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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강해 삼부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말씀 마가복음 2장 21-마가복음 2장 28
요절 마가복음 2장 22
예수님이 레위를 부르시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레위는 제자들과 많은 친구를 초청하여 잔치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계속해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를 통해서 은혜의 복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은혜의 복음을 배울 때 우리는 정말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힘에 넘치게 수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은혜의 역사에 감사합니다. 어제 일층의 창문과 출입문을 교체하였습니다. 그 후에 교회 청소하고 책장 정리하는 일을 하는데 어린 학생들을 포함하여 젊은이들이 힘을 다하여 수고하였습니다. 이들이 수고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잔치하는 것)
18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당시의 전통에 따라서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는 날도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느라 평상시 배가 고팠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파서 길을 가다가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고 혼난 적도 있습니다. 배고픈 제자들이 세리레위가 변화되어 잔치를 하자 풍성하게 잘 먹었습니다. 항상 배고팠던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금식하는 것을 생각지 않고 맛있게 먹고 마셨습니다. 제자들은 기쁨이 충만하고 웃음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잠도 잘자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서로 모이면 웃음꽃이 피는 교회가 예수 잘 믿는 교회입니다.
(고행으로 신앙생활하는 자들)
그런데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그 날이 마침 금식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먹고 마실 때 다른 한쪽에서는 배고픈 것을 참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금식을 하게 되면 후각이 예민해집니다. 금식을 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예민해진 바리새인들은 화가 나서 신경질적으로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금식이란 본래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인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 탐욕에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은 경건의 표시로 금식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1년에 한 번 7월 10일 대속죄일에만 회개의 표시로 금식하였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는 국가적 재난을 기념하기 위해 1년에 4번 금식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한층 더 금식법이 강화되어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월요일날과 내려온 목요일 날 일주일에 이틀 번씩 금식하였습니다(눅 18:12). 그들은 금식을 해야 경건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자신이 경건한 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띠고 얼굴도 씻지 않고 흉하게 하였습니다(마 6:16). 그들은 금식의 참된 의미도 알지 못한 채 금식을 통하여 자신이 신앙생활 잘한다는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금식 외에 기도와 구제등 선생을 해야 경건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고행이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내가 선행을 하거나 고행을 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행과 선행으로 신양생활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특징입니다. 불교는 결혼도 하지 않고 육식도 하지 않고 머리를 깎고 화장을 하지않습니다. 도를 닦기 위해서 물구나무를 오래 서고 다리를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놓습니다. 유교는 철저히 육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예절을 따라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양반은 비가 올 때도 철저히 걸어갑니다. 이슬람교는 라마단 절기에 금식하고 하루에 다섯 번 절하고 기도하고 성지순례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고행하고 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
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예수님은 금식이 쓸데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금식하는 때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 그를 따르는 자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비유하심으로 신앙생활은 혼인잔치와 같이 기뻐해야 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쁘게 사셨습니다. 항상 맛있게 먹고 마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하였습니다.(마 11:19). 신앙생활이란 형식과 규례에 얽매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신랑되신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혼인 잔치와 같이 근본적으로 기쁘고 즐거운 생활입니다. 유대 혼인 잔치는 1주일 동안 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모든 슬픈 행사는 금지되었습니다. 비록 금식 기간이 닥치더라도 금식이 면제되었습니다. 로마 식민 통치하에서 유대 백성들의 삶은 매우 힘들고 고달팠습니다. 그들은 하루 한끼도 먹기 힘들 정도 배고프고 굶주린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혼인 잔치집 만큼은 먹을 것이 풍성했습니다. 그들은 혼인잔치에서 모든 괴로움을 잊고 먹고 마시며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춤을 추며 즐거워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쁨이 넘치는 생활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의 원천은 신랑 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예수님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슬프게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짓고 결국은 죽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와 권세와 명예를 얻어도 죽는다면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새생며명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들은 슬픔이 사라집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말이나 생활이 밝고 희망차고 긍정적이고 기쁨과 감사가 넘쳐납니다. 사도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실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명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던 상황에서도 기뻐해야합니다. 항상 기뻐해야합니다. 이렇게 기뻐하면 면역력이 높아집니다. 어떤 질병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울증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기뻐하면 힘이 납니다.
