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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해자 자서 원문과 번역 说文解字序原文及翻译
소스:동북아문물역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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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해자서》, 《또》.설문해자서. 다음은 소편에서 특별히 모은 설문해자서 원문과 번역을 보십시오!
설문해어 자서 원문과 번역
원문
옛날에 포희씨(즉 복희)지왕은 천하를 우러러 하늘을 보고, 부칙관법(法像, 현상)을 땅에 놓고, 새와 짐승의 문(文, 画畵)을 보았다.상교문. 금자가 무늬를 짓다.여지(與地)는 여지(地地), 즉 여지번체(與之")와 통(通)여(通)여, 여지(與地)는 여지(地地)이다."여지"는 수레로 땅을 비유하는 것이며, 곧 대지의 뜻이다.의(義)의(를) 통(通)하고,또는 법도)를 제 몸으로 취하여 《역》의 팔괘, 이수(也(, 《강희자전: 우포야, 유전, 후세에 전해지는 것) 헌상(推算像, 관측추계천천상)을 짓기 시작하였다.
신농씨(神農氏)가 줄을 지어 그 일을 통괄하고, 서())가 번성하여, 위(()를 꾸미고(托)를 꾸미고, 위(()를 꾸미고())를 꾸미고, 위(诈)를 꾸미다(伪), 즉 교묘하게 위사(及)를 꾸렸다.황제의 역사 창힐은 새의 짐승발굽(hang, 짐승의 발자취)을 보고, 지분리(즉 문리)의 가차이야(悟分理)를 알고, 처음 서계(書()를 만들었다.'백공이찰(y,, 다스림), 만물이찰(分、, 명찰), 개취제찰(guai, 설문(說文)이 분결(分也, 즉 단결, 분별)', '양양(分辨传播:전파) 우왕정(王"()'이다.
언문자는 왕자의 조정에서 선교를 명문화하고, 군자(왕신백관)는 녹과 하(하층서민)를 시록하고, 거덕(축덕)은 기야(也德)를 하였다.창힐은 처음에 책을 썼는데, 이는 유상형에 따라서 글이라 하였다.그 후의 형성과 소리가 서로 좋다고 하는 것을 지자라고 한다.文者,物象之本;字者,言孳乳(孳乳:繁殖,泛指派生)而浸(一作寖,渐也)多也。죽백을 책이라고 하는데, 서자가 이와 같다(예를 들면 설문(随文)을 따라다닌다.일설로 약야라 해도 마찬가지이다.오제(황제, 전욱(zunx)), 고양(고신, 제요, 제순)의 삼왕(하우, 상탕, 주문무)의 대에 이르러 수체(별도의 형체)를 바꾸다.태산에 봉한 자는 칠유이대, 미(無)는 같은 것이 있다.
주례: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보씨(관명) 교국자(공경대부의 아들 동생)가 먼저 육서(지사, 상형, 형성, 회의, 전주, 가차)일설지사. 사물을 가리키는 자는 보고 알 수 있고, 살필 수 있으며, 상하가 그렇다.둘째, 상형이라 한다. 상형자는 그 그림으로 그렸고, 몸소 미꾸라지(jiéqu)를 따라 불렀다.일월시야.삼일형성.형성자,이사이름을 붙이고, 비유하여 상성이 되고, 강과 강이 이와 같다.사일회의.회의자,비합,조합류(字類,字群)의합의(義之本字,義之義之借字)이견지향(指向)으로(二言言이자군을결합하여그의의에합하여지향적인사물을표현한다.)무신(武信)은5일전주(轉主)한다.
전주자, 건류(造字類) 한곡(부수 통일), 수(加),) 동의(加也), 시노로(老是老老)도.육일 동안 빌리다. 빌리는 자는 본래 그 글자가 없고, 그 소리에 의지하여 일을 부탁하니, 영장이 그러하느니라.그리고 선왕태사는 《대전》을 15편이나 읽었는데, 고문이나 이상(창힐의 고문과 약간 다르다 한다)과 같다.공자의 책 육경, 좌구명술 춘추전은 모두 고문으로, 궁의(,意, 그야, 지시대명사; 궁의, 문자구성 의미)가득이하게설명된다.그 후 제후들은 역정(政政, 즉 정)을 하였다.역정: 무력으로 정벌하다), 왕에게 통하지 않고, 악례악의 폐해((己之)를 하며, 그 전적(典(·전장서적)을 없앤다.
