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밥
황보 영락.
식사를 끝낸다. 그러나 먹던 음식이 남아있다. 보관 가능한 음식은 랩에 싸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그러나 먹다가 남은 밥은 가능한 한 음식물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남은 것은 냉장고에 넣어 둔 뒤 데워서 먹거나 나중에 누룽지로 만들어서 먹는다. 아마도 밥은 버리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자랐기 때문일 것 같다.
어릴 적 ‘이밥에 소고깃국’ 하면, 그 시절 최고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식사를 의미했다. 1970년대 초반 무렵에 통일벼가 재배되고, 산업화를 이룬 뒤 197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이밥(쌀밥)을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었다. 그 이밥은 고려말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농토를 조선의 새로운 왕 이성계가 빼앗아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는데 그곳에서 생산된 쌀, 이 씨가 먹게 해 준 쌀밥이어서 이밥이라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산촌의 고향마을에서 밥을 하려면 부엌의 가마솥에서 갈비(말라서 땅에 떨어진 솔잎)를 때어서 밥을 지었다. 밥을 하면서 반찬까지 만들어야 하므로 밥이 잘 안 될 때 솥뚜껑 위에다 타다 남은 불덩이들을 올려놓고 뜸을 들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비싼 쌀을 절약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값싼 좁쌀, 보리쌀, 옥수수 알맹이를 넣어서 밥의 양을 늘렸다. 때때로 고구마나 감자를 넣거나 산나물을 넣기도 했다. 하지만 철부지 아이였기에 “나는 까끌까끌한 보리밥 싫어, 이밥 줘”라고 투정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시커멓거나 노르스름한 잡곡밥보다 하얀 이밥은 보기만 해도 이미 호사스러운 밥이었다. 이밥을 달라고 보채는 자녀들에게 나눠주다가 보면 남아있는 보리밥은 어머님 몫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보이스카우트 야영장에서 처음으로 밥을 했다. 등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풍로에다 냄비를 얹어서 밥을 지었는데 도중에 뚜껑을 자주 열어서 확인하다 보니 삼층밥이 되어버렸다. 당시에는 뚜껑을 열면, 밥이 잘 안 되는 원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취를 했다. 연탄불에 무쇠솥이나 냄비를 얹어서 밥을 하다가 그당시 유행하던 석유풍로에다 밥을 해 먹었다. 얼마 뒤에 전기밥솥이 대중화되면서 밥솥을 이용해서 밥을 쉽게 지어먹을 수 있었다. 1990년대는 전기압력밥솥이 나오면서 밥솥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이제는 음성과 인공지능까지 가미되고, 밥맛까지 좋게 하는 가마솥 원리의 밥솥이 일반화되었다.
며칠 전에 밥솥의 밥을 먹으려 하니 밥이 푸석푸석했다. 나는 밥솥의 뚜껑을 잘못 닫았거니 생각했는데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밥솥을 들고 서비스센터로 갔다. 밥솥의 뚜껑 위의 김 배출구 주변의 작은 패킹을 교체하고 끊어진 연결선을 다시 연결하니 신제품 같았다. 매일 저녁 아침밥을 예약하면서 “백미 고화력 맛있는 밥이 예약되었습니다.”라는 AI 아가씨의 보고를 당분간 더 받기로 했다.
쌀도 업그레이드되었다. 아끼바래, 고시히카리 같은 일본산 품종이 인기를 끌다가 요즘은 재배지역에 따른 안정성, 수량성, 밥맛 선호도에 맞추어 개발된 일품, 신동진, 삼광, 영호진미, 백진주 같은 고품질의 쌀이 많이 생산된다. 하지만 쌀 소비량이 문제이다. 30년 전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은 106.5kg이었으나 2025년은 53.9kg으로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과잉생산된 쌀 때문에 정책적으로 다른 농산물 재배를 장려한다고 하니 세상이 바뀌었다.
보름 전에 신체검사를 하고 어제 검사 결과를 받았다. 당뇨 전 단계이며 처방으로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라고 한다. 앞으로 배부르게 실컷 먹는 즐거움은 이제 거두고, 반 공기의 밥만 먹으라는 충고를 들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하얀 쌀밥보다는 보리나 조, 콩 같은 내가 싫어했던 잡곡밥을 먹으라고 한다. 호사스러운 식사의 대명사 '따뜻한 이밥'은 소고깃국에 말아 먹어도 이미 '찬밥'신세이다. 아침을 건너뛰거나 가볍게 먹고, 점심과 저녁을 푸짐하게 먹는 사람이 많아지더니, 육류 소비량이 쌀 소비량을 추월해 버린 세상이 되었다. 여세추이(與世推移)라 했다. 천대받던 보리쌀과 좁쌀이 환영받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첫사랑 이밥과는 이별하고 잡곡밥과 눈을 맞추며 살아가야 한다.
질병 관리청 조사에 따르면 비만율이 증가하고, 서양인들의 암인 대장암이 많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아직도 “밥심으로 산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 한국인의 몸은 서양인들보다 섭취한 음식물의 수분을 흡수하는 대장이 더 발달한 몸이라고 한다. 수천 년 동안 밥과 채소를 섭취하는 식습관에 맞춰서 진화해 왔을 것이다. 밥과 채소보다 수분이 많지 않은 육류를 더 많이 섭취하니까 대장의 수분흡수 역할이 없어진 상태에서 생긴 문제일 것이다.
구석기 식단이 유행한 적이 있다. 우리 몸에는 부드러운 가공 음식이 아니라 잡곡밥과 섬유질이 많은 채소를 곁들인 식단이라는 이야기이다. 오늘 저녁은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보리쌀을 섞은 잡곡밥에 콩나물과 새싹을 얹고 비벼 먹자고 아내에게 주문부터 해야겠다.
첫댓글 이밥이 찬밥 신세가 되었습니다. 격세지감이지요. 잘 살게 되었습니다. 늘 건강을 돌보며 강건하기를 기원합니다.
어릴적 가장 먹기 싫었던 밥이 무밥과 깡보리밥이였어요. 지금은 먹고 싶은 밥은 압력밥솥을 이용해 지어 먹고있어요. 음식도 세월 따라 유행이 달라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