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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아침 조간신문에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이 할 수 없는 7가지 기사를 읽었다.
1. 마흐람(남성 보호자)없이 외출하기
2. 운전
3. 몸을 드러내는 옷을 입는 것
4. 가족이 아닌 남성과의 대화
5. 공공장소에서 운동하기
6. 혼자 여행하기
7. 쇼핑할 때 미리 옷 입어보기
식당 등 모든 공간에서 남녀 공간 분리
눈을 제외한 온몸을 가린 '니캅' 차림새
병원 갈 때, 물건 살 때 등 남성보호자와 함께 가야 되고...
집 밖에 나올 때는 온 몸을 두루 덮은 아바야를 입어야 하며,
여자들은 아직도 주민등록증(ID카드)도 갖지 않는다고.
1932년 건국한 이래로 여성한테 처음으로 투표권을 부여했단다.
뭐 이따위 국법이 있어? 뭐 이따위 야만 종교관이 있어? 뭐 이 따위 국왕이 있어?
뭐 이 따위 야만인 나라가 있어? 뭐 이 따위 미개인들이 살어?
뭐 이 따위 들짐승이 사는 나라여?
참으로 지독한 이스람국가다.
서울 송파구 잠실역 부근에 나가면 이따금 검은 옷(치마같다)을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뒤집어 쓰고는 눈만 빠꼼히 낸, 복면을 쓴 사람들을 본다. 대체로 외국인이다. '니캅'이라는 검은 천으로 머리꼭대기를 뒤집어 쓰고는 두 눈만 빠꼼히 낸 복면인, 가면인을 보면 나는 겁이 난다. 귀신들이 왔나?
이거 우리나라 현 정치권력자가 극도로 싫어하는 복면 가면 쓴 사람들이 아녀? 전신까지 다 썼네.이들도 검거해야 되는 거 아녀?
이런 괴상한 의상을 하도록 규정한 국가란 무엇일까? 국왕과 종교란 무엇일까?
이에 여성천대 문화가 당연하다고 여기며, 이를 시인하는 남성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억압과 굴레에 순종/복종하는 여성은 무엇일까? 잘 길들여진 것일까?
반항하고, 저항하고, 투쟁해서 이기는 그런 것은 진정으로 없는가?
국가와 종교라는 마약으로 국민의 심신을 나약하게 만들고, 채찍으로 갈기고, 당근으로 길들인다.
이에 동조하는 수컷들, 순종으로 길들여진 암컷들은 반항할 줄도 모른다.
이런 괴상한 제도들은 특수층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특정집단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해괴한 법과 종교관을 제정하고, 경찰과 군대의 무력에 의한 통치행위를 자행한다
후질그레한 국가체제, 특수층을 위한 정치제도가 변해야 한다.
특권층의 권력을 바꾸자, 개인자유(프리덤, Freedom)을 찾자, 개인과 인간의 존엄성을 찾자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 천 년이라는 세월이 더 지나면 이런 국가와 어떤 종교가 남을 것인지. 대부분의 국가는 사라져도, 특정종교는 사라지지 않고 잔재할 게다. 종교는 마약(환각제)이기에...
요즘 아국의 사정도 엇비슷하다.
사찰계의 땡중들, 머리에 요란한 것들 뒤집어 쓰고는 할레루야를 읊조리는 주교와 목사들, 괴상한 복장을 하고 북 치고 춤 c추며 푸닥거리하는 무당들은 내가 보기에는 모두 똑 같다.
오늘 아침 신문 광고에서 보았다.
대구 팔공산 근처의 암자에 있는 듯한 머리 박박 깎고, 승복 입은 사람이 붓으로 황금돼지를 종이에 그려서 파는데 그거 하나 사면 만사형통이란다. 이럴 때면 불교의 부처 종교도 해괴망칙하기는 똑 같다.
오늘 신문에 요상한 것이 또 있었다.
어떤 성명풀이 책장수가 요상한 책을 지어서 몇 권에 260,000원으로 판다고 광고 냈다.
성명을 개명하는데 응용되는 쥐 돼지 개 등 12띠, 한자 획수의 풀이 등으로 개인의 운명과 재운을 바꿀 수 있다는 광고였다.
웃긴다. 자기 이름을 개명하면 세계 최고의 권세가, 재벌, 돈 잘 삼키는 위정자가 될 터인데도 이 좋은 비법을 남한테 권하다니 참 쓸데없는 짓거리를 한다.
