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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희 아가다 자서전
1. 나의 전생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경북 봉화군 법전면에 살았다.
우리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들은 선비 어른들이어서 한양 (서울)에서 살면서 사돈을 맺은 사이라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첫아들을 낳아 다섯 살 때 경끼로 죽고 십년동안 아기가 없어 우리 어머니가 치성(기도)을 많이 드려서 기도 발이 받아 하느님께서 나를 점지 해주셨단다.
2. 출생 후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병을 달고 살았 단다
그때 우리 집은 꽤 부자 였나 보다 한의사를 집에 모셔놓았으니 아버지는 선비타입인데 장사(상업)하신다고 재산을 탕진하고 강원 탄광촌으로 내가 세 살때 갔다.
아버지는 거기서 공무원생활을 하셨다. 광산이 국명이어서 나는 항상 아버지의 등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만 따라다니며 자랐답니다.
다섯 살 때 기억으로는 병이 나면 아버지만 옆에 있으면 안 아팠다
아버지는 나에게 세상에 제일인 아버지 였다.
3. 초등학교 시절
나는 철암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를 잘했다. 담임선생님이 우리 아버지 모르는 선생님이 없었고 우리 집에서 식사한번 안한 선생님이 없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큰 희망을 걸고 계셨든 것 같다.
나는 정말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했다. 시골 학교라서 산길을 넘고 내를 건너 학교 가는데 아버지는 삼학년 때까지 업고 징검다리를 건네주시곤 하셨다.
학교 가는 길가에는 철따라 여러 가지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다.
봄엔 진달래꽃 따먹고 입이 시커멓게 해가지고 집에 오고 다람쥐 쫓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울고 집 찾아 온 것 운동장에서 공기하다가 해지는 줄도 모르고 늦게 집에 가서 엄마한테 야단맞은 일 고무줄하다 남자 아이들하고 싸운 일 같은 반 친구(넘이)가 같은 동네 사는데 그 친구는 안 놀고 학교 끝나면 집에 바로 가니 우리 엄마가 친구(넘이)는 일찍 오드라고 해서 그 다음 부터는 그 친구도 못 가게 잡아 놓고 같이 오면 늦게 와도 엄마에게 혼나지 않고 그렇게 학교서 늦게 까지 놀고 싶었다.
졸업식 때 그때 애들은 순진해서 잘 있어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떠나갑니다.하는 노래 부르면서 울기도 했다.
야생화 꽃다발 만들어 선생님께 드리고 참 순진하고 순수한 아이였다.
소풍 갈 때에는 우리 아버지 내 운동화를 사 주셔서 반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시절이 내 인새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였다.
4. 중학교 시절
태백 중학교가 남녀 공학이었다.
중학교시험 치는 날 아버지는 교문 앞에서 끝 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
합격통지서 받고 그렇게도 기뻐하시든 우리 아버지 그때 우리 엄마는 시장 마당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맞은 편에는 우리학교 선배 오빠 최복조내는 맞은 편에서 지물포를 했다
그 집에는 아들 둘 우리집은 딸둘 부모님들은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우리는 학교 갈 때도 같이 가고 그 오빠가 늘 내 책가방을 들어주고(그때는 책가방을 들고 다녔다) 우리 학교는 전철을 타고 장성이라는 곳 으로 다녔는데 자리도 잡아주고 학교 끝나면 기다렸다가 같이 집에 오고 집에 서도 공부를 많이 가르쳐 주었다.
그 오빠가 공부를 잘해서 나는 그 오빠가 참 좋았다.
그 오빠는 장차 검사가 되겠다고 나는 우리나라의 두 번째 여자 장관이 되겠다고 그때 임영신여자 상공부 장관이 우리나라에 처음 여자 장관이였다.
그런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중학교 졸업하면서 우리 외가 할아버지 한테 가서 공부하기로 되어 있었다.
육이오가 터졌다.
5. 피난 생활
나와 내 동생은 피난길이 재미있었다. 미지에 세계로 가는 게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대현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빨지산이 인민군을 데리고 공격해 와서 피난 짐을 다 자기들 차에 싣고 사람들은 그 학교로 데리고 같다. 나는 우리 집 지킨다고 남아 있었다. 인민군이 와서 짐을 뒤지는데 교과서가 나오니 동무레 왜 학교 안가고 어디에 가오한다.
