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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이야기 (8)
퇴계 선생의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8일] 4월 11일(월) 가흥창(가흥초교)→ 충청감영(관아공원) (20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11일 퇴계 선생]
◎ 가흥관에서 잠시 쉰 퇴계 선생은 다시 남한강 배를 타고 ‘달천강’ 하구를 거쳐 충청감영이 있는 충주로 들어갔다. 감사 유홍(兪泓)이 함께 가면서 길을 인도하였을 것이다. 충주는 선생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인 1548년 선생의 중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 선생이 일찍이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던 곳이다. ― 1569년 귀향 당시, 선생이 충주에 머물렀을 때의 행적은 앞에서 소개한 시를 제외하고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서 관찰사로 재임하였던 온계 형님을 그리워하였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그리하여 지난 2019년 4월 선생의 마지막 귀향 450주년을 기념하는 제1회 재현행사로서 충주관아공원 바로 옆 충주문회회관에서 ‘퇴계 선생과 감사 유홍과의 인연’과 함께 ‘중형 이해와 선생 간의 우애’를 추억하는 행사를 했었다.
* [2022년 4월 11일 월요일] 귀향길 재현단 (제8일)
▶ 오전 8시, 귀향길 재현단은 어제의 도착지점인 가흥초등학교 교정에 모였다. 오늘은 가흥초등학교를 출발하여 충주 중앙탑을 경유, 탄금대 앞에서 충주천을 따라 충주관아공원까지 20km를 걷는다. 재현단 일행은 크게 원을 그리며 둘러서서 김병일 원장의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이동신 별유사의 진행으로 〈도산십이곡〉 제7곡을 반주음에 맞추어 다함께 노래하고, 이어서 전신 준비운동을 한 후 오늘의 일정에 돌입했다.
천운대(天雲臺) 돌아들어 완락재(玩樂齋) 소쇄(蕭洒)한데
만권생애(萬卷生涯)로 낙사(樂事)이 무궁(無窮) 하여라.
이 중에 왕래풍류(往來風流)를 일러 무엇하리오.
— 도산서당 앞, 장대한 노송이 드리우고 있는 천운대(天雲臺, 天光雲影臺)는 낙동강 강가에 있는 전망대이고, 완락재(玩樂齋)는 도산서당 공부방이다. 퇴계 선생의 학문적 생애는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하나는 책을 통해 옛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산수 자연과 더불어 노니는 것[遊樂]이었다. 그는 이러한 삶을 〈도산기(陶山記)〉에서 가감 없이 적어두었다. … 선생은 매일 새벽 일어나 책을 읽고 주변을 산책하며, 그 흥취에서 솟아나는 감흥을 시(詩)로 읊거나 때로는 편지를 썼다. 거기 제자들을 가르치고, 가끔 찾아오는 손님과 환담하기도 한다. 그는 자연과 독서에 무궁한 즐거움이 있다고 자랑한다. 퇴계 선생의 진정성은 그의 실천적 삶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오늘의 출행
▶ 오전 8시 30분, 귀향길 재현단은 어제의 도착지였던 충주 가흥초등학교 교정을 출발하였다. 오늘도 선두에는 의관을 갖추어 입은 이한방 교수를 비롯하여 도산서원 김병일 원장, 이광호 박사, 홍덕화 님이 앞장서서 대열을 이루어 가고, 그 뒤에 송상철·오상봉 님, 그리고 안동에서 올라오신 유림 여러 분도 의관을 갖추었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김언종 박사, 이치억 박사가 동행하고 있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종주하는 진현천 님, 그리고 진병구 님을 비롯한 노복순 님 등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경기지부 여성 지도위원 몇 분이 오늘의 대열에 합류했다. 필자는 선두에서 향도를 하며 사진을 찍었다.
특히 오늘은 충주 ‘중심고을연구원’ 이상기 원장이 귀향길 재현단에 참여하여 사진을 찍고 안내를 자처했다. 이상기 원장은 충주의 향토사학자이면서 ‘팔봉서원’의 문화재 사업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팔봉서원’ 안내서를 건네주었다.
* 팔봉서원(八峰書院) 이야기
이상기 원장에 의하면, ‘팔봉서원’은 충주에 연고가 있는 조선시대의 이자(李耔), 이연경(李延慶), 김세필(金世弼), 노수신(盧守愼) 등 4현을 모신 서원이라고 했다. 이곳에 위패를 모신 네 분은 사화(士禍)와 관련되었을 때 청렬한 지조와 절개를 지켰던 분들이다.
팔봉서원(八峰書院)은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달천강 팔봉마을에 있다. 충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으로 1586년(선조 19)에 세워졌다. 충청감사, 충주목사 그리고 이 지방의 사림이, 1529년부터 1533년까지 토계리로 귀양 와서 살았던 계옹(溪翁) 이자(李耔, 1480∼1533)를 기리기 위해 서원을 세우자는 논의를 했다. 이자(李耔)는 조선 전기 연산군 7년(1501) 식년문과에 장년 원급제, 이조좌랑을 거치다 연산군의 난정으로 사직했다가 중종반정으로 부제학, 우참찬을 역임하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탈 관직되어 음성 음애동(陰崖洞)으로 귀양을 온 다음, 1529년 충주 토계리로 이거해 몽암(夢庵)을 짓고 살다 죽었다.