위 황당무계하게 무지몽매한 인간을 현혹시키는 요상한 짓거리들은 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적 병적 행태와도 똑같다.
이해불능의 짓거리로서는 외국이나 아국이나 그게 그것이다.
국가통치에 관한 한 우리나라도 별 수 있겠는가?
후진국형 방법의 차이일 뿐.
정치권력자들의 못난 행태는 이쯤에서 접자.
2.
오늘이 2015. 12. 14. 월요일.
내가 중학교 2학년 때(1963년? 12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사날도 날이 참으로 사나웠다.
조부의 기제일인 오늘도 서울의 하늘은 뿌이연한다. 날씨가 흐리고 겨울비가 내린다.
벌써 50여 년 전의 일이다.
호랑이같이 무섭고 두렵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분, 수염을 길게 기른 할아버지였다.
사진 찍으면 혼이 빠져나간다면서 사진을 절대로 찍지 않았던 구시대 노인이었다.
한문을 읽고 쓰던 할아버지였는데, 도회지/대전에서 오랫동안 사신 분의 생각은 왜 그렇게 고루했는지 모르겠다.
젋은 날, 사당패거리를 뒤따라다니며 세상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며 놀기 좋아했다는 분이...
50여 년 전,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장례복장을 보면 참으로 황당했다.
삼베옷, 굴건제복, 수십 개의 만장이며, 첩첩히 괘어올린 음식, 그 많은 문상객들이며...
30여 년 전(1982년 6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입은 상복은 간소화해서 흰 광목으로 된 상복을 입었다. 행전을 치고, 여자들은 흰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아버지 때에도 문상객이 참으로 많았는데...
올해 (2015년 2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검정양복을 입었다. 여자들은 검정치마 옷을를 입었다. 모두 서구식 복장이었다으며, 상복 입는 친척들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아쉽게도 어머니때에는 문상객이 적었다. 미관말직이었던 내가 무슨...
위 사례처럼 장례절차가 자꾸만 간소화되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초상 때를 비교하면 불과 50여 년 만인데도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한다.
또한 넓게는 국가와 사회, 사람들이 행동하는 양식들도 무척이나 간소화되고, 현실화되었다.
특히나 집단에서 개인위주로 자꾸만 변화되고, 제도에 따른 행사와 행태들도 편리화된다는 것을 느낀다.
방금 전, 주방으로 나가니까 아내가 부산하게 요리한다.
'내가 뭐 도와 줄 것 없소?'
'당신이 하게요?, 당신이 할 것은 없어요.'
나는 주방 뒷편 베란다에 나가서 냄비 뚜껑을 열었다. 생선 등이 눈에 띄었다.
'저거, 생선 올리지 마, 밥이나 한 그릇 올려.'
'밥만 올려요?"
'그럼 국 한 그릇만 더 올려.'
내가 손자 맞냐? 할아버지가 유독히 귀여워했다는 손자가 맞냐?
천문학 우주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시간(time)'을 생각한다.
시간을 흐르는 것이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제사라는 것도 일년 뒤에 다시 돌아오지만 그것은 인간이 태양이란 별을 근간으로 시간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때에는 1963년 12월이지 돌아가신 날짜가 해마다 되돌아 오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뒤로 밀려나는 것이지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다.
올해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10개월 째. 이제 두 달만 더 있으면 네년 2월에 첫 기일이 돌아온다.
어머니는 시조부, 시부모, 남편인 내 아버지 상을 꼬박 2년씩 매일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 안 사랑방에 혼백상자를 올려놓고는 조석으로 따슨 밥 지어 올리고 절을 했다. 나도 안사랑방에 가려면 왜그리 무서웠던지...
어머니가 유언하셨다.
'나 죽거든 3일만 밥 떠 놓거라. 모든 것을 다 없애라.'
당신은 알 게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구시대 규율이었는지를.
나도 조금은 짐작한다. 그게 얼마나 형식적인 복종이었는지를.
나는 어머니 제사를 어떻게 지낼까?
최소한도로 간략하게, 약소하게, 줄여서, 형식적으로만 지낼 게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혼이 내 집, 제삿상에 올 리는 없다. 다만 돌아가신 어머니를 한 번 더 생각하는 날짜일 게다
이조시대의 충효사상, 삼강오륜 등이 가진 자들을 위한 억압제도였다는 생각으로 나는 제사에 관하여 크게 축약해야겠다.
3.
나는 내일 시골에 내려간다.
