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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33
12월4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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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교회는 한 인간 존재의 전인적(全人的) 구원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14장과 15장, 연속해서 빵을 많게 하는 동일한 기적을 두 차례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14장 13~21절, 15장 32~39절) 이는 저자가 빵의 기적의 중요성과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두 기적이 조금씩 다른 부분들도 있습니다. 첫번째 기적 때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였으나, 두번째 기적 때는 빵 7개와 물고기 몇마리였습니다.
첫 번째 기적 때는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였지만, 두 번째 기적 때는 일곱 바구니였습니다. 첫 번째 기적 때 배불리 먹은 사람은 남자만 5천명이었지만, 두 번째 기적 때는 4천 명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기적 때는 제자들이 굶주리고 지친 백성들의 상황을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기적 때는 예수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잡으십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부르시어 말씀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본고 싶지 않다.”(마태오 복음 15장 32절)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과 연민의 마음이 크게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말씀하시는 투가 마치 우리들의 어머니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 어떻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 안달입니다. 정말이지 귀찮고 짜증날 정도로. 예수님의 마음도 우리들의 어머니 같으시니, 참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훈훈해집니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든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그럴듯하게 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구름 위에 떠 계시기만 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장밋빛 이상만 제시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육체적인 질병을 구체적인 치유활동을 통해서 참으로 고쳐주셨습니다. 당신 자녀들의 육체적인 굶주림을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진실로 채워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측의 영적·정신적인 측면의 필요성 뿐만 아니라 육제척인 필요성을 보고 계시며, 우리 인간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예리하게 우리의 고통을 느끼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이 세상 모든 당신의 자녀들이 굶주리지 않는 것이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적인 가치나 내적인 요소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적 건강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주님의 제자들은 백성들의 영혼 구원에도 관심을 기울이지만, 한 인간 존재의 육체를 포함해서, 한 인간 존재의 전인적(全人的) 구원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일어난 빵을 많게 하신 이 기적은 모세가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인 만나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해서 4천명의 장정들을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들이 일곱 바구니에 흘러넘쳤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풍요로움, 즉 하늘나라의 풍요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기적이 완전무결한 기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 모든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이 기적을 통해 우리는, 하늘나라의 풍요로움과 천상의 메시아 잔치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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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하느님을 만나러 나오는 방법은 생계의 걱정을 포기하는 것이다>
로드아일랜드의 릴리안 J. 데올리베이라는 끊임없이 가난했기에 끊임없이 기적을 체험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가정용 난방 기름에 얽힌 두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돈이 다 떨어져, 가정용 난방 기름을 살 수 없어 어찌해야할지 모를 때, 저녁미사가 끝나고 신부님이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기름이 떨어져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는데 신부님이 껄껄껄 웃으셔서 조금은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오후에 어떤 신자가 나에게 와서는 기름 100갤런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기름은 당신 거요.”
또 한 번은 남편이 술 때문에 직장을 잃었고, 자신은 심장수술로 역시 직장까지 잃고 돈도 다 떨어져서 전기와 기름이 동시에 끊기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주님께서 저희를 돌보겠다고 하셨으니, 돌보아 주세요!”라고 주님께 소리치고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8시 30분 경, 예전의 직장 상사에게 전화가 왔는데 초과 이익 분배금을 받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매는 1월까지 근무했기에 받을 자격이 있었고 그 금액은 1,777.68달러로 전기료와 기름 값을 낼 수 있었고 약간의 식료품도 살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돈이 전혀 없었던 몇 달 동안은 주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생각에 날아갈 듯한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참조: ‘101가지 기도의 힘; 기적의 연속’]
하느님을 따르는 백성은 항상 ‘광야’에 머뭅니다.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광야는 나의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길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자신의 계획이나 노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공간이 광야입니다. 반대로 도시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이들이 사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 광야로 나온 백성의 병을 치유해주시고 먹이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는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라고 걱정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걱정하시면 그것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양식을 만들어주시는 것은 일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따라 광야로 나온 이들에게 연민을 가지셨다면 그 사람들은 절대 굶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일에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연민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켈커타의 사랑의 선교회 모원에 사는 300여 명의 수련 수녀들이 음식이 없어 모두 굶게 생긴 일이 있었습니다. 주방 담당 수녀는 마더 데레사에게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더 데레사가 몇몇의 후원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중이었으며 그 어린 수녀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가 이번 주 주방 담당인가요? 그렇다면 경당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세요. 그 문제는 해결됐군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그리고 십 분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고, 처음 보는 어떤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마더 데레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을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공립학교 교사들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수업이 취소되어서 7,000개의 점심 도시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도시락을 처리하게 도와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가장 쉬운 일이 육체의 양식을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KBS N의 ‘무엇이든 물어보살, 34회’에서는 매일 술을 2병씩 마시는 남편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결혼하기 전에는 배우보다 잘 생긴 미남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이 어렵고 자녀들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머리가 다 빠지도록 매일 술만 마십니다.
