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태조 주원장
明태조 朱元璋
출생지가 어디인지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놀라운 것은 주원장의 출생지로 회자되는 곳이 우리 나라의 전라남도 해남 마을로 전해 내려온다. 설화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천하 명당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다가 전라남도 해남 바닷가 어딘가에 천하제일의 명당이 있음을 알아 냈으나 이를 눈치챈 주원장이 미리 자기 부모를 모신 후 중국으로 갔다는 설화가 있다. 설화뿐이 아니다 장백전(張白傳)이란 군담소설에도 주원장이 장백(張白)의 죽은 누이의 자부(欺夫)라는 것을 현몽하는 대목이 있고 조선의 대표적 판소리 춘향전에도 주원장이 나타난다.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이 뿌리내리는 조선에서 감히 상국 明태조가 조선 전라도 해남에서 머슴하던 상놈출신이었다 기록하지 못했을 뿐 남향 곳곳에서 상국의 황제가 된 주원장을 여기 저기서 나즈막하게 口傳을 통해 오랫도록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
북한의 김일성도 한반도의 절반을 차지 했다고 작은 초가집을 성지로 꾸며 단장하고 경북 구미 두메산골의 박정희 생가 역시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하물며 최하층의 신분에서 중원 대륙의 황제 位에 오른 주원장은 오죽하겠는가!! 그의 생가가 중국 어느 외진 바다 한가운데 위치 하더라도 요란하게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明이 망할 때 까지 중국에서 주원장의 생가는 발견되지 않았다.
明나라는 高麗人들에 의해 건국 됐다
주원장의 아내 또한 高麗人 한영정(韓永정)의 딸이며 한확(韓確)의 누이로 주원장과 高麗妃 사이에 태어난 주숙(朱肅)은 후에 永樂帝가 된다. 주원장이 명태조에 즉위하기 전 또 다른 高麗妃를 맞는데 석비(碩妃)이며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는다. 또 高麗妃의 동생 한계란韓桂蘭은 후에 明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의 恭愼夫人 이다.
명 선종의 손자며 明 제9代 皇帝인 憲宗 成化帝(1464-1487) 朱見深이 恭愼夫人 韓씨가 졸할때 아래와 같은 제문을 지어 올리는 것으로 보아 성화제는 한계란(恭愼夫人)의 손자가 아닐까 한다.
成化帝는 司說監 太監 王据(사설감 태감 왕거)를 보내 공신부인 한씨에게 제문을 올림니다. 부인께서는 溫柔敬愼(온유경신)하여 아름답고 착함이 칭찬하기에 족하며 궁중에 일을 맡아 오랫동안 공로가 드러났고 壽福(수복)이 康寧(강녕)하여 마땅히 큰 복을 누릴 것인데 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訃音(부음)을 들으니 슬픔에 탄식하옵니다. 이에 특별히 공신부인을 추증하고 관원을 보내어 諭祭(유제)하며 또한 유사에게 명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옵니다. 아아! 살아서는 어질고 착하셨으며 돌아가서는 영화로운 이름을 얻으셨습니다. 인생이 이와 같으면 유감이 없을 것이니 부인께서는 흠향하옵소서.
또다른 고려인으로 明건국의 1등 공신은 병부시랑(兵部侍郞)을 거쳐 호부상서(재무장관)에 오르는 주원장의 오른팔 高麗人 추 유(秋濡 :1343 - 1404)다.
