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순 친구아들이 행방볼명된지 2년만에 돌아온 사연- 친구에게 온 메일을 그대로 올립니다 ************** 상범이(감순친구아들)가 무죄판결을 받고 어제 자대 복귀하였다 (원래 근무하던곳) 변호사님도 이런 판결은 처음이라고 하시며 재판관님의 관대한 판결로 2년이라는 탈영기간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긴 휴가기간이 되었다 아래 글은 내가 국방부 장관님께 올린' 눈물의탄원서 '니라 모두의 기도가 모아모아 이런 좋은 결과를 얻었다 친구에게 감사하며.........................................
탄 원 서 성명 : 일병 김 상 범 소속 : 5군단 66사단 189연대
국방부 장관님께 올립니다 저는 5군단 66사단 189연대 취사반에서 근무한 김상범 일병의 어미입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을 당하여 이 글을 올립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모범적 가장인 남편과 착하게 잘 자라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런 두 아들과 넉넉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목한 모두들 부러워하는 그런 아주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왔다고 감히 자부하고 싶습니다. 둘째 아들은 형의 일을 겪는 크나큰 아픔 중에도 의무를 다 하고자 2002. 8. 5 공군에 지원 입대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하게 군복무 하고 있으며 이렇게 두 아들 모두 자랑스럽게 나라에 기둥이 되게끔 훌륭하게 바른 사람으로 잘 길렀습니다.
상범이는 다니던 대학을 휴학 하고 2001.10.16 자원 입대 하여 그해 12월초 자대 배치를 받은 후 군 내부의 잘못된 악습으로 이등병 때부터 줄곧 선임병들의 구타와, 폭행, 집단 따돌림으로 견디다 못해 4박5일 2001.6.22 ~ 6.26 휴가 마지막 날 미복귀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성실함과 근면함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들은 성실함의 표본인 학교생활의 개근을 초등학교6년, 중학교3년, 고등학교3년, 총 12년간 개근한 아주 성실한 청년입니다. 또한 능력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학입시의 척도인 대학수학능력 시험에서 전국 상위 2%대의 우수한 성적으로 현재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 2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로 휴학중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국방의 의무를 다 하고자 자원입대한 성실한 한청년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본연의 임무와 달리 온갖 폭력, 폭행, 집단 따돌림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인격을 파괴하는 폭언 및 구타 집단따돌림은 있어서는 안 되며 허용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군대 내의 구타는 절대 없으며 부모님과 아들들은 안심하고 입대 해도 좋다’ 라며 군은 TV로나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홍보 하였으므로 저 같은 선량한 국민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군을 믿고 두 아들을 군에 입대 시켰습니다. 하지만 일부 군에서는 아직도 폭행, 폭언, 왕따를 묵인하며 관리 소홀로 군발전에 역행하는 부대도 있었습니다. 말하면 현재보다 더 당할까봐 더 맞고 시달릴까바 표출하지 못하고 참으면 더 바보 취급하고 의사표시 하면 더 맞았을 뿐입니다. 폭언은 인격을 파괴 시키고 자존심을 무너뜨리며 자신의 무력에 피폐되어 생의 의미를 잃어가게 한다고 합니다. 구타는 대항할수 없는 아들의 입장에서는 인격의 모멸감과 열등감에 자멸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반듯하고 예의 바르게 잘 키운 저의 아들이 왜 이 비참하고 처절한 느낌을 계속 느껴야 합니까? 폭력과 갈굼 속에서 군대는 꽃다운 한 젊은이의 희망도 꿈도 모두 앗아 가버렸습니다. 군에 그 누구도 ‘구타할 권리’는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하루도 쉬는날 없는 고된 취사병이었지만 ‘우리연대의 최고음식을 만들겠다’ 며 하루에도 수번을 다짐하며 열심히 노력하며 최선을 다한다고 편지도 보내왔습니다. 요리에 취미가 많은 아들은 성실한 군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혹시 취사병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할수 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여 군입대 바로전 강남역에 위치한 수도요리학원을 수강하며 한식요리 기능사 이론에 합격하는 등 노력도 하며 성실한 군생활을 위한 준비도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일을 다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남자가 취사를 잘 한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야 해결되는 일입니다. 서툰 취사병 일이지만 선임병의 할일은 칭찬으로 일을 잘 발전시킬 수 있도록 유도하고 가르치는 일일 것입니다. 고참들의 사사건건 트집으로 또 잘못되면 어쩌나 ,잘못될까?, 잘못될 거야....... 로 점점 더 일을 그르치게 만들뿐입니다.