집안일을 다 하며 직장생활도 열심히 하지만 정작 자녀들이 보는 아빠는 매일 술에 절어있는 모습입니다. 아빠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알코올 중독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고민을 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더 잘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란 것입니다. 내일 걱정은 시간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걱정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도시에 있는 것입니다. 도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의 양식을 얻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아무 걱정 없이 예수님만을 따른다면 매일 기적처럼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양식을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동시에 생계를 걱정하는 신앙인이 되지 맙시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시험이라도 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굶어 본 적도, 목말라본 적도, 신발이나 옷이 떨어져본 적도 없습니다.
생계를 걱정하면 그만큼 광야의 하느님과 멀어진 삶을 살고 그만큼 하느님의 은총에서 멀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생계를 걱정하지 않았던 사람들만이 기적의 빵을 먹을 수 있었음을 묵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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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5,29-37 :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심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병든 이들을 기다리신다. 사람들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다. 그분의 옷자락을 잡는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발치에까지 온다. 그들은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를 저는데도 불구하고 산으로 애써 올라왔고, 산에 오른 다음에는 그분의 발치에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된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외딴 곳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에 지칠 줄 몰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나약성과 우리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흘 동안이나 당신 곁에 있었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32절)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더라도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배불리 먹일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33절) 하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그들이 더욱 동정심을 느끼도록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34절)고 물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 주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유대인과 다른 민족을 차별하시지 않고 골고루 대하셨다. 이 차별 없고 순수한 사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삶이 우리는 진정 은총의 삶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많은 군중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사화는 두 가지 형태로 전해졌다.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더 오래 된 것으로 마태오는 이 두 가지를 다 전하고 있다. 복음은 이 기적사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구약에서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었다는 사화(1열왕 17,8-16)를 알고 있으며,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기적 이야기(2열왕 4,42-44)를 알고 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는 사상도 들어있는 것 같다. 그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께서는 외딴 곳에서 백성을 먹이신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다음 빵을 나누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이웃에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우리와 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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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준비한 잔치를 예언합니다. 대림 시기는 이런 잔치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몇 사람만, 완전하다고 여기는 단체만을 위한 구원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가 당신과 맺는 친교의 충만함을 맛볼 수 있도록 손수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그 잔치가 세상 종말에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고 슬픔의 너울을 없애 주시며 ‘잘 익고 잘 거른 술의 잔치’로 비유되는 특별한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구원의 날에 모든 이가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라고 외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의 불안하고 열악한 상황에도 당신의 뒤를 따르는 군중을 보시고 이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이미 배부른 자는 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삶의 현장에서, 모든 것의 한계를 느끼는 고단한 신앙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굳게 믿고 따르는 이에게는 살며시 희망과 기쁨이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먹이시려고 제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 곧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이 비록 크게 가치가 없을지라도, 그분께서는 당신 활동과 우리의 활동을 결합하시고자 이를 받아들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은 군중에게 나누어 줍니다.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는 영원한 잔치에 온전히 참여하여 누리게 될 우리의 행복을 미리 보여 주는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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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 군중이 가엾구나.>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15,30-31)
예수님은 온갖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들”과 “마귀들을 쫓아내신 이야기들”은 단순한 치유 기적 이야기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신 이야기들입니다. (여러 가지 질병들과 신체장애들을, 인간들을 억누르는 억압과 압박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질병들과 장애들 자체도 억압이고 압박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고쳐 주신 일은, 사람들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와 안식을 주셨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뒤에 이어지는 ‘빵의 기적’ 이야기도 “예수님은 해방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이 이야기에 나오는 ‘군중’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군중입니다. (부자도 있었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군중 가운데에는 정말로 가난해서 늘 굶주리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그들의 사정을 걱정하시는 분이지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평소의 굶주림’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지금의 배고픔’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불우이웃 돕기를 강조하는, 즉 이웃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이야기가 아니라, 산상 설교에 나오는 “걱정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에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이 말씀은, “너희의 먹고사는 일에 관한 걱정은 내가 하겠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만 힘써라.”로 해석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는 이 말씀이 실제 상황으로 실현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과 군중이 모두 사흘 동안 계속 굶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마도 함께 지내는 그 사흘 동안에는 먹을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면서 먹을 것이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먹을 것도 없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라는 말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을 것도 없이 ‘먼 길’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서 돌려보내고 싶다.”