忠臣 추익한 영정
秋氏는 송때 함흥으로 이전한 추엽을 시조로 하며 추엽의 자 추영수는 1213년 문과 급제 후 高麗의 예부상서, 예문관 대제학의 벼슬을 하며 손자 추적도 국학교수를 역임하는 등 고려 명문家이다. 秋씨 일가가 明건국에 큰 기여를 하며 추익한(益漢)은 세종 때 한성부윤을 지내고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1457년 살해되자 그도 따라 죽으니 세상 사람들은 당시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와 더불어 '살아 생전 추충신이요 죽어서는 엄충신'이라고 일컬었으니 추氏는 明에도 조선에도 명문가 임에는 착오가 없다
주원장 (朱元璋 ; 1328.10.21~1398.6.24)
주원장의 아명은 중팔이며 중국의 기록에 安徽省 鳳陽縣 출신으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16세에 고아가 되었다고 기록하며, 기근을 피하기 위해 펑양에 있는 황각사(皇覺寺)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어 하북지방 일대를 탁발 하였다고 되어있다. 즉 안휘성 봉양현의 막연히 어디쯤에서 태어나고 최소한 그 나이면 父의 성명과 4남2녀 형제들 신상을 모를 리 없다. 주원장은 한고조와 마찬가지로 미천한 신분에서 왕조를 건설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래서 요즘 중국 드라마나 영화로 여러 차례 소개되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거대한 중원을 통일한 영웅이 자신의 生地와 부모형제를 모른다니 말이 되나? 중국으로서도 참 딱한 일이다. 주원장이 절에 투신한 해에 하북지역의 재난은 심각했다. 당시 이 일대는 제도적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무법천지였다. 당시 중원의 중부와 북부 지방에서는 기근과 가뭄으로 7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이런 상황은 민중봉기를 촉진시켜 1325년경부터는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눈이 퀭하니 굶주린 거지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골목 여기 저기엔 굶어 죽거나 칼에 찔린 시체들이 나뒹글고 밤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시체들을 소리 소문 없이 집안으로 끌어 가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탁발승에게 시주할 사람은 없었다. 절 역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주원장은 강호를 유랑하며, 발길 향하는 대로 정처없이 살아갈 길을 찾았다. 25세에 濠州 郭子興의 홍건紅巾 기의군 투신한 것으로 나온다. 말이 기의군이지 도적의 소굴이다. 그는 여기서 뛰어난 담력으로 그의 진가를 인정 받는다. 그의 배짱이 얼마나 두둑한 지는 7세의 나이로 거슬러야 한다. 重八은 7세때 집안을 돕기 위해 지주의 소를 방목했다. 소를 방목하던 날 重八은 친구인 서달, 덕흥, 탕화와 함께 놀았다. 이때 그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일화가 있다. 어느날 重八이 친구들과 함께 방목했는데, 장난을 치느라 배고픈 것도 잊었다. 서산에 해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는, 누구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지주의 채찍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는 배가 고파졌다. 누군가가 '고기가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부잣집은 온종일 고기를 먹는다.' 이 말은 더욱 어린 악동들의 배를 고프게 했다. 重八은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차려 놓은 고기를 안먹어서야 되겠는가?'하며 송아지를 끌고 갔다. 소년들은 놀랐으나,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또 실제로 배가 고프자, 소를 묶고는 소를 잡아 구워 먹었다. 모두는 게걸스럽게 먹었다. 배가 채워지고 날이 어두워 집에 돌아가려니 그제야 근심이 밀려왔다, 어떻게 지주에게 대답해야 하는가? 重八은 한가지 생각을 냈다. 소의 껍질과 뼈를 묻고, 소꼬리를 땅에 꽂아 놓고, 지주에게 보고를 했다. '송아지가 땅속으로 들어가고, 꼬리만 남았다. 아무리 해도 꺼낼 수가 없다.' 이같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믿을 지주는 없었다. 중팔은 실컷 얻어 맞고 집으로 쫓겨 갔다. 그리고 그는 이 일로 인해 친구들 중에서 당연히 두목이 되었다.
