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를 책임진 그대여!
일하라. 일하라 그리고 또 일하라!
“만약 한달간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나요?”
답변은 뻔했다. 뻔하다는 건 무슨 답을 할 것인지 안다는 것이다. 무슨 대답인지 안다는 건 너의 고민이 내 고민이고 내 고통이 너의 고통이란 뜻이다. 답이 뻔한 사회,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건 우리 사회가, 우리 모두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어떤 답변이 나왔을 거라 생각하는가? 맞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게 답이다.
- 여행이요.
- 가족과 국내외 여행가기. 가서 나의 지나온 삶도 되돌아보고 노후에 대한 고민도 하고.
- 골프장 있는 휴양지 가서 골프치고 쉬고 자고 수영하고. 단 혼자. 혼자가서.
- 여행을 가고 싶어. 국내가 되었건 해외가 되었건. 근데 또 여행도 종류가 다양하고 결국 비용의 문제가 있으니까.
- 무조건 가족여행이요.
- 휴식 반납 할거에요. 한달 쉬면 자리 없어질 거고 설사 자리 보전 된다고 해도 감이 떨어질까 두려워요. 일년 혹은 이년 유급으로 쉬게 해준다면 어학연수나 MBA갈거에요. 자기개발해야지. 요새 때가 어느 땐데…….
사는 매일매일 똑같은 것은 누구나 그렇다. 매일매일이 새롭다면 그 또한 피곤할 지 모른다. 매일매일 다르다는 건 사건 사고가 많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간사해서 매일 똑같은 삶이 심심하고 무미건조해서 힘들어 한다.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의 질문도 그거였다. 자신의 일상이 너무 평범해서 얘깃거리가 되겠냐는 걱정어린 답변이 날아왔다.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긴데 이상할 것 없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그는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김부장의 평범한 이야기
그는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들을 때마다 코끝이 찡하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개인택시를 하고 계신다. 그 나이에 아이들이 그렇듯 부끄러워할 법도 한데 김부장은 초등학생 때부터 존경하는 인물은 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성실의 대명사셨다. 그의 생활신조가 성실인 건 순전히 아버지 영향이다. 결혼 전 아내에게 한 약속도 누구 못지않게 성실하게 살겠다는 거였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그 약속은 성실하게 지키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의 하루는 단순했다. 대한민국 샐러리맨의 하루가 그렇듯. 16년 동안 한 회사에서 근무했고 3년 전 지금의 회사로 옮겼으니 19년을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김부장은 아침 6시면 일어난다. 집과 회사가 멀지 않아 7시 40분이면 회사 책상 앞에서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8시면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부원들과 일을 조율하고 간단하게 보고도 받고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면 9시다. 본격적인 회사 일이 시작된다.
금융관련 일을 하다 보니 일의 대부분이 돈과 관련된 것이다. 이미 나간 대출에 대해 관리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절반을 차지한다. 나머지 절반의 일을 미팅이다. 물론 대출 관련한 미팅이다. 사회 초년생일 때는 개인 대출 일을 잠시 했지만 지금은 기업대출만 한다. 미팅은 30분에서 길어야 한 시간인데 이런 미팅이 하루 평균 5~6건이다.
그의 하루는 단순했다
대한민국 셀러리맨의 하루가 그렇듯
오전 일이 끝나고 나면 12시 점심시간이다. 밥은 직원들과 먹는다. 직장상사이지만 부하 직원들은 그를 가장 편한 상사라고 한다. ‘그걸 믿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반색을 했다. 진짜라며 재차 강조하는 그의 이야기가 재밌기도 했다. 딴 건 모르겠지만 밥값에 있어서는 나름 합리적인 규칙이 있단다.
매달 직원은 10만원, 대리나 과장은 13만원, 부장은 15만원을 모아서 함께 계산을 한다. 일년 350일쯤 먹는 점심이다보니 메뉴는 주로 밥이다. 밥먹고 나면 차 한 잔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단다. 남자직원들만 있다는 그의 부서에서 남자들끼리 모여서 도대체 무슨 수다를 떠냐고 했다. 김부장은 웃으며 할 얘기가 무척 많다고 한다. 남자들도 여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젠 신기하지도 않지만.
역시 직장생활에서 가장 재미없는 일은 회의다. 학교 수업시간보다 더 재미없는 게 회의시간이다. 직원회의보다 중역회의는 더 재미없단다. 일주일에 한번 외에도 수시로 잡히는 회의는 하면 할수록 회의적이다. 저녁 7시가 되면 김부장은 퇴근한다. 그는 가장 먼저 칼퇴근을 한다고 한다. 자신이 나와줘야 아래 직원들이 퇴근을 하던가, 야근을 하던가 할 수 있단다. 하긴 상사가 퇴근 안하고 버티고 있는데 집을 가겠다는 강심장의 직원은 없을 테니까.
