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4〜1839)
o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남편이요,‘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부친. 회장
o 1804년 충청도 홍주 다리골(현 청양 다락골) 출생
o 1838년 경기도 수리산 교우촌(현 안양시)으로 이주한 뒤 그곳 회장에 임명됨
o 1839년 9월 12일 좌포도청 옥에서 장살로 순교
최치운(즉 최경환)이는 치도곤 40도를 맞으면서도 “위주치사(爲主致死, 주님을위해 목숨을 바침)하겠다.” 는 말만 하고 다른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천주학을 하려거든 수리산 치운(즉 최경환)이처럼 하여라!21>
1839년의 기해박해때 좌포도청에 갇혀 있던 도둑이 형벌을 받던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보 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던말이다. 이 한구절에서 우리는 포도청의 혹독한 형벌 아래서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증거하던 그의 굳은 순교 용덕을 잘 느낄 수 있다.
충청도 홍주 다리골(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22백 경주 최씨 집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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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순교 당시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일반적으로 서른다섯(음력)으로 나 온다(『기해일기』, 109쪽 :『순교사 비망기』, p. 420 :『순교자 약전』,p. 28 :〈최양업 신부의 보고서〉, 229쪽). 그러나 최양업 신부의〈1851년 10 월 15일자 서한〉(청주교구 배티성지 • 양업교회사연구소 편,『최양업 토마 스 신부의 서한집』, 천주교 청주교구, 2009, 111쪽)에는 서른여섯(음력, 만 35세)으로 나온다.
21)『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97, 이 베드로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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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태어난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부 친이요,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남편으로 잘 알려져 있다. 1791년의 신해박해를 겪은 뒤 다리골로 낙향해 살던 최인주와 경주 이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열다섯 되던 1818년에 세 살 위인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고,3년 뒤인 1821년에는 장남 토마스를 얻었다. 그의 보명은 영눌(榮訥)이고,경환(京煥)은 그의 자(字)였는데,23) 교우 들 사이에는 치운 (T’ sioun) 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정직과 순박함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괄괄하고 불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단점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온화하게 바뀌었고,그래서 주변 사람들마저 그의 성품이 본래 그러했던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소년 시절부터 세속의 오락을 경멸하고 천주 교리를 듣거나 읽는 것만을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가족들이 점차 냉담 상태에 빠지자, 여러 차례 가족들에게 재 물을 버리고 고향 마을을 떠나서 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하자 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자 혼자 집을 떠나 생활하다가 얼마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집을 떠난 이유를 묻는 가족들에 게 이를 설명하고,그들을 설득한 끝에 마침내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25>
1827년 이전26네 홍주 다리골을 떠난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서울 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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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현재의 청양 다락골 혹은 다래골의 본래 이름은 ‘다리골’ 이었다(〈모방 신부가 조선 신학교 교장에게 보낸 조선 신학생들의 1836년 12월 2일자 서 약서〉, 배티 사적지 편,『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서한』, 천주교 청주교구, 1997, 33쪽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101, 최 베드로의 증언). 증언자 최 베드로는 프란치스코의 셋째 아들 최선정을 말한다.
23)최대식 레오 소장,〈경주최씨세계(世係)〉(필사본 가승).
24)『순교사 비망기』, p. 405 :『순교자 약전』, p. 26 :『기해일기』, 107쪽.
25)〈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103〜104쪽.
26)최선정 베드로가 1827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사실에서 볼 때,프란치스코 의 가족은 그 이전에 이미 서울로 이주했음이 분명하다(『기해 • 병오 재판 록』,최 베드로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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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2”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박해의 위험이 다가오자 이를 피해 강원도 김성(현 김화군), 부평 접프리(현 지명 미상) 등지로 이주해 살았으며 , 1838년에는 안양 수리산(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9동)으로 다시 이주하 여 이곳을 참 신앙인들의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노력하였다.28> 그의 장 남 토마스가 신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접프리에 살 때였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의 화목과 효도에 힘썼고,아랫사람들을 자상하 게 보살펴 주었다. 특히 그가 일상에서 보여준 이웃 사랑과 나눔 정신은 모두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보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먼저 그들을 돌보았으며, 추수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가난한 이웃을 위한 몫으로 남겨놓곤 하였다. 한번은 빚 때문에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는 대신 빚을 갚아주어 싸움을 말린 적이 있었고, 떡이 쉬 어서 팔지 못하는 노인을 보고는 그 떡을 모두 사주었다는 일화도 전한 다. 또한 그는『칠극』과 같은 신심 서적을 열심히 읽거나 자주 묵상에 잠 기곤 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 래서 유식 한 사람들조차 그의 강론을 즐겨 듣곤 하였다.29>
1839년에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수리산 교우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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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프란치스코의 가족이 서울 벙거지골(현 종로3가 인근) 혹은 낙등(현 중구 회현동 일대)에 살았다는 증언도 있다(『기해 • 병오 재판록』. 이 베드로의 증언 및〈최우정의 이력서〉, 배티 사적지 편,『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천주 교 청주교구, 1996, 70쪽).