1352년 그가 몸담은 홍건적은 대규모로 호주를 공략 하는데 주원장은 이 반란군의 일개 병졸로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그 뒤 제2인자가 된다. 1353년 주원장은 安徽省을 함락시켰다. 뒤이어 계속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냈고 와중에 元군과 대치하던 농민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 많은 유능한 인재들을 거느렸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후 명 초기에 벼슬길에 나아가 관리로 일했다. 1355년 두목이 죽자 주원장은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 후 주원장은 중국 동부지역의 여러 읍과 성을 함락시킨 뒤 양쯔 강(揚子江) 유역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사대부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과 알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주원장의 봉기에 가세하자 그는 그들의 조언을 현명하게 받아들여 실천에 옮겼다. 그들로부터 그는 중국어의 기본을 배웠고, 중국사와 유교경전을 공부했다. 더욱 의미 깊은 일은 그가 통치의 원칙을 배우고, 군대조직과 함께 효과적인 지방행정제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조언자들은 그에게 민중봉기의 우두머리에 만족하기 보다는 원(元)나라에 대항하는 국민적인 지도자로 나설 것을 종용했다. 중국 측의 기록이다. 그러나 살펴보면 사대부 출신의 엘리트란 다름 아닌 맨 위에서 열거한 고향후배 高麗人 추 유(秋濡)의 합세를 표현함이며 굶주려 도적이 된 홍건적이나 농민군 중에선 그런 인재를 찾을 수 없자 다른 도적과 달리 배포가 남다른 주원장은 그가 두목이 되자 일개 지역의 도비에서 일국의 제왕을 꿈꾸며 그리하여 그가 알고 있던 고향 高麗의 후배 추유(秋濡)(전주秋씨)를 불러 와 그에게 처음으로 학식을 얻으며 체계적인 병법을 익힌다. 더욱 큰 이유는 후에 기술하지만 高麗軍과의 전투에서 전략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 당시 용감 했지만 원시적이던 元의 지배 하에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중국에서는 체계적 병법의 이치를 꿰뚫는 식자를 구할수 없었고 이때 주원장은 고향 고려의 수재 추유를 불러 들이며 秋濡는 주원장의 오른팔이자 뛰어난 전략가로 후에 주원장이 건국 明의 兵部侍郞을 거쳐 재무장관에 이른다. 추유의 사촌 수경(秋水鏡)은 明의 무강자사(武康刺史)에 재임 중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병으로 이여송의 副將이 되어 아들 노(蘆)·추(萩) 형제와 함께 우리 나라에 들어와 곽산·동래(東萊)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때 全州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완산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1380년 좌승상 호유용의 모반으로 3만의 행정관리를 몰살 하는바 6部의 기능이 마비되어 주원장이 親政 하고 6部의 관리를 새로 뽑아 교육하는바 이때 秋濡의 인척인 고려의 侍郞겸 예문관대제학이며 국학교수인 秋適은 교육을 위해 明에 건너간다. 그러나 중국의 모든 기록엔 고려인 秋濡대신에 劉基를 내세운다. 劉基는 元말 浙東行省都事로 근무하다 1357년 청전산에 들어가 저술활동을 하다. 유원장의 전략가로 묘사되며 명 건국 후 御史中丞兼太史令, 太子贊善大夫, 弘文館學士, 開國翊運守正文臣, 資善大夫上護軍등을 역임했으며 1370년에 誠意伯에 봉해졌다고 하나 그의 저서나 직책 등을 살피면 그는 전략가가 아니고 단순한 서기나 행사를 기록하는 史官에 불과함을 알수 있다. 그럼 왜 고려인 추유 대신에 유기를 내세우는가 하면 주원장 근처에 어른거리는 고려인의 흔적을 지워 명 황제 주원장이 고려인임을 감추기 위함이라 판단한다. 유기가 저술했다는 郁離子를 살피면 그가 저술했다는 民本論의 요체로 仁과 德을 주장하나 이건 고려인 이라면 누구나 단군의 弘益人間 사상임을 알수 있다. 아무튼 중국은 제갈공명 다음으로 유기의 수많은 논문을 쏟아 내고 있다.
중국의 기록으론 주원장이 명 건국 후 고려의 공녀와 결혼 한것으로 되어있으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주원장(1328.10.21~1398.6.24) 32세 되던 5월2일 영락제가 태어나니 1360년이다. 明 건국이 1368년이니 永樂帝는 이미 明건국 8년 전에 태어났으며 당시 元을 섬기던 고려에서 국가의 운명을 걸고 상국 元나라의 반란군 홍건적의 두목 주원장에 고려조정에서 공녀를 상납함은 있을수 없는 일이며 더구나 영락제가 태어나던 1360년 이전의 주원장은 당시 황건적의 거대 세력 장사성(張士誠),진우양(陳友諒)등에 가려 별로 드러 나지도 않던 조그만 비적 무리에 고려조정이 공녀를 조공 받았다는 것은 상식이 아님을 알수 있다.
永樂帝
청주 한씨 문정공파 족보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麗妃 明 太宗 永樂帝 西成府院君永恭愼夫人 明 宣宗宣德帝上 同昭惠王后 德宗大王 西原府院君確丁巳誕降 甲子昇遐...) 주원장이 전라도 한영정 대감 머슴이었을 때 주인집 딸인 麗妃와 눈이맞아 중국으로 도피 하였거나 주원장이 중국에서 어느정도 자리잡은 연후 고향의 머슴살던 한대감집 麗妃를 불러들인 것인지는 명확 하지 않아 더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나 永樂帝의 모친이며 주원장의 부인되는 麗妃가 생산된 문정공파 한씨의 족보에 고려 중엽 (容信王后<1036>,容懿王后)를 배출한 고려 최고의 명문 대가이다. 따라서 중국문헌의 공녀 운운함은 년대상 혹은 조건상에서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락제는 후에 티벳 베트남 남만주등 중국 최대의 영토를 넓히고 콜럼버스 60년 앞서 환관 정화를 시켜 6회에 걸쳐 멀리 아프리카 까지 정복하는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에 버금가는 중국인에 자긍심을 심어준 황제다. 이게 다 순수 父母가 고려인에서 난 순종 Korean 바로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永樂帝다 지면상 영락제는 여기서 줄인다.