여러명이 한사람 바보 만들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혹시? 잘못될 것을 빙자하여 일도 맡기려 하지 않고 따돌리기 시작했으며 폭언, 구타에 죽을힘을 다해 참고 있는 아들에게 점점 더 강도를 높여 구타하고 ‘이 놈은 때려도 괜찮은 놈’ 으로 단정짓고 처음에는 가벼운 일침으로 나중에는 수시로 발차기에 무릎 찍기, 주먹질을 가하고 안경을 착용한 아들에게 주위 사물을 던져 얼굴을 가격 하는등 참을 수 없는 인격모독 을 하였습니다. 가해자는 재미로 즐겼지만 매맞는 당사자는 헤어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아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은 이런 결과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후임병이 오고난 후에는 (막내생활 7개월째 후임병이 들어옴) ‘ 너는 왜 너가 맞은만큼 후임병에게 군기를 주지 않는냐’ 하면서 폭언을 하며 괴롭혔습니다. 아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 후임병을 관습대로 때릴 수 없다며 자기는 맞았어도 머리털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었다했습니다.
저의 아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근면 성실하고 올바른 제 아들이 어떻게 계속 참고 참으며 복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학생들도 학교에서 구타나 왕따가 발생시 가해자는 물론이고 학생을 지도하는 담임은 물론 교사를 관리하는 학교장까지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군인은 사회에서 완전 격리된 군대에서 일어난 구타, 폭언, 왕따 행위로 일어난 이번 사건에 대하여 군을 관리하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2. 3월초 아들의 일로 인사계장 핸드폰에 음성녹음을 남겼을 때나 3. 7 면담 시 묵살하지 말고 관리자로서의 책임만 수행했더라도 이런 사태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취사반에 배치된 한달후 정도부터 시작된 선임병 들의 구타와 폭언, 집단 따돌림은 인생을 포기하고 삶을 허물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혹한 행위들 이였다고 했습니다. 자대 배치 후 두 번째 휴가 가는 날까지 폭언, 폭행, 왕따 등이 이뤄지지 않은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가혹행위는 거의 날마다 일상처럼 행해졌습니다.
제 아들을 제대하는 그날까지 괴롭히기로 말한 한달 빠른 바로 위 ‘조 형기 선임병’ 은 6.22 4박5일 두 번째 휴가 나오는 그날 아침까지도 ‘너는 복귀하는 그 날부터 죽었어’ 각오 하라고 협박했으며 아들은 귀대하는 버스에 올라 출발을 기다리는 중 ‘조 형기 선임병’ 의 말과 그 때까지 가! 해진 모든 폭행, 폭언, 더욱 견딜 수 없는 집단 따돌림, 등 모든 행위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면서 버스에서 무의식적으로 내려 버리게 하는 우발적 상황을 만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미 복귀는 선임병 들의 구타, 폭행, 인격모독, 집단 따돌림 등을 피 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였습니다. 지금도 아들은 창고에서 ‘ 조 형기 선임병’ 에게 저 만치 날라가 쓰러질 정도의 센 주먹으로 가슴, 배 등을 수차례 맞았던 기억들이 생생하여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밀치기부터 시작한 구타는 발차기, 무릎찍기, 주먹질에 안경을 쓴 아들에게 음료수 캔 같이 위험한 사물을 던져 얼굴을 맞히는 등 구 타의 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고 대항 할 수 없는 아들의 입장에서는 헤어날 수 없는 심한 모멸감, 자괴감에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들의 키 168cm 이고 ‘조 형기’ 일병의 키가 190cm, 85kg의 거구였음을 고려해 본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 어떻게 왜소한 저의 아들이 저항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점점 무서워졌고 심한 모멸감에 죽고 싶다는 생각과 정신병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합니다. 취사장 옆에 위치한 보급품 창고에서 처음에는 경고성 얼차려 로 시작하여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창고 문 을 닫고 안경을 벗긴 뒤 눈에 잘 띄지 않는 가슴, 배, 같은 부위를 때렸고 아들은 또 짐승같이 맞아야만 했습니다. 말하면 현재보다 더 당할까봐 더 맞고 시달릴까봐 표출하지 못하고 참으면 더 바보 취급하고 의사표시 하면 더 맞았을 뿐입니다. 군입대전 사회에서는 험한 말 한번 할줄 모르고 싸움한번 안해 본 아들이 선임병들의 가혹행위는 업무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업무효율을 떨어뜨렸습니다. 