일곱 나라, 밭과 밭과 밭과 차도가 궤도와 율령이법, 의관이제, 말이성, 글자의 이형으로 나뉜다.진시황이 천하를 시작했을 때 정승 이사내(上))는 동(同)·통일(同)·파())가 진문과 합치(合合)하지 않은 자를 연주(上秦(삭제)사작 《창힐편》, 중차부령 조고작 《원잉력편》, 태사령 호무경작 《박학편》, 모두 역사의 대전(大,)을 취(省)하거나 상당히 절약(혹은 매우 큰 간략한 변경)을 하는 이른바 소전(小者)자(小斯者)이다.당시 진나라가 경서를 불태우고, 구전을 없애고()書儒),)하며, 예졸을 떨치고(隶除), 관직을 일으켜 관옥의 직책이 날로 번성하고, 예서가 처음 있는 이취약역(趣约易()으로 고문이 단절된 것이다.자어 진서의 팔체: 일명 대전, 이명 소전, 삼명 각부(信(·부신의 몸에 새긴 것), 사명 충서(书書·새의 벌레 모양과 같이 편지를 쓴 것)라고 한다.信信, 즉 깃발 같은 것), 5는 모사(之印·도장을 모사한 몸), 6은 서서(书書·제서 몸)라고 한다.일곱은 병기에 새겨진 서(书)라고 하고, 여덟은 예서(书書)라고 한다.비고:자각부 이하의 《한서예문지》는 6기라 불리며, 그중 예서(书書)를 제외하고는 대개 대전(大、)과 소전(小之)의 예술체이다.
한흥에는 초서(草書)가 있다.초서의 특징은 두 가지다:간소화, 연속이다).위율(정위의 법) : 학동들이 17세 이상부터 시행을 합니다. 주문 9천 자를 풍자하면 이리가 됩니다.귀납자는 이를 낭송하고 이해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주문 구천문은 주문으로 쓴 글이 9천 자에 달해도 통한다며 팔체시험지(진나라 팔체를 시험해 보고 쓰도록 한 것)라고 말한다.군이태사를병시(병시)하여최우수(최우수)를상서사(尙書史)로 삼았다.책이나 부정이 있으면 툭하면 탄핵한다(이 두 문장은 이민이 글을 올리면 격식에 맞지 않는 자는 즉시 바로잡는다는 뜻이다).비록 지금은 율법이 있지만 가르치지 않고 초등학교(문자의 학설인 초등학교)가 이수하지 않으니 모달의 설(문자의 구형설)은 오래됐다.
효선 때 창힐을 불러 읽게 하였다.장창(張昌)은 이를 받아들였고, 량저우(州州)는 스투예(史业業), 패인 원예(礼禮), 강학대부 진근(秦近)을 찔렀다.孝平时,征礼等百馀人令说文字未央廷(未央宫)中,以礼为小学元士,黄门侍郎扬雄采(采,采取,采取会议讲学讨论之结果)以作《训纂篇》。무릇 창힐 이하는 열네 편이고 무릇 오천삼백사십 자라 여러 책에 실려 있는 것은 약간 있느니라망하면 새 거섭(新,, 망신이라 하면 왕망(王莽)을 가리킨다.섭정(,政, 王代代漢)은 왕망대한(王汉大漢)이 자립하는 것을 의미하며, 대사공 견풍(丰等校) 등의 교문서(大司空, 관명)를 두었다.견풍지부.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며 고문을 고쳤다.일명 고문(古文), 공자 벽중서(中中書)가 있다.2는 기자(古字)라 하면 고문(古文)이 다른 자이고, 3은 전서(篆書)라 하면 진시황제가 하두인 성막(成邈)을 하였으며, 4는 좌서(书書)라 하면 진예서(秦书書)라 하고, 5는 뮤전(篆,書)이라 하여 모사(印印)도 하고, 6은 조충서(鳥書)라 하면 서(鳥書)라 하여 번신(信信)도 하였다.
벽중서자(中中書, 고문으로 벽에서 유래된 것을 벽중서(之中書)라고 한다.진나라 사람들은 올챙이문이라 부르는데, 주시고문의 머리끝이 굵고 꼬리가 가늘어 올챙이와 비슷한 사고가 있다. 공자왕은 공자의 집을 망쳐서 《예기》, 《상서》, 《춘추》, 《논어》, 《효경》을 얻었다.또한 북평후 장창헌(張昌氏)이 춘추좌씨전(春秋传氏傳)에 군국(軍國)이 산천(山川)에서 정이(丁,)를 얻기도 하였는데, 그 명(名)은 바로 앞대의 고문(古文)이 모두비록 앙큼한 뜻이지만 원류를 다시 보게 되겠지만(이 말은 먼 옛날 문자의 유변은 다시 볼 수 없지만, 그 구성자의 상세한 것은 설명할 수 있다
그 상세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그러나 세상의 대공은 트집잡이가 아니라 호기심 많은 사람으로 여겨서 (변야) 정정을 하고, 향은 (앞으로는) 벽허로 알 수 없는 책을 만들어 난잡하게(상행, 통행의 서, 즉 예서를 말한다)하여 세상을 빛나게 한다.제생경설자해경(依生说說字解經)은 진나라의 예서를 창힐(倉时) 때 서운(書雲)이라고 일컫는다. 부자(父子)의 전래를 어찌 고쳐야 하는가?내위(曲,·곡야)는 말머리 사람이 길다, 사람이 열 사람을 잡으면 말이 말다, 벌레 먹은 사람이 굴중이다.정위는 율법(,法)에 따라 '가(之之借字·호지가짜 글자를 빌려 쓴다고 질책해도) 사람은 돈을 받는다' '가(之)'자의 '지구(句句)'를 말한다.만약 이 사람이 매우 많다면 모두 공씨 고문에 부합되지 않으며, 역사 책보다 오류가 있다.속유비(俗鄙翫)는 그 습(书)을())하고(()소희())문(之意)를 가리우고, 통학(通學)을 모르며, 자례지조(字禮條)를 보지 못하며, 구예(舊藝之條)를 탓하고 야언을 잘하며, 아는 것을 비묘하게 하여 동(通)성인의 미(恉)를 구한다.또 《창힐》편에서 《어린 아들승조(学童子承"(, 학동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속유비인 비천부(儒夫)가 후세에 《군명왈조(君命诏")라 하여 《창힐편》은 고제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를 보면, 고제를 호칭하는 것이기에 그 언사에 신선(神之)의 술(術)이 있다.그 미혹을 불유하니, 어찌 위배되지 않겠는가!
