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모세는 해골을 들고 탈출했을까? (창50:24-26)
만일 여러분은 자다가 불이 나면 뭘 챙겨 나가겠습니까? 적금통장인가요? 부동산 문서인가요? 이런 것들은 관공서에 가면 컴퓨터에 다 저장되어 있을테니 가보성경이나 아버지의 유품, 혹은 귀금속이겠지요.
오래 전 군목일 때 21연대를 섬겼는데 주일아침 예배 때 제가 병사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불이 나면 무엇을 갖고 나갈 것인가?” 그러나 대부분의 병사들이 애인사진, 저금통장, 심지어는 숟가락이라고 말하는 병사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이 집사님(대대장)이 병사의 뒤통수를 치면서 말했습니다. “총을 가지고 나가야지 쨔샤...”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제가 병사들에게 물었던 이유는 병사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알고 싶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생각나는 것이 그 사람의 가치관이고 본질입니다. 가장 급할 때에 떠오르는 것, 그게 그 사람의 가치관이고 살아가야 할 존재이유입니다.
1. 출애굽 때 뼈를 챙기는 모세(출13:17-19)
오늘의 본문(출13:17-19)은 모세가 출애굽 할 때의 긴박했던 순간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400년간 애급의 압제 하에 있다가 드디어 해방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정말 얼마나 기뻤을까요? 해방과 탈출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요? <전군 지휘관 회의>도 가져야 하고, <관계 장관 연석회의>도 해야 하며, <수석비서관 모임>이나 <NSC회의>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개인 짐도 싸야하고, 긴 여행을 대비해서 충분한 음식을 비롯해서 수많은 물건들을 추려야합니다. 그런데 이 위급한 때 모세는 무엇을 했을까요?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출13:19) 놀라운 것은 그때 모세는 한 사람의 해골을 챙기고 있습니다. 조상 요셉의 해골입니다. 모세는 왜 하필 요셉의 뼈를 추스르고 있었을까요? 부모도 아니고, 직계 조부도 아닌데 왜 모세는 왜 4백년 조상인 요셉의 뼈를 챙겼을까요? 해방되는 이 시점에 하필 요셉의 뼈입니까? 해외 유해 송환 때문인가요? 아니면 요셉의 뼈가 신유의 기적이라도 베푸는 전설이라도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요셉의 유언 때문입니다. 요셉은 죽으며 다른 이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자신이 죽고,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는 날이 오거든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원했다면 무덤, 즉 피라미드도 어마어마한 규모로 건립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들을 원치 않고 단 한 가지만을 유언으로 남겼던 것입니다. 그 후 사백 년의 세월이 흘렀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급시키신 것입니다. 그때의 상황은 참으로 급박했습니다(출12:11) 서둘러야 했습니다. 심지어 얼마나 바빴는지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음식 먹는 법까지 자세하게 일러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12:11) 얼마나 급했던지 허리띠를 띠고, 신발을 신고, 서서, 지팡이 든 채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은 은금 패물, 의복을 구할 때(출12:35)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추려서 챙긴 것입니다.(출13:19)
당시 출애굽에 참여한 사람은 장정만 육십 만(출12:37)이고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약 이백만이 훌쩍 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 거대한 행렬(行列)의 선두에 모세가 섰습니다. 그는 400년 전의 조상인 요셉의 유골을 들었습니다. 유골을 앞세운 행렬이라면 결국 장례행렬 아닙니까? 이것은 사십년 동안의 장례행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는 왜 이다지도 급박한 순간에 요셉의 뼈를 챙겨야만 했을까요?
2. 유언하는 요셉(창50:25)
어떤 이들은 구약 창세기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결국 창세기는 창조와 생명으로 시작하였다가 죽음과 입관으로 끝났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마지막 구절은 뭐라 쓰여 있을까요?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창50:26)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생이란 이런 건가요? 젊고 아름다운 날이 지나면 늙고 병들고 죽음이 오듯, 성경도 이런 자연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걸까요? 총리로 화려하게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지만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는 걸까요?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마지막에는 요셉을 ‘하관(下棺)’이 아닌 ‘입관(入棺)’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장례의 끝은 입관이 아닙니다. 하관입니다. 관 속에 시신을 넣는 입관이 아니라 그 관을 무덤 속 구덩이, 즉 광중(壙中)에 안치하는 하관이 마무리입니다. 그런 다음 봉분(封墳)을 만들면 끝입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NASB)을 보면 요셉은 관 속에 입관만 되었지(he was placed in a coffin in Egypt) 묻히지는(buried)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유언 때문입니다.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50:25) 결국 이들은 언제일지 모를 그 날을 대비해서 그의 해골을 운구하기 위해 입관만 해놓고 ‘대기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창세기는 얼핏 보면 죽음과 절망으로 끝난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실낱같은 희망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인데 이 책은 BC430년 경에 쓰인 책입니다. 이 때는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하고 나라가 사라져버린 비극적인 시기에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하고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나 예례미야 같은 선지자를 보내사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셨지만 결국 그들은 불순종함으로써 파멸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모두가 마지막이라고 희망의 끝을 놓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말라기를 통해 실낱같은 희망을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4:5-6) 이런 희망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기 위해 먼저 이 땅에 온 선지자 세례요한(마11:14)에게서 실현된 것입니다.