내가 학교 휴학 중이라고 했더니 빨리 학교로 돌아가시오. 이제 해방이 되었소한다.
조금 있으니 학교로 불려갔든 피난민들이 오는데 우리 아버지 나를 안고 우시면서 d서 여기를 떠나자 나는 영문을 몰랐는데 내 책속에 태극기와 사촌오빠 군에 복무하면서 찍은 사진이 책속에 있었다. 그때 오바는 현역 군인이었다. 일요일 휴가 나와서 놀다가 부대로 들어갔다. 그 후로 오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또 산을 넘고 내를 건너고 낯선 길에 노랏재라는 곳에 도착해서 큰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곳에 우리학교 선배 오빠네 식구들이 거기와 있었다.
이주되었다고 우리는 친형제들을 만난 것 같이 반가웠다. 또 거기 삼척서 대학생들이 피난와 있었다.
우리는 매일 만나 학교 이야기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그 대학생 오빠들한테서 시국 이야기도 듣고 공부도 하고 피난 생활이 아니라 천국 같았다.
거기서 이주쯤 지난밤에 대학생들이 방문을 두두리며 지금 막 따발 총소리가 들렸다고 빨리 출발하자고 그 밤에 달빛은 유난히도 밝은데 두 집식구들은 배낭을 짊어지고 대학생들을 선두로 큰길로 나와 남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오빠들이 손짓을 해서 우리는 큰 길밑으로 숨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이 아니고 가로수 썩은 나무가 달빛에 인민군이 총을 견주고 앉아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우리는 밤새도록 걸어서 아침에 법전도착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 고향인 소지리라는 동네로 들어가고 그 오빠들은 남으로 가고 나는 그 오빠들 따라 남쪽으로 가고 싶었다.
우리는 큰 아버지 집에서 일 년을 지내고 대구에 있는 사촌 오빠가 데리러 와서 대구로 같다. 아버지는 대한 방직에 취직돼서 근무하시고 그 때 오빠네 식구가 일곱인데 우리식구 네 명이 한집에 사는데 우리 사촌 올캐 언니가 심통을 부려서 배고픈 경험을 많이 했다.
일생을 두고 잊어지지 않을 정도로 배가 너무 고파서 누워 있으니 천정이 빙빙돌았다.
우리 식구들은 셋방을 얻어 오빠네 집에서 나왔다.
그때부터 부자 부럽지 않게 살았다. 나도 직장에 들어가고 그때 우리 집은 대구 침산동에 살았는데 공소회장이 엄마하고 알게 되어 우리 식구들은 대구 태평동 종합운동장 옆에 성당을 지어서 의자도 없이 바닥에 앉아 이사를 했다.
우리는 미사 참례하고 교리 배우고 참 열심히 다녔는데 내가 직장 생활 적응을 못해 병이 났다.
나중에 혼수상태에서 우리 종고모가 와서 나를 데리고 경산에 조그마한 암자에 보살이 혼자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곳에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경을 읽었다고 한다. 나는 의식 없는 상태에서 갔으니 아침에 눈을 뜨니 절 방에 누어있었다.
그 길로 병이 회복돼서 나는 또 대구 청파미용학원을 들어가 미용사 자격증을 따고 미장원에 다니는데 퇴근하고 오다가 버스에서 떨어져 다쳐서 또 병원신세 몸이 회복되어서 집에서 부업으로 하는데
6. 결혼생활
엄마 친구가 중매를 해서 선을 봤는데 아버지 엄마는 괜찮다고 해서 나는 별로 인데 착한 사람 같아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아들이 없으니 아들같이 잘 모시겠지 하고 반신반의 한 마음으로 결혼을 했다. 살다보면 정도 생기겠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이라는 것 했다.
순간의 잘못 선택이 일생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결혼하고 일 년 되었는데 첫 아이 낳고 삼일 만에 술 먹고 대구시내 있는 리베라 위스키 빠 술집에서 난장판을 치고 기물을 다 부수고 옷을 홀랑 뺏기고 쫓겨서 집에 왔다.
