적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새벽부터 장터에 나왔는데,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루 공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배고파 우는 자식들과 슬픈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인생의 비참함을 맛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포도원 주인을 만나 새벽부터 일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도 처음에는 새벽부터 자기들을 불러주신 포도원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도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 온 자와 똑 같은 품삯을 받는 것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은 먼저 부르심을 받고 남보다 일을 좀 많이 했다고 해서 특권의식을 가지고 특별대우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교만해져서 은혜를 감사치 않았습니다. 은혜를 감사치 않는 것이 죄의 뿌리입니다(롬1:21).
신앙공동체인 교회에서 먼저 온 사람도 있고, 나중 온 사람도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개척자로 많은 수고를 합니다. 교회를 세우고자 헌신도 더 많이 하고 시간과 정성을 쏟으며 수고합니다. 이렇게 수고해서 교회가 세워지면, 후배들이 생기게 됩니다. 후배들은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교회의 터전 위에서 별 고생이나 헌신 없 이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선배인 나는 이렇게 수고를 많이 했는데, 후배들은 왜 수고를 안 하는가? 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갈등과 불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다 다릅니다. 어떤 분은 결혼해서 딸만 낳습니다. 어떤 분은 아들만 낳았습니다. 어떤 분은 아들과 딸을 낳아서 모두의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교대상이 됩니다. 더구나 수고를 많이 한 나는 받은 축복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별로 수고하지 않은 누구는 내가 봐도 더 많은 축복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힘든 마음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가? 하며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불평과 원망을 없애기 위해서 세상에서는 성적을 매깁니다. 성과급에 따라 상급을 줍니다. 그러나 내가 언제 왔든, 무엇을 했든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한 데나리온’을 약속대로 주십니다. 곧 구원과 영생을 주십니다. 서로를 비교하여 차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한 데나리온, 구원과 영생을 주십니다. 이 주님은 잘못이 없으십니다. 그럼 무슨 생각이 듭니까? 왜 새벽부터 와서 뼈 빠지게 일해? 차라리 오후 5시에 오면 너무 속 보이는 행동이니, 한 오후 3시쯤 와서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왜 새벽부터 포도원 농장에 나와 일해야 하나? 태어나서 보니, 목자 자녀이고, 선교사 자녀라, 어디 가지도 못하고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나는 새벽부터 온 것이 아니라, 심야부터 왔어! 하며 손해심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새벽부터 일한 사람은 새벽부터 일할 수 있다는 기쁨 가운데 하루를 평안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터에서 하루 종일 일자리를 얻지 못해 어슬렁 거리며 지낸 사람들은 불안과 염려 가운데 보내야 했습니다. 오늘날 엄청난 스펙을 쌓고 대학을 졸업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자신을 불러주는 회사가 없습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절망한다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본문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품꾼들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오후 5시, 3시 그때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막차를 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행복지수가 다르고 삶의 질이 다릅니다. 이들에게 노는게 노는 것이 아니고, 쉬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내가 부름을 받지 않았다면 나의 에너지와 능력과 시간을 나의 욕심을 채우는데 쓰다가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나를 부르셔서 구원을 주시고 주의 일에 쓰임 받게 해 주신 것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내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더구나 내가 언제 왔든지 시간이 지나면 나도 선배가 되고, 리더가 됩니다. 또 주님의 도우심이 나타나는 방법은 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다 다양하게 주님께서 합당하게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다보면, 오히려 내 마음만 좁아지게 됩니다. 은혜가 말라 버리게 됩니다. 결국 뒤쳐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보통 자기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나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쁘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는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했거나 상대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먼저 왔지만 나중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사는 그 사람은 나중 왔지만 먼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 마음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 또 내게 없는 복을 받는 그 사람에 대해서도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때 공동체가 하나 되어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모임이 이런 교회,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장, 인자가 온 것은(17-28)
이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자신이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메시아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주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답답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시고자 하는 잔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고통스러운 잔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 잔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무작정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를 듣고 분히 여겼습니다. 아마도 두 자리 빼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 똑같은 수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 즉 세상에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권세를 부린다는 것을 이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익숙하고 또 이들이 꿈꾸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어떻게 달라야 한다고 하십니까? 26,27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을 흔히 ‘섬기는 리더쉽’을 나타내는 것으로 많이 인용합니다. 심지어 이 말씀을 인생의 성공비결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전혀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크게 되고 으뜸이 될 수 있는가 이를테면, 인생 성공의 비결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어떤 존재입니까? 자식과 아내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아버지로 인정받기 위해서 고생하고 수고합니까? 그냥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남편보다 더 크게 인정받고자 경쟁하며 수고합니까? 아닙니다. 한 목자님이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영적 야망 가운데 이 말씀을 붙잡고 열심히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정을 좀 받았지만 만족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섬기는 않아도 더 인정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목자를 보고 비교하는 마음에 더 힘들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무슨 말입니까? 내가 아버지이니까? 내가 목자이니까? 내가 선배이니까? 내가 하나님의 종이니까? 당연히 수고하고 헌신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너 왜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 헌신하는데, 인정하지 않아, 알아주지 않아?”라고 하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신자는 누구입니까? 주님께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받은 우리는 이미 큰 자요, 으뜸된 자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왕이요,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이 세우신 위대한 사역자들입니다. 계시록에는 주님이 오시기까지 우리는 왕 노릇한다고 하였습니다. 왕은 최고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넘버 1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으뜸 되기 위해서 큰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으뜸 된 자이고 큰 자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아버지들이 한 달 동안 그렇게 수고해서 월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월급으로 치킨을 사서 자녀들에게 줍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치킨을 맛있게 먹는 그 모습을 보고 흐뭅해 합니다. 신자는 그런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큰 자가 되기 위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요, 내가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당연히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늘 감사합니다. 내가 섬긴다고 누구 인정해 주든 인정해 주지 않든,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섬기다보면, 주님의 은혜 가운데 더 큰 자가 되고 더 큰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또 그렇지 않을지라도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크고자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게 되면 즉 큰 자가 되고자 하는 목적 지향성을 갖고 섬기다보면, 늘 사람과의 갈등과 비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국은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누가 더 인정 받냐? 누가 더 크냐? 경쟁하고 갈등하고 그래서 뭔가 큰 소리 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도우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이런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가장 높고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모든 권세와 영광을 붙잡고 모든 사람을 휘두를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광과 권세를 누리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것도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여기에 우리 지금 상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 사랑받고 섬김 받고 인정받는다고 해서 인생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 그런 쉬운 자들이 아닙니다. 죄로 치며 좀 과태료를 낸다고 해서, 병으로 치면 약 몇 알 먹는다고 우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단 하나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대신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6-10)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많은 영광과 특혜를 갖고 있지만, 다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섬기는 삶을 사신 그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누가 크냐 다툴 것이 없습니다. 또 옆 사람과 비교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진정한 으뜸,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장,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29-34)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떠날 때에 맹인 두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사람들의 만류에도 계속 외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보기를 원한다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곧 메시야로 오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앞에 나온 베드로나 제자들이 왜 헤매고 있는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구해야 할 것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떠야 제대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제대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눈을 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