이고, 이 말씀은 “영육 간에 배부름을 체험한 상태로 돌려보내고 싶다.”로 해석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식과 해방을 체험하게 해 주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사람들이 집에 도착한 다음의 생계 문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먹고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사람들이 깨닫는 것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한 끼 식사를 해결해 주려고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즉 메시아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기적의 빵’을 받아먹은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 빵을 먹은 사람들은 ‘영육 간의 배부름’을 체험했을 것이고, 또 그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안식과 행복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고 믿었어야 했는데, 요한복음 6장을 보면, ‘기적의 빵’을 받아먹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빗나갔습니다.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몸의 배부름만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와 ‘빵의 기적’ 이야기를 하나로 이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병자들과 장애자들도 ‘기적의 빵’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치유의 은총도 받았고, 빵의 은총도 받았는데, 과연 그들 가운데 몇 명이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
몸의 병을 고쳐 달라고, 또는 몸의 배고픔을 해결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일 자체는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썩어 없어질 양식만 찾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외면하는 일이 됩니다. 또 메시아께서 주시는 참된 해방과 자유와 안식을 거부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여러 가지 은총들은 해방의 시작이고, 동시에 그 해방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곳까지 가는 길로 인도해 주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몸을 고친 것에만, 또는 한 번의 배부름에만 만족하고 멈추면, 그것은 그 길의 입구에서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얻으면 그만인 생활이 아니라, 최종 목적지인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가지 않으면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생활, 즉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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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곽승룡 비오 신부님]
<저 군중이 가엾구나...>
오늘복음에는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중에 혹은 가족들 중에 아픈 이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빕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의료인들에게 특별한 주님의 평화와 은총을 청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와 여러 단체 및 의료기관이 병자들에게 최선의 도움을 베풀어 주고, 병자들에게 인간적, 초월적 차원에서 고통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도록 도와주며, 각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특별한 방법으로 병자와 병원 종사자들에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자원 봉사자들의 참여를 더욱더 장려하고, 의료계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정신적, 도덕적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며, 사제들을 비롯하여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병자에 대한 신앙적 도움의 필요성이 더욱더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 병자의 날을 “교회의 선익을 위한 기도와 나눔, 고통을 봉헌하고 병자의 얼굴에서 고통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는 날”로 기념해 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아파하는 이, 힘들어하는 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사랑을 표현해야 함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배고파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가를 잘 보게 됩니다.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삼일 전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군중들이 모여 있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보시고 “저 군중이 가엾구나” 하십니다. 이 가엾음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볼 때 함께 고통에 참여하고 그 고통 속에 뛰어 들어 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때문에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스스로 군중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는 그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에 직접적으로 뛰어 들어가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심과 사랑에 의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픔에 있는 군중들의 상태를 아셨습니다. 곧 그들과의 친밀감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친밀감이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촉발시키고 이 관심과 애정이 가엾음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가엾음이 그들의 고통과 힘듦을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힘듦과 고통을 풀 수 있는 것을 행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파하는 이, 힘들어하는 이, 그리고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에 함께하고 그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껴안으며 그 고통의 현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그네들에게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장에서부터 그네들에 대한 가엾음이 용솟음칠 것이고 이 마음이 우리를 그네들과 하나 되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네들의 아픔을 기쁨으로 나눌 수 있도록 행동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아파하는 이들, 힘들어하는 이들, 배고파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가엾음을 느낍니까? 그리고 그들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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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정렬 베드로 신부님]
"그들을 굶겨 보내서야 되겠느냐?"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서로 나누는 사랑을 베풀 줄 모르는 우리 인간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라 외딴 곳으로 모여듭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올바른 세상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능력은, 인간의 모든 차별 때문에 소외된 사람들을 대표하는 병자들을, 그들이 앓고 있는 병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치유기적을 통해서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이 모든 억압과 차별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어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흘러 넘치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루 온종일을 보내게 되었는데...,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배는 점점 고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들을 걱정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굶겨보내서야 되겠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은 빵 일곱개와 물고기 몇 마리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그 모든 것을 내어놓았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으로 배고파하는 많은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바로 인간의 영혼과 육신 모두가 풍족하게 채워지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꼭 빵과 물고기가 왜 꼭 필요하셨을까요? 그냥 아무것도 없이 그들을 다 배불리 먹이실 수는 없으셨던 것일까요?