그 때 우리 사촌 오빠가 남 대구 경찰서 보안과장으로 있어 그 대는 백차를 타고 다니면서 꽤 끝발이 쎘다. 그 오빠 백을 믿고 사흘이 멀다고 경찰서 파출소를 드나들면서 지내는데 내가 헤어지자고 나는 이런 사람하고 평생을 절대로 못산다고 그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술은 끊는다고 몇 해 동안 잠잠했는데 둘째가 태어나니 또 그 병이 도지고 그러다 애가 셋이 태어났다.
이젠 나가서 사고를 치는게 아니고 집에 와서 폭력을 휘두르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자살을 세 번시도 했다.
물에 빠졌는데 낙싯꾼이 건져내고 수면제를 소주에 타서 먹었는데 우리 집에 세든 할머니가 발견해서 위세척을 해도 삼일 만에 깨여나고 농약을 먹으려다 동네 아주머니한테 들키고
그때 아 아 하느님께서 살려 주신 것 같다. 또 도망가려고 보따리를 싸다가 아버지한테 들켰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네가 저 애들 셋(3살,5살,6살)을 두고 가려는지 나는 안다. 그런데 저 애들이 에미찾고 울면 네 눈에서는 피 눈물이 난다. 참고 애들 이십살 될 때까지 견디어 보아라 내가 도와줄게. 내가 사람을 잘 못보고 선택을 해서 너를 이렇게 고통 속에 살게 하는구나” 하시면서 가슴을 치면서 우시는데 나도 아버지 무릎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우리가 서울로 이사를 했다. 마포에 큰집이 살고 있고 시사촌 두명이 고려서적에 있어 취직이 되어 우리가 서울로 온 후 아버지는 그 손자가 보고 싶어 날마다 서울 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눈물 지우곤 하셨다.
그렇게 보고 싶은 손자를 못 보시고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우리가 서울로 온지 육 개월 만에 나는 충격 받아 두 번이나 실신을 하고 아버지를 의지하고 살아온 내가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 나는 슬픔에 잠겨 거의 한달 동안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고 날마다 울었다.
남편은 그 직장도 힘든 다고 그만두고 봉천 초등학교 옆에 구멍가게를 내었다. 가게서도 물건 팔아놓으면 돈 몽땅 가지고 색씨 집 가서 홀랑쓰고 그래서 가게도 망하고 낙성대 골짜기 외사촌이 국회법사택지 조성해 놓은 곳에 가건물을 지어 살다가 철거당하고 완전 바깥에 나와 앉은 상태.
초가을 인데 밤에 밖에서 자면 아침에 이불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 앉아 있었다.
외사촌 오빠한테 떼를 써서 취직이 되고 단칸 셋방을 얻어 생활 하는데 그때 나는 결혼 전에 성당 다니던 생각이 나서 하느님을 찾고 성당을 갔다.
1973년도 영세를 하고 정말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작자 성당만 갔다 오면 집안이 뒤집어진다. 견딜 수가 없어 수녀님께 여쭈었다. 그때 열심히 잘한다고 수녀님이 많이 예뻐하고 서울근교 성지는 다 데리고 다니고 많이 좋아했다.
수녀님 너무 안타까운지 집에 오셔서 남편과 대화 도저히 대화가 안 되니까 남편마음 가라앉을 때까지 집에서 기도 하라고. 나는 그때도 수녀님 손잡고 너무 많이 울었다. 그런데 남편의 술주정은 점점 더 심해지고 이젠 폭격까지 쓰고 사람을 구타가지 한다. 그래도 술만 안 먹으면 괜찮겠지 하고 살았다. 그러던 중 동생들도 대구에 서 서울로 이사를 오고 엄마도 같이 와서 내가 조금 위안 되었다.
동생은 십일 남매의 맞이로 결혼했는데 남편이 착실한 사람을 만나 평탄하게 살았다.
그 제부가 공무원이고 나는 (외사촌 오빠가 국회 법사 택지 삼 만평을 조성해 놓고 나를 관리하라고 했다) 택지 삼 만평을 놀리는 게 아까워 뭘 재배를 해 볼까 하고 중앙 청사 새마을 본부로 찾아가서 계약 재배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더니 단위조합하고 연결시켜 주어서 해바라기를 재배 했는데 동사무소 사회 담당한테 부탁해서 새마을 일꾼을 붙여 달라고 해서 심고 가꾸었는데 여름에 꽃이 피었는데 정말 예뻤다.
