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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같이 식사합시다!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제 어린 시절 걸인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추운 겨울 다리 밑 같은 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깡통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 좀 주이소!’라고 외쳤습니다. 재수가 좋아 마음씨 좋은 마나님을 만나면 밥과 반찬을 좀 얻어서 대충 요기를 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분들에게 가장 기쁜 날은 혼례 날이나 회갑, 칠순 잔칫날이나 아니면 상이 난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 잔치의 주인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오가는 행인들이나 걸인들에게도 넉넉한 한 상을 차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인들은 나름 달력을 하나 만들어 이 마을 저 마을 잔칫날을 미리 메모해서 허기를 달래곤 했습니다.
식사 한끼 함께 나눈다는 것, 별것 아닌 듯 하지만 엄청난 위미를 지닙니다. 식사를 아무하고나 하지 않습니다. 주로 가족들과 함께 합니다. 살짝 범위를 넓히면 친지들, 친구들, 동료들과 마음 편히 하는 것이 식사입니다.
유다 전통 안에서 식사(食事)에는 아주 큰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잔치나 축제 때에는 ‘ㄷ’자 모양의 식탁이 준비되었고, 3면에는 의자가 놓였습니다. 비어있는 공간으로는 종들이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포크나 나이프같은 식사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음식을 먹었기에,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식사 전후 기도는 필수였습니다. 별도의 개인 접시는 준비되지 않고, 큰 그릇에 빵이나 요리가 담겨나오면,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스프나 국은 빵에 적셔 먹었습니다.
잔치집에서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큰 친밀함과 친교의 표현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의 잔치상에 이왕이면 귀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을 초대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복음 14장 13~14절)
사실 과거 유다인들에게 있어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냉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될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규정으로 인해, 당시 장애인들이 받았던 싱처와 고통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지체장애인들은 꿈란 공동체에 편입될 수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 청각장애인들은 성전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초세기 교회 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바오로 사도께서 크게 분노하신 흔적이 서간 안에 남아있습니다. 코린토 교회 신자들의 경우, 만찬 식탁에서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벌어졌습니다. 폭식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굶주린 채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코린토 전서 11장 20~22절)
잔치집 식탁에서 벌어지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직접 보신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초대를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사심없는 봉사를 실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베풀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심없는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큰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라는 은혜로운 선물이 상급으로 부여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피안(彼岸)에서의 보상을 기대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이 부단히 이 세상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에 고정시키라고 당부하십니다.
지상의 권세는 하느님의 때가 오면 약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의 약함은 하느님의 때가 오면 그분의 힘에 의해 큰 권능으로 바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나약하고 부족해보이는 사람들이 내적,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훨씬 부유한 능력자 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을 강하게 해주시고, 신앙의 빛은 그들에게 참 지혜를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저도 요즘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운영하는 피정 센터가 가장 환대하고 극진히 모셔야 할 첫 번째 VIP 손님들은 과연 어떤 분들이어야 하나?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4,12-1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갚을 수 없으므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왜 일까요?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보답할 수 없다면 당신께서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하지 않고는 배기지 않습니다. 선행이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에게 칭찬받지 못했다면 부모는 10배로 더 칭찬해 줍니다. 우리가 선행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자선 활동은 그의 거대한 부와 성공에서 비롯된 ‘책임감 있는 부의 사용’이라는 원칙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19세기 미국 철강산업을 이끌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는 결국 역사상 가장 큰 자선 활동 중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평생의 재산을 교육, 예술, 도서관 건립, 과학 연구 등에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자선 활동으로는 미국 전역에 약 2,500개의 공공 도서관을 설립한 것과 카네기 멜런 대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을 세운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자선 활동이 단순히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한 수단이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여러 건물과 기관을 설립하며 이를 통해 스스로를 기억되게 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카네기 홀(Carengie Hall), 카네기 재단 등의 이름에서 보듯이 그의 자선 사업은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남기려는 목적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카네기의 자선 활동은 한편으로 그가 축적한 부의 이면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카네기는 대규모 철강 회사인 카네기 스틸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을 극도로 착취했습니다. 그가 철강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희생이었는데, 그는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과 긴 노동 시간을 강요하며, 심지어 무력으로 파업을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가 쌓은 부가 진정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자선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카네기는 평생 수십억 달러를 기부했지만, 그의 자선 활동은 여전히 자기 명성 추구와 도덕적 갈등이라는 논란을 안고 있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자선가’와 ‘냉혹한 자본가’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공한 기업가들이 제일 존경하는 롤모델로 꼽을 때 앤드류 카네기보다는 찰스 피니(Charles ‘Chuck’ Feeney)가 많습니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자신들이 기부하게 된 롤모델로 주저 없이 척 피니를 듭니다.