《책》은 "예욕관관고인상"이라고 말한다.말은 반드시 고문(고대의 기록)을 지키되 뚫지 않는다.공자는 "나는 아직도 역사의 궐문에 이르니, 지금 망야부!"라고 말하였다.모르면서 묻지 않고, 사사로운 것을 쓰고, 옳고 그름도 없고, 교묘한 말로 천하의 학자들을 의심케 한다.글자를 짓는 자는 경예(經藝, 경전자사)의 근본, 왕정의 시작, 선인의 후예, 후인의 후예이다.그래서 '본립이 도생이다' '천하의 지치찬을 알고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금 서술한 전서문은 옛 책, 박채통인(博, 광야; 통인, 학식이 해박한 전문가)과 합치되, 소대함은 신빙성 있는 증거(信、可信), 신빙성도 있다.증거도. 계찬(,稽, ;譔, ), 해석)은 군류(群類)를 이(理)로 해석하고, 오(误)를 풀며, 학자를효(学者)하고, 신(神)을달달(恉)한다.각각 부위(부위)에 있고, 변소(치유, 방치)는 따로 두지 않는다.만물은 함박(),靡)이며, 무불유불(無不有)이 겸재(记()한다.그야(대명사) 이불소(쇼, 명야), 원밍이유(유, 고야)역, 맹씨, 서, 예, 주관, 춘추, 좌씨, 논어, 효경, 모두 고문이다.그 사실을 알지 못하여 개궐여(,, 즉결, ;, 즉 阙不言之意)其略即也(阙阙,盖阙如于缺,所即如不知)야.
번역문:
고대 주희씨가 천하를 통치할 때, 위에서는 별을 하늘과 같이 관찰하고, 아래에서는 현상을 땅으로 관찰하며, 또 오수의 질과 지리의 모양을 보고, 가까이서는 몸으로, 멀리서는 사물에 따라 그 형상을 본 후에, 가괘를 쓰기 시작하여, 이것을 법정 도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신농시대에 이르러 밧줄을 매는 방법으로 사물을 기록하고, 모든 일이 번잡하며, 가짜를 꾸며대는 일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황제의 사관 창힐은 오수의 발자국을 보고 결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백관이찰, 만민이찰, 대체로 이별을 닮았다." "별이 났으니 왕정에서 발양되었다." 즉, 글자는 왕의 조정에서 명화되었고, 백관이 하포를 교화하고 덕을 닦으며 금기를 깨달은 것이다.창힐은 글자를 처음 만들 때 대개 사물의 형상에 따라 그 도형을 그렸기 때문에 '문(文)'이라고 부른다.훗날 형방성(形方旁)이 서로 결합해 '자(字)'라고 불렀다.문(文)은 사물의 본연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고, 글(字)은 문(文)이 번성하면서 점차 많아지는 것이다.죽백에 쓴 것을 '책'이라고 하는데, '책'은 '여(")오제삼왕의 시대에 이르러 문자는 점차 다른 형체로 변화하였다.태산에는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왕조가 많은데, 같은 글자를 쓰지 않는다니.
