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수도원은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된 곳이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살까. 수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외부로부터 차단된 곳이니 외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몇 달 전에 <위대한 침묵>이 메가박스에선가 단관 개봉되었다. 수도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까, 관객이 솔찮게 들어왔다. 시간이 흐르니 천주교 신자들 간에
입소문이 퍼져 단체로 보다시피 하여 관객이 늘어나 상영관도 늘어나더니
몇 달이 지난 지금 동네 오리 CGV에서까지 상영되고 있다.
알프스 산록 1,300 고지에 샤르트뢰즈 수도원이 있다. 수많은 수도원 중에서도
엄격하기로 소문난 곳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감독 필립 그로닝이라는 감독이
단신 수도원에 들어가 그들과 같은 생활을 하며 찍은 다큐멘타리다. 오직 자연광
만으로 찍었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음악이나 특수 효과를 전혀 쓰지 않았다.
샤르트뢰즈 수도원에는 30명의 수도사가 산다. 이들은 수도를 하는 것 이외에도
먹고 살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 일과 수도가 그들의 삶의 전부다. 수도원
안에서는 일체 침묵이다. 각자 정해진 독방에서 혼자 기거한다. 다른 수도사를
만나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식사할 때, 미사 드릴 때뿐이다. 물론 이 때에도
말을 하면 안 된다.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수도원 밖으로 공동
산책을 나갈 때뿐이다.
이렇게 극히 짧은 공동의 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수도사는 혼자 지낸다.
오직 기도하고 기도할 뿐이다. 매일 자기만의 기도석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매일 같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본다. 매일 같은 시간에 미사를 드리고 마치
형무소에 있는 것처럼 독방으로 배달되는 식사를 한다. 깊은 산 속,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이 수도원에 들리는 것은 오직 자연의 소리뿐이다. 침묵이 지배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강한 햇빛조차 소음처럼 느껴진다.
수도사들이 이곳에서 사는 평균 기간이 65년이라고 한다. 빨라야 스물 정도에
들어온다고 할 때 대개 90 이상은 산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이 백날을 하루 같이
기도에 몰두해서 사는 동안 조그만 창밖의 자연은 세월 따라 변화한다. 햇볕과
바람 속에 봄이 가고 여름이 온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어김없이 겨울이
와 조그만 창문을 통해 보이는 알프스 봉우리를 흰눈으로 장식한다.
밖의 계절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수도원의 시간은 서 있는 듯하다. 오직 기도에
매달린 수도사들에게 그런 변화는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신과의 만남을 생각하는 그들에게 단순한 시간 그 자체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용한 침묵 속에서, 따뜻한 햇볕 아래서, 산들 바람을 맞으며 기도하는
그들 또한 시간을 이겨내지는 못한다. 그들은 조용히 낡아가고 있었다. 삭아 들고
있었다. 조용히, 침묵하며.
수도사들의 연령 분포는 20대 젊은이에서부터 초고령 노인들까지 다양하다.
단순하고 한정된 공간 속에서 다양한 연령층의 수도사들을 동시에 보는 것은
사람이 낡아 간다, 삭아 든다는 것을 한 눈에 느낄 수 있어 감회가 새롭다.
감독은 매우 단순하고 솔직하게 이들의 생활을 그려내고 있었지만 그의 앵글은
매우 심미적이어서 화면 자체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또한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이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외면적인 삶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하면 표현해낼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특히 수도사들의
맑은 얼굴들을, 무표정한 얼굴들을 클로즈업으로 보는 느낌은 그것으로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어쨌거나 164분이라는 긴 시간을 이렇게 단순한, 말 한 마디 없는 화면을 들여다
보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것은 신기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수도를 하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다.
이런 수도사의 생활은 불교문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들은 이보다 훨씬 어려운 수련을 쌓은 고승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지 않은가. 그런 것이 익숙하지 않은 서양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충격을
준 모양이다. 많은 찬사를 받았는데 수도회 측에서 경쟁 영화제등에 출품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기독교도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겠다. 특별한 종교가 없는 나에게는 한 가지
엉뚱한 소회가 있었다. 우리의 불교나 선학에서 하는 수도는 특별한 경전을 연구
하는 목적으로 수련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 자아의 발견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혼자 스스로 깨치기 위해 수련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들 수도사들은 오직 성경을 통해 신에게 가까이 하려는 목적으로 수련을 하는
것 같았다.불교나 선학도 신과의 합일 을 목적으로 하기도 한다.-나의 생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