단위조합 구청 동사무실에서 나와서 사진을 찍고 똑 순이 아줌마라는 별명도 지어 주었다.
남편이 직장생활만 충실히 하면 평탄하게 살 수 있을 터인데 월급날이면 집엘 오지 않았다. 그 때는 월급봉투가 본인한테로 수령되던 때였다. 월급타면 술집에 가서 그 돈을 다 털고 빈 봉투 들고 아침에 집에 오면 정말 죽이고 싶었다.
소리 없는 총으로 쏴죽이고 싶었다. 내가 살인자가 되면 저 아이들 누가 도봐주나 하는 마음으로 참았다.
그런데도 그 직장도 술 먹고 깽판을 놓고 나와서 시골로 간다고 자기는 도시 체질이 아니어서 못살겠다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살고 싶다고 . 그때 애들이 초등학교 5학년, 중1학년, 고1학년 이렇게 팔십만원짜리 셋방하나 남겨놓고 시골로 갔다.
가서 두 달 만에 와서 자기 소지품 다 챙겨 가지고 고속버스 정류장 간다고 택시타고 가고 나는 가게로 그 때 나는 미아리 기름시장에 양품점을 하고 있었다.
가게 문 열고 장사 할 기분이 안 나서 옆집에 악세사리가게 하는 친구와 같이 그 때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신 그 이튿날이다. 우리는 빈소에 갔다. 둘이서 얼마나 울었는지 나는 앞으로 저 애들 데리고 혼자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마음에서 또 내 팔자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통곡을 하고 그 친구는 시어머니와 갈등 때문에 울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순경이 물컵을 가지고 와서 진정을 시켜 일어나 보니 우리와 같이 들어 온 일행은 아무도 없고 우리 둘이서 그렇게 통곡하고 우니까 애국심에 감동해서 순경들이 달랬을까 남의 속도 모르고...
그 길로 남편이라는 사람 우리를 한 번도 돌보지 않고 들리는 소문에 여자를 다섯 번 갈아가며 살고 있다고 부산 있는 시동생이 소문을 전해주곤 했다. 지금은 청도에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와 같이 살고 있다. 아들이 남도 도와주는데 어떻게 굶어죽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매달 생활비를 준다.
그 사람과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 사람 얼굴 보는 것 저승 사자보는 것 같은 느낌 죽을 때까지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미아리 가게를 처분했다. 세를 얻어 했기 때문에 그 수입으로는 애들 공부시킬 수가 없을 것 같아 고정수입인 직장을 구하려고 뛰어다녔다. 그 때 우리 제부가 관악구청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전에 해바라기 끈도 있고 해서 관악구청 녹지과에 취직이 되었다. 봉급으로 힘들었다. 학비주고 나면 생활비는 없다. 나는 그때 돈 버는 기계였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몸을 아기지 않고 일을 했다. 그러다가 과로로 쓰러진 일도 있었다.
다행이 애들이 착하게 잘 자라주고 공부도 잘했다. 결손가정 애들이 문제아로 전략되는 것 많이 봐서 무척 염려했는데 애들이 똑바로 자라주어서 내가 잘 길렀는줄 알았는데 하느님이 길러 주신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지 않았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애들 대학 입학시험 보러 갈 때 한 번도 같이 간적 없고 합격발표 나도 집엘 안 와서 떨어졌나 했는데 저녁때 전화 “엄마 미안해 합격했어. 엄마 힘들어서 어떻게 해” 하는 데 가슴이 아려 왔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큰 딸은 서문여고 나와서 고려서적에 취직되어서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지금 울산에 살고 있다.