주나라의 제도는 아동이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보씨는 먼저 왕실의 자제를 '육서("書)'로 교육하였다.첫 번째는 지사라고 합니다.==(위아래) 두 글자가 그렇다.두 번째는 상형이라고 합니다.상형이란 그것을 그리는 것인데, 그 형체에 따라 굴곡이 있고, 일·월 두 글자가 그렇다.세 번째는 형성이라고 합니다.형성이란 사물에 따라 글자를 만들고, 비슷한 성부적을 하나 더 취하여 합성한 것인데, 강과 강 두 글자가 이와 같다.네 번째를 회의라고 합니다.회의(會意)란 두 글자를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무(武)와 신(信)이라는 글자가 이와 같다.다섯 번째는 전주라고 합니다.전주란 이런 문자를 만들어 통일부장관이 동의어 한 자전으로 주석을 돌린다는 것인데, 구고(舊考)의 관계다.여섯째는 '거짓말'이라고 합니다.가차란 원래 이 글자가 없는데 동음이의 글자를 차용해서 그 개념을 나타내는데, 레이, 장 두 글자가 그렇습니다.주 선왕에 도착했을 때 태사관의 이름은 대전(大十五) 15편으로 고문과 조금 달랐다.공자가 육경을 쓰고 좌구명이 춘추전을 쓸 때까지 모두 고문으로 썼고, 글자의 의미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각국의 제후들은 서로 정벌하고, 주나라에 복종하지 않았다.천자, 그들은 예악이 자신을 방해하는 것을 싫어하여 옛 책장을 모두 폐기하였다.당시 천하가 7개국으로 나뉘었는데, 나라마다 밭을 구분하는 제도가 다르고, 차로 궤도의 폭이 다르고, 법제도가 다르고, 의관 형식이 다르고, 언어의 소리도 다르고, 글자의 형체도 다르다.진시황의 통일이 있은 후, 승상 이사(李就)는 상서(上書)를 통해 이러한 혼란현상을 정리하고, 진나라의 글자와는 다른 형태의 글씨를 폐지할 것을 건의하였다.리스가 《창힐편》을, 중차부령이 조고령이 《원예력편》을, 태사가 호무경이 《박학편》을 각각 작곡한 것은 모두 역사의 대전(大,)을 취하거나, 약간의 변경이나 간략화를 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소전(小篆)이다.이때 진나라는 경서를 불태우고, 과거의 전적을 폐지하고, 예졸을 대거 발동하여, 역술, 행정사무, 감옥사건이 나날이 번잡해지며, 예서가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고문사는 그 이후로 사용하지 않았다.이후 진나라의 문자는 여덟 가지 체식이 있다: 첫째는 대전, 둘째는 소전, 셋째는 각부, 넷째는 충서, 다섯은 모사, 여섯은 서서, 일곱은 예서, 여덟은 예서.한나라 초년에 초서가 나왔다.정위의 법률은 학동이 17세 이상이면 응시할 수 있고, 구천우의 문장을 낭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사관이 될 수 있으며, 진나라 팔체의 글씨도 시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지방은 조정에 보내져 회시를 치렀고, 성적이 가장 좋은 것은 상서사로 채용되었다.글씨가 부정확하면 고발 처분한다.현재 비록 아직 정위의 법령이 남아 있지만, 시험을 보지 않고 초등학교에서도 강요하지 않아 일반인들은 벌써 글자의 도리를 알지 못한다.효선 황제 때 창힐편에 정통한 사람을 불러 장창을 보내 공부하게 했고, 양저우 자스두예, 패인원례, 강학대부 진근도 글자의 지식을 가르칠 수 있었다.효평황제 때 원예 등 100여 명을 초빙해 미앙궁에서 글을 쓰고 봉원예작초등학교 박사를 지냈다.황문시랑 양웅(雄雄)이 그들이 말하는 것을 채집하여 『훈찬편』으로 편찬하였다.창힐편부터 훈찬편까지 합치면 14편, 합계는 5340자로 각 책에 실린 글자는 대체로 보존돼 있다.왕망이 섭정할 때에 대사공 견풍 등을 보내 글자를 교정하게 하였다.견풍은 자기가 명령을 받들었다고 여기며 고문을 좀 고쳤다.제1종은 고문(古文)으로 공벽(公文字)에서 얻은 글자라고 하는 육서가 있다.두 번째는 기자(字字)라고 하는데, 바로 고문의 이체(異體)이다.세 번째는 전서(篆書)라고 하는데, 바로 소전(小篆)이다.네 번째는 좌서(书書)라고 하는데, 진시황의 명을 받아 두인성막(程所作的)이 한 것이다.다섯째는 뮤전(篆,)이라고 하는데 도장을 모각하는 데 쓰이는 글씨입니다.여섯째는 새벌레 책이라고 하는데 깃발이나 부절에 쓰는 책입니다.