피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며, 그의 삶과 자선 활동은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병원 간호사로, 이웃과 주변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고 항상 남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행동은 어린 피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자신의 부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신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남을 도울 때 가톨릭 신자답게 자신이 한 행동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어린 피니가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다운 선행은 드러내는 게 아니야. 그러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잖아.”
피니는 성인이 된 후 듀티 프리 쇼퍼스 그룹(Duty Free Shoppers Group)을 공동 창립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를 과시하지 않고, 철저히 검소한 삶을 살며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기(Giving While Living)’라는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하기 위해 1982년 애틀랜틱 필랜스로피스(The Atlantic Philanthropies)를 설립하고, 교육, 과학, 의료 분야에 약 80억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피니의 기부는 대부분 익명으로 이루어졌고, 1997년 우연히 나라에서 감사받게 되면서 드러났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집과 차도 없었습니다. 집도 임대 주택이었으며 시계도 2만 원짜리, 비행기도 이코노미석만 탔습니다.
그는 이렇게 살면서 행복했을까요? 피니는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면 행복하고, 그렇지 않다면 불행하다.”라고 말하며, 타인을 돕는 것이 자신의 행복의 원천임을 강조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럽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굳이 자선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부러라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어머니가 보고 계시고 하느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플 때 부모는 그 아픈 자녀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도 보상받지 못한 선행에 대해 직접 당신이 나서서 성령을 주십니다. 이 맛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선행을 알림으로써 성령의 보상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됨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4,12-14: 선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랑과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바로 당신이 공생활 중에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하셨듯이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하신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팔을 벌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에 대한 보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모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형제애로 서로 나누며 살아가라 하신다. 나눔을 통하여 그 사람은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되며, 하느님께서는 더욱 풍성히 갚아주실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이 세상에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이 있는가? 거의 없다. 이 지상의 삶에서 쌓아두고 감추어 둔 것은,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시에 인연을 마감하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따라, 그분이 그것을 나에게 맡겨주신 뜻에 따라서 올바로 관리하고 주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잘 사용하게 되면, 그래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눈 것은 나의 죽음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모든 것이 나를 반기며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할 것이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매 순간 깨어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것은 아주 작은 사건이나,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에서조차 우리는 그것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을, 나의 시간을 그들과 나눔으로써 더 큰 성숙을, 기쁨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사랑과 봉사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건축가는 건물을 만들지만, 완성 후에는 집주인에게 열쇠를 내주고 떠납니다. 요리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만, 정작 그는 제때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기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만들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잘 쓰지 않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수많은 직업이 바로 이런 모순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남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과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누구 때문에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분이 있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만나는 손님 때문에 힘들다고, 그래서 이제는 자기 일이 싫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리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던 어느 청년이 어느 유명 식당에 취직했습니다. 이 식당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서 성장하겠다고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선배 요리사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했습니다. 신입이라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선배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이 청년을 혼냈습니다. 결국 이 청년은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요리 자체가 싫어졌다고 합니다.
충분히 이 청년의 행동이 이해됩니다. 그런데 먼저 모든 일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싫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사람이 싫다는 생각이 들 때, 자기가 사랑하던 일조차도 싫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사람이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합니다. 더구나 우리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사랑에서 시작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실마리가 잡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원래 이런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뿐이 아니라 사람들이 초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특히 소외받는 사람도 따뜻한 손길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들에게 보답받지는 못하겠지만, 하느님께 보답받는다고 하시지요.
우리 삶에서도 나를 반대하는 사람 때문에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미워할수록 하느님께 받는 보답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큰 보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조금 헐렁하면 어떠냐 서툰 인생길 익숙해질 그날까지 묵묵히 뚜벅뚜벅 부지런히 가보자 멋지고 아름다운 내 삶과 인생을 위해(김유영).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우리의 잔치에는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이라네.
우리는 그들에게
단순히
음식을 베풀지만
그들은
저마다의 가슴에
소중히 성체를 모시고
우리를 찾아온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교회는 가진 자들이 대접받는
그런 곳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하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
아픔과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는 삶의 자리여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야
복음적 삶이 살아 숨 쉴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구원이고 행복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거리를 두지 않고
함께 살아간다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히려 교회를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2,1-4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2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3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