아들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막내는 대학졸업하고 혼기가 되어 아들이 연애를 했는데 사귀고 보니 개신교 신자어머니는 광적인 신자 여자 애는 모태신자 신부집 주장으로 결혼식도 교회서 하고 그때부터 나는 속상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더니 결국 우리 집 어렵게 살고 홀시어머니고 시누도 자기 딸 보다 나이 많고 집도 없고 그렇다고 신부집에서 결혼을 반대. 그래도 신부가 우리 아들 아니면 결혼 안 한다고 하니 신부집에서 너가 좋아서 하는 결혼이니 아무소리 하지 말라고 신부 엄마가 못을 밖고 그때부터 나를 철저히 무시하기 시작 명색이 사돈인데 아들도 그때는 여자 밖에 눈에 보이지 않아서 나는 입도 못 열게 하고 나는 혼자 의논할 상대도 없고 매일 성체조배실에 가서 울면서 주님 가난이 죄입니까? 누가 가난하게 살고 싶어 삽니까 주님께서 요만큼만 주시는데 제가 왜 사돈될 사람들한테 무시를 당해야 합니까? 혼자서 애들 키운 것이 죄 입니까? 저의 능력이 이것밖에 안되는데 왜 제가 무시를 당해야 합니까? 하면서 통곡을 하면서 지냈는데 지금 생가하면 주질 없는 생각. 다 내려놓으면 편한 걸 나의 욕심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다.
며느리가 들어왔다. 고부간의 갈들 나는 그건 상대적이고 내가 잘하면 되지 했는데 그것도 다 내 생각과는 다르다. 참 괴로운 날들이 흘러 갔다. 손녀가 태어났다. 날 보고 길르라고 한다.
그때 나는 성당에 매일 가고 여러 가지 능력껏 일을 많이 맡아서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애를 보라니. 집에 갖혀 한 동안 미칠 것 같았다. 애기가 두 달 정도 되어서 애들 업고 성당을 갔다. 그랬더니 우리며느리 K.B.S방송국 아침마당에 나가서 우리 시어머니는 돌아다니는 걸 좋아 해서 간난 아기를 업고 매일 나가서 속상하다고, 나는 그날 그 시간에 반모임을 하고 있었다. 내가 반장직을 맡아서 정말 열심히 했다. 그래서 그 T.V를 못 봤다. 집에 오니 우리 교우 들이 전화통이 불이 난다. 아가다씨 매일 성당오더니 그 사이에 어디로 돌아 다녔냐고.
나는 이렇게 방송국에 메스컴을 타는 대단한 며느리를 모시고 산다.
주일 아침이면 사돈이 와서 애들 다 데리고 교회로 가고 당당하게 더 황당한 것은 손녀 둘다 나한테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저의 외할머니가 데리고 가서 세례를 시킨 것 아들도 교회서 세례를 받고 나는 정말 혼자 사는 것이 이렇게 무시당하는 구나를 느꼈다.
그때 내가 하느님이 안 계셨으면 나는 그 고통과 소외감을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한 많은 나날은 그래도 지나가는 것 지금은 아들도 나이가 드니까 이제 엄마가 눈에 조금 들어오는 모양이다. 잘 하려고 노력을 한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살지 자식들을 힘들지 않게 하고 아버지 집으로 가야 할 터인데.
지금도 며느리한테는 무시당하면서 사는 느낌이 든다.
강아지도 나는 처음부터 싫다고 완강하게 말했는데도 가지고 와서 나는 정말 개가 싫다.
어떤 때는 개가 며느리 같고 며느리가 개 같을 때도 있다.
요즘세상은 어른은 권위가 없는 세상이니 내가 참고 살려니 가끔 속알이를 한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면 지금은 편하게 잘 살고 있는데 그래도 개를 집안에서 사람과 같이 키우는 것은 싫다.
이 모든 고통 다 참고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내게 주신 고통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배였다. 그것을 이제야 깨닫고 아버지께서 받은 것 나그네살이 하면서 잘 쓰고 돌려드리려고 시신 기증하려고 카톨릭대학교에 서류 같다가 보증 둘 세우라고 해서 애들이 안 해줘서 못하고,
지금은 시신 보증인 없어도 된다고하여 보증인 안 받는다고 그래서 안구도 장기도 기증했다. 나는 내 모든 것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고 서약하고 반지도 받아 끼고 남은 내 인생 살아도 죽어도 주님 것이 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사는 동안 덕 많이 쌓아 가면서 살도록 노력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