인간과 세상을 無에서 창조하신 하느님, 그분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총이라면, 오천명이 아니라, 오만명이라도 아무 것도 없이 다 배불리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욕심으로부터 해방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신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생명까지 바치신 예수님은, 인간 스스로가 미약하고 부족하지만 자기 것을 봉헌하는 사랑을 나눌 때, 그 사랑을 당신께서 받으시고, 더 큰사랑과 은총으로 되돌려진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의 많은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을 봅니다.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차별 때문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사는 우리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안타깝고 슬픈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굶어 죽어가는 북한 사람들을 위해, 집과 재산을 잃은 수재민들을 위해, 그리고 꼭 그런 사람들은 아니더라도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는 쉽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는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도를 한다는 것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에는 인색한 우리들의 모습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기도..., 나눌 생각은 전혀 없이 입으로만 하는 기도..., 동물도 부리지 않는 욕심을 부리는 인간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하는 기도는 절대로 이루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턱도 없이 모자를 것을 알지만..., 세상의 수많은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에게 내어놓을 나의 재산과 시간과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적은 것인 줄을 알지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그들을 위한 진정한 기도를 바칠 때, 오늘 복음에서처럼 큰사랑의 기적을 당신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여, 이 세상 전체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느님 나라가 되게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사명을 알고,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봉헌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은 물론, 동물, 그리고 모든 세상 사물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죽이고 죽는 악육강식의 법칙이 아닌, 하느님의 평화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큰사랑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내어놓고 나눌 때, 하느님께서 그 정성을 보시고, 더 큰 사랑, 이 세상 전체가 당신의 나라가 되는 더 큰 기적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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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로 당신입니다>
마태오 15,29-37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사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 곁에 굶주린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의 주린 배를 채워줄
누군가를 찾기 전에
바로 당신이 먼저 기꺼이
귀한 몫을 내어 놓으십시오.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나누는
아름다운 당신을 보고
누군가 당신을 따를 테니까요.
그리하여 마침내
굶주린 이 하나 없는
넉넉하고 푸근한 세상 열릴 테니까요.
당신 곁에 외로운 이가 있다면
그 사람과 함께 있어줄
누군가를 찾기 전에
바로 당신이 먼저 기꺼이
소중한 벗이 되어 주십시오.
아무런 조건 없이 벗이 되어주는
정다운 당신을 보고
누군가 당신을 따를 테니까요.
그리하여 마침내
너와 나 갈림 없는
하나 된 우리를 이룰 테니까요.
당신 곁에 아파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을 치유해줄
누군가를 찾기 전에
바로 당신이 먼저 기꺼이
정성껏 어루만져 주십시오.
아픈 곳을 정성껏 어루만지는
따뜻한 당신을 보고
누군가 당신을 따를 테니까요.
그리하여 마침내
고통 속에 주저앉은 이 없이
모두 기쁨과 희망의 노래 부를 테니까요.
당신 곁에 억눌린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을 짓누르는 것들을 치워줄
누군가를 찾기 전에
바로 당신이 먼저 기꺼이
억압의 사슬을 끊어 주십시오.
두려움 없이 억압의 굴레를 깨뜨리는
정의로운 당신을 보고
누군가 당신을 따를 테니까요.
그리하여 마침내
뺏는 이 빼앗긴 이 없이
모두가 벗인 평등 세상 올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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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흐트러뜨리지 마라!>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혼자서 살 수 없기에 모이지만, 막상 모여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갈라지고 흩어지니 말입니다. 이렇게 흩어지면 또 다시 모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어찌보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과정의 반복이 바로 삶의 본질적인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모였다 흩어질 때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남길 수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기왕 모였다면, 흩어져야 할 이유보다는 애초에 모였을 때의 첫마음을 떠올리며 모임을 새롭게 일구어 가는 지혜로운 모습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모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치유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모임이 지닌 신비한 힘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모임도 배고픔이라는 인간적인 한계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느껴집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모두가 굶주릴 수는 없으니 최선의 방법은 각자 굶주린 배를 채우도록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흩어져야 하는 절박한 상황보다 모여서 함께 하는 삶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이제 다른 방법을 택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방법이죠.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되는 것이지만 나눌 것이 있기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육신의 치유로 새 삶을 살게 되었지만 이미 며칠 동안의 굶주림을 원망하며 떠나갔을 사람들이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기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또다른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음식이 남았습니다. 