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는 날 : 2024. 6.217(금)
2. 가는 곳 : 금산 금성산 - 술레길 & 칠백의총(충청남도 금산군)
3. 산행코스
Ⓐ 마수리(수리수리칼국수) - 계원봉 - 할미봉 - 해너무재(37번 국도) - 금성산 - 돌고개(마수재) - 사시봉(술레길 쉼터) - 뱀실재 - 칠백의총(11.5km, 4시간 30분)
Ⓑ 해너무재(37번 국도) - 금성산 - 돌고개(마수재) - 사시봉(술레길 쉼터) - 뱀실재 - 칠백의총(8.5km, 4시간 )
Ⓒ 칠백의총 & 술레길 자율산행
4. 회비 : 35,000원 (아침, 하산주 저녁식사 제공)
☆입금계좌 : 농협 302-5680-7900-61, 김효숙
5. 버스 이동 경로
[월드컵경기장] 버스승강장(07:20) - 화정역(07:30) - 광주역(07:50) - 문예회관 후문(08:00)
- [동광주진입로](현대물류) 버스승강장(08:15)
6. 준비물 : 물, 점심, 간식, 스틱, 무릎보호대, 보온자켓, 기타 개인 등산장비
7. 산행신청 : 전화 또는 카페 좌석표에 댓글
총무 010 5680 7900
8. 산행안내 : 몽산 010 9911 3694
9. 다음산행지 : 2024. 7. 7(금)은 지리산 반야봉(블야 100대 명산) - 삼도봉 - 뱀사골,
7. 21(금)은 거창 현성산 & 수승대 출렁다리
☆금성산
충청남도 금산군의 금성면과 복수면 추부면 경계에 있는 높이 439m의 산이다.
1914년 등장하는 금성면의 명칭이 유래할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진산(鎭山)으로 인식되고 있는 의미 있는 산이다. 『여지도서』에 "금성산은 금산으로부터 왔는데 군 북쪽 10리에 있다."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조선 전체 사람이 사흘을 먹을 금이 들어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읍치 서쪽 장군봉에서부터 금성산을 지나 추부면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예로부터 여러 성들이 축조되었는데, 만악리와 둑실 사이 고개에 있는 지춘산성(芝春山城, 작은성재)과 초미동과 성밑 사이에 있는 학성산성(學聖山城, 큰성재) 등이 그것이다. 금성이라는 이름도 과거 이 산에 성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금성산술레길
행정안전부가 전국 지자체를 대상으로 2012년 녹색길 사업 대상지를 공모한 결과 ‘금성산 술래길 조성사업’이 선정되어 탄생한 ‘금성산술레길.’ 이 길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왜적에 맞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의병과 승병이 묻혀있는 칠백의총과 마을을 지키는 전설의 숲 상마수리 송림을 이은 역사·문화가 함께하는 길이다.
4.3km의 능선 길을 걷다보면 임진왜란 때 격전의 현장을 바라보며 역사를 생각하고 나머지 3.9km의 끝에서 6.25 때 마을사람들이 목숨 걸고 지킨 송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 그 사이사이는 자연과 함께한다. 역사와 문화, 자연이 함께하는 아름다운 길 금성산술래길을 걸어보자.
금성산술래길은 금성산(438m) 줄기를 이용해서 금산의 역사유적과 토속마을을 잇는 길이다. 금산군 금성면과 추부면에 걸쳐있는 이 산은 금성면의 들녘으로 산줄기를 길게 늘어뜨린 것이 특징.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양 팔을 앞으로 쭉 뻗어 내린 형국의 이 산의 윗줄기는 400m에서 300m 대의 봉우리를 일구며 군북면 외부리에 이르러 계원봉(250m)을 일군다음 세를 다한다.
반면 아랫줄기는 금성면 하류리에 이르러 271m의 사지봉을 일군다음 의총리에 이르러 세를 다하는 줄기로 ‘10리장동’또는 ‘뱀산’이라 불린다. “10리에 이르는 긴 산줄기”라 해서 10리장동이요, “뱀처럼 길다” 해서 뱀산이라. 줄기의 고개 중 ‘뱀이실재’와 그 아랫마을 ‘뱀실’이 지명유래를 이야기한다. 이렇게 같은 산이지만 별칭이 달린 것은 그만큼 이 고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끌어안은 산이기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칠백의총[七百義塚]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조선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한 700의사의 무덤.
사적 제105호. 1592년(선조 25) 8월 1일조헌(趙憲)의 의병과 영규(靈圭)의 승병이 합군하여 청주성을 수복하고, 이어 8월 18일 남은 700인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막강한 왜군과 혈전을 벌여 전원이 순절하였다.
4일 후인 22일조헌의 제자 박정량(朴廷亮)ㆍ전승업(全承業) 등이 시체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1603년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峯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년(인조 12)순의단(殉義壇)이 설치되어 제향을 올렸다. 그 뒤 1647년종용사(從容祠)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1663년(현종 4)에 ‘從容祠’라는 사액(賜額)과 4결(結)의 토지를 내려 춘추제향에 쓰게 하였다. 순의단이 설치되면서부터 각 지방수령과 유생의 성금과 의연금이 답지하여 옆에 종용당서원(從容堂書院)도 세워졌다. 그뒤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는 일본인들이 진화사(進化社)를 만들어 사우(祠宇)와 의총을 허물고 일군순의비를 폭파한 뒤 제토(祭土)를 강제로 팔아버렸다. 광복 후 1952년에 군민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하였다. 1970년 국가에서는 경역을 2만2800평으로 확장하고 종용사ㆍ기념관ㆍ순의탑 등을 새로이 지어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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