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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심성의 날렵한 터치 Gorgeous Mind, Swift Strokes
화사하고 화려한 그림의 뒤에는 화사하고 화려한 작가의 심성이 있다. 윤은숙의 그림은 현란한 색채의 아라베스크와 활달하고 날렵한 터치 그리고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질감 및 색채의 중층구조로 충만 된다. 그리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정서적으로 가슴에 닿아오는 그러한 색채와 터치의 이면에 현상을 빌려 대상의 정신을 극대화하려는 의지가 숨막히게 표출된다.
윤은숙은 주로 꽃을 그린다. 꽃은 터질 듯한 향기를 내뿜는다. 오히려 자연 속에 피어 있는 꽃들이 이토록 숨막히는 아름다움과 향기를 뿜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꽃은 향기롭다. 그런 생각에서 다시 그림 속의 꽃을 보면 그 꽃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화면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렇게나 휘둘러 그은 선과 이겨 붙인 몇 개의 물감덩어리 그리고 그리다 만 것 같은 몇 개의 색면에 불과하다.
사실 이러한 표현의 기법과 그것이 가능한 미학이라는 것은 20세기 미술이 추구해온 문자 그대로 황금률(Golden rule)이었다. 황금률이란 신약 산상수훈의 교훈에 붙인 이름이었다. “네가 원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어라”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적인 꼬리표를 떼어버리고 남는 것은 “귀중한 율법” 이라는 뜻이다. 그럴 때 황금률이란 가장 값진 교훈 혹은 목적의 세계, 나아가서는 목적의 왕국(Kingdom of End)과도 통할 수 있는 말이 된다.
목적의 왕국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이다. “인간성을 수단으로 생각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Treat Humanity as an end, not a mean라는 말이 그 요체이다. 가장 귀중한 율법으로서의 황금률, 목적의 왕국에서 말했던 목적성은 20세기 미술에 있어서 모리스 드니Morris Denis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일세기동안 빙글빙글 돌다가 종국에는 다시 모리스 드니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방황의 과정에서 보다 풍요해지고 화사해진 감성과 심성의 회화는 역시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미술가들의 공로일 것이다.
모리스 드니는 20세기 화가의 제일신조」에서 “한 폭의 그림이란 여러 마리의 말이거나 벌거벗은 누드, 아니면 어떤 숨은 이야기이기 이전에 일정한 질서에 의해 물감으로 범벅된 평면이라는 점을 상기하라” 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19세기까지의 미술이 추구해 왔던 미학의 정점에서 그 미학을 파괴한 후에 20세기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는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
서구미술은 인간의 재현에 그 목적을 두고 발달했다. 동굴벽화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사슴이나 매머드 등을 그렸다. 그것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이며 인간에 의해 사냥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동굴인 화가는 이렇게 생존을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먹을 것을 그리면서도 사람을 그리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왼손을 벽에 대고 바깥에 물감을 찍어 손바닥의 흔적을 남기어 사인을 삼았다.
동굴벽화에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동굴벽화의 역사상 매우 후세의 일이었다. 최초의 인간형상은 아마도 극도로 단순화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둥근 머리와 막대기처럼 생긴 몸통이 차츰 팔과 다리로 변했을 것이다. 실제 사냥하는 동물 주변에 그러한 인간들의 모습은 오늘날도 원시미개인의 그림에서 발견된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에 눈뜨게 된다. 말하자면 가사성에 대한 인식이다. 가사성可死性이란 불멸성不滅性에 대하는 말이다. 모든 형상을 가진 것은 소멸하고 생명을 가진 것은 죽는다는 뜻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는 생존을 걸게 되었다. 동양의 미술은 불로장생의 신앙을 신선사상으로 표출하여 산수화가 그려졌다. 신선을 그리던 신선화가 인물화로 넘어가게 된다. 서양의 미술은 죽어 가는 인간 대신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모든 세기의 모든 화가들이 매달렸다. 그것이 19세기까지 서구 미술의 진면목이다.
그리스 로마의 미술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이른바 인간척을 내세운다. 인간의 모습을 가장 불사의 존재인 신적으로 표현하는 조각가가 상찬되었다.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미술의 승리는 사실 유화의 승리였다. 유화란 템페라거나 과슈 등 가변적이고 다루기 힘든, 그러면서도 평면적인 표현에 만족해야했던 당시까지 화가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이를테면 재현의 승리였다.
르네상스 이후 몇 세기 동안 인간은 인간을 그렸다. 사실 서구미술에서 화가란 바로 초상화가였다. 초상화라는 단순한 재현에서 약간 나아가서 구도와 구성과 또는 예술적인 성취, 혹은 변화와 발전 등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틀은 인간을 어떻게 인간처럼 묘사하고 재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20세기에 들어 바뀌게 된다. 사진술의 발명이 그것이다.