함께 하는 삶의 의미를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당신의 품 안에 하나로 모아들이기 위해 오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여, 예수님 안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이들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갈라진 세상에 하나됨의 기쁨을 전하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과연 주님의 도구로서 제대로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겉모습은 온전할지라도 속으로는 서로 갈라지고 흩어져 싸우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갈라진 세상에 모범으로 다가가기는 커녕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안에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무늬만 교회, 이름만 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님의 교회로 거듭나도록, 작은 교회로서 내가 먼저 다른 이들과 갈라서려는 마음을 씻어내고, 인간적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기보다는 당신 안에 모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기쁘게 응답하는 대림시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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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하자마자 은총….>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구름같이 많은 사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으며, 특히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을 보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사흘 동안 따라다녔지만 먹지 못하여 굶주리고 지쳐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리고 지친 저 많은 사람을 그대로 보낸다면 길에서 쓰러질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빵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모든 백성을 땅에 앉게 하시고 빵 일곱 개와 생선 몇 마리를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백성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제하고 4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 그리고 남은 조작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오늘 배고픈 군중을 먹이시려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고운님들이 은총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군중의 형편을 잘 아시는 사랑의 소리’입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이 말씀 속에는 “나는 저들의 배고픔을 안다. 저들이 집까지 가는 동안에 겪는 허기와 피곤을 안다. 나는 저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허기진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사랑의 소리입니다. “그들의 피곤이 곧 나의 피곤이요, 그들의 배고픔이 곧 나의 배고픔이다. 나는 저들을 사랑한다. 나는 저들을 결코 주린 채로 돌려보낼 수 없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불타는 사랑의 음성인 것입니다. 주님은 고운님의 수고와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좁은 길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이 오늘 고운님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결코 거저 돌려보내시지 않는다.’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거저 돌아간 때는 결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병 환자이든지, 백인 대장이든지, 이방인의 가나안 여인이든지, 소경이든지, 세금 받는 자캐오이든지, 지체 높은 니고테모이든지, 혈루증 앓는 여인이든지, 그 누구도 예수님께 왔다가 그냥 돌아간 일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은총을 입고, 축복을 받은 행복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주님의 은총은 한 마디로 “하자마자 은총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나오자마자 주님께서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은총을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자마자 주님께서 용서의 은총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자마자, 주님께서는 만사형통의 은총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복된 신앙”입니다.
요한 1서 1장 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운 분이시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구름같이 많은 사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으며, 특히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고운님들의 자녀들이 그분을 품고 나아가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입고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사랑하는 고운님들의 삶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분의 은총과 축복을 입는 복된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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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35)
♧♧ 시편 65편 4절….
"죄악 때문입니다. 저희의 죄가 저희에게는 너무나 무겁지만 당신께서는 그것을 용서하여 주십니다."
* 죄악 때문입니다. 저희의 죄가 저희에게는 너무나 무겁지만...
여기서 말하는 ‘죄악’은 특정한 어떤 죄를 가리키기 보다는 다윗이 일생동안 지은 작거나 큰 모든 죄를 가리킵니다. 다음으로 ‘무겁다.’라는 말은 ‘견고하다.’ 라는 뜻으로 다윗 자신이 완전히 죄의식에 짓눌려 있음을 말해 줍니다.
* 당신께서는 그것을 용서하여 주십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는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인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 시편 65편 5절….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저희도 당신 집의 좋은 것을,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
*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뽑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하르’라는 말은 주님께 충실한 이들을 만민들 가운데서 특별히 당신의 영적인 자녀로 선택하신 하느님의 주권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까이 오도록 하시다...’라는 말은 성소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즉 하느님과의 영적 친교를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신명기 5장 23절. 참조) 이는 곧 하느님께 경배 드리며 그분과 영적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의 특권이자 큰 축복임을 일깨워 줍니다.
* 행복합니다.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당신(주님)의 뜰...’은 성소 앞마당으로서 사제가 아닌 일반 백성들도 출입할 수 있는 구역을 가리킵니다.(레위기 6장 16절. 참조) 그리고 ‘머물다..’라는 말은 ‘친교를 나누다.’ ‘동거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하느님의 성소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며, 영적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이는 하느님이 주시는 특별한 행복을 누리는 이라는 말입니다.