이자가 귀양살이 하던 토계리 몽암은 달래강[達川]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달래강 북쪽 산록에 1586년 서원을 세우고, 계옹(溪翁) 이자(李耔)와 탄수(灘水) 이연경(李延慶, 1484∼1548)을 배향하게 되었다. 이연경(李延慶)은 조선 전기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로 유배되는 할아버지를 따라 유배소까지 갔다. 이연경은 중종반정으로 풀려 형조좌랑까지 지내다 중종 14년(1519) 현량과 병과에 급제, 교리를 지내다 을묘사화(乙卯士禍) 때 파직되었고 현량과에 복구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서원의 이름은 이들의 호인 계옹(溪翁)과 탄수(灘水)에서 한자씩 따 계탄서원(溪灘書院)이라 불렀다. 이들이 함께 배향된 것은 기묘사화로 벼슬을 잃고 충주지방에서 교유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1612년(광해군 4)에는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과 소재 노수신(盧守愼)을 배향했고, 1672년(현종 13)에는 충주 유생 한치상(韓致相) 등의 상소로 ‘八峰書院’(팔봉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은 조선 전기 연산군 1년(1459) 식년문과에 급제 후 대사헌·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중종의 과오를 규탄하다 음죽현(陰竹縣, 지금의 충청북도 음성)에 장배(杖配)된 후 생극(면)에 은거, 죽은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38년(1543)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후 사간원·이조좌랑을 지내다 을사사화 때 파직되어 충주로 돌아왔다. 1547년부터 19년간 진도에서 귀양살이하며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1567년 선조의 즉위로 이조판서·대제학·좌의정·영의정에 이르렀다.
팔봉서원(八峰書院)은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98년 정부지원과 후손들의 출연으로 서원이 재건되었고, 2003년 6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대지 200평에 팔봉서원 편액이 걸린 솟을삼문이 있고, 그 안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 숭덕묘(崇德廟)가 있다. 사당의 북쪽 측면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재실이 있다. 사당의 남쪽 측면으로는 ‘八峰書院重修紀念碑’(팔봉서원중수기념비)가 있다.
팔봉서원은 달천강을 낀 서쪽 경사면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었다. 서원 건너편에는 칼바위와 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 있다. 이 산줄기가 팔봉산(八峯山)이다. 수주팔봉이라 한다. 칼바위에는 인공폭포가 만들어져 그를 통해 석문천이 달래강에 합류된다. 그리고 칼바위 폭포 위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칼바위를 넘어 팔봉산으로 오르는 길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등산로에 전망대까지 만들어 팔봉마을과 서원을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다.
남한강 둔치의 바이크로드
— 파릇파릇 버드나무 연둣빛 실가지 —
▶ 귀향길 재현 제8일인 오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따사로운 4월의 햇살이 내리는 아침, 신선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이 여간 쾌적하지 않았다. 가흥초등학교 후문에서 시작된 제방의 자전거길은 얼마가지 않아 남한강 둔치에 조성된 자전거길로 접어들었다.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큰 다리를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길 가의 나무는 아직 움이 트지 않았지만 강안의 버드나무는 파릇파릇 연두빛 실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막흐르기여울’과 ‘목계나루’
◎ [막흐르기여울] ☞ 충주시 가금면 가흥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여울이다. 강바닥에 바위와 큰 돌이 많으며 물길의 낙차가 있어 물길이 사납게 흘러 붙여진 이름이다. 가흥초등학교에서 충주 방향으로 1km 남짓 올라가서 있다.
◎ [목계나루와 목계장터] ☞ ‘목계장터’는 이곳 출신의 시인 신경림의 시(詩)로 세상에 더욱 알려졌다. 충주시 엄정면 남한강 변에 있다. ‘막흐르기여울’에서 조금 더 상류로 올라가면 남한강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이 목계나루 마을이다. 본디 가흥창도 목계에 있었는데, 막흐르기여울에서 사고가 잦았으므로 조금 아래로 옮겼다고 한다. 물산이 많이 모이는 곳이므로 큰 장이 섰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나루터였다. 강변에는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시비가 강변에 있다.
장천리 긴 제방 길
▶ 둔치의 길은 599번 지방도로 ‘목계교’ 아래를 지나고, 나란히 남한강을 건너는 38번 국도의 ‘목계대교’와 평택-제천간 고속도로 ‘남한강대교’ 아래를 지나고 나서, 장천리 긴 제방 길로 올라섰다. 그리고 여주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경강선 전철 아치형 교각 아래를 지났다.
☆ 高山仰止 景行行止 ☆
높은 산을 우러러 보고 큰 길은 따라 간다
긴 제방의 바이크로드는 크게 만곡선(彎曲線)을 그리며 길게 뻗어 있다. 맑은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진다. 햇살이 따갑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하얀 도포를 입고 배를 타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퇴계 선생 모습을 그려 본다.
긴 제방 길에서 선생을 생각하며 문득, 한국국한진흥원 이갑규 교수가 이 구간을 걸으며 사유한 ‘높은 산은 우러러 보고 큰 길은 따라 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말이 떠올랐다. (— 이광호 외 지음 《퇴계 길에서 길을 묻다》 (푸른역사, 2021) pp.156~159) 그리고 이 구절은 도산구곡 설정을 위한 답사 길에 전 경상국립대 김덕현 교수가 지극한 마음으로 강조한 말이다.