28)최선정 베드로는 열두 살(양력 11세, 1838년) 때 수리산으로 들어갔다고 증언하였다(『기해 • 병오 재판록』, 최 베드로의 증언). 프란치스코의 가족 이 부평 접프리에 살았다는 기록은 다른 증언에 나오며, 현석문(가롤로)과 민극가(스테파노)도 한때 강원도 김성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나온다(『기 해 • 병오 재판록』, 이 베드로의 증언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99 • 100, 최 베드로의 증언).
29)〈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105〜 106쪽 :〈최우정의 이 력서〉, 73쪽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27, 김 막달레나의 증언 및 회차 101, 최 베드로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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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회장으로 활동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곧 기해박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박해가 시작되고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프란치스코 회장은 서울을 오가면서 그들의 시신을 찾아 안장하였고, 수리산 교우들 을 격려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7월 31일(양력 6월 21일广의 어느 날,서울에서 내려온 포교배가 포졸들을 이끌고 수리산으로 들이닥 쳐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체포하였다. 어린아이까지 포함하여 모두 40명이 넘었다.
한여름에 서울로 끌려가는 신자들의 행렬은 모두의 조롱거리가 되었 고,더위에 지친 어린아이들은 울음보를 터뜨리곤 하였다. 만 한 살밖에되지 않은 갓난아기 스테파노를 압고 가는 프란치스코 회장의 아내 마리 아에게는 ‘그래, 그 어린아이를 업고 죽음을 자청하러 간단 말이냐?’ 하
는 비 아냥이 잇달았다. 그 와중에도 프란치스코 회장은 앞장서서 걸으며 일행 모두를 격려하였다.
형제들이여,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즉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3”
좌포도청으로 압송된 프란치스코 회장과 그의 가족, 교우들은 옥에 갇혔다가 이튿날부터 포도대장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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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순교사 비망기』, p. 405.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는 7월’ 로만 나오는데(〈최 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108쪽), 이는 양력임이 분명하 다. 따라서 다블뤼 주교가 기록한 7월 31일도 양력으로 보았다.
31)〈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서한〉,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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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이때 프란치스코 회장은 배교를 강요하는 포도대장에게 “이 세상 에서 자기 주인에게 불충실한 것도 흉악한 범죄이거늘,하물며 천지 만 물의 주인이신 대주재 (大主幸)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하라고 하십니까?” 라고 대답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수리산 교우들 대부분은 계속 되는 형벌에 굴복하고 말았고,프란치스코 회장의 둘째 아들 최희정 야 고보도 마음이 약해져 석 방되 었다.
이후 프란치스코 회장은 40여 일 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겪으면서 아 내 마리아와 함께 문초와 형벌을 받곤 하였다. 그때마다 이들 부부는 큰 아들 토마스를 비밀리에 나라 밖으로 보내 공부를 시킨다는 이유에서 더 혹독하게 다루어졌다. 프란치스코 회장은 주리형과 치도곤 110도에 주 장과 태장 등 모두 340도를 맞았지만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피 범벅이 되었고, 살은 곤장에 묻어났으며,팔다리는 부러져 온전하지 못 하였다. 이렇게 다 죽어가던 그였지만, 교회 서적을 가져다주거나 교리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에 환한 빛이 돌곤 하였다. 형리들조차 이러한 그 를 보면서 “그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목석과 같은 사람이다.” 라 고 하거나 “바윗덩어리”라고 하면서 탄복했다 한다.32: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으로 형벌을 받고 감옥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 회장의 몸에서는 더 이상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편안한 얼굴로 천 상의 영광을 얻은 것이다. 1839년 9월 12일(음력 8월 5일)로,그의 나 이 35세였다.33> 그의 아내 마리아는 남편이 순교한 뒤 한때 마음이 약해 졌으나, 이후 다시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한 뒤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 후 프란치스코 회장의 시신은 3일 만에 자식과 교우들에게 거두 어져 애오개(현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안장되었다가 그 해 가을 수리산 으로 이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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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위의 서한 및『기해 • 병오 재판록』,최 베드로의 증언 :『기해일기』. 109쪽 :『순교사 비망기』, p. 420.
33)〈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111쪽 :『기해일기』,109쪽 :『순교사 비망기』, 420쪽 ;『순교자 약전』,28쪽. 반면에〈페레올 주교의 보고서〉(897쪽)에는 ‘10월 2일(음력 8월 25일)’ 로 나온다.
34)『기해 • 병오 재판록j, 최 베드로의 증언. 프란치스코 회장의 무덤은 시복식 이 있은 뒤인 1929년 6월 18일 수리산 현지에서 확인되었으며 (『경향잡지』 제23권 665호, 1929년 7월 15일), 1930년 5월 26일 유해로 발굴되어 명 동성당 지하 묘역에 안치되었고(『경향잡지』제24권 687호, 1930년 6월 15일 :〈천주교회보〉제40호, 1930년 7월 1일), 1967년 다시 절두산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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