*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
‘거룩하신 당신(주님) 궁전의 좋은 것...’이란 성전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성전(거룩한 궁전)에 언제나 살아계시며 당신의 백성들에게 모든 신령한 은혜를 베푸시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느님과 친교하는 주님께 충실한 모든 이들의 행복과 기쁨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소’와 ‘성전’라는 단어는 같은 의미의 말로서 서로 번갈아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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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젊은이가 꿈을 찾아 집을 떠났습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것이 걱정되어서 마을에서 지혜롭다는 현자를 찾아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세 개의 편지를 주면서 말합니다. “첫째 편지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열어보고, 둘째 편지는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난관에 빠지면 열어보게. 마지막 편지는 인생이 한가해지면 열어보게.” 외국의 낯선 도시에 도착해서 이 젊은이는 첫째 편지를 열었습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짧은 글귀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걸어가 도전하게.’ 그는 이 글에 힘을 입어서 새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은 아니었지요. 잘되는가 싶었는데,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서 큰 어려움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두 번째 편지를 열어보았습니다. ‘낙담하지 말고 계속 도전하게.’ 이 편지에 또 힘을 얻어 포기하지 않고 도전에 도전을 더했습니다. 결국, 그는 남들이 말하는 소위 ‘성공’이라는 것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허무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제대로 된 길을 향해 가고 있었는지 불안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편지를 열어보았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니 후회하지 마세요.’ 이 글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후회나 망설임, 그리고 절망의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도전과 함께 자신이 이룬 삶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실망하고 포기하고 좌절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신 뒤에 산에 오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 올라온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사람, 장애인과 말 못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전해줍니다.
이러한 사람이 산을 오르기가 쉬웠을까요? 쉽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또 망설이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오를 수 없는 형편이라면서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지금 처지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으므로 실망하거나 포기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꿋꿋하게 산을 올랐고 그 결과는 우리가 모두 잘 알듯이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어리석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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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운동을 잘 하지 않던 사람이 매일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기로 했습니다. 큰마음을 품고 시작했지만, 너무 힘들었습니다. 운동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지요.
근육통이 생겨서 일상생활의 어려움도 생겼고, 운동할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면 더 유익할 것만 같았습니다. 여기에 운동시간이 너무나 지루하게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치에게 운동이 자신에게 맞지 않아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코치는 딱 한 달만 멈추지 말고 운동하라고 권합니다.
이 사람은 한 달만 열심히 하고 포기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한 달을 넘어서 몇 년째 멈추지 않고 계속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아주 건강한 몸을 갖게 되었고, 이 힘으로 열정적으로 일상을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일이 있어서 운동하지 못할 때 오히려 더 힘든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와 묵상을 처음 할 때는 이런 생각들이 멈춰지지 않습니다. ‘효과가 있을까? 이렇게 분심만 계속되는데….’, ‘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 기도를 언제 해?’, ‘기도는 왜 이렇게 지루한 거야?’ 하지만 이 순간의 지나고 나면 지루함이 사라지면서 이 힘으로 세상을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기도….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그리고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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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마존에서 옷걸이를 주문했습니다. 택배로 온 옷걸이를 보면서 놀랐습니다. 조립해야 하는 옷걸이였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글을 쓰거나, 계획을 세우는 건 자주 했는데, 손으로 조립하거나, 만드는 건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바퀴를 달고, 어찌어찌 연결하니 근사한 옷걸이가 되었습니다. 옷을 걸면서 뿌듯했습니다. 한편으로 저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시간, 너무나 많은 걸 스스로 하기보다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편하고, 쉽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루는 일은 힘들고 어렵지만, 보람 있고 이웃에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저는 아이라서 말을 못 합니다.’라고 응답했지만,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가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응답했습니다. 예언자는 앞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시대의 사명과 표징을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유배지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희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권능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사야 예언자로부터 위로를 얻었고, 용기를 얻었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제게도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장거리 운전할 때도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 힘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적막감과 외로움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용기를 얻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왔지만, 그 목적과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물처럼 여기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을 지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욕망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이라는 불기둥, 재물이라는 불기둥, 명예라는 불기둥에 뛰어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만함 때문에 사랑받지 못하고, 열등감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두 주님께로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안식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행복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 적어 놓은 글인데,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와닿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일, 홍보를 위해서 본당을 찾아가는 일, 강의를 준비하는 것들은 제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좋아할 수 있다면 저는 무척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의무감으로 하는 일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기준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은총이요,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십자가도, 부활의 영광도 다 축복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죽음을 넘어서지 않는 부활은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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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제 잔치 인생>
-하느님 꿈의 현실화-
배밭 농사의 이치도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어제부터 배나무 가지치기 전정剪定이 시작되었습니다. 새삼 끝은 시작임을 깨닫게 합니다. 대림의 시작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된 배농사입니다. 배나무의 전정을 통해 배나무의 꼴을 새롭게 잡아가듯 ‘삶의 전정剪定’을 통해 삶의 꼴을 새롭게 잡아가야 할 대림시기입니다.