3. 요셉을 묻는 여호수아(수24:32)
결국 이 출애급할 때 모세가 요셉의 유해를 운구한 순례의 끝은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한 후 요셉을 묻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즉 모세 5경 뒤에 위치한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공격과 분배과정을 기술한 책입니다. 이 방대한 과정 뒤에 여호수아가 마지막으로 마무리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긴 시간 동안 들고다녔던 요셉의 뼈를 땅에 묻는 것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수24:32) 이처럼 창세기 말미에 요셉의 유언이 약 400년이 흐른 후 모세에게서 실행되고, 이후 모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에 의해 완성되는 것으로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서가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약에서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요셉의 뼈에 대하여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11:22)
모세가 요셉의 뼈를 들고 나온 것이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① 신앙의 역사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출애급 당시 모세가 400년 전의 조상의 해골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은 ‘요셉의 뼈’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역사(신앙)를 들고 광야로 나온 것입니다. 노예상태에서 막 해방된 사람들에게 질서가 있었을까요? 200만이 넘는 사람들이 광야로 쏟아져 나오면 이들을 통제할 능력이 있을까요?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이때 모세는 요셉의 유골로 상징되는 여호와 신앙을 앞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후손이다. 애급에 정착해 살면서 7년 흉년기 때에도 애급을 살린 우리 조상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지금 우리가 광야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유일 신앙만 잊지 않는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살려주실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바로 왕과 6개월간 협상할 때 그는 무려 9번이나 자신의 약속을 번복했습니다. 이렇듯 바로가 자신의 말을 바꾸는 동안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출9:29) 하는 중대한 선언이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사는 현대가 광야같이 기독교신앙을 이어나가기 힘든 곳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신앙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었던 모세를 기억하고 우리 또한 신앙의 대물림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② 믿음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400년 전 조상인 요셉의 뼈를 챙겼습니다. 이건 요셉의 유언을 이루고 기의 약속을 기억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를 지켜보는 수많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신앙은 기억하는 것이란 사실을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역사는 기억되어야 합니다. 신앙도 기억해야 합니다. 잊으면 안 됩니다.
히틀러의 야만적인 광기 밑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습니다. 히틀러의 자살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독일과 이스라엘이 화해 무드로 치닫더니 급기야 국교수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텔아비브 대학>과 <히브리 대학> 등 여러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스크럼을 짜고 데모를 시작했습니다.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말자” 그들은 거리에서 크게 소리쳤습니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혹시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되 쉽게 잊어버리고 살진 않나요?
예루살렘 <기억의 산> 위에는 1953년에 개관된 <야드 바쉠 Yad VaShem>이라는 홀로코스트 역사박물관이 존재합니다. 여기에는 2차 대전 당시 고난 받던 유대인의 학살 장면이 생생히 보존되어 있는데 홀로코스트 증거와 필름 12억 5천만 개, 사진 42만 장. 그리고 10만 명의 증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입구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습니다. “망각은 우리를 유배지로 이끈다. 반면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기억해야 구원받는다) 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도 과거의 치욕과 아픔을 잊어버리는 순간 또 다시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말 것입니다. 36년간 일제의 강점만행이라든지 6,25의 쓰라린 경험, 극심했던 좌우대립, 그리고 군부독재의 고통의 늪, IMF의 치욕도... 모두 잊으면 다시 반복되고 말 것입니다.
③ 요셉 신앙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요셉신앙은 무엇일까요? 17세에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가 39세가 되던 해, 애굽에 쌀을 구하러 온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던 형들, 급기야 물 없는 웅덩이에 자신을 가두고 죽이자며 희희낙락하던 형들, 먼 나라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세상에 그가 하는 말을 다시 들어보세요. 요셉은 자신을 애굽에 보낸 이는 형들이 아니고 미디안 상인들도 아니란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보내신 분께서 목적하시는 것도 알았습니다. 즉, 세상의 생명을 구하려고 자신을 생면부지의 땅인 애굽에 보내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0장에 보면 아버지 야곱이 죽자,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들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창50:17) 그리곤 요셉이 다시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19-20) 이것은 창세기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아니 성경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의 반역과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인간은 악을 행하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그런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④ 광야 생활의 나그네 삶의 유한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관에 잠시 몸을 누이고 탈출을 기다리던 요셉의 뼈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시고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실텐데 그때 내 해골을 메고 여기서 나가다오. 여기는 내가 묻힐 곳이 아니다. 나에게는 영원한 고향이 있다. 사명 때문에 이곳에서 110년 동안 나그네의 삶을 살았지만 나는 항상 내가 가야할 곳, 궁극적인 고향인 가나안을 사모해왔노라.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으로 나는 가야만 한다.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곳이 영원한 고향(故鄕)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향(本鄕)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나그네이긴 하지만 분명한 목적지가 있기에 ‘방랑자(vegabond)'가 아니라 ’순례자(pilgrim)'입니다. 우리 모두는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란 1인칭 ‘나’와 3인칭 ‘그’ 그리고 ‘철수네’ ‘영희네’ 하듯이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는 ‘네’로 이뤄진 단어입니다. 나그네란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은 자, 즉 길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나그네입니다. 언젠가 이 나그네 삶을 모두 마치고 본향집에 도착하면 주님께서 달려나와 우리의 지친 몸을 안으시고 쳐진 어깨를 도닥여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 품 안에서 거친 숨을 고를 때까지 요셉의 신앙을 본받아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