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당신의 그림자를 사랑했습니다
김경혜
제목을 보는 순간, 멈춰 섰다. ‘한때 당신의 그림자를 사랑했습니다.’
한때 당신도 아니고 당신의 그림자를 사랑했다니…. 평소 사진을 찍을 때에도 대상의 그림자에 이끌리던 내게 그 제목은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그림에 그려 넣었을지도 모를 ‘당신’에 대한 사랑의 단서를 찾아내기라도 하듯,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화가 최욱경이 사랑한 ‘당신’은 누구, 혹은 무엇이었을까. 사랑했으나 내색도 못했던 짝사랑의 대상이었을까. 아니면 융(C.G.Jung)의 말대로 ‘자기 안에 있으나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특질과 감정’인 그림자마저도 사랑했던 그런 사랑이었을까. 사람이 아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생각이 날개를 단다.
어떤 상황이 되었을 때 ‘한때 당신의 그림자를 사랑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했던 대상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들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을 때 실체가 아닌 그림자를 사랑한 거였다는 고백일까. 아니면 더이상 사랑하지 않거나 혹은 사랑할 수 없을 때 그 그림자라도 멀리서나마, 하며 할 수 있는 고백일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여운이 그녀를 에워쌌을 테고 골초였던 그녀는 불면의 밤을 보내며 담배 연기 속으로 자신의 고통을 뿜어낸 것은 아니었을는지.
평소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 탓도 있겠으나 ‘당신’의 존재에 꽂혀있던 나는 화가가 사랑한 그림자에까지 채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림을 다시 바라보았다. 위쪽의 하트를 붉은 심장이 아닌, 빛바랜 노란색으로 표현했다. 아무리 바라봐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랑을 빛바랜 노란 하트로 표현하고 그 타오르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다 멍든 가슴을 아래쪽의 푸른 하트로 그렸을까. 아니면 푸른색 하트는 노란색 하트의 그림자였을까. 그림 중간쯤의 제법 넓은 흰색 부분은 두 마음이 연결되지 못하고 분리된 듯 보여 허탈감마저 들었다.
작품이 완성된 1965년은 그녀가 미국 유학을 떠난 지 2년째 되는 해였다. 한 인터뷰에서 최욱경은 언어와 문화가 낯선 미국 유학의 경험을 “뿌리가 흔들리는 충격‘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엄청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을 시기였으나, 추상 속에 진솔한 자신의 내면 이야기를 담아내려 애썼다. 사랑하는 대상이 타인이든 조국, 예술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것이든 사랑이나 열정이 식었음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문득, 한 장면이 그림 위로 겹쳐졌다. 한때나마 잠시 사랑이라 믿었던 이를 오랜만에 길에서 우연히 보았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날이었다. 시커먼 장 우산을 들고 있던 그를 보는 순간, 화창한 날씨와 장 우산의 조합처럼 그와의 인연이 저렇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 속의 한 조각 애틋함마저 휘발되는 순간이었다. 화창한 날씨에 장 우산을 들었던 것이 무슨 대단한 잘못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비 오던 곳에서 왔거나 비가 오는 곳으로 가려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융(C.G.Jung)의 해석대로라면 내 그림자 속엔 내 판단이 옳다고 믿는, 속단하고 정죄하는 교만함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화창한 날의 장 우산의 조합‘에 그렇게 예민할 리 없다. 또한 내 그림자로 인해 나는 평소에도 잘난 체하거나 짐작일 뿐인 것을 실제로 확신하며 말하는 이를 참기 어려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에….
그녀의 고백 또한 나처럼 혼자 떠나보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헛헛한 고백이었던 걸까. 전시회를 다녀온 이후에도 ‘당신’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화집을 펼치고 그녀가 쓴 글들을 읽어봐도, 평론가들의 글을 뒤져봐도 결국 그 ’당신‘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이건 사랑했던 대상을 향해 사랑이 멈추었음을 의미하는 그 문장엔 쓸쓸함과 함께 대상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사랑이 시작되기 전의 설렘과 사랑이 끝나갈 무렵의 덧없음이 ’한때 당신의 그림자를 사랑했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했을까.