꿈과 희망, 비전이 있습니까? 과연 나의 꿈과 희망은, 비전은 무엇입니까? 꿈과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삶의 전정剪定'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꿈과 희망이, 비전이 없는 곳 거기가 지옥입니다. 활짝 열린 꿈과 희망은, 비전은 우리의 숨통입니다. 꿈과 희망을 숨쉬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영육의 건강에 꿈과 희망보다, 비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런 꿈과 희망이, 비전이 있을 때 기쁨도 샘솟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아름다운 생명과 빛의 하느님을 꿈꾸는 시간입니다.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예언자 이사야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의 꿈의 모습이 환히 드러납니다. 바로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 나라 구원 잔치의 축제입니다. 바야흐로 하느님의 꿈은 이사야의 꿈, 예수님의 꿈, 우리의 꿈이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천상 축제 잔치의 모습입니다.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꿈, 이사야의 꿈, 예수님의 꿈, 우리의 꿈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씌워진 환상, 허영, 착각, 오해, 혐오, 선입견, 편견 등 이런저런 부정적인 너울들은, 또 우리를 덮고 있는 교만, 탐욕, 슬픔, 분노, 권태, 무지, 허무 등 부정적인 덮개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마치 너울과 덮개의 구별이 모호한 듯 생각됩니다.
참으로 이런 저런 너울들과 덮개들로 인해 온전히 오늘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참 나를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고맙게도 주님께서 이 거룩한 천상잔치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온갖 너울을 거둬주시고 온갖 덮개를 치워주시며 우리 모두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모든 민족, 모든 겨레란 말마디에서 보다시피 우리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천상 구원 축제 잔치입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오늘 복음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사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구원의 축제 잔치를 마련해 주신 똑같은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치유하시고 당신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구원의 천상 축제 잔치는 언제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현재화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궁극의 천상 축제 잔치를 앞당겨 맛보고 체험함으로 우리의 하느님 나라의 꿈과 희망, 비전도 더욱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치유와 구원을 체험한 당대의 사람들과 이 거룩한 천상 미사 잔치에 참석한 우리들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참으로 복된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젠가의 그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불암산 요셉 수도원 우리 위에 머무르신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궁극의 희망이신 하느님을 앞당겨 체험하는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구원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천국의 영원한 행복을 앞당겨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천상잔치의 궁극의 희망과 기쁨을 고스란히 앞당겨 맛보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의 은총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바로 대림시기 오늘 앞당겨 살아야 할 천상 축제 잔치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같은 세상 속에서도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화답송 시편의 소원을 그대로 이뤄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내 몸담고 있는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주님의 집입니다. 그러니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궁극의 하느님의 꿈과 희망을, 비전을 앞당겨 체험함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상축제 잔치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저절로 주님께 드리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 감탄의 하늘 나라 축제 잔치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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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품어 생각하면>
아침잠에서 깨면서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를 또 허락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반성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 날인데 새날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시길 기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하신다 해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으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열매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겠습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절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측은지심, '가엾구나‘ 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바라보셨던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모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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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어릴 때 미술 시간에 데칼코마니 기법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종이를 반 접어 한 면에 물감을 짠 뒤 양면을 겹치면 좌우 대칭의 작품이 탄생하는 원리지요.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이 마치 그런 느낌입니다. 독서와 복음이 같은 그림을 보는 듯, 서로 명쾌하게 호응합니다. 독서에서 예언된 희망과 바람이 복음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으니까요. 과연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진리 또한 실감하게 됩니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5,30)
군중의 도움으로 질병과 장애에 시달리던 이들이 주님 앞에 나아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군중의 협력과 예수님의 연민으로 그들이 온전해집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겨레 앞에서 정결을 회복하고 제 자리를 되찾게 됩니다.