다녀와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선대 산소 이장 묘역을 새로 조성하려는 계획에 관하여 토지측량 등을 친척과 상의해야 한다.
내 고향 앞뜰과 앞산은 일반산업단지로 편입되기에 묘역 한 군데가 모두 사라질 예정이다.
후보지로 서해안 고속도로로 무창포나들목을 빠져나오는 곳인 인근지역. 서낭댕이 근처를 예상한다.
서낭댕이(성황당)에도 선대 묘역이 있는데 이 묘역 위에 새로 조성하여 모두를 집합할 계획이다.
이런 때에는 내가 종손이라는 직위가 참으로 곤혹스럽다. 하지만 별 수 있어? 일 해야지.
1997~98년 경 서해안고속도로 개설 때에도 선산 묘역이 편입되어 부득히 산소를 이장했다.
하필이면그 당시에 이장한 곳이 왜 이번에 또 일반산업단지로 편입되었느냐고?
내가 관리해야 하는 무덤들은 자꾸만 서낭댕이 마을 쪽으로 집결하고 있다.
대전 회덕산(대덕구 읍내동)에 홀로 있는 조부의 무덤도 내년 초에 서해안으로 이장하여 할머니 무덤에 합장할 계획이다.
오늘 큰아들네가 제사 지내려고 잠실에 올까?
증조부 제삿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기제 날짜를 말하지 않았으니까. 제사 지낼 터이니 오라고 연락을 하지 않을 게다. 그거 다 형식적이고, 자꾸만 사라져야 할 구시대 잔재이며, 없애야 할 그 풍습일 뿐이기에.
산소와 제사는 모두 축소하여 간소화해야 될 구시대의 구풍습이다.
나는 구시대 사람의 자손답게 아직도 구시대 풍습을 조금은 따르고 있다. 하지만 조만간 내다버려야 할 폐습이다.
나도 변화하고, 현실에 맞도록 더욱 변신해야겠다, 우선 제사도 줄이고, 형식적인 굴레를 생략해야겠다.
서해안 벽촌에 근거를 둔 최씨네는 자손이 무척이나 귀하다.
드센 딸은 낳아도 사내아이들은 희소한데... 앞으로는 더욱 그러하겠지. 자손도 별로 낳지도 않고, 어쩌다가 자손이 있더라도 옛 관혼상제 풍습을 조금이라도 유지하려는 마음은 없을 게다. 종손인 내가 이 지경이니...
지금은 초과학시대인 21세기이다.
지구를 떠나 또다른 별로 우주여행를 떠날 꿈을 꾸는 현대에 산다. 그런데 중동지역 사우디아라비아 국가에서는 괴상하고 고립타분한 종교관과, 특권의식에 가득찬 왕들의 괴상한 작태로 여성을 탄압하는 제도가 아직도 존재한다니 참으로 웃긴다. 개, 돼지, 닭들도 지키기 싫어하는 압제이다. 이런 병신짓 제도는 최고권력층인 그들, 정신병자들의 이익을 위한 행진곡이다. 일반 국민을 탄압하기 위한 교모한 수단에 불과하다. 여성인권 취약국가 136개국 가운데 127 등이란다. 이보다 못한 나라도 있다는 뜻.
지구 저편에 사는 제3자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못나고, 못된 수작들이다.
4.
어제 밤에는 늦도록 구호적과 족보를 대조했다.
구호적 최기 시작은 일제시대 1910년대가 아닐까 싶다. 증조부가 호주가 되었는데 증조모, 조모, 대고모 등의 이름이 없었다. 최씨, 김씨 등이었다가 최성녀(姓女), 김성녀(姓女) 등 성씨 뒤에 계집녀를 붙인 게 고작이었다. 나중에는 이름을 붙였다. 내 할머니는 김씨, 김성녀에서 김송자로 변했다. 1940년인가? 일본의 창씨개명에 의해서 내 증조부는 성이 최씨에서 산본(山本)으로 바뀌었고 옛 성씨인 최(崔)는 X자로 그어졌다가 해방 뒤린 1946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일제시대의 구호적이 일부는 남아 있고, 나머지는 1950년 6.25사변때 멸실했다고 한다.
그래도 최씨네 구호적은 조금이나마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불과 100년 전에는 우리나라도 여자들의 이름은 없었다. 일제시대에도 호적을 새로 만들면서 이름이 이닌 성씨로 기재되었다. 내 대고모의 이름은 최성녀(崔姓女)다. 모친과 딸의 이름에 성녀(姓女)가 참으로 많았다.