만질 수도 품을 수도 없는 그림자를 사랑했던 그 사랑 안에 가득 고여있던 것은 아득한 고독이었을지도….
시간, 내 곁을 지나다
김경혜
크로스비 해변에 가고 싶어졌다.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에 대한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그의 작품 ‘어나더 플레이스(Another Place)’가 설치돼있는 영국 리버풀 근처 크로스비 해변. 작가 자신의 벌거벗은 몸에 석고를 바르고 굳혀 틀을 만든 후, 금속 물질을 부어 만든 100개의 주철 인물상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해변에 드문드문 서 있다고.
작가는 다양한 형태의 인물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극도의 인내와 체력을 요하는 그 작업을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했다.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위대한 예술가의 삶이 펼쳐져 있는 곳. 신문에 실린 사진 속, 노을 지는 해변을 보고 서 있는 인물상들을 보며 저들 중 하나가 나일 것 같아 가슴속에 파도가 일렁였다.
상상해 본다.
노을 지는 그 해변에서 밀물 때가 되어 바다에 잠기는 조각들을 바라보며 인간의 몸도 때가 되면 저렇게 자연의 순환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나를. 조각상 중 하나를 ‘나’로 점찍고 그에게 묻는다. 자유롭게 헤엄쳐 멀리 가보고 싶지 않았냐고. 키를 넘는 파도가 몰려올 때 무섭지 않았냐고, 밀물 때가 되어 바다에 잠기면 무슨 생각이 들었냐고. 노을을 바라보며 가끔은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냐고, 힘들고 지쳐 이제 그만 눕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은 없었냐고. 그의 대답을 듣던 내 안에서도 시간을 견뎌온 말들이 꿈틀거릴지 모르겠다.
100개의 ‘나’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응원하고 서 있는 것도 같다. ‘모든 게 녹아내릴 것 같던 한낮 태양의 이글거림도, 파도의 그 광포함도, 묵묵히 견뎌내고 나니 지금에 와 있더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거기 그렇게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들, 나는 누구에게 위로가 되어 줄까.
아들이 학위 논문을 위해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던 시절, 모처럼 집에 온 아들에게 연구하는 건 좀 어떠냐는 질문에 자신의 심경을 얘기했던 게 생각났다. 드넓게 펼쳐진 몽돌해변에서 어느 돌에 불이 들어오는지 알기 위해 자갈을 하나 하나 일일이 다 뒤집어 봐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던.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아득함이라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참으며 아들과 함께 있어 줄 뿐이었다. 그렇게 바닷가를 헤매던 아들에게 어느 날 작은 몽돌 하나가 불을 밝혀주었다.
몽돌마다 누군가의 염원이 깃들어 있고, 파도 소리에도 누군가의 외침이 담겨 있을 것 같다. 해변의 인물상들 앞에 서면 들려오지 않을까. 순간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함부로 살기도 하고, 순간이지만 영원처럼 아름답게 살아가는 삶도 있다고. 인생이 그런 거라고, 저마다의 삶 속에서 불꽃으로 타오르다 스러져가는 것이라고. 물속에서 시간을 견뎌내다 부식되어 자연과 하나 되는 여기 서 있는 우리처럼.
바닷물이 발등을 적신다.
시간도 바닷물처럼 저렇게 지나갔을 터, 빠져나가는 순간을 느끼지 못한 채 지금껏 살아왔다. 사진 속 정수리 부분이 휑해 보이고 패인 볼에 그림자가 질 때,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져 보일 때, 손자의 키를 재던 눈금이 쑥쑥 올라갈 때 시간이 내 곁을 지나갔으리라. 인물상에 해가 머물고, 파도가 달려와 보듬어 주고, 바람이 쓰다듬어 줄 때도 시간은 흘러갔으리라. 알몸으로 와서 잠시 머물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임을 해변의 인물상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짧게 머물다 갈 아주 잠깐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나는, 위대한 예술을 품고 있는 자연의 영속성 앞에 그저 고개를 숙인다.
김경혜
월간 경영과 컴퓨터 취재 기자 및 데스크 역임(1982-1990)
계간수필 등단(2020). 수필집 ≪발칙하고도 외로운 상상≫, 계수회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