‘高山仰止 景行行止(고산앙지 경행행지)’는 《시경(詩經)》〈소아(小雅)〉〈거할(車舝)〉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정현(鄭玄)은 “옛 사람 가운데 높은 덕(德)을 지닌 이가 있으면 그를 사모하고 우러르며, 밝은 행위를 한 이가 있으면 본받아서 나도 그렇게 행한다.”라고 주(註)를 달았다. 그렇다면 '경행(景行)'은 ‘본받을 만한 밝은 행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태사공은 말한다(太史公曰)’에서 다음과 같이 공자에 대해 언급했다. … “시경(詩經)에 ‘높은 산은 우러러 보고 큰 길은 따라 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 내 비록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은 항상 그를 동경하고 있다.(雖不能至, 然心鄉往之)”…… 사마천은 《시경(詩經)》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공자(孔子)를 ‘높은 산’으로 우러러 보았다. 그리고 ‘항상 마음으로 동경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노자(老子)나 맹자(孟子) 등은 〈열전(列傳)〉에 포함시키면서도 공자(孔子)는 〈세가(世家)〉편에 넣어서 특별히 서술하고 있다.
* 《사기(史記)》는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나라까지의 제후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세가의 ‘가(家)’는 종묘라는 의미로 ‘세가(世家)’는 바로 제후들이 분봉(分封)을 받아 제후국을 세운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마천은 공자를 제후의 반열에 올린 것이다.
필자에게 있어서도, 퇴계 선생의 고절(高節)한 경지[陶山]는 아득하게 ‘높은 산’이요, 오직 경(敬)으로 일관하신 선생의 호연(浩然)한 삶은 마땅히 좇아야 할 ‘경행(景行)’이다. 이는 오직 마음으로 난 ‘큰 길’이다. 사마천이 《시경(詩經)》의 이 구절로 공자에 대한 마음을 담은 것처럼, 오늘 ‘도산’을 향하여 남한강 장천리 긴 제방 길을 걸어가는 필자에게도 이 말씀은 마음의 ‘큰 길’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길은 탄탄대로인데 갈 길이 멀다. 그래서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길이 있으니 가지 아니하고 어쩔 것인가. ― 선생도 이러한 후생(後生)의 마음을 헤아리기도 한 듯 ——,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古人) 못 뵈
고인(古人)을 못 뵈도 *녀던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녀고 어떨고
하고 노래하셨다. *‘고인(古人)’은 옛 성현(聖賢)을 가리키는 말이다 *‘녀다’는 ‘가다’의 고어이다 — 퇴계 선생의 〈도산십이곡〉(제9곡)이다. 필자의 마음이 또한 이러하니 절묘하지 않은가. 선생이 닦아 놓으신 길이 앞에 있는데 아니 가고 어쩔 것인가.
제방 길 사각정 쉼터
모현정과 하강서원 그리고 정약용 이야기
▶ 한참 동안 크게 휘어지는 제방 길을 걷고 난 뒤, 일행은 충주시 중앙탑면 장천리 길목의 사각정 쉼터에서 다리를 풀었다. 이때, 오늘 귀향길 재현단의 충주 구간 길 안내를 자처하면서 동행하고 있는 충주 ‘중심고을연구원’ 이상기 원장이 말을 했다. 우리가 걷고 있는 남한강 강 건너편을 가리키며, ‘저기 언덕 위에 모현정(慕賢亭)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모현정 일대의 유적에 관한 이야기를 유창하게 풀어놓았다.
모현정(慕賢亭)과 하강서원(荷江書院)
◎ 모현정(慕賢亭)은 1817년(순조 17)에 충주 지역에 거주하는 많은 선비들과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의 후손인 홍승하·홍관식 등이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모현정은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어 경관이 빼어나며, 남동쪽으로 100여 미터 아래에는 1786년에 홍이상(洪履祥)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하강서원(荷江書院)과 하강단소(荷江壇所)가 자리 잡고 있다.
◎ 충북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 425에 위치한 하강서원(荷江書院)은 조선 선조 때의 명신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의 덕을 기리기 위해, 1786년(정조 10) 창건 하였으나,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 되었다가, 1907년 서원 터에 하강 단소[사당]를 만들고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4년에 서원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인터넷 자료를 검색해 보니) 하강서원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고, 목조건물인 ‘하강 단소’는 정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서원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며 가운데 3칸에는 넓은 마루, 양쪽 각각 1칸에는 온돌방을 두었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해마다 음력 10월에 제사를 지내며 풍산 홍씨 종중에서 관리를 맡고 있다.
하강서원(荷江書院)에서 배향하는 홍이상(洪履祥)은 자가 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이며,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와 호조의 좌랑과 직제학, 이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서경(평양)까지 왕을 호종 하였으며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에 올랐으며, 이후 성혼(成渾)을 변호하다 파천되기도 하였으며 광해군 때는 부제학, 개성유수 등을 지냈고, 병들어 사직하여 이곳 고향에 돌아와 물가에 집을 짓고 여생을 보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모현정(慕賢亭)은 조선후기 5대 하항 중 하나였던 목계나루터에서 약 2km 떨어진 금가면 하담리 남한강변 언덕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모현정이 있는 자리는 옛 문헌에 나오는 충주 팔경 중 제4경으로 꼽히는 하담추월(荷潭秋月)이라 일컫던 곳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정자 주변에 연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는 하담(荷潭, 일명 두무소)이 있었는데, 가을밤 하담 위에 밝게 뜬 달이 일품이란다.