호적 초기였을까? 호적에 증조부, 조부의 이름도 두 개씩이다. 마구잡이다. 족보에 오른 증조부 조부의 이름은 제각각이다. 별개의 이름(謂), 호(號), 족보 항열에 따른 이름 등 참으로 복잡다기했다.
남자의 이름은 그런대로 유지된 반면에 여자들의 이름은 아쉽게도 없었다. 무슨 박씨, 무슨 김씨 등 본관만 나열했다.
불과 100년 전후에는 여자들은 이름이 없었다니...
그럼 그 당시에 여자들의 인권이 지금과도 엇비슷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개명천지에 똑같은 인간인데도 성차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구 시대의 생각, 관념, 문화, 사회제도라는 것이 얼마나 특권의식에 가득 찼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내 고향에는 손씨가 있었다.
황씨네의 노비였단다. 1894년 노비제도가 없어졌는데도 그 손씨네는 황씨의 사랑채에서 살았다고 한다. 왜 신분보다는 먹을 것이 우선이었기에...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그런데도 더 빠르게, 더 많이 변해야 한다. 특권층의 그 잘못된 권력, 권한, 권리를 다 내려놓아야 한다.
간밤, 구호적과 구 족보를 잠깐 살펴 본 바로는...
그냥 욕부터 하자. 과거시대가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나를 엿볼 수 있었기에.
11월 말. 나는 경북 경주 문화관광을 다녀왔다.
경주 첨성대가 있는 그 교동에는 경주 최부자댁이 있다. 내가 이십대 그곳을 아비와 함께 방문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족보사업에 열성이었다. 대동보 발간위원장이었던 아비의 역활을 감안하면 나도 족보사업에 열심히 해야 하지만 나는 고개를 외면했다. 아비가 폐암으로 죽기 직전까지 대전에서 족보발간사업에 매진하는 것이 나로서는 별로였다. 당신이 곧 죽는데도 그 놈의 족보사업에...
일제시대의 구호적을 더 찾아야겠다.
면사무소가 전쟁통에 멸실되었기에 그 많은 기록들이 사라졌다고 하는데도 최씨네는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었다.
간밤에는 과거 여자들의 인권신장의 변화 추세를 엿볼 수 있었다.
시집 가면 친정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짓은 덜 했으면 싶다.
벌초, 시사(시향), 제사, 산소관리 등 돈이 들어가는 데에는 '내 몰라라' 하면서도 토지수용 등으로 토지보상액이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꼬라지가 종종 신문에 떴다.
이번 산단지역에 편입되는 어떤 성씨네는 산 면적이 넓고, 묘소가 수십 개나 되다 보니 보상액이 무척이나 크단다. 생전 듣도 보지도 못한 여자들이 종친회 운운하며 고개를 내민다며 걱정하는 사례도 생겼단다. 도대체 종친회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고 싶다는 사람도 보았다.
다행히도 나는 적은 산소 면적이에 불상사는 없을 게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는 남자 자손보다 여자 자손이 상주(喪主)가 되는 사례는 없거나 적다고 본다.
나이가 적어도 남자가 상주로 이름 오르는 이유는 아직도 구시대 잔재문화일까?
올 봄 나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누나가 나이 많은데도 아들인 내가 상주가 되어 모든 장례 절차를 독단 처리했다.
여자들이야 손님접대용 밥상이나 보조했을 뿐.
제발이다. 님자들의 일에 너무 깊이 간섭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싶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는 여성문제의 방향이 앞으로 변해도 그 한계는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 밤, 조부의 기제사인데도 내 누이들이 알까?
글쎄다. 전혀, 전혀...
피 한 방울, 뼈 한 점도 안 섞인 손주며느리인 내 아내가 종일 주방에서, 시장에서 바빠했다.
2015. 12. 14. 월요일. 해비치
첫댓글 각나라바다전통다르고 종교가
다른것으로알고이습니다
특희공산국가는 나라가 선택한
종교를따라해야한다는것이죠
기일이라구요,
무슨의가있는것일까요?
29세부터열심히
제사를지내주었지요.
딸이떠나고3년 재사를지냈구요.
지내지않으면찜찜해서 지내는것같아요.
그러나 딸을보내고는 명절때외
남편재시때 같이지내주지요,
그러면서회가나곤하죠.
딸을지켜주지못하는남편에
대한분노 가 저를괴롭희죠.
그런내마음을알리는없겠지만~
?