"... 너울과 덮개를 없애시리라 ... 눈물을 닦아 내시고 ... 수치를 치워 주시리라."(이사 25,7-8)
주님께서 서로 다른 이들 사이에서 구분과 차별, 소외와 분쟁, 무지의 너울, 덮개를 없애 평등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행복을 훼손하는 설움과 부끄러움도 치워 주시어 저마다 떳떳하고 충실히 당신을 섬기게 하실 것입니다.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15,31)
이제는 "군중이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어느 정도 기대했기에 아픈 이들을 데려오는 수고를 자처한 건데 직접 기적을 확인하니 경외감이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보내어 악의 세력을 물리쳐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이사 25,9)
예수님을 체험한 군중의 찬양이 이러했을 겁니다. 예언이 실현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계신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쁘실지 상상해 봅니다. 누군가 나를 타인에게 소개할 때 이처럼 내 지고한 사랑과 정성을 알아 준다면 세상을 얻은 듯 뿌듯할 겁니다. 사랑을 깨달은 이나 사랑을 들킨 분이나 행복하긴 매한가지겠지요.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당신 곁에 머무르던 군중의 굶주림에 마음을 쓰십니다.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들이 그분 말씀과 기적에 이끌려 사흘을 따라다닌 후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고 고쳐주시는 일 못지않게 당장 뱃속도 채워주고 싶어 하십니다.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사랑입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메시아 시대, 구원의 날이 오면 온 백성은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베푸신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거기서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배도 채우고 흥도 돋우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5,37)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가 예수님의 감사 기도, 사랑의 지향과 함께 많은 군중을 배불릴 양식으로 불어납니다. 흡족하고 충만한 잔칫상이 벌어지고, 자격 조건 없이 모두가 그 향연에 참여합니다. 내것 네것 따지지 않고 풍족히 나누며 저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 산에서 지금 이루어지는 기적은 옛부터 마련되어 예언자들이 예고했던 하느님의 계획 안에 이미 들어있었습니다.
"보라, 당신 백성을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복음환호송)
이사야는 메시아의 도래를 그렸고, 복음은 예수님을 향해 나아온 백성을 그렸습니다. 이처럼 구원자 주님과 우리의 만남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입니다.
주님의 "오심"과 그분을 맞이하려는 우리의 "달려감"이 교차하는 접점에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 거리는 그분의 뜨거운 사랑과 우리의 열렬한 갈망으로 나날이 좁혀지고 있습니다. 그 접정, 절정의 순간을 향한 그분과 나의 끊임없고 부단한 줄달음질이 결국 우리를 일치로 이끌 것입니다. 지금의 대림시기도 그 여정 안의 어디쯤입니다. 그러니 열렬히 희망하며 기다림의 고삐를 늦추지 맙시다. 기쁨은 그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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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영적 발전이 부진하다고 자신을 채찍질하지 마라.
“낙심하지 마라. 하느님이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것이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고 의심하지 마라. 네가 아는 사람들이 너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게 도움이 된다. 그들한테는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다.”
위의 “감정을 억누르지 마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면 감정이 솟구치는데 그렇게 되면 남의 잣대에 우리가 편들어 주는 꼴이 되어 나는 그들에게 휘둘리어 나만 희생자가 될 뿐입니다. 이는 자기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아직 살지 않는다는 신호입니다.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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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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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신 예수님>
이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그들이 음식이나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외딴 곳이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에 지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본성의 나약함과 우리가 신체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마련해 주심으로써 그분은 당신께서 우리의 영혼만 아니라 육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 영흔과 육신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헤라클레아의 태오도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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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그분 발치에>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병든자를 고쳐주시고
주린배도 채워주십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한 시절!
성당은 먹을 것을 주고 안식처가 되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그냥 받아들였지요.
지금은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는 게 아니라
좋은 병원을 찾아가 돈만 갖다주면
다 찾아내고 치료한다는...
유명 의사, 유명 학원 강사를 찾는 게
중요해진 세상에서
예수님 발치에 다가가는 발걸음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앞으로 더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이미 프랑스는 사제를
찾아보기 어렵고 한국에서 사제를 파견하죠.
아는 신부님이 프랑스 현지인들을 위해
본당에 파견되었는데,
혼자서 3개의 본당을 맡고 있고
그 안에 10개의 성당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앞으로 20년 뒤 어찌될까?
각 본당마다 좋은 학군인 곳은
부모들 이사로 애들이 넘쳐나고
그외 본당은 초중고를 통합하는 실정입니다.
예수님 발치에 나오고 싶고
성당에 들어서고 싶은 마음
그 움직임이 무엇으로 인해 멈추고
멀어지게 하고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그분 발치에 머무르는 기회조차
놓치고 그렇게 무뎌져 살면서
예수님의 존재가 불필요한
요소가 되어버린다면 정신 차려야할 때!
"너희는 멈추고 나를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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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5, 37)
처음도 마지막도
성체성사입니다.
매일매일
우리를 위해
성체성사를
준비하시고
성체를 주시는 분
또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성체성사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성체성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의 성사임을
알게 하십니다.
사랑의 성사는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의 삶은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따뜻한
사랑입니다.
구원의 여정 안에
모두를 배부르게
하시는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히
돌보아주시고
사랑하여 주시는
그분을 만납니다.
모두를 살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의 성체성사는
말씀과 나눔
찬양과 감사가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기쁨으로
다시돌아가는 감사의
대림시기 되십시오.
성체성사는
모두를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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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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