◎ 조선 초기의 문신 정인지(鄭麟趾, 1396~1478)는 충주를 “남쪽을 지키는 길목의 땅”이라 했다. 남한강을 통해 경기·경상·강원도 등 여러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고려시대 덕흥창(德興倉), 조선 초기 경원창(慶源倉), 조선 후기 가흥창(可興倉) 등 조세 운반의 중간 창고가 충주지역에 설치되었다. 충주의 남한강 물길은 소백산맥을 넘나드는 죽령·계립령·이화령·조령 등의 고갯길로도 연결돼 영남대로의 중요한 길목이 되었다.
모현정 ‘하소마을[荷潭]’
정약용의 가족묘가 있었던 곳
◎ 충주의 향토사학자 이상기 원장은, 모현정이 있는 이곳은 원래 사휴정(四休亭)의 한 곳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충주의 ‘사휴정’이란 가야에서 신라로 귀화한 우륵(于勒)이 탄금대(彈琴臺) 주변을 찾아다니면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쉬며 머물렀던 네 곳으로, 누암리의 청금정(聽琴亭), 금가면의 옥강정(玉江亭), 하담리 하소(荷沼), 목계리에 있던 정자 등을 일컫는다.
그런데, 모현정과 하소마을(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은 다산 정약용의 시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풍산 홍씨의 세거지인 남한강변 하소(荷沼)마을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가족묘가 있어 아주 인연이 깊었던 곳이다. 그래서 다산은 하담(荷潭)을 오가거나 하담을 생각하며 남긴 시(詩)와 글이 열 편이 넘는다.
◎ 정약용 집안은 다산의 고조부와 증조부, 조부까지 3대에 걸쳐 벼슬을 하지 못해 가세가 한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충주의 유력 가문인 풍산 홍씨 집안인 다산의 할머니 선산에 가족묘(家族墓)를 쓴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다산의 조부 정지해(1712~1756)와 조모 풍산 홍씨, 진주 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1730~1792)과 어머니 윤소온(1728~1770, 해남 윤씨 윤두서의 손녀), 흑산도에 유배갔던 둘째 형 정약전의 부부묘도 있었다. 그 묘들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천주교 천진암 성지인 ‘한국천주교회창립선조 직계가족 묘역’(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 으로 이장하였다.
정약용은 부모묘를 하담(荷潭)에 모신 후 고향인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소내[苕川]에서 충주 하담까지 남한강 물길 300리를 따라 성묘를 다니며 마음의 안식처로 삼았다. 1801년(순조 1) 천주교 신유박해 사건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떠나면서 하담에 있는 부모 묘소에 들러 성묘하고 나서 통한의 눈물을 뿌리며 쓴 시가 〈하담별(荷潭別, 하담의 이별)〉이다. 당시 다산의 아픈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록 이 목숨 부지했지만 / 육신은 이미 일그러졌습니다 / …(중략)… / 하늘같은 은혜 꼭 갚으려 했더니 / 이 지경이 될 줄이야 / 세상 사람들에게 바라노니 / 다시는 아들 낳았다고 자랑하지 마오.”
1819년 18년간의 전라도 강진의 유배에서 풀려난 뒤 다산은 다시 하담을 찾아 성묘하고 〈도하담(到荷潭)〉이란 시를 쓰기도 했다. 이후에도 이곳에 와 남한강변 ‘두무소(杜舞沼)’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모현정을 즐겨 찾기도 했다. 그리고 남양주 생가에 머무르면서도 부모 묘소가 있는 하담(荷潭)을 잊지 못해 생가 옆에 ‘하담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하루(望荷樓)’를 짓고 아침마다 이곳을 향하여 문안 인사를 했다고 한다.
충주 장미산성(薔薇山城, 사적 제400호)
◎ 이상기 원장은, 길에서 서남쪽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산을 가리키며 ‘장미산’이라고 했다.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장천리 장미산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 있어 유서가 깊은 곳이란다. 높이 340m 가량의 장미산 정상과 북동쪽 계곡 윗부분을 돌로 에워싼 산성으로, 성벽의 일부가 원형대로 남아 있다. 현재 성 안에는 규모가 작은 사찰이 들어서 있고 조선시대의 무덤도 분포하고 있다.
이 ‘장미산성’은 남한강이 남쪽에서 동쪽으로 굽었다가 서쪽으로 흐르는 만곡부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서 사방을 전망(展望)하기에 좋다. 특히 남한강을 따라 남북으로 오가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였으므로 군사전략상으로도 중시된 곳이다. 산성 남쪽의 입석리에서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 국보 제205호)가 발견되어, 고구려와 신라가 맞닿아 있는 국경 주변에 축조된 요새로 주목되었다.
산성의 이름은 장미(薔薇)라는 장수가 쌓았다는 전설에 의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성(城)을 의미하는 우리말 ‘잣’과 산을 의미하는 ‘뫼’가 합쳐진 ‘잣뫼’가 원래의 이름이었을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다. … 산성 성벽의 둘레는 932m인데, 서쪽과 서남쪽 성벽은 원래의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유물로 보아,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산성을 점령하고 경영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다만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축조 방식이 충청북도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충주 ‘남산성’과 비슷하므로, 신라 진흥왕 때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이 산성을 고쳐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산성 주변에 분포한 많은 고분 가운데 최근에 발견된 충주 ‘누암리고분’(사적 제463호)은 6세기 후반에 조성된 신라계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 국보 제205호)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다. … 충주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280-11에 있다. 비문의 서두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문자가 보이고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하부(下部)·사자(使者)’ 등 모두 고구려의 관등뿐이며, 비문 중의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성이므로 고구려의 비임이 분명하다고 정리해 놓았다.