주원장은 유능한 조언자들을 밑에 거느리고 효과적인 전술과 전략 행정조치를 취할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원에 대항하는 가장 강성한 지도자가 되었다. 주원장은 장사성의 세력을 제거한 후 북벌군을 편성해 사방에서 원으로 진격했으며, 주원장은 북벌군을 편성해 북진에 성공하여 1368년 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명나라를 세웠다.
북으로 쫒겨간 北元과 조선군의 결합을 주원장은 죽기 전까지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요동(遼東)에 나가 있는 요왕에게 주원장은 조선이 20만대군으로 쳐들어 온다면 우리군대가 어떻게 막겠는가! 우려하며 조선의 공격을 염두에 두고 철저히 대비하라 당부한다. 그러면서 만약 조선이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한다면 이는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걱정하는 대목이 『명실록』에 전한다.
이 기록을 정리 하면서 당시 고려는 1354년 元의 요청으로 최영 장군을 필두로 수하에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 40여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이때 무명의 장수 이성계가 비로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바 기록에 의하면 고우(高郵), 회안로(淮安路), 팔리장(八里庄)에서 1년여 전투를 벌여 元의 승상(丞相)이던 TATAR(脫脫)와 연합하여 홍건적을 소탕한다. 문제는 사기에 기록된 지명이 놀랍게도 安徽省 바로 明건국의 진원이며 주원장의 본거지인 즉 現 上海에서 내륙 한가운데 지점이라는 것이다. 주원장은 홍건적 무명의 졸개로 이성계는 高麗장수로 조우했단 사실이다. 그당시 상해 내륙 안휘성, 강소성에는 농민군을 포함해 약 60만의 반란군이 엄청난 속도로 북상을 하며 기승을 부리던 때다. 그러나 그 험악한 60만명의 홍건적에 단지 2,000여명의 고려군사들이 종횡무진 활약하며 반란군을 1년여간 제압 한다는 사실이다.
고려 원정군에 제압당해 북상의 활로를 1년간 뚫지 못하고 확실하게 제압당하며 발이 묶이자 황건 기의군은 더이상 북진을 감행하지 못하고 고려원정군과 원의 연합군이 주둔한 지역을 멀리 피해 3방향으로 분산시켜 포위망올 벗어날 계획을 세우고 성공적으로 분산이동올 개시한다. 홍건적은 군대를 3군으로 나누어, 1군은 관선생(關先生), 파두반(破頭播)등을 장군으로 하여 기주(寶州:낙양과 산서성 하동지역)로 진출하고, 2군은 백불신(白不信)을 대장으로 하여 섬서성 동관(違關)을 지나 관중(關中)지방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넓히고, 3군은 모귀(毛貴)의 지휘하에 익도(益都:산동성 교주)방향으로 진출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했다.라고 원사는 쓰고 있고 고려사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즉 지도를 펴고 이들의 북상루트를 살피면 고려 원정군 주둔지 고우(高郵), 회안로(淮安路), 팔리장(八里庄)등지를 피해 가기위해 엄청난 거리를 돌아 북상 루트를 개척함을 살필수 있다. 그러나 고려 원정군은 중국 전지역을 커버하는 기능이 아닌 제한된 지역만을 방어하는 임무였기에 이들의 뒤를 추격하지는 않고 1355년 철수한다. 이때 고려군의 피해도 있어 몇몇 유망한 장수들을 잃는다.