벽중서란 무제 때 노공왕이 공자의 집을 헐어 얻은 예기, 상서, 춘추, 논어, 효경(孝經)을 말한다.또 북평후 장창의 춘추좌씨전(春秋氏氏傳)도 있고, 각 지방에서는 종정이기(宗彝二器)가 발굴되기도 하는데, 그 위에 있는 명문(名文)이 바로 선대의 고문(古文)인데, 그 글씨들이 모두 비슷하다.이 자료들을 보면 글자의 유변은 알 수 없지만 글씨 작성의 자세한 내용은 대략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그러나 당시 일부 사람들은 이런 고문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고 비난하고, 일부러 정규문자를 변경해 공벽을 향해 알기 어려운 것을 허구하고, 통용되는 문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자랑했다.태학 학생들은 앞다퉈 글자를 풀이하고 경을 밝히며 진나라의 예서가 창힐시대의 글자라고 망언했다.글자는 대대로 전해지는데 어떻게 바뀔 수 있느냐는 것이다.경합은 '마두인(馬頭人)'은 '장(長)'자, '인유지십(人十十)'은 '두(頭)'자, '벌레(")'자는 구부러진 '중(中)'자로 왜곡했다.법을 관장하는 사람이 법을 설명하고 심지어 예서의 자형에 따라 사건을 판결하면서 가혹하게 돈을 받는다는 가(字)자를 지문(",文)으로 말하는 경우도 많다.이것들은 모두 벽에 있는 고문과 맞지 않으며, 큰 전서에도 맞지 않는다.그러나 속인은 그들이 배운 것을 가지고 놀았고, 그들이 보기 드문 것을 알지 못했으며, 웅통한 학자도 보지 못했으며, 글의 조례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옛 예법을 괴이하게 여겼고, 야언을 보배로 여겼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오묘한 것이라고 여겼고, 성인의 깊은 뜻을 투철하게 이해했다고 여겼다.그들은 또 창힐 편에서 "어린 아들 승조"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창힐 편은 고대 제왕이 지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안에는 신선의 법술이 기록되어 있다.이렇게 잘못 알고도 모르다니, 설마 패란스러운 것은 아니냐!
상서는 "여상이 옛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공자는 "고사의 궐문도 봤는데 지금은 없구나"라고 했다.모르면서 묻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시시비비를 가리고, 교언사설로 천하 학자들을 의심케 하는 이들이 바로 그것이다.글자는 경예의 기초이자 정치의 기초이다.그래서 "기본이 세워져야 다른 것이 생긴다"며 "천하의 심오한 도리를 알면 착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나는 지금 소전과 고문대전을 편찬하고, 광범위하게 통인의 의견을 채택하고 있으며, 각종 해석에 대해서는 모두 믿을 만하고 증거가 있다.
그 해설을 고찰해 해석하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문자를 해석해, 잘못을 해부해, 문자 구조의 깊은 뜻을 독자에게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부류를 따로따로 배열하여 어지럽히지 않도록 하다.여기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없다.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게 설명해라.책에 인용된 『주역』은 맹씨본, 『상서』는 공씨본, 『시경』은 모씨본, 『예경』·『주관』·『좌씨춘추』·『논어』·『효경』이 모두 고문경이다.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지 않으니 생략할 수밖에 없다이해가 안 돼요.
《说文解字序》,又作《说文解字叙》。下面请看小编特地为大家收集的说文解字序原文及翻译!
说文解字序原文及翻译原文