구타를 당한 사병들의 부당한 처사를 보고서도 부대원들은 신고를 하여 도움을 줄 수 없는 분위기 였으며 군대 에서는 암묵적으로 구타나 폭언 등 가혹행위가 허용된다는 인상이 조성 되었습니다. 구타나 폭언, 암기강요 하물며 고성도 금지 하는, 군대문화가 이미 예전과 달리 많이 개혁 된 걸로 알고 있으며 훈련소에서도 그렇게 교육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상관에게 절대 반항할 수 없는 곳이 군대이므로 이 군법 적용으로 선임병은 때려도 되는 군인이고 후임병은 맞아야만 되는 비참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일반사회에서는 머리털 한올도 남에게 피해본적 없으며 더더구나 피해준적 없는 제 아들입니다. 제 아들은 인격을 가지고 있고 생각을 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속수무책으로 맞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아픈 시간을 보낼 수 있었겠으며 그런 비참한 현실 속에서 군생활에 무슨 희망이 있다고 생각 했겠습니까 견뎌내기에 너무나 참혹한 군현실 이였습니다. 아들은 이렇게 힘든 일들을 종교의 힘으로 견뎌내고자 주말마다 교회에서 예배를 보려고 하였지만, 선임병들은 일과시간 후라 취사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데도 ‘일도 못하는 놈이 교회까지 다니려 한다’며 교회 가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여 그것마저도 협박으로 막았으며 하나님의 힘을 빌어 군생활을 이겨내 갈수 있을 것이라는 아들의 생각은 실천되기 어려운 현실에 봉착 되었습니다. 폭언은 인격을 파괴 시키고 자존심을 무너뜨렸으며 자신의 무력함에 스스로 좌절하고 생의 의미를 잃어가는 텅빈 공황 상태가 되어가고 구타는 대항할 수 없는 아들의 입장에서는 인격의 모멸감과 열등감, 수치심에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구타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기억에 남겨 평생 지워지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에 심한 스트레스를 주어 성격, 인간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며 심하면 정신분열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신적 상처로 인하여 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취사장의 관습이었겠지만 잘 하던 일까지도 망치게 하는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하여 아들은 선임병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보려 다양한 방법을 써 보았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고 일도 해보았고 PX에서 자기돈으로 간식거리를 사와 회식도 해보고 애교와 아부도 떨어보고 해보았지만 효과는 잠시 그 순간뿐이었습니다. 미 복귀후 아들은 부모님 1통, 국방부 민원실 1통, 66사단 1통, 모두 3통의 편지를 보내 스스로 자수하여 빠른 시일 안에 복귀를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가진 많은 두려움과 아들을 괴롭힌 선임병들의 얼굴을 보면 자수를 결심했던 담담한 마음이 휴가 전 상태로 돌아가 다시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만 같다는 두려운 생각에 하루 이틀 미루다보니 용기가 없었다 합니다. 그 상태로 복귀하면 더욱 비참한 군생활만 기다릴 것이고 전보다 달라질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괴롭힌 선임병들이 제대한 후 정신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후에 다시 군에 복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합니다. 정신분열증이 일어나는 것보다 오로지 피하고 싶다는 생각들로 꽉 차 있었을 것입니다. 선택한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감안하여 주시기를 무릎꿇고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일년 이상을 그 기간 내내 군대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감 상실, 선임병들에 대한 깊은 불신감으로 인해 우울중에 시달렸지만 아들 특유의 노력하는 성실한 생활로 바닥에 떨어진 자기를 되찾았으니 어미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복귀를 염두에 두고 군복과 군화, 양말, 모자,군번줄, 복무규정이 적힌 책자, 위로 휴가증, 등 모든 군용품을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소중히 지금까지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착한 아들은 본인의 일로 성실하게 근무했던 부사관님, 장교님, 후임병들이 피해를 볼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나름대로 혼자 벌을 받아야 한다며 그 분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후임병이 7월 제대로 알고 있음) 선임병도 제대하고 후임병도 제대한 후로 생각하여 이렇게 기간이 길어졌다고 합니다. 