저하고는 생각이 다르군요.
저는 돌아가신 분한테서 어떤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그 분을 생각하고,
현재 나를 있게끔 해 준 끈/인연에 감사한다는 뜻.
저는 앞으로는 많이 줄일 겁니다. 별 의미도 없어지고요.
딸은 이미 그렇게 운명지어진 것이고요. 그게 왜 애들아범한테?
있다면 당신네들의 그 전지전능하다는 절대신을 원망해야 되지만 그 신 자체도 인간이...
종교 이야기는 겁이 나서 이쯤 줄이고...
은주 따님을 편하게 놔 주셔요. 더 멀리 훌훌 날아갈 수 있도록요. 우주 시공 저너머는 너무나 멀고 먼 곳이지요.
지상의 어미가 붙잡고 있으면 무거워서 잘 날 수 있겠어요?
잊어야 할 듯 싶네요
맏습니다.
기일에는너희들아버지가이런
분이셨다.
다른날에는언급도않했던 이야기를
하게되지요.
승조는유복자라서 그런지
아버지에대한애정이없는듯
합니다.
그러함에도 자식들을보살펴 달라고 하면서그분의영혼을
위로하게도는군요.
끈. 하나의 긴 끈이지요.
님이야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 존재를 승조 아들이 이어가고 있지요.
돌아가신 분, 일찍 저 너머의 세상으로 자유롭게 여행떠난 은주 따님을 이제는 즐겁게 보내셔요.
님이 잘 웃는 것을 그 분들이 원할 거예요.
윤리, 도덕, 법, 제도, 규약.... 등등은 이제라도 조금 벗어내시고.
나는 누구여? 내가 누구일까? 자신을 더 사랑하고 존경하실 거죠?
카페에 글 자주 올리고, 더 열심히 사셔유.
장문의 댓글에 감사해요.
ㅎㅎ...긴 글 다 읽었네, 왜 웃었냐 하면...
마지막을 읽을 무렵에는 처음 내용을 다 잊어 버려서 웃었다네 허허...
이게 다 나이 탓이라고 하면 말이 안될 테지...원래 머리가 그 정도였나 보이.
1, 하나 궁굼해,니캅을 두른 중동여자들은 눈만 예쁘면 되겠네 그려, 얼굴이 뵈야지 ㅎㅎ
2, 조부님 기일이구먼, 정성으로 모시면 아들이 또 최형을 그리 대할 걸세.다 보며 배우는 거니까
나도 다음주에는 아버지 제사 모시러 고향 가야 하네
3,조상묘 이장하는 일 어렵고 힘들지...요즘은 돈만 주면 척척 해 주는 업자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4, 족보? 그 걸 뭐 그리 들여다보고 대조까지 하시나?
족보에 보면 어렸을 적에 죽은 자식들 안 올라. 호적에는 있는데...
절가(絶家)한 자의 이름도 없고... 예전 이씨네 왕조에서야 일반 서민의 가계도가 정부차원에서 있었을까? 호패라고 해서 군역, 세금이나 거둬들이려고 억지로 만들었겠지만...
서낭댕이 산소에 누구 묘인지 2기가 있어서 살펴봐도...
못한 후손들. 자기네 윗할아버지 묘소조차도 잃어버리고...
나보고 그것을 어찌 하라고? 해마다 인부 사서 풀을 깎아주었는데...
족보에는 안 나오고... 몇 개의 족보를 다 대조해야 되는지...
정형네 선친은 아마 2000년 경에 돌아가셨던가?
옥천에...
옥천에서 비공식으로이장하는데
30만원든데요.
우리도 할려고했는데한사람이반대해서
못 해소
비공식 이장?
왜 반대? 누가? 관공서에서? 아니면 자손 중에 한 사람? 동네사람?
30민 원이면 이장비 싼 편이네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적은 비용같은데...
저는 많은 비용들어갈 겁니다. 남의 산과 경계선 측량, 산 두 군데 포클레인 두 대 동원, 많은 석물들., 운반 차량,
신도비 등 돌이 무척이나 크거든요.
시멘트 옹벽 치고, 물 수로 만들고,...
아마 작업해야 할 듯... 5~7일 정도 작업?
아니오
군첨에신고안하면할수있어요.
우리부모님도할려고둘째어니가
반대해서모했어요.
계약까지했었는데요,
아무린높이도
해쥐요 우리도괭장희 높은산에
묘지가있어요@
영슴이가속해주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