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와 궤도
최정례
서류 문제로 미국의 휴 페레와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내가 ‘원고’를 첨부한다는 말 대신에 ‘궤도’를 첨부한다고 써 보낸 것이다. 뒤늦게 정정하는 메일을 보냈다. 내 허술한 영어를 이해해 달라고 뭣 때문에 이를 혼동했는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답장이 왔다. 오늘 인공위성이 지구로 돌아왔는데 그 옆에 빈자리가 하나 있더라. 아마 네가 예약한 자리였나 보다.
그 자리에 앉힐 한 인물을 생각했다. 이름은 제니퍼라고 아니 제니라고 했다. 베란다 화분에 떨어진 씨앗 하나가 어쩌다 싹이 텄고 그날은 덩굴손을 뻗어 허공을 휘저어 올라가려고 했다. 제니도 그렇게 실수로 생겨난 인물이었다. 제니가 자라나며 말하고 뛰고 사랑하고 날기까지를 바랐는데 그러나 그는 내 생각을 따르기는커녕 고집스럽게 지지대만 붙잡고 뻗어갔다.
학교 앞 울타리에는 언젠가부터 장미 넝쿨 대신 능소화가 뻗어가고 있었다. 학기가 끝나는 종강 날에 능소화야 다음 학기에 보자 눈짓하면 흥, 다음 학기에도 볼 수 있을까, 시간강사는 시간강사만큼만 학교 울타리 꽃을 볼 수 있는 거야. 나를 비웃었다. 제니도 그런 식이었다. 제멋대로 뻗어가더니 어느 날은 꽃도 피기 전인데 푹 꺾어져 버렸다. 몹시 더운 날이었다. 물을 주는 것을 잊은 나를 탓하며 뒤늦게 듬뿍 뿌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실수로 피어나려다만 쌍떡잎식물, 제니는 말하자면 잠깐 왔다가 침몰한 순간의 돛배였다.
계간 『딩아돌하』 2012년 가을호
첫댓글 그 궤도가 원고 맞나봅니다.
그 빈자리는 아마 제가 깜박 잊은 것 같은데요.
한동안그대로 두어도 괜찮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