김부장의 하루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맞벌이를 하는 김부장은 퇴근 후면 집으로 향한다. 아내의 일이 야간 교대근무가 많은 간호사여서 밖에서 별다른 일이 없으면 집으로 가서 아이들을 돌본다. 아직 초등학교 5학년, 1학년 아이들이니 손이 많이 간다. 밥도 해서 먹이냐는 질문에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에 가서 밥을 해서 아이들을 먹이고 설거지하고 나면 아이들 숙제를 봐준다고. 준비물 체크하는 일도 김부장이 꼭 해야 할 일이다. 주말에 청소기 돌리는 일은 결혼해서 쭉 김부장이 해온 일이다. 쓰레기 분리수거도 역시 김부장의 몫이다. 아내도 당연히 쓰레기 분리수거는 남편의 일로 알고 있단다. 김부장의 하루는 그렇게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끝이 난다.
김부장은 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라고 했다. 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일이 머릿 속을 뱅뱅 돈다고 한다. 그렇다고 사람들과 술 먹는 것을 아주 즐기는 편도 아니다. 술을 잘 먹지 못해서 더 그렇기도 하다. 결국 스트레스는 온전히 혼자의 몫이다.
"혼자 삭히는 편입니다. 이미 벌어진 일 화내봐야 바뀌지도 안잖아요. 스트레스가 또 뭘 한들 삭혀지겠어요? 나가서 혼자 담배 한 대 피고 넘어가기도 하고 일 끝내고 직원들이랑 간단하게 술 한잔 하는 게 다에요."
오늘을 살며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중년 남자들의 이야기는 듣는 내내
마음이 헛헛했다
요즘은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선배들이나 동료가 회사 공개석상에서 듣게 되는 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할거면 때려쳐!”란 비난을 듣고도 다시 회사에 나와 일을 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고. ‘난 저러면 회사 다닐 수 있을까?’ 가정을 책임져야 된다는 책임감 때문에 남자들은 회사를 그만두거나 혹은 그만두게 된다면 갖게 되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상당히 커보였다.
정년은 있지만 그걸 채우고 나가는 사람들도 거의 보지 못했다. 김부장 역시 능력이 다해서 나가느냐, 구차하게 버티느냐를 걱정하게 될 때쯤이면 자신도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담담해 했다.
잘나가던 선배도 회사를 나가면 일반화되는 것을 익히 보았다. 김부장은 그래서 퇴직 이후에 대해서 조금씩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마흔 여섯의 나이지만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다는 그는 대부분 대한민국 직장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김부장은 너무 평범해서 들어보고 쓸 게 없으면 딴 사람 인터뷰하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과 잘 하는 일.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냐고 그들에게 물었다. 모두 하고 싶은 일과 잘 하는 일을 선택했고 돈을 많이 버는 일은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일의 목적이 생계유지와 가족부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고 싶거나 잘 하는 일을 했을 때의 만족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얘기다.
꿈도 다양했다. 건축가, 국어선생님, 조종사, 아나운서, 조경설계사 등 중년의 꿈들은 예상 밖으로 다양했다. 꿈을 이루고 사는 이들도 있고 꿈은 그저 꿈일 뿐 현실에 착실히 발을 딛고 살며 건강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지긋지긋한 직장생활과 일이 끝나는 퇴직 이후에도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건 가정을 책임지는 남자들에겐 더 당연해 보였다.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하는 사회. 퇴직 이후의 삶이 다시 일이어야 하는 현실. 답답하고 힘들다는 하소연대신 오늘을 살며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중년 남자들의 이야기는 듣는 내내 마음이 헛헛했다.
- 미워하는 사람 빨리 죽이는 법 중 하나가 사회에서 은퇴시키는 거래요. 일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체력도 저하되고 우울증도 빨리 올 것 같아요. 여행도 돈보다 건강해야 가능하니까요. 일 해야죠. 퇴직해도.
- 퇴직하고도 왜 또 일하냐구요? 일 해야죠. 사람이니까 당연히 일을 해야죠. 일 안하고 며칠 있어봐야 금방 답답하고 더 힘들어요. 퇴직하면 아마츄어 골프 코치를 하고 싶어요. 물론 생업으로 돈 벌려구요.
- 퇴직 후엔 자영업을 해볼까 해요. 지금은 찾고 있는 단계에요. 항상 미리미리 준비하자는 주의라서요. 일은 존재감이자 돈이니까요.
- 퇴직이라니 무슨 소리에요? 악착같이 다녀야지. 이런 엄동설한에 퇴직이라니 떠밀 때까지 다니고 잘리면 받아줄 곳 찾아야죠.
이숙정 객원기자
첫댓글 어쩜 나하고 똑같지?구구절절,
나? 명퇴하고도 일해요.다행히 받아주는데가 있어서,ㅎㅎ
남자의 자존심은 지갑에서 나온다나?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