석비의 형태가 광개토왕비와 흡사해 두툼하고 무게가 있어 보이며, 자체(字體)도 고졸한 예서풍(隷書風)이다. 자경(字徑)은 3∼5㎝이며,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 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문헌적으로 고찰해 볼 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북벌남정(北伐南征) 못지 않게 장수왕(長壽王)은 남하정책을 단행해 평양성 천도를 비롯해 한강 유역에까지 이른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이곳 한강 유역을 따라 상류에까지 척경(拓境)하고 그 기념적인 석비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 석비의 건립 연대를 5세기 경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고구려의 남쪽 영역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대에 다져진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광개토대왕 때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대에 고구려의 영토가 최대가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427)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신라와 백제는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저항하였지만, 장수왕은 한성백제을 점령하였고 백제의 개로왕을 살해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의 남쪽 영역이 아산만에서 영일만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충주에 있는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이 비석은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비석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중원고구려비는 비문의 마멸이 심해 연구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으며, 지금까지 비문의 판독, 그에 따른 내용해석과 용어, 건립연대, 건립목적 등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남한강 둔치의 길
599번 도로변 휴게소 주차장
▶ 장천리 사각정 쉼터에서 길은 강변 둔치로 이어졌다. 한참동안 둔치의 길을 걷다가 화사한 벛꽃이 눈부시게 핀 장미산 아래의 599번 지방도로로 올라와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가 도로변 휴게소에 이르렀다. 거기 주차장에는 퇴계 귀향길 지원단 버스가 주차해 있고 그 앞에 승용차로 미리 와 있던 도산서원 경기지역 여성지도위원이 따뜻한 차와 간식을 준비하여 차려놓았다. 정성으로 다과를 준비한 마음이 여간 고맙지 않았다.
충주 조정지댐 탄금호(彈琴湖)의 벚꽃 길
▶ 한참 동안 휴식을 취한 후, 599번 도로를 지나는 길에 충주 조정지댐 입구를 지났다. ‘충주조정지댐’은 남한강 충주다목적댐의 급작스러운 방류가 있을 때 수위 변화를 조정하는 보조댐이다. 이 댐으로 인하여 댐의 상류는 자연스럽게 호수처럼 물이 고여 있다. 이 물은 달천강이 유입되는 탄금대 위까지 고여 있으므로 ‘탄금호’라고 부른다. 길은 탄금호 호반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의 테크 보도이다. 오늘따라 벚꽃이 만발하여 화사한 꽃길의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눈부신 봄날이다.
탄금호 중앙체육공원
탑평2교를 건너면, 호반의 테크 산책로가 아름답다. 탄금호 호숫물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이곳은 2013년 충주세계조정선수권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된 충주국제조정경기장 등 광장을 중심으로 ‘중원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충주 탑평리 7층석탑(일명 중앙탑, 국보 제6호)
▶ 재현단은 공원가든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재현단에서 함께 걷다가 개인 사정으로 이틀 전에 상경했던 이상천 님이 다시 합류했다. 중앙탑이 있는 공원은 역사적 유적과 함께 잘 가꾸어진 공원이므로 매우 짜임새 있고 쾌적한 공간이다. 식사 후, 재현단은 탑평리 중앙탑 앞에 모여 이상기 원장의 설명을 들었다. 이 원장은 탑의 역사와 문화사적 가치 그리고 탑의 구조까지 자상한 해설을 했다.
◎ 충주 탑평리 7층석탑은 화강암 석재(石材)의 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린다. 충주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삼국은 모두 이 지역을 전진기지로 중시해왔다. 현재의 위치가 원 위치로서 주변 경작지에서는 가끔 기왓장이 출토되고, 또한 석탑 앞에는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으로 보이는 8각 연화대석(蓮華臺石)이 남아 있어 이 일대가 신라시대의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곳 유적지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므로 사찰(寺刹)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높이 14.5m인 이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7층 탑신을 형성하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구성한 방형중층의 일반형이다. 기단부는 10여 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한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상층·하층의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이 모두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것은 이 석탑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옥개석(屋蓋石)은 초층이 낙수면부와 처마 밑의 옥개받침부가 도합 8석으로 조립되어 있는데, 상층부로 올라감에 따라 낙수면부와 옥개받침부가 1석으로 되어 전체가 2석으로 조립되었으며, 6층과 7층에 이르러서는 1석으로 되었다. 옥개받침은 각 층이 5단씩이고 옥개석 상면에는 각형 2단의 받침대를 만들어 그 위에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어 신라석탑(新羅石塔)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추녀가 수평이며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反轉)도 잘 표현되어서 대규모의 석탑으로서는 경쾌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전각부에는 풍경(風磬)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창건 당시에는 웅장한 규모에 장엄함도 갖추었던 당대의 유수한 석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륜부에서 특이한 것은 노반석(露盤石: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을 이중으로 놓고 그 위에 복발(覆鉢)과 앙화(仰花)를 구성한 점이다. 복발 측면에 한 줄의 띠를 돌리고 앙련(仰蓮)을 조각한 앙화석을 얹은 것은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상륜양식이라 하겠으나, 노반석 2석을 겹친 것은 아직 그 유례를 보지 못한 특수한 형식이라 하겠다.
창동리 문경공 장암 정호 사당
▶ 중앙탑공원의 산책로를 나와서 도로를 따라 걸었다. 미누리산 고개를 넘으면 가금면 창동마을이다. 도로 옆 나지막한 산자락 밑에 문경공(文敬公) 장암 정호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하는 사당이 있다.