(예수님을 빼앗길 때는 슬퍼해야함)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마음에 기쁨이 없고 세상의 모든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고 울고 싶어집니다. 이런 분들은 신랑되신 예수님을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소멸된 사람들입니다. 사단은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빼앗아가기 위해서 우는 사자처럼 공격합니다. 죄를 짓게 하고 불신을 심어 예수님을 빼앗습니다. 예수님을 빼앗기면 현실의 여러 일들로 근심 걱정이 찾아옵니다. 이런 분들은 빼앗긴 예수님을 다시 찾기 위해서 금식하며 슬퍼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금식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디.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버리면 자녀를 찾기까지 슬퍼합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슬퍼해야합니다. 우리는 이런 때 아침이라도 금식하며 양식 말씀을 보고 기도해야합니다. 소감을 깊이 쓰면서 영적 투쟁을 하여 예수님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 때 다시 성령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에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 안에서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
(그리스도의 새옷을 입자)
21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 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생베조각과 낡은 옷은 합할 수 없습니다. 생베조각은 새옷조각을 말합니다. 새옷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새옷조각이 낡은 옷을 당겨서 낡은 옷을 찢어지게 합니다. 여기서 헌옷은 율법적인 신앙생활입니다. 내 힘으로 하나님께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새옷은 예수님의 옷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와 은혜 신앙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옷이 낡았을 때는 그 옷을 새옷조각으로 기우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헌옷을 벗어버리고 새옷으로 갈아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과감하게 율법주의의 헌옷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신 새옷을 입어야합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은혜 신앙을 갖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피곤하고 지칩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를 벗어 버리고 평생을 은혜로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도 은혜요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은혜요 취업을 하는 것도 은혜요 결혼을 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양을 치고 말씀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야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합니다.
(새포주는 새부대에)
22절을 보십시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새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못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새포도주가 낡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 둘다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성령님을 새 포도주에 비유합니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낡은 가죽 부대에 비유합니다. 새포도주는 새롭게 발효하여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새 포도주로 비유하신 것은 복음은 항상 새롭고 힘이 있고 신선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새포도주와 같이 항상 살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담대함을 주고 힘을 주십니다. 복음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깊고 오묘한 맛을 줍니다. 유대주의를 낡은 가죽 부대에 비유한 것은 인간의 행위에 기초한 율법주의는 굳어지고 쓸모없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인간의 행위에 기초한 율법주의를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은혜의 복음은 유대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복음은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사상이나 종교와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복음은 그 자체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력이 있고 늘 신선합니다. 어떤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력이 있습니까?
(죄인을 새사람으로)
첫째로 복음은 어떤 몹쓸 죄인도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사상은 사람의 인격 형성이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불교나 유교와 같은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이나 사상이나 종교가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죄와 죽음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몹쓸 죄인도 새 사람되게 하는 폭발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기력한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기적인 세리를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자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끼가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형제들을 낳고 키우는 믿음의 어미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이 없다”라는 책을 읽어보면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흉악한 죄인들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의 고기를 구워먹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지존파 중에서도 가장 악독했던 김현양은 이재명 집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완전히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30명 이상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사형집행 때는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를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부른 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를 외치며 사형집행을 받았습니다. 그가 벗어 놓은 흰 운동화에는 성경 두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누가복음 23: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과 야고보서 4: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화되어 새 인생을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사람은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아”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도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틀림없이 변화됩니다.
(새 역사를 창조하는 복음)
둘째로 복음은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시키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린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세우신 질서와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그릇된 질서와 가치관이 파괴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새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기존의 낡은 건물을 파괴시켜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전통과 기존 질서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도전하여 개혁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이 들어가면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에 개혁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기존의 그릇된 질서와 가치관을 깨뜨리고 진리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이 형성하십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혁명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런 영적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영적 혁명을 통해서 개인이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캠퍼스가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됩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복음이 처음에 이 땅에 들어왔을 때 미신이 타파되고 비합리적인 생활이 개혁되는 혁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처음 복음이 한국에 오자 샤마니즘과 유교와 불교의 전통과 가치관에 매여 있던 백성들은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문중에서 축출되기도 하고 목침(나무베개)에 맞기도 하고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반발을 뚫고 놀라운 개혁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다니엘 기포드 선교사는 1888년 미 북장로교 소속으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선교 초창기부터 보고 느끼고 체험한 사실들을 세밀하게 기록하여 “조선의 풍속과 선교”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조선인들은 유순하고 예의바른 민족이지만 많은 악습을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짓말이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노름이 성행하여 심지어는 자기 아내를 노비로 팔아서까지 노름에 미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술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서 길거리에는 술 주정꾼들이 서로 상투를 잡아당기며 싸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조선인은 수많은 종류의 귀신들을 섬기며 귀신들이 주는 무시무시한 공포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사를 하거나 나무를 베고나서 병이 나거나 혹은 문제가 생기면 그들은 굿을 하여 이 귀신들을 달랬습니다. 조상숭배가 성행하고 조상을 잘 섬겨야 그 후손들은 복을 받고 조상을 잘못 섬기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동안 우상숭배에 사용했던 물건들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조롱을 받고 그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쫓겨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첩을 여러 명 거느리던 사람은 아내와 그 자녀들만 제외하고 모든 첩들과 헤어졌습니다. 술과 노름으로 일삼던 사람은 과거 습관에서 탈피하여 새 생활을 하였습니다. 장사꾼이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했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주일에는 장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술장사를 하는 사람이나 부동산투기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 직업을 버렸습니다.
