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제물진두 순교성지
지번주소: 인천시 중구 항동1가 1-13
도로주소: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240
1800년대 중후반 흥선대원군이 조정을 통치하던 시기, 조선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서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인천 지역은 서양 세력이 조선으로 드나드는 관문이자, 선교사들에게는 선교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하지만 외국과의 통상과 이질적 사상의 침투에 완고했던 조정은 외세와 함께 천주교 신자들을 조선 침략의 공범으로 내세워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인천 제물진두(祭物津頭)에서는 우리나라의 첫 번째 영세자인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의 증손자인 이연구와 이균구 등 열 명이 처형되었다. 1868년 4월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에 의해 일어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 무덤 도굴사건과 잇따른 서양 세력의 침공과 관련해 조선 정부는 천주교인들에게 책임을 물어 서양 배와 관련된 장소에서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진두(津頭), 곧 나루터에서 신자들을 공개처형함으로써 서양세력의 배척하는 척사(斥邪) 의식을 고조하고 천주교를 금하는 경종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한 것이다.
1868년 무진년(戊辰年) 4월 부평 읍내에 살던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朴順集, 1830-1911년)의 이모인 김씨(1810-1868년), 남편 손 넙적이 베드로(1800-1868년), 사위 백치문 사도 요한(1826-1868년), 이 마리아의 손자 등 4명이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고 인천으로 압송되어 제물진두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871년 신미년(辛未年) 5월에는 남양에 살던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 토마스(李在誼, 1785-1868년, 이승훈의 장남 이택규의 아들, 1868년 5월 28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아들 이연구(李蓮龜)와 이균구(李筠龜) 형제가 미군 함정을 살피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어서 인천에 살던 이승훈의 손자 이재겸(李在謙, 이승훈의 3남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의 아들, 1968년 체포되어 1871년 유배지에서 사망)의 부인 정(鄭)씨와 그의 손자 이명현(李明玄), 신자로 추정되는 백용석과 김아지도 체포되어 이곳에서 함께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1821-1846년)가 부제품을 받고 입국하여 1년 여간 조선교회의 사정을 둘러본 후, 1845년 4월 사제품을 받기 위해 인근의 포구에서 작은 목선을 타고 중국 상해로 떠났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또한 1888년 7월 22일에는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Joannes Marie Blanc) 주교의 초대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 4명(프랑스 국적 2명과 중국 국적 2명)이 이곳 제물포항을 통해 순교자의 땅인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로써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도생활이 시작되었다.
제물진두 순교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으나, 인천교구는 2010년 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고 김진용 마티아(2012년 선종) 씨가 규명한 인천시 중구 파라다이스 호텔 부지 언덕 일대와 지척인 차이나타운 입구 한중문화관 옆 부지를 2011년 10월 21일 매입해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제물진두 성역화를 추진하였다. 2013년 7월 11일 제물진두 순교기념관(경당) 기공식과 부지 축복식을 갖고, 2014년 5월 15일 교구장 최기산 주교의 주례로 제물진두 순교기념 경당 축복미사를 봉헌했다. 이어 2015년 1월 20일부터 경당에서 순례자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인천 지역 최대 순교 터 위에 건립된 순교기념 경당은 대지면적 109.1㎡(33평), 건축면적 43.3㎡(13평) 규모의 지상 1층 구조로, 차이나타운 입구 한중문화관 바로 왼편에 15m 높이로 건립되었다. 경당 외관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 모양이자 하느님께서 순교자들을 감싸는 두 손 모양을 형상화했다.
벽면에 적힌 순교자 10위의 명패를 따라 좁고 긴 입구로 들어가면 작지만 아담한 경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벽면 높이 십자가 모양의 유리화 사이로 내려오는 빛은 마치 순교자들을 은총으로 감싸 안는 하느님의 빛처럼 여겨진다. 또 한편에 걸린 그림 속에는 1845년 제물포를 통해 중국으로 사제품을 받으러 갔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1888년 이곳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의 모습이 순교자들과 함께 담겨 있다.
인천교구는 인천 남동구 장수동에 건립 추진 중인 ‘이승훈 역사문화 기념관’ 건립 사업을 2016년에 완성할 예정이며, 이 같은 성역화 사업이 하나씩 마무리 되면 강화도 갑곶 순교성지를 비롯한 인천 지역의 모든 성지를 잇는 성지순례길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현재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인천 답동 주교좌성당에서 제물진두까지 걷는 ‘제물진두 순교자 현양 도보순례’를 해오고 있다. [관련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5년 10월 24일)]
제물진두 순교자와 박순집 일가
인천 차이나타운에 제물진두 순교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관광지 사이에서 잠시나마 신앙을 돌아보고 묵상할 수 있는 성지이다. 김대건 신부(당시 부제)가 사제품을 받기 위해 중국 상해로 출발하던 곳이며, 수녀들이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10명의 신앙인이 순교했다.
1) 제물진두 순교자
제물진두에서 순교한 10명의 신앙인은 1868년에 박순집의 이모부 손 베드로, 그의 아내인 김씨, 이 부부의 사위 백치문 사도요한, 이 마리아의 손자가 있고, 1871년에 이승훈의 증손 이연구(李蓮龜)와 이균구(李筠龜) 형제, 이승훈의 손자며느리인 이재겸의 부인 정씨와 손자 이(손)명현, 백용석, 김아지 등이 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선참후계(先斬後啓, 참형을 행한 후에 보고함)로 인하여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이들이 제물진두에서 처형된 이유는 이곳에 이들의 연고지가 있었다기보다 조선을 침공한 서양인들과 관련된 장소라는 점과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나루터의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
1868년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박순집 일가의 사람들이다. 박순집의 이모부인 손 베드로는 형장으로 끌려가며 아내에게 ‘이 때를 당하였으니, 정신을 잃지 말라.’고 하며 일깨우자, 아내도 ‘영감도 정신을 잃지 말라.’며 서로를 격려하며 순교를 받아들였다.
손 베드로 부부와 함께 순교한 사위 백치문 사도요한은 손 베드로 부부의 딸과 혼인하여 살다가 부인을 잃고 재혼하였지만 손 베드로 부부의 근처에 살면서 재혼한 부인에게 예비자 교육을 시키는 등 독실한 신앙인으로 살았다. 세 사람은 함께 도끼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1871년 순교한 이연구와 이균구, 그리고 이재겸의 처 정씨와 정씨의 손자 이명현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 베드로 집안의 사람들이다. 이승훈 집안이 박해 속에서 신앙의 수용과 배교의 혼재를 겪으면서도 신앙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박순집 일가
손 베드로 부부와 백치문 사도요한을 비롯하여 박순집 일가에는 20여 명의 많은 순교자가 있었다. 이것은 박순집 집안에 천주교 신앙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박해 시대에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며 봉사하며 살아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순집의 아버지 박 바오로는 여러 신앙인들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하였다. 당시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행위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박 바오로가 순교하자 박순집 베드로도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그 일을 계속해서 실천하였다. 박해가 끝나고 박순집은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고 이를 모아 기록한 것이 『박순집 증언록』이다. 또한 많은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박순집은 60세에 인천 제물포로 이주하여 제물포 본당(현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회장직을 맡아 봉사하였다. 신자들이 올바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사생활과 교리 등을 가르쳤고, 죽음을 앞둔 신자들을 사제에게 데려가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선종한 이들을 교회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장례기간 내내 함께 하며 도와주었다.
또한 박순집 집안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자가 탄생했다. 박순집의 딸 박황월 글라라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도자로 살아갔다.
[2021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인천주보 3면, 유동식 마리오 신부(청소년사목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