◎ 장암(丈巖) 정호(鄭澔)는 정철의 4대손으로 1648년(인조 26년) 아버지 정경연과 어머니 여흥 민씨 사이의 둘째로, 형제 전체로는 다섯째로 충주 노은고개에서 태어났다. 1669년부터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1684년(숙종 10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시문과 글씨에 모두 능했다. 1696년 의성현령으로 있을 때 고조인 정철의 《송강가사》(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수록)을 발간했다. 1717년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1725년(영조 1년) 영의정이 되었다. 그리고 1736년 10월 충주 누암리 강변[樓巖江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실함[誠]과 곧음[直], 그리고 예(禮)와 의(義)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제향 되었다. 숙종 28년(1702)에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누암서원은 본래 송시열·권상하·민정중·정호 등을 봉향해 왔는데 고종 1년(1864)에 훼철되었던 것을, 1952년 정호의 후손들에 의하여 누암서원의 건물 부재 중 일부를 가지고 와 이곳에 정면 3칸·측면 2칸의 작은 기와집으로 복원하고 매년 향사하고 있다. 현재 임금의 임명장인 교지 23장이 보관되어 있다.
창동리 역사유적들
◎ 창동마을 입구에는 ‘창동리 5층석탑’과 ‘창동리 마애여래입상’이 나란히 서 있고, 우륵이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타면 약 2km 떨어진 이곳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청금대(聽琴臺)가 있는 곳이다. 거기 가파른 강안의 절벽에 ‘중원창동마애불’이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 못했다. 충주 ‘창동마애불’은 남한강에 뛰어든 신립 장군이 강 건너 이곳에서 숨을 거뒀고, 마애불의 붉은 기운은 신립 장군의 피눈물이라는 설화가 전하기도 한다.
▶ 우리 귀향길 재현단 일행은, 강안의 도로를 따라 내려와서, 국도 19번 도로(충주~원주)의 ‘우륵대교’ 아래를 지났다.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우륵대교는 거문고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탄금교’(구교)를 건넜다. 달천강이 남한강에 유입되는 하구의 다리이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긴 다리에는 인도가 따로 없어 .상당히 복잡하고 어수선했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탄금대가 있다.
◎ 1569년 마지막 귀향길의 퇴계 선생은 한양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가흥관(가흥창 객사)에서 충청관찰사 유홍의 영접을 받았고, 다시 배를 타고 이곳 달천강 하구까지 올라와, 달천강나루에서 충주관아로 들어가기 위해 말을 타고 갔을 것이다.
충주 탄금대(彈琴臺)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이 탄금대 아래에서 남한강에 합류한다. 달천(達川)은 남한강 수계의 최남부에 있는 지류로, 길이는 약 116㎞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백두대간 속리산 계곡과 청주 근방에서 발원하며, 보은군의 북쪽을 지나 심하게 곡류하면서 북쪽으로 흐르는 남한강 지천인데 괴산군 칠성면의 쌍천(雙川)과의 합류지점까지 40.2㎞는 지방하천이다.
◎ 달천과 남한강의 합류부에는 대문산(大門山, 108m) 또는 견문산으로도 불리는 탄금대(彈琴臺)가 있다. 해발 100m 정도의 낮은 산으로, 하식단애의 구릉이다.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 악성(樂聖)으로 불린 우륵(于勒)은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했다. 진흥왕은 우륵을 반기며 국원(충주)에 거주하게 했다. 우륵은 이곳 강변의 풍치를 탐미하여 산 정상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탔다. 그래서 ‘탄금대(彈琴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탄금대에 자리 잡은 우륵은 자기를 보좌하던 신라 청년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가르치며 여가 있을 때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며 살았다.
우륵이 연주하는 가야금의 미묘한 소리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고 곧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탄금대 주변에는 지금도 가야금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칠곡리(칠금동), 금뇌리(금능리), 청금리(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모두 가야금과 관련된 것이다.
탄금대는 산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는데 강변에 기암절벽이 형성되어 있고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절벽을 따라 강물이 휘감아 도는 탄금대는 남한강과 너른 들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강줄기의 모습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벼랑에 위치한 ‘열두대’에서 가장 잘 보인다. 정상부에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탄금정’이 있고, 동쪽으로는 ‘계명산’과 ‘남산’이 솟아 있으며 아래로는 충주 시가지와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 그러나 탄금대는 뼈아픈 비운의 현장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 신립(申砬)이 적은 병력으로 출전하여 이곳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대결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고, 부장(副將) 김여물(金如岉)과 함께 전사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치고 올라가고 선조는 도성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탄금대에는 1953년에 세운 탄금대비를 비롯하여 1977년에 세운 악성 우륵선생추모비, 1978년에 세운 신립장군전적비, 1968년에 건립된 권태응(權泰應)의 ‘감자꽃노래비’, 1970년에 세운 탄금정과 그 밖에 충혼탑·충주문화관·야외음악당 등이 있다. 그리고 충주댐이 준공되어 호반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또한 탄금대 부근에 중원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을 비롯하여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등 귀중한 문화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충주천 하방 둑방길 벚꽃
▶ 탄금대교를 건넌 우리 귀향길 재현단 일행은 탄금대 길로 가지 않고, 달천강 제방을 따라가다가 충주천 만나 그 제방 길을 따라 충주 시내로 들어갔다. 충주시 충주천이 시내를 흐르다가 달천강과 합류하는 이 곳 하방 둑방길은 벚꽃의 명소이다. 봉방동에서 축제를 할 만큼 벚꽃길이 아름다워 시민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오늘은 때마침 충주 하방 둑방길의 벚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사실 충주는 벚꽃의 고장이다. 충주의 벚꽃 길 중 최고로 치면 충주댐 부근의 벚꽃 길과 우리가 지나온 중앙탑면 입석-반천-장천리구간의 벚꽃길이 유명하다. 이곳 벚꽃 길은 중앙탑과 충주고구려비, 장미산성, 충주고구려천문과학관, 루암리고분군, 충주박물관, 탄금대, 세계무술공원, 목계나루 등 역사와 문화, 관광을 즐기는 곳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충주 탄금호의 물결을 보며 걸을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 오늘이 그날이다!