古者包羲氏(即伏羲)之王天下也,仰则观象于天,俯则观法(法象,现象)于地,视鸟兽之文(文,错画也。象交文。今字作纹)与地(一说为“舆地”,即“与”之繁体“與”通“舆”,“ 与地”即“舆地”。“舆地”,以车喻地,即大地之意)之宜(通“仪”,仪象,或法度),近取诸身,于是始作《易》八卦,以垂(示也;《康熙字典》:又布也;留传,留传后世)宪象(观测推算天象)。及神农氏结绳为治而统其事,庶(众多)业其繁,饰(假托、掩饰)伪(作伪、虚假)(饰伪,即巧饰伪诈)萌生。黄帝之史(史官)仓颉,见鸟兽蹄迒(háng,兽迹也)之迹,知分理(即文理)之可相别异也(悟出纹理有别而鸟兽可辨),初造书契(即文字)。“百工以乂(yì,治理),万品以察(分辨、明察),盖取诸夬(guài,《說文》分決也,即断决、分辨)”;“夬扬(扬:传播)于王庭”(这句意思是:万物分辨明晰了,然后在王者朝廷上予以传播)。言文者宣教明化于王者朝廷(说的是文字是在国王朝廷宣明教化的工具),君子(王臣百官)所以施禄及下(下层庶民),居德(蓄德)则忌也。仓颉之初作书,盖依类象形,故谓之文。其后形声相益,即谓之字。文者,物象之本;字者,言孳乳(孳乳:繁殖,泛指派生)而浸(一作寖,渐也)多也。著于竹帛谓之书,书者如(如:《說文》从隨也。一曰若也,同也)也。以迄五帝(指黄帝、帝颛顼(zhuānxù)高阳、帝喾(kù)高辛、帝尧、帝舜)三王(指夏禹、商汤、周文武)之世,改易(改变)殊体(不同的形体)。封于泰山者七有二代,靡(无)有同焉。
《周礼》:八岁入小学,保氏(官名)教国子(公卿大夫之子弟)先以六书(指事、象形,形声、会意,转注、假借)。一曰指事。指事者,视而可识,察而见意,上下是也。二曰象形。象形者,画成其物,随体诘诎(jiéqū,弯曲),日月是也。三日形声。形声者,以事为名,取譬(喻也)相成,江河是也。四日会意。会意者,比(比合、组合)类(字类、字群)合谊(义之本字,义乃谊之假借字),以见指撝(指向)(二句言组合字群而会合其义,以表现所指向之物事也。),武信是也,五日转注。转注者,建类(造字类)一首(统一其部首),同意相受(加也),考老是也。六日假借。假借者,本无其字,依声托事,令长是也。及宣王太史籀著《大篆》十五篇,与古文或异(谓与仓颉之古文稍有不同)。至孔子书《六经》,左丘明述《春秋传》,皆以古文,厥意(厥,其也,指示代词;厥意,文字构成之义)可得而说(说明)(这几句意思是:直到孔子编写六经,左丘明写春秋传,都用古文,字的意义还能够说明)。其后诸侯力政(政,即征。力政:以武力相征伐),不统于王,恶礼乐之害己(讨厌礼乐妨害自己),而皆去(废弃)其典籍(典章书籍)。分为七国,田畴异亩,车途异轨,律令异法,衣冠异制,言语异声,文字异形。秦始皇初始天下,丞相李斯乃奏(上奏)同(同一、统一)之,罢(删除)其不与秦文合作(相合)者。斯作《仓颉篇》,中车府令赵高作《爰历篇》,太史令胡毋敬作《博学篇》,皆取(采用)史籀大篆,或颇省改(或者有很大的简化改变),所谓小篆者也。是时秦烧灭经书(指焚书坑儒),涤除(废除)旧典,大发隶卒,兴役戍,官狱职务日繁,初有隶书,以趣约易(以求简便),而古文由此绝矣。自尔秦书的八体:一曰大篆,二曰小篆,三曰刻符(刻于符信之体),四曰虫书(象鸟虫之形,书写旙信之体。旙信,即旗帜之类),五曰摹印(规摹印章之体),六曰署书(题署之体),七曰殳书(殳,兵器;殳书,刻于兵器之体),八曰隶书。(注:自刻符以下《汉书艺文志》谓之六技,其中除隶书外,大约都是大篆、小篆之艺术体)。
汉兴有草书(段玉裁曰:“按草书之称起于草稿……其各字不相连绵者曰章草,晋以下相连绵者曰今草。”草书之特征有二:—简化,二连绵)。尉律(廷尉之法律):学童十七以上始试,讽籀书九千字乃得为吏(讽,背文也;籀,紬绎理解之意。讽籀者谓讽诵理解也。有人说:籀书九千文,是用籀文所写之文长达九千字,也通);又以八体试之(试用秦之八体使之书写之)。郡移太史并课(并试),最者(成绩最优者)以为尚书史。书或不正,辄举劾(以法纠有罪也)之(这两句意思是:吏民上书,书写如不合规格者,即举而纠之)。今虽有尉律,不课,小学(文字之学谓之小学者)不修,莫达(明白)其说(文字构形之说)久矣。孝宣时,召通仓颉读(谓李斯所作仓颉篇之说解。读,即说解)者,张敞从受之(从之受业);凉州刺史杜业、沛人爰礼、讲学大夫秦近,亦能言之。孝平时,征礼等百馀人令说文字未央廷(未央宫)中,以礼为小学元士,黄门侍郎扬雄采(采,采取,采取会议讲学讨论之结果)以作《训纂篇》。凡《仓颉》以下十四篇,凡五千三百四十字,群书所载,略存之矣。及亡新居摄(亡新,指王莽。摄,摄政,指王莽代汉自立),使大司空甄丰等校文书(大司空,官名。甄丰,人名)之部。自以为应制作(谓应王莽之命而作),颇改定古文。时有六书:一曰古文,孔子壁中书也。二曰奇字,即古文而异者也;三曰篆书,即小篆,秦始皇帝使下杜人程邈所作也;四曰佐书,即秦隶书;五曰缪篆,所以摹印也;六曰鸟虫书,所以书幡信也。
壁中书者(壁中书,以古文出于壁中故谓之璧中书。晋人谓之蝌蚪文,则以周时古文头粗尾细,有似蝌蚪之故),鲁恭王坏孔子屋而得《礼记》、《尚书》、《春秋》、《论语》、《孝经》。又北平侯张苍献《春秋左氏传》,郡国亦往往于山川得鼎彝,其铭即前代之古文,皆自相似。虽叵(不可之意)版复见远流(此言虽不可再见远古文字之流变,然其构字之详尚可说明),其详可得略说也。而世人大共非訾(大加非议),以为好奇者也,故诡(变也)更正文,乡(向,先前)壁虚造不可知之书,变乱常行(常行,通行之书,即指隶书),以耀于世。诸生竞说字解经(言依秦隶书之形体牵强解字释经),喧称秦之隶书为仓颉时书云:父子相传,何得改易?乃猥(曲也,误也)曰:马头人为长,人持十为斗,虫者屈中也。廷尉说律,至以字断法,“苛(诃之假借字,斥责也)人受钱”,“苛”之字“止句”也。若此者甚众,皆不合孔氏古文,谬于史籀。俗儒鄙夫翫(wàn,玩弄)其所习(指隶书),蔽(不明之意)所希(稀)闻,不见通学,未尝睹字例之条(谓构字之条例),怪旧艺而善野言,以其所知为秘妙,究洞(通达)圣人之微恉(恉,意也)。又见《仓颉》篇中“幼子承诏”(言学童承师之教告,而俗儒鄙夫因后世有“君命曰诏”之义,因说“仓颉篇”为古帝所作),因号古帝之所作也,其辞有神仙之术焉。其迷误不谕,岂不悖哉!