사진은 화가들의 밥줄을 끊는 혁명적인 발명품이었다. 화가들은 사진보다 뛰어난 초상화를 그리도록 보다 많은 시간 데생을 익히거나 사진을 뛰어넘는 미학을 발견하여 사진을 무력화하거나 둘 중의 하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거기에서 모리스 드니의 「20세기 화가의 제1신조」가 나오게 된다. 평면으로서의 그림에서 입체를, 정서 및 감동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안료와 그 배열의 질서로 돌아가자는 주장인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서구미술의 흐름에서 윤은숙의 그림에 발견되는 물리적 의미에서의 물감덩어리가 재현을 넘어선 어떤 질서로 향하는 가닥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초월적 질서의 가능성은 다시 모리스 드니 이후 서구미술의 흐름에서 일세기 동안을 방황한 끝에 얻어지는 그런 것이었다.
사진술 이후 서구미술은 카메라가 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을 탐구 개발해 나간다. 인상-표현-입체-초현실-절대주의 등의 흐름은 나름대로 철학이 있으되 요약하자면 기계적 시각에 대한 인간의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기계가 있는 그대로 하나의 눈으로 본대로 재현한 것에 대해 인간의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변형하고 꿈꾼 대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자면 추상이라 할 수 있다. 추상화란 이제 알아보기 힘든 그림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내력을 따져보면 사실 인간이 그린 어떠한 그림도 모두 추상화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잘 재현된 그림이라도 그것은 추상이다. 예를 들어 초상화가 있다. 그것은 먼저 어느 특정한 시간 특정한 각도에서 특정하고 제한된 조명에서 특정한 감정과 느낌의 한 단면을 강조하여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비교적 그 사람의 정신적인 분위기를 잘 표현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으로 카메라의 일회적인 시각 대신 비디오나 영화 등에 의해 일정한 질서 아래 단일한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화면에 비유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인간 자체를 사실이라 한다면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추상이 되는 셈이다.
사진의 경우도 경우에 따라서는 추상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인간의 입체시각, 즉 두 눈으로 보는 시각 대신 하나의 시각과 하나의 시점을 하나의 평면에 옮겨놓는 카메라 역시 자연 자체의 어떤 부분을 추출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비디오나 영화 등의 메카니즘에서 볼 때도 그 화면들은 의도되었건 아무렇게나 찍혔건 자연 자체일 수 없다. 카메라와 마이크가 지향하는 곳의 제한된 프레임 안에서 마이크가 잡을 수 있는 가청반경의 음향만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일단 대상 자체의 사실성을 인간이 옮겨놓을 때 추상이 된다는 가정에서 한 걸음 나아가 미술에서의 추상, 혹은 추상화는 좀 더 전문화된 정의를 필요로 한다. 윤은숙의 그림에서 붓 터치와 색면, 물감의 궤적이 남아 있다고 했을 때 그것만으로서 추상화라 할 수 없는 것은 20세기의 한 세기를 지나면서 추상의 개념이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각도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윤은숙의 그림은 추상화가 아니다. 추상화란 조형의 요소인 점 선 면 색채 질감 양감 등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말한다. 추상이란 그러므로 이 조형요소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추상한다Abstract란 말은 어떤 본질적인 것을 추출한다는 말이다. 콩나물 국을 먹고서 쓰린 술 속을 달랬다면 그것은 사실적 추론이다. 그러나 콩나물에서 아스파라긴산을 추출해 냈다면 그것이 추상이다. 아스파라긴산이 든 음료를 마시고서 거뜬하게 직장으로 향하는 회사원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추상화抽象化이다. 그림에서 비유하자면 꽃에서 빨간 색면을 이끌어내어 색면만의 그림을 그렸다면 그것이 추상화가 된다는 뜻이다.
윤은숙의 그림을 추상화가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구체적인 형상을 묘사하여 보는 사람에게 형상에서 연역될 수 있는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윤은숙이 그리는 해바라기를 보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해바라기를 떠올리게 된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황토밭에 서 있는 해바라기라는 기본 정보를 윤은숙이 캔버스라는 정보 틀에 심었을 때 그것을 보는 사람이 한국의 가을, 어린 시절 자신이 보았던 해바라기를 떠올렸다면 그것은 분명 동일한 정보와 공감으로서의 정서가 전달된 것이 된다.
