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간공 권규(齊簡公 權跬) 본관은 안동(安東). 할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권희(權僖)이며, 아버지는 찬성(贊成) 권근(權近)이다. 1403년(태종 3) 태종의 3녀 경안공주(慶安公主)와 결혼하여 길천군(吉川君)에 봉해졌다. 1407년 호분위상호군(虎賁衛上護軍)을 거쳐 이듬해 겸우군도총제(兼右軍都摠制)가 되었다. 1413년 명나라 성조(成祖)의 동정을 탐문하기 위하여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여칭(呂稱)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성조로부터 구마(廐馬) 3필, 견단(絹段) 각각 8필씩을 하사받고 돌아왔다. 1416년 길창군(吉昌君)으로 다시 봉작되고, 1418년에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가 되었다. 1421년 29세에 죽자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였다. 품성이 온후하고 매우 겸손하였다.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경안공주(慶安公主) 경안공주(慶安公主, 1393년 ~ 1415년 5월 30일(음력 4월 22일))는 조선의 공주로, 제3대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의 3녀이며,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의 누나이다. 경안공주는 1403년(태종 3) 음력 12월 18일(양력 1404년 1월 30일)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 1393~1421)와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는 실록 기록이 있지만 딸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없는 것으로 보아 딸은 일찍 죽은 듯 하다. 1415년(태종 15) 5월 30일(음력 4월 22일) 23세의 나이로 죽었다. 태종은 경안공주의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 의관 양홍달(楊弘達)의 과실이 있었다 하여 그 신분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경안공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궁주(宮主)는 임금의 세째 딸인데, 나면서부터 정숙하고 예뻤으며, 총명과 지혜도 보통 사람과 달라서, 임금과 중전[兩宮]의 사랑을 한데 모았었다.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가니, 부덕(婦德)이 있어서 시부모를 섬기는데 예절을 극진히 하였고, 가정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죽으니 나이가 23세로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임금이 애도(哀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정지[輟朝]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대·소염(大小斂)에 소용되는 물건이 부족하므로, 명하여 상의원(尙衣院)의 의대(衣襨)로 부의(賻儀)를 주게 하고, 장사는 종친(宗親)의 상등례(上等禮)를 쓰게 하였다. 권규가 불사(佛事)를 행하지 못하게 청하여, 한결같이 《예경(禮經)》의 제도에 따랐다. 궁주와 충녕 대군(忠寧大君)은 천성과 기품이 서로 닮아서, 궁중에서 그 어짊[賢]을 함께 일컬었다. 궁주는 매양 충녕의 덕기(德器)가 날로 이루어짐을 감탄하였으니,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태종실록》 29권, 1415년(태종 15) 4월 22일 <위키백과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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