(최치량 이야기)
예수 믿고 변화된 대표적인 사람이 최치랑입니다. 최치량은 마펫선교사와 한석진씨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마펫 선교사를 도와주던 한석진 씨가 평양에 선교회 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한 보따리의 전도책자를 들고 최치량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주막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최씨는 술과 노름 그리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농담과 시비를 일삼아 왔습니다. 사교성이 많은 최씨는 가끔 만나는 한씨를 좋아하였습니다. 최씨는 한씨가 들려주는 이상한 예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아주 싼 값에 팔리는 전도책자도 사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마펫 선교사와 한 씨가 선교활동에 필요한 땅을 사는데 최씨가 토지중개인으로서 토지를 사주면서 관계가 깊어졌습니다. 마펫 선교사와 한씨가 예배참석을 요청하자 사업상 거절할 수 없어서 주일예배에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설교 말씀을 듣고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성경 공부도 하였습니다. 그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자 그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술과 노름을 끊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지도 않았습니다. 집안에서나 길거리에서 싸움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가장인 최씨가 집안에 들어서면 집안이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했으나 이제는 행복과 웃음이 넘쳐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최씨의 부인은 남편의 이같은 변화에 매우 즐거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하였습니다. 남편이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집안에 모셔 둔 각종 신주 단지를 없애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최씨는 이런 부인에게 내가 예수 믿고 술과 노름을 끊기를 원하는가 미신을 믿으며 술과 노름을 하기를 원하는가 물었습니다. 아내는 술과 노름을 끊고 제사도 지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씨는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한번은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강제로 술을 먹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술을 먹으면 복통이 일어난다 거절 하였으나 친구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은 예수 믿기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최씨의 상투를 잡고 서양 오랑캐의 교리를 믿는다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니 마지막으로 이별주를 한잔하자고 했습니다. 최씨는 어쩔 수 없어서 그러겠다고 한 후 친구집을 도망나와 마펫 선교사에게로 달려 왔습니다. 최씨는 처음으로 평양교회의 교인이 된 7명 중의 한 사람입니다. 후에 그는 기독교 박해 사건으로 투옥이 되었습니다. 친분이 있는 한 관리가 최씨를 조용히 불러서 만약 죽고 싶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최씨는 영원히 살고 싶어서 잠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의 가족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평양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새사람되게 할 뿐만 아니라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시키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겸손과 도전의 새부대가 되어야)
새 포도주는 신선하여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며, 또 팽창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은 새포도주와 같이 언제나 생명력이 넘치지만 이를 영접하는 우리 자신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새술을 담는 새부대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새 부대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까? 첮째는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과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굳어 버리는 것입니다. 굳어 버리는 가장 큰 원인은 교만과 안일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자연히 성장하지 못하고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새로운 부대가 되고자 힘을 썼습니다. 그는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투쟁하여 앞으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을 닮고자 투쟁하여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엡 4:13). 안일을 사랑하는 마음도 낡은 가죽 부대가 되게 하는 큰 요인입니다. 안일이란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을 싫어하고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고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생하고 싶지 않고 편히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고난을 싫어하고 안일해 질 때 낡은 가죽부대처럼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학생 때는 약속의 말씀을 잡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며 살고자 하다가도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갖으면면 현실적이 되어 먹고 사는 일에 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꿈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안일해져서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좀 고생스럽지만 하나님의 꿈을 품고 목자로서 양을 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낡은 가죽 부대가 되지 않고 늘 새포도주되신 성령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먹을수록 더욱 하나님의 꿈을 꾸어야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꿈을 꾸었기 때문에 항상 새로워졌습니다. (고후 4:16). 이슬람 선교의 아버지 레이몬드 럴(Raymond Lull, 1232-1315)은 30세에 예수님을 믿은 후에 40세에 선교사의 삶을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적대 감정이 가득한 이슬람권에 가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40세부터 아라비아어를 공부하는데 투자했습니다. 그는 튀니스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돌에 맞아 국외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고 75세 때 다시 그곳에 갔다가 다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 선교사로서의 삶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 80세에 다시 도전하여 결국 그는 81세에 선교사로 갔다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꿈을 꾸었기 늘 새부대로서 도전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로 살지는 못할지라도 세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하나님의 꿈을 꾸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항상 새로워지는 새부대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의 새부대가 되어야)
둘째로,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복음 중심으로 끊임없이 개혁해야합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해 나갈수록 점점 진리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매너리즘에 빠져 형식적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낡은 가죽부대가 되지 않고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외적인 개혁에 앞서 먼저 마음을 개혁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회개하는 데는 아픔이 있고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아픔과 희생을 통해서 껍질을 벗고 새로워질 수 있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끊임없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결단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랑이 되시고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복음은 어떤 사람도 변화시켜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회를 개혁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겸손과 회개와 믿음을 새롭게 함으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힘있게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일층의 창문과 문을 교체한 것도 그런 변화를 위한 몸부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교회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마가복음 2장 강해 3부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