정보의 전달만을 목표로 하는 그림은 많다. 지도나 도표, 표지판이나 게시판 등은 단순화한 정보단위를 담고 있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정서적인 반응과 연결되지 않는 순수한 정보 뭉치를 담고 효율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보는 사람에게 전달되도록 만들어지는 것이 그러한 그림들이다. 미술에서 말하는 그림은 거기에 정서적 반응이 개입된다. 때로 전혀 정보를 담고 있지 않으면서도 보는 사람에게 정보를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정보를 담고 있어야 하는데도 아무런 정보가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충격을 줄 수도 있다. 그것이 역시 정서적 반응이다. 미술의 정보는 그처럼 정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말에 비구상이라는 말이 있다. 윤은숙의 그림은 정확히 말하자면 구상에서 비롯하되 비구상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비구상이란 구체적인 형상에서 시작하되 추상에 이르지는 아니한 이를테면 중간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이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식별요소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식별요소란 색면과 형상과 조형요소로 환원하여 그려지는 그림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암시하는 단서를 말한다.
윤은숙의 그림에서 비구상적인 요소는 사실적 형상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서 온다. 그는 꽃을 그린다. 그것은 하나의 단서이다. 눈앞에 있으니까, 언제나 그 곳에 있으니까 편하게 그릴 수 있는 대상으로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감성에 부딪쳤다가 화면으로 쏟아져 나가는 통로로서 자신의 감성과 정서를 제공한다. 그러니까 자연이 제공하는 대상이라는 단서와 윤은숙이 제공하는 감성이라는 단서가 만나 화사하게 불타오르는 것이 윤은숙의 화면이다.
윤은숙의 화사한 그림에는 색동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윤은숙의 화사한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 화사한 색채만으로 살고자 하는 내심의 충동을 적절히 조화할 수 있는 통제의 기능을 그는 잘 안배하고 있다. 윤은숙의 화사한 색면이 보다 돋보이는 것은 물론 그 반대색 혹은 보색 계열의 차분한 색면이 화사함에 대비 색면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윤은숙의 화면이 당당하게 밝고 투명한 공간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철저한 대상파악,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티 없이 내심에 투과하여 다시 화면으로 쏟아 붓는 투명한 의식의 결과이다. 윤은숙은 스케치를 나가서 밑그림을 그려와선 작업실에서 마무리하는 일반적인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 그녀는 풍경에서 수평선처럼 넓은 것이라는 개념과 감동만 담아 돌아온다. 그리고서 정물에서 그 넒은 것의 감동을 찾아낸다. 정물에서 그가 느끼는 것은 자기화의 동기와 기회를 주는 대상이다.
그렇게 그려지기에 윤은숙의 화면은 투명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화면의 깊이와도 통하는 말이다. 공기가 통하는 것은 배경만이 아니고 꽃이나 과일-악기 컵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두터운 꽃병도 윤은숙의 손에서는 공기가 숭숭 통하는 투명체가 된다. 물론 이러한 투명성은 의식적인 것이다. 물체의 고유한 질감 혹은 대상의 독특한 성질 이를테면 대상성의 경우 윤은숙은 철저히 고전적이다.
윤은숙에게 단색이나 얌전한 색은 불안한 색이다. 맨살이라도 보여주는 것 같은 색이 된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무지개 색이라도 그림에 도입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화가로서 겪어야 하는 과정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추상의 세계를 지향하면서도 구상형체에 머물어야 하는 절대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추상의 세계는 평면시각과 잔상시각에 의해 화면에 정착된다. 평면시각이란 대상을 평면으로 보는 것이다. 그 평면은 입체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상을 색채로 재구성하는 자의적인 것이다 잔상시각이란 색채를 바라보되 마치 눈을 감고 햇빛을 보는 것 같은 시각으로 대상을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멸하는 색채와 부유하는 형상의 투명함으로 화면에 나타날 것이다.
다시 화면에 나타나는 그 투명함의 비밀은 그녀의 재빠른 손길에서 온다. 실제 그녀의 그림은 마지막 몇 분에서 완결된다. 철저히 다진 바탕 위에 차분하게 쌓아올린 질감, 대상의 충분한 묘사에 의해 마무리되는 화면과 그것은 다른 궤도를 지향한다.
그 다른 궤도란 스스로 체득한 초월의 언어이다. 대상과 형상에서, 색채와 포름에서 정서와 논리에서 윤은숙의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딛고 그 위에 투명하고 화사하게 자리잡은 초월적 언어의 표상이 된다. 그것은 모리스 드니에게서 20세기 초에 비롯하였으되 일세기동안 숱한 작가들에 의해 검증과 확인을 거친 후 다시 드니에게로 환원하는 20세기 작가들의 헌사 같은 것이다.
1998-2018
이미지
-1998년 평문과 인터넷에서 갈무리한 이미지는 다를 수 있음
울산매일UTV-울산지역 주말공연 전시2019년 11월 23일~
윤은숙 “충만의 숲”개인전-2018.11.13.~12.2
https://blog.naver.com/ccbbmm017/221404121302
생명, 그곳-윤은숙전
https://blog.naver.com/venice87/120166515550
자투리여행-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shdud2047/40206976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