그동안 참혹했던 군생활을 잊고자 나쁜 기억들을 머리에서 지우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주일마다 순복음 교회에 나가 교회를 통해 자신을 많이 교화하고 오산 기도원에도 다니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함으로 순화가 되었고 좋은 책, 들을 접하며 인간관계에 대한 자신감도 회복하였으며 군 생활에 잘 적응 할 수 있도록 용기도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2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괴롭혔던 선임병들도 용서가 되고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은 군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사라지고 마음의 상처도 아물고 나름대로 대처능력도 길러졌으며 2년전 그 상황이 오더라도 다시는 사고가 재발되지 않을 적응력도 생겼고 잘 견뎌 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동안 신림동 난곡의 불우한 어린이들을 보며 좋은 환경에서 자라온 본인과 비교하며 부모님께 더욱 감사하고 앞으로 제대후 계속 어려운 그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합니다. 자기비하에 의한 절망감, 군 부적응으로 인한 극도의 소외감, 좌절과 공포, 고문관으로 당한 행위로 인한 자괴감, 등을 잊고 용기를 되찾았습니다. 어미는 군복 입은 시신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을 때는(시화호옆), 새벽에라도 달려가 확인해 보았고, 경찰서에도 신고하여 확인전화도 여러번 주고 받았으며 때로는 나쁜 사람들에게 사기도 당하며(부산 사상역 터미널 챔피언 PC방) 마지막으로 군의문사 유가족회의 에도 참석하며 아들 찾기에 온세월을 눈물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누구보다 잘 길러온 자식인데 군대의 나쁜 악습으로 행복했던 우리가정이 이렇게 되었다고 군을 원망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찾은 지금 어미의 심정은 말 할 수 없이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나쁜 길로 나쁜 유혹에 빠질 수도 있었겠지만 2년여를 오로지 자기 발전을 위하여 뼈를 깎는 아픔으로 포기하지 않고 복귀하기 위하여 노력한점, 교회를 다니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따뜻한 삶을 사는 법 등 (구세군에 기부, 신림동 난곡의 어린이 공부방에도 기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자기 반성을 많이 하였습니다. 죄는 미웁더라도 정상을 참작 해주시어 많은 용서를 구합니다. 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시기를 이 어미는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아들에게 다시 한번 나라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다면 어미역시 이 나라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자식으로 더욱 열심히 훌륭히 기를 것입니다. 진실을 인정하고 옳은 판단으로 억울한 사람이 발생하지 않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라 생각합니다. 어미는 20여년을 고이고이 길러온 사랑하는 자식을 국가를 믿고 맡겼습니다. 군은 의무만 강요하지 마시고 국민의 권리도 보장 해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군은 단 한명의 사병도 하찮게 생각지 마시고 지휘관님들의 자식처럼 존중해주어 잘 적응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관리하여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되돌려 줄 의무와 책임이 국가에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후방의 부모들도 국가를 믿고 안심하고 자식을 군에 보내 사랑하는 내 조국을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눈물로 호소 드립니다. 국방부 장관님 ! 전도 유망한 한 젊은이의 인생을 경과만으로 책 하지 마시고 성 실하고 유능한 부분을 모두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국가가 포용해 주십시오. 제 아들을 복귀 후 원상태로 돌려 주시길 간곡히 선처를 바랍니다.
김 상범의 부 : ***모 : ***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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