충주천을 따라 관아로 가는 길
충주천은 충주의 남산과 발치봉 사이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충주 시내 한 복판을 흘러내려 오다가, 충주의 진산인 계명산에서 발원한 교현천과 교현동(대봉교) 앞에서 합류하여 달천강으로 흘러든다. 퇴계 선생은 달천강을 건너 큰 길로 말을 타고 가셨겠지만, 오늘 우리 재현단 일행은 관아까지 가는 번잡하지 않고 가장 빠른 길을 택하여 충주천을 따라서 올라갔다.
충청감영 충주관아공원
여기가 어디인가?
▶ 귀향길 재현단은 오늘의 여정 마지막 포인트인 충주관아공원에 도착했다. 옛 충청감영이다. 높다란 이층의 다락 형태로 지어진 충청감영문(忠淸監營門)이 버티고 서 있다. 문루 안으로 들어가니 너른 마당 정면에 동헌인 충녕헌(忠寧軒)이 장중한 무게로 자리하고 있고 그 오른 쪽에 객사(客舍)가 보인다.
아, 여기가 어디인가. 이 충청감영은 퇴계의 형인 온계 이해가 1548년 10월 충청도 관찰사로 이곳에 부임하여 2년간을 복무했던 곳이다. 온계와 퇴계는 형제 가운데 우애가 남달랐다. 그런데 온계가 1550년(명종 5) 한성부윤이 되었을 때 이무강 등의 탄핵과 간신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갑산으로 유배 도중, 양주에서 5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퇴계가 받은 상처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 깊은 상처는 그 동안 오직 학문과 자기 수양으로 이를 극복해 왔다. 그 14년 뒤, 1569년 4월에 퇴계가 마지막 귀향길에 이곳 감영에 들러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을 때, 온계 형님에 대한 생각과 그리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1548년 온계가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당시 퇴계는 단양 군수로 있었는데, 형제가 하나의 행정구역 안에 근무하는 것은 * ‘상피(相避)’에 해당하므로, 퇴계는 경상도 풍기 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 상피(相避)는 친척 따위의 관계로 말미암아 같은 곳에서의 벼슬, 청송(聽訟), 시관(試官) 따위를 피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에 일부 공직자들이 자신의 아들이나 친척 등을 측근에 채용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퇴계 선생의 처신이 얼마나 깔끔한지를 알 수 있다.
온계(溫溪) 이해(李瀣)
◎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는 진성 이씨 5세 진사 이계양(李繼陽)의 손자이고, 6세 이식(李埴)의 6형제 중 4남으로 태어났으며 퇴계 이황의 바로 위의 형이다. 이식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의성 김씨 부인 소생의 이잠(李潛), 이하(李河), 계실 춘천 박씨 부인의 소생 이의(李漪), 온계(溫溪) 이해(李瀣), 이징(李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다. 셋째 이의(李漪)와 다섯째 이징(李澄)이 요절하였으므로, 이해(李瀣)가 이황(李滉)의 바로 위의 형이 된 것이다.
일찍이 이해(李瀣)는 형제애가 유별났던 이황(李滉)과 함께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瑀)에게 글을 배웠다. 22세 때는, 경상감사로 부임하는 당대의 대학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당시 안동부사인 송재의 집을 방문해 두 형제를 보고는, “고인인 이식(온계 형제의 부친)은 이런 형제를 두었으니 헛되게 죽지 않았다”고 칭찬한 뒤 책과 양식을 내려주었을 정도였다.
1525년(중종 20) 30세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33세 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533년 사간원 사간˙정언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좌승지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내고 이 해에 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 1년(50세) 대사헌 신분으로 전횡(專橫)을 일삼던 권신 이기(李芑)를 간교함을 탄핵하여 우의정에 등용하려는 것을 반대하여 이기가 병조판서로 강등되었다. 이 일로 하여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목숨을 다하는 고난을 당했다. 윤원형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이기가 다시 정승으로 등용되자 온계가 충청도관찰사 시절에 유신현에서 몰수한 토지와 노비를 사사로이 역적에게 빼돌려 주었다고 누명을 씌웠다.
지극히 온유한 인품을 지닌 온계이지만 정직과 충성으로 일관해 권신들과 타협하지 않은 곧은 인물이었다. — 온계는 이후 그들의 집요한 견제와 회유와 협박을 당하며 황해도 관찰사(1547), 충청도 관찰사(1548), 한성부 우윤(1550) 등을 지냈다. 그러나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소윤이 득세하자 이기(李芑)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의 일파로 몰리게 되어 무고를 당했는데, 이때 주위의 사람들이 말이라도 권세에 굴복하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기도 하고 이웃에 사는 권신 김안로가 이끌고자 하였으나 공은 거절하였다. 명종은 평소 그의 인품을 존경하였으므로, 사건에서 공의 결백함을 알고 귀양 보내는 것으로 처결하였다. 그러나 온계는 이기의 잔인한 고문을 받은 뒤 갑산(甲山)으로 유배 되었는데, 그 도중 찌는 더위 속에서 장독이 심해져 세상을 떠났다. 그곳은 양주의 객점이었고 향년 55세였다.