생각해 보라!! 중국 심장부 상해에서 눈이 뒤집혀 날뛰는 60만 반란군의 틈바귀에서 1년간 그것도 고작 2천의 高麗軍이 그들을 헤집고 다닌 용맹한 그들이 만약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아니었다면 대륙의 주인이 뒤바뀌었을 수도 있었지 않나 하는 아쉬운 착각을 남기게 한다. 물론 TATAR군과의 연합 이었지만 고려군의 방어망을 뚫고 뒤에 안휘성 후방에 구축한 元군의 방어망을 쉽게 돌파 당하는 것을 보면 그당시 元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으며 또한 그 당시 홍건적은 숫자가 60만이라 해도 이들 모두 오합지졸에 불과 했단 결론이다 .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노비에 불과한 신분이라도 한인간의 의지로서 거대한 제국의 주인 될 수도 있고 수십만 정예군을 거느린 장수라 하더라도 의지가 부족하면 일개 비천한 노비에 패한단 사실이다. 후에 이성계는 明황제가 된 주원장에게 조선의 개국을 알리고 조선의 국호를 허락 받기위해 사신을 明에 보내나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章)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를 신하로서 임금을 쳐 나라를 세운 충신이 아닌 역적의 무리들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에서 보내는 사신마다 참수를 하여 보내며 조선의 국호를 승인하지 않았다. 가는 사신마다 목이 잘려 오니 이제는 어느 누구도 사신으로 가길 주저 할때 고려의 정승으로 불심이 아주 돈독했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한 정승 조반이 큰 사명을 띠고 위험한 사신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황해도 서흥군 오운산에 이르렀는데 꿈에 비 맞는 부처님을 잘 모시면 소원을 성취할 것이란 가르침을 받고 그대로 하였다. 조정승은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 개국과 국호를 간절히 청하였지만, 주원장은 역시 처형을 명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조정승의 목을 친 칼이 세 번이나 부러졌을 뿐 조정승의 목은 멀쩡했다. 집행을 맡았던 대신은 이 사실을 주원장에게 보고했다. 주원장은 놀라운 사실에 크게 감명하였고, 이는 하늘의 뜻으로 볼 수밖에 없다하여 자신의 경솔함을 사과하고 큰 상을 내렸으며 개국의 승인과 조선이란 국호를 얻었다는 것이다. 조반정승의 목이 세 번이나 무사했던 것은 황해도 오운산 불상의 목에 칼자국이 3번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화경 (法華經)묘장엄왕본사품 제27에 나오는 글이다. 明태조 주원장, 韓妃, 아들 永樂帝, 천재 전략가 高麗人 유(秋濡) 一家 이들 자랑스런 高麗人들에 의해 明나라가 세워졌단 사실을 기록하는바다.
단기 4337년 정월 보름날 단군성조의 후손이며 大高麗 제국 유민 가우리 쓰다. |
첫댓글 이런 내용은 우리나라 국가와 국민이 더욱더 많이 알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은 자기들의 역사도 아닌 남의 나라 역사도 편입시키는 이 시기에 왜? 우리나라는 그렇게는 못 하드라도 있는 역사는 알리고 보존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생각에 이 들을 읽고 나서 글을 올렸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중국에 계시는 우리나라 국민들께서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구려 역사 편입 논란으로 한참을 힘들어 했습니다...이 놀라운 글을 읽고, 중국 사이트에서 주원장에 관한 것을 잠깐 찾아 보았습니다. 뭐든지 研究를 즐겨하는 사람들인지라 반드시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역시 安徽鳳陽縣이 주원장의 고향이라는 글이 있더군요.
역사적 고증으로 사실화 해야 겠네요,,
사이트는 http://unn.people.com.cn/BIG5/21674/21717/2043968.html , 주원장에 관한 영상물은 많은데 비해, 근거 문헌 자료가 생각보다 많이 부족함에 퍼오신 글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화 주실때는 아무말씀 안하시더니.. 좋은글 올리셨네여. 특히 지도가 훌륭한데(년도가 없어 흠, 차이나가 좀 크네요)일단 우리의 강역이 현 중국대륙에도 있었다는 표기자체가 중요합니다. 숙제는 고려의 군대를 빼가지고 조선(현,한반도)에 이씨조선을 건국한 이후 주원장에게 나라를 내준 고려왕조의 처리과정이 현재
보라케서 봤는데 뭐이래 복잡하고 길어요 저녁때 다시한번 면밀히 보겠습니다.
밝혀지지않은점 입니다. 최영휘하의 고려군사가 우리역사에서 말한 것처럼 한반도에서만 살고있었다면, 이곳 현지 전쟁에서 그렇게 승리할 수 없었죠. 이곳의 카페는 통제되고 있기때문에 이만. 잘못하면 막힐 수 도 있을것 같아요. 스~님 말씀도 그렇고..에이! 그냥 내친김에. 확!^^:
아반님 몸사릴게 뭐 있다고,,세계어디에나 개인의 사상은 존중되어야지요.
많이 많이 퍼 날라 주세요... 역사를 바로 알자는 차원입니다.. 지도 보면 일본도 한국의 식민지이잔습니까! 까불것도 없는 일본이...ㅎㅎㅎ
이거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가슴이 벌렁거리네요...저기가 다 우리땅이었으면 중국에도 우리 종자가 많이 퍼졌겠네요. 그리구 디자이너님 처럼 우리모두가 감춰졌던 모든것을 다시 발굴합시다..화이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