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왕방연 시조비 - 청령포를 바라보며
단종의 애환이 서려 있는 유배지 청령포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역사와 문화가 있는 관광지입니다.
청령표 매표소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왕방연 시조비가 있는데요.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우뚝 서 있는
시조비는
청령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그저 해설사의 설명으로
저쪽에 왕방연 시조비가 있다는 말로
그냥 지나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세조의 어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진어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단종을 생각하며
서글픈 마음을 담아
시조를 읊었던 곳에
시조비가 있다고 해요.
'천만리 머나먼 길의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뒤 없셔
냇가에 안쟈시니
뎌 물도 내 안 같도다
울어 밤길 예놋다.'
뒤편으로는 높은 산과 절벽이 있고
앞으로는 휘돌아가는 서강으로 둘러싸인
청령포는 마치 섬처럼 보이는데요.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단종이 2개월 살았던 유배지인데요.
배를 타지 않으면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곳입니다.
배를 타면 배의 방향만 바꾸면
건너편 청령포에 도착입니다.
사람들이 배를 타면
수시로 배가 출발하며 왕복을 합니다.
뒤편을 보면
높은 산과 우거진 숲과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앞으로는 강이 휘돌아 감싸고 있어
배를 타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청령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매표소에서 매표를 하고
청령포를 먼저 다녀왔어요.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을 하면 아는 것만큼 보인답니다.
단종의 애사를 듣고
실제로 유배지를 방문하니
가슴이 참 먹먹하더이다.
왕방연 시조비가 서 있는 곳으로
가다 보면
단종대왕 유배길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2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영월읍내에 있는
영월객사(관풍헌)로 옮겨져
유배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해요.
그때 영주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흡과 함께
논의하기를
'세조를 제거하고
유배 중인 상왕(단종)을
임금으로 모시자' 하여
만들게 된 격문이 고변되어
역모 혐의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해요.
세조의 신하들은
'노산군이 살아 있기에
역모사건이 또 일어난 것이니
사사시켜야 합니다'라는
상소문을 연달아 올리자
세조는 '아니 된다'라고 반복하였는데
'금성대군과 송현수(단종의 장인)를
역모혐의로 사사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 노산군이 놀라서
자결하였다'라고
조선왕조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네요.
1733년 영조대왕은
단종대왕의 능인 장릉에
표석(능비석)을 세우면서
앞면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 하고,
뒷면에는
1457년에 단종대왕이
영월군에 계셨는데
10월 24일 승하하셨으니
나이 17세이셨다'로 기록되어 있어
죽음에 이르게 된 내력은
실록에도, 능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고 하네요.
단지 실록과 장릉 표석에서
승하하신 날짜의 차이가
3일이나 된다고 해요.
단종대왕은 영월 땅에서
1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나,
청령포와 장릉은
격동의 세월을 간직한
조선국 역사의 현장으로서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합니다.
왕방연 시조비가 서 있는 대로입니다.
바로 왼편 소나무가 많이 있는 곳에
위치합니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시조비 위치합니다.
소나무 사이로
저 멀리 소나무 숲이 우거진
청령포 보이시나요?
이곳은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시조를 읊었던 곳이라 해요.
1617년 병조참의 용계 김지남이
영월 순시 때
아이들이 이 시조를
노랫가락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한시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고 합니다.
청령포 매표소에서
왼편으로 가면
배를 타고 청령포로 들어가고,
오른 편으로 가면
왕방연 시조비가 있습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진어하고
슬픔과 비통한 마음으로
단종을 생각하며 읊은 시가 담긴 비석이
청령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를 찾았다면
왕방연 시조비가 있는 장소에 들려
왕방연이 단종을 생각하며
읊은 시를 음미하며
그 앞에 서서
청령포를 바라보는 것도 좋을 듯...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에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일찍부터 각종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의 불꽃을 피웠고,
생애 후반에는 총칼 대신 문학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애국지사였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7월에
그의 시비가 있는 생가를 찾아본다.
그의 생가터인
포도공원에 세워진 청포도 시비
청포도
이육사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돗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생가터인 육우당유허지비
초가(草家) 시비
초가
이육사
구겨진 하늘은 무근 애기책을 편듯
돌담울이 고성가티 둘러싼 산기슭
박쥐 나래 밑에 황혼이 무쳐오면
초가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지고
고향을 그린 묵화 한폭 좀이쳐
띄엄뛰엄 보이는 그림 조각은
압밭에 보리밧헤 말매나물 캐러간
가신애는 가신애와 종달새소리에 반해
빈바구니 차고 오긴 너무나 부끄러워
술레짠 두뺨우에 모매꽃이 피었고
그네줄에 비가오면 풍년이 든다더니
압내강에 씨레나무 밀려나리면
절믄이는 젊은이와 뗏목을 타고
돈벌로 항구로 흘러간 몇달에
서릿발 입저도 못오면 바람이 분다
피로가꾼 이삭에 참새로 날라가고
곰처럼 어린 놈이 북극을 꿈꾸는데
늘근이는 들근이와 싸호는 입김도
벽에서려 성애끼는 한겨울 밤은
동리의 밀고자인 강물조차 얼붙는다
흉폐된 지역에서
이육사 문학관 앞에 세워진
이육사 좌상과 절정 시비
절정(絶頂)
이 육 사
매운 게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를 상징하는 시 광야는
대한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하는
시어로 가득 차 있다.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발표된 시다.
광 야
이 육 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에 휘날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벌 하뎐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