이기(李芑)와 윤원형은 사림의 공적일 뿐 아니라 우리 역사를 후퇴시킨 조선 중기의 반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李芑)기는 덕수 이씨로 온계보다 20년 연배이다. 명종 4년(1549)에 영의정에 이르렀고 보익공신 1등에 풍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윤원형은 파평 윤씨이며, 명종의 외숙으로 역시 1563년에 영의정에 이른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신 작호는 선조 초에 삭훈되었다.
온계는 서울, 관직에 있으면서(1533년) 남산 밑(지금의 회현동) 한적한 곳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 ‘취미헌(翠微軒)’이라는 현판을 걸고, 퇴청해 나오면 항상 문을 닫고 책을 읽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의 집인 줄 몰랐다. 온계가 세상을 뜨고 난 뒤, 명예가 복원되고 어렵게 정식 장례를 치르게 되었을 때 동생 퇴계가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 “공은 성품이 너그럽고 모습이 뛰어났다. 아름다운 재주가 일찍 성취했고 예서를 잘 썼다. 우애가 돈독하여 형의 아들을 자기의 아들같이 교육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벼슬하고 몸가짐에 있어 자신의 도리를 지키기에 힘써서 시론에 어긋나거나, 권세에 아부하는 짓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후일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온계를 두고 ‘강대하고 우뚝하며 남들은 쉽사리 하기 어려운 절조를 지켰던 분(剛大俊偉非常之人)’이라고 하면서 ‘통탄하며 눈물을 흘린다(爲之痛傷流涕也)’고 가슴 아파했다. 온계는 학문이 높고 인품이 고매하였으며 특히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사후 선조 때에 와서 복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효종 때 유림들의 발의로 고향 안동 도산면 온혜리의 ‘청계서원(淸溪書院, 1667)’에 아버지 이식, 숙부 이우와 함께 배향되었다. 영주의 삼봉서원에도 배향되었다.
★ 온계 이해 선생의 생애에 대한 자상한 내용은 이동식 작가가 쓴 《온계이해평전》(휴먼필드, 2020.05.)에 담고 있다. 작가 이동식(李東植)은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77년부터 2013년까지 36년간 KBS에 재직하면서 사회부 기자, 문화부 차장, 베이징특파원, 런던지국장을 거쳐 보도제작국장, 정책기획본부장, 해설위원실장 그리고 KBS부산총국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인문사회분야의 역량있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 이동식은 온계 선생의 15대 후손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방대한 사료를 섭렵하고, 심도 있는 고증과 현장 취재를 거쳐 최초로 온계평전을 완성했다.
귀향길. 재현단
충주관아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다
▶ 충주감영(관아공원) 충녕헌(忠寧軒) 맞은 편 나무그늘에 열(列)을 갖춘 의자를 배열해 놓았다. 귀향길 재현단은 모두 자리를 잡아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내일의 여정을 함께 하기 위해 서울에서, 봉은사~미음나루 구간을 함께 걸었던 김경조 시인과 친구분 셋이 함께 내려오고, 국제퇴계학연구회 고정강독반의 류점숙 교수(전 영남대)가 친구 한 분과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황상희 박사가 정옥·정아 예쁜 두 딸을 데리고 오고, 그 외 새로운 얼굴도 몇 분도 보였다.
▶ 이 자리에서 김병일 원장은 퇴계 선생이 이곳 충주관아에서 충청감사 유홍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하룻밤을 묵게 된 이야기와 그 20년 전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각별한 우의를 지닌 중형 온계 이해 선생이 충청감사로 있을 때의 사연을 상기하기도 했다. 이광호 박사도 충청감영과 퇴계선생에 대해 말씀하였다. 그리고 오늘 우리와 함께 걸어온 이상기 원장이 충주(忠州, 중심고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오늘 이 자리 우정 참석한 충주교육장이 퇴계 선생 귀향길 재현단을 환영하는 말씀도 해주었다. 그리고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경기지역 지도위원들이 정성스럽게 다과(茶菓)를 준비하여 담소하며 따뜻한 뒤풀이를 했다. 또 수련원 유수영 지도위원은 별도로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와서 재현단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다함께 상읍례를 하고 오늘의 일과를 마무리했다.
◎ 지난 2019년 4월 15일, ‘제1회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 행사’에서는 관아공원 바로 앞에 있는 충주문화회관에서 시 창수 및 강연회를 가졌다. 당시 김종성 충남대 의대 교수가 시 창수 공연을, 이갑규 한국국학진흥원 한문강원교수가 '퇴계선생과 송당선생의 시'를 소개했다. 그리고 허권수 경상대 명예교수는 '퇴계선생과 온계선생의 우애', 이기동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퇴계선생의 삶과 정신'을 주제로 강의했다. 오늘은 충청감영(관아공원)의 마당에서 간단한 행사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 국학진흥원 이갑규 교수는 퇴계 선생이 충주관아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이곳에서 관찰사를 지낸 온계 형님에 대한 마음을 ‘이곳에 오니 형님 생각 사무치네’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 이광호 외 지음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푸른역사, 2021) pp.164~166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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