《书》曰:“予欲观古人之象。”言必遵修旧文(古代的记载)而不穿凿。孔子曰:“吾犹及史之阙文,今亡也夫!”盖非其不知而不问,人用己私,是非无正,巧说衺(xié,同邪,不正也)辞,使天下学者疑。盖文字者,经艺(经传子史)之本,王政之始,前人所以垂后,后人所以识古。故曰:“本立而道生”,“知天下之至啧而不可乱也”。今叙篆文,合以古籀,博采通人(博,广也;通人,学识渊博的专家),至于小大,信而有证(信、可信也。证、证据也)。稽撰(稽,稽考;譔,诠釋)其说,将以理(解释)群类(字类),解廖误,晓学者,达神恉(深奥之旨,此谓文字结构之神妙意义)。分别部居(部类),不相杂厕(置也,放置)。万物咸覩(睹),靡不(无不)兼载(尽记也)。厥(其也,代词)宜不昭(昭,明也),爰明以谕(谕,告也)。其称(称,举也,犹今言征引,引证)《易》,孟氏,《书》;《礼》、《周官》、《春秋》、《左氏》、《论语》、《孝经》,皆古文也。其于所不知,盖阙如(阙,即缺;阙如,即阙略不言之意)也。
译文:
古代庖羲氏统治天下的时候,上则观察星象于天,下则观察现象于地,又看到乌兽的纹理和地理的形状,近则取法于身,远则取象于物,于是开始作了八卦,用它来表示法定的图象。至神农时代,用结绳的办法记录事物,诸事繁杂,饰伪的事情不断发生。黄帝的史官仓颉,看到乌兽足迹,知道纹理可以互相区别,始创造了文字。“百官以乂,万民以察,大概取象于分别,”“分别了,扬于王庭,”这就是说,文字是在王者朝廷里宣教明化的,是百官用以对下布施教化,增修德行,明白禁忌的。仓颉在开始创造文字的时候,大抵是依照事物的形象画出它们的图形,所以叫做“文”。后来形旁声旁相互结合就叫做“字”。“文”是表示事物的本然现象,“字”就是由文孳生出来而逐渐增多的。写在竹帛上的叫做“书”,“书”就是“如”的意思。到了五帝三王的时代,文字逐渐改变成不同形体。在泰山祭天地的有很多朝代,使用的文字竟然没有相同的呢。
周朝的制度,儿童八岁入小学,保氏先用“六书”来教育王室的子弟。第一种叫做指事。所谓指事,就是一见就可以认识,细致观察就可以了解它的意义,==(上下)二字就是这样。第二种叫做象形。所谓象形,就是画成那个东西,随着它的形体而曲折,日、月二字就是这样。第三种叫做形声。所谓形声,就是根据事物造字,再取一个近似的声符配合而成,江、河二字就是这样。第四种叫做会意。所谓会意,就是组合两个以上的字,表示一个新的意义,武、信二字就是这样。第五种叫做转注。所谓转注,就是说造这种文字要统一部首,用一个同义的字展转注释,老考的关系就是这样。第六种叫做假借。所谓假借就是本来没有这个字,借用一个同音字来表示这个概念,令、长二字就是这样。到周宣王的时候,太史官名叫籀的作大篆十五篇,跟古文稍有不同。直到孔子编写六经,左丘明写春秋传,都用古文,字的意义还能够说明。此后,各国诸侯互相征伐,不服从周天子,他们讨厌礼乐妨害自己,于是都废弃旧时的典章书籍。当时天下分为七国,各国田亩划分的制度不同,车路轨道的宽窄不同,法律制度不同,衣冠形式不同,语言的声音不同,文字的形体也不同。秦始皇统一天下以后,丞相李斯就上书建议把这些混乱现象统—起来,废除那些跟秦朝文字不同的书写形式。李斯作《仓颉篇》,中车府令赵高作《爰历篇》,太史令胡毋敬作《博学篇》,都是取史籀大篆,或者稍微进行一些改变或简化,这就是所说的小篆。这个时候,秦王朝烧毁了经书,废除了过去的典籍,大量发动隶卒,兴起役戍,行政事务,监狱案件一天天繁杂起来,开始产生隶书,以求简便,于是古文使从此不用了。自此以后秦国文字有八种体式:一叫大篆,二叫小篆,三叫刻符,四叫虫书,五叫摹印,六叫署书,七叫殳书,八叫隶书。