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시 모음> 나태주의 ´장마´ 외
+ 장마
하늘이여 하늘이여 하늘이시여
억수로 비 쏟아져 땅을 휩쓸던 날.
(나태주·시인, 1945-)
+ 장마
오뉴월 손님
달갑잖은 손님
잘 치르고 나면
먹구름 속
햇살,
맛볼 수 있다
(김옥진·시인, 전북 고창 출생)
+ 장마
바람에 누운
풀잎 위로
바쁜 물들이 지나간다
물 속에서
더 짙어진
달개비의 푸른 눈썹
세상은
화해의 손을
저리 오래 흔들고 있다
(강현덕·시인, 1960-)
+ 장마
장마는
비보다 더 무서운
쓰레기 세례를
퍼부었다
세상은 온통
쓰레기통
집집마다
토해낸
오물들이 즐비하다
하늘의 토악질
장마철엔
우리들도
토악질을 한다.
(류정숙·시인)
+ 장마
메마른 태양의 이글거리는 빛에
숨죽어 살던 삼라만상의 존재들
한 번 눈물 흘림으로
그칠 줄 모르는 장마가 찾아와
또 다른 숨을 죽여가며 산다.
가뭄과 장마,
한발과 수해
극과 극의 조화 속에
숨죽이며 장마를 맞는다.
기다림의 긴 시간
또 다른 생명들이
홍수로 휩쓸려 떠내려간다.
어찌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
대항할 수 있겠는가.
(윤용기·시인, 1959-)
+ 장마비 내리는 밤
모두가 잠든 까만 밤
구성진 장마비가 어둠을 채운다
희미한 가로등의 눈썹 끝에 매달린 물방울
부풀어 오른 비만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산산이 부셔진다
반쯤 열려진 창가에 서서
두 손을 모으듯 가만히 빌어본다
잉태한 교만과 이기심
질긴 탐욕을 꺼내 무게를 덜어내야 한다
순결한 마음과 비워낸 가슴 가득
꿈 하나만 간직하고픈
장마비 내리는 밤
(최다원·화가 시인)
+ 장마
줄창 울고는 싶었지만 참고
참은 눈물이 한번 울기 시작하니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는 거지
누군가의 기막힌 슬픔은
몇 날 몇 밤을 줄기차게 내리고
불어터진 그리움이 제살 삭이는 슬픔에
이별한 사람들은 잠수교가 된다
해마다 7월이면
막혀 있던 둑들이 젖어
매일 하나씩 터지는 거지.
(안수동·시인, 강원도 동해 출생)
+ 장마철 여행 떠나기
며칠을 두들겨대던 빗줄기 끝에
장마는 잠시 틈을 내어 쉬고 있었다.
밤새
길 떠날 이의 가슴엔 빗소리로 엉겨든
불안한 징조가 떠나질 않더니
설핏 잦아든 빗소리가 반가워
배낭을 메고 나선다.
차창에 비치는 산야는 물안개에 잠겨
그윽한데
강줄기에 넘치는 듯 시뻘건 황토 물이
맑고 고요한 물보다 격정을 더하게 한다.
수많은 토사물이 뒤섞여 흘러가는 강물
그 속에 일상의 찌꺼기도 던져 보낸다.
미련 없이.
(목필균·시인)
+ 장마
습한 바람이 불고
어두운 하늘에서 종일 비가 내린다.
장마의 긴 터널로 들어가고 있나 보다.
장마는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되었다.
오랜 아내의 부재 속에서
집 구석구석에 쓰레기가 쌓이고
고장난 세탁기에는
던져 놓은 빨래가 산더미 같다.
한나절이면 음식은 썩어 나가고
저녁이면 멍하니 빈 창가에 앉아
TV를 켜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제 나는
맑은 날 틈틈이 빨래를 말리며
햇볕의 소중함을 느낄 것이다.
습기에 상해가는 생의 의욕을 추스르면서
햇볕보다 더 소중한
아내의 귀가를 기다릴 것이다.
(한승수·시인)
+ 장마 그치고
장마 그치고
허기진 배를 꿈틀거리며
바위틈을 기어 나온
지렁이 한 마리
햇살의 말랑한 젖가슴 만지작거리며
여름 한낮을 물고 포만감에 젖는다
(차수경·시인, 충남 서산 출생)
+ 장마
빗방울 하나에도
떨어지는 이유가 있네
빗방울 하나에도
잠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네
이렇게 하늘이 우는 날
떨어져 멍들은 꽃잎에도
흩어져 내리는 잎새들도
비와 비 사이
서러운 곡예일랑
우산일랑 접어놓고
온몸으로 잔을 드세
슬퍼 누운 꽃잎들에게
하늘이 베풀어주는가
씻김굿의
눈물 한마당
(장성희·시인, 1944-)
+ 장마
폐허의 담벽 아래, 성스런 신의 병사들이
지구의 왼쪽 관자놀이를 찢는 총성이 울리고
그 피와 살을 받아 핥는
시퍼런 잡초와 갈가마귀의 혀가 비릿하다.
골고다, (우주 배꼽?), 거기, 여전히 신생아들의 울음소리도
들린다지?
안 보았어도 좋을, 흥건히 피에 뜬 조간을 보며
질긴 탯줄을 씹듯 간신히 조반을 삼켰다.
장마가 쉬 그칠 것 같지 않다.
(고진하·목사 시인, 1953-)
+ 장마
복지교회 옥상 위에서 예수가 비를 맞고 서 있다 첨탑 십자가를 향해 빗줄기가 심문하듯 창끝, 꽂힌다 시멘트 바닥 널브러진 검은 비닐봉지와 널빤지 조각들 퉁퉁 불은 기억의 한쪽 끝을 움켜쥔 채 빗물 토해내고 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멀어, 꿈과 현실을 사선으로 이어주던 양철계단이 삐걱거리며 무거워진다 빗소리에 지붕과 지붕, 번지와 번지 사이 구원이라 믿었던 길들 경계가 실려가고 삶의 찌꺼기가 홈통을 타고 흘러내린다
세상을 온통 붉은 녹물로 뒤섞어놓으며 범람하는 시간의 하수도는 만원이다 밤새 중얼거리던 주기도문이 떠내려가고 누추와 생활의 무게로 달그락거리던 세간살이가 떠내려간다
며칠째, 옥상 안테나는 복음 대신 빗소리를 송전하고 있다
(강해림·시인, 195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