汉朝初年,出现了草书。廷尉的法律规定:学童十七岁以上才得应考,能讽诵理解九千宇的文章才能允当史官;同时也要考秦代八体的写法。地方送到朝廷去会试,成绩最好的录取为尚书史。书写有不正确的就检举处分他。现在虽然还有廷尉的法令,可是不考试了,小学也不讲求,一般人早就不懂得文字的道理了。孝宣皇帝的时候,召集了精通《仓颉篇》的人,派张敞跟他学习;此外,凉州刺史杜业、沛人爰礼、讲学大夫秦近,也能够讲授文字的知识。孝平皇帝的时候,征聘爰礼等百多人,在未央宫中讲述文字,封爰礼作小学博士。黄门侍郎扬雄采集他们所讲的编成《训纂篇》。合计《仓颉篇》到《训纂篇》共十四篇,合计五千三百四十字,各书所记载的文字大致都保存着。到王莽摄政的时候,派大司空甄丰等人校正文字。甄丰自以为奉命而作,对古文有些改定。当时有六书:第—种叫做古文,就是从孔壁中得到的文字。第二种叫做奇字,就是古文的异体。第三种叫做篆书,就是小篆。第四种叫做左书,就是秦时的隶书,秦始皇命令下杜人程邈所作的。第五种叫做缪篆,是用来摹刻印章的字体。第六种叫做鸟虫书,是用来写在旗帜或符节上的。
壁中书,就是指武帝时鲁恭王拆孔子住宅而得到的《礼记》、《尚书》、《春秋》、《论语》、《孝经》。又有北平侯张苍所献的《春秋左氏传》,各地又往往在地里挖掘出钟鼎彝器,上面的铭文就是前代的古文,它们的字体都相类似。虽然不能从这些材料看出文字的流变,但是造字详情还是可以大致说明的。然而当时的一些人对于这些古文,大加非议,认为这是好奇立异,故意变更正规文字,向着孔壁凭空虚构一些难以认识的东西,淆乱通行的文字来炫耀自己。。太学的学生都争着解说文字,阐明经义,妄称秦朝的隶书就是仓颉时代的文字。他们说,文字是世代相传的,怎么会改变呢?竞歪曲地说:“马头人”是“長”字,“人持十”是“斗”字,“虫”字是弯曲“中”字而成的。掌管法律的人说明法律,甚至根据隶书的字形判决案件,把“苛人受钱”的“苛”字说成“止句”,类似这种情况还很多。这些都同孔于壁中的古文不合,也不合于大篆。可是庸夫俗子玩弄他们的所学,不明了他们所少见的东西,没有看到宏通的学者,也没有明白文字的条例,把旧艺当作怪异,把野言当成宝贝,认为自己所知道的是非常奥妙的东西,认为自己透彻地领会了圣人的深意。他们又看到仓颉篇中有“幼子承诏”这句话,就说仓颉篇是古代帝王所作的,这里面还记载着神仙的法术哩!这样迷误不明,难道不是悖乱吗!
《尚书》说:“余想观看古人之象”,这就是说,必须遵守古代的记载,不应穿凿附会。孔子说:“我还看到过古史上的阙文,现在没有了啊!”这就是批评不懂不问,各逞己见,是非无定,巧言邪说,使天下学者疑惑的那些人。文字是经艺的基础,也是政治的基础,前人用它,将文化传给后人,后人用它认识古代文化。所以说:“基本建立了,其它事物才能产生”,“知道天下的深奥道理就不可错乱。”我现在编次小篆和古文籀文,广泛地采取通人的意见,至于各种解释,都是可信而有证据的。稽考诠释那些解说,目的在于拿它解释文字,剖析错误,告诉读者通达文字构造的深意。分别部类排列,不使杂乱。在这里,万事万物都可以看到,没有什么遗漏。那些意义不明的就清楚地加以说明。书中所引《周易》是孟氏本;《尚书》是孔氏本;《诗经》是毛氏本;《礼经》、《周官》、《左氏春秋》、《论语》、《孝经》都是古文经。至于那些还不清楚的,只好阙而不解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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