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소프 야르(차시우 야르)와 오체레티노(오체레티네), 그리고 하르코프(하르키우)
미국의 대(對)우크라 군사 지원 재개 결정 소식이 알려질 즈음, 내외신 보도에서 자주 등장하는 우크라이나 지명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러시아군의 거센 공세에 함락 위기에 빠진 도시, 마을이다.
이같은 전황 흐름이 새삼스러운 것은 절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제 2의 도시이자 하르코프주(州)의 주도인 하르코프를 제외하면,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러시아 본토를 겨냥한 우크라이나군의 포격 거리를 최대한 넓히기 위해 진군을 계속하는 러시아군의 당초 진격로에 들어 있던 도시(마을)이다. '라스푸티차'(진흙탕)와 같은 계절적인 지형의 영향으로 진격 속도가 다소 늦어졌을 뿐이다.
특히 미국이 거의 6개월 만에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예산안을 통과시키고, 이에 맞춰 영국 등 유럽 측의 군사적 지원도 임박해지자, 러시아군은 진군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지난 22일 '차소프 야르'가 새로운 격전지로 부상했다고 전했다. 러시아군이 2만~2만5천명 규모의 병력으로 이 곳을 점령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은 이미 러시아군의 손에 떨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 동부사령부 측은 "차소프 야르 주변의 상황이 어렵지만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소식은 다르다.
차소프 야르는 우크라이나군에게는 도네츠크주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전략적 요충지의 하나로 꼽힌다. 오랜 격전 끝에 지난해 6월 '바흐무트'를 장악한 러시아군이 군사기업 '바그너 용병'의 6.24 군사 반란으로 주춤거렸던 서진(西進)을 계속하면서 우크라이나군과 맞딱뜨린 곳이다. 이 곳을 점령하면. 도네츠크주의 산업 단지인 크라마토르스크와 슬라뱐스크로 치고 올라가면서 도네츠크주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러시아군은 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인 내달 9일(5월9일)에 맞춰 '차소프 야르'를 장악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설 것으로 우크라이나 측은 보고 있다.
최전선을 시찰한 시르스키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사진출처:페이스북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합참의장 격, 총사령관)도 열흘 전인 지난 13일 이례적으로 "동부 전선의 상황이 크게 악화됐다"고 인정했다. 시르스키 총참모장은 "적(러시아군)은 대통령 선거(3월 중순) 이후 공격을 강화했다"며 “적군은 기갑부대(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리만과 바흐무트 방향에서 우리 진지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있으며, 포크로프스크 방향으로는 수십 대의 탱크와 보병 전투차량을 이용해 우리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리만과 바흐무트 방향이 바로 '차소프 야르'를 지목한 것이다. 또 포크로프스크 방향은 '오체레티노'로 향하는 러시아군의 공격을 말한다.
우크라이나 지도를 보면, 러시아군이 지난 2월 중순 점령한 아브데예프카(아우디이우카)와 '차소프 야르', 포크로프스크는 지형적으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철의 삼각지대'(鐵의 三角地帶)를 연상케 한다. 강원도의 철원군, 김화군, 평강군을 잇는 '삼각지대'는 한국전쟁 당시 '중부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아브데예프카, '차소프 야르', 포크로프스크도 도네츠크주 서부 전선의 주요 방어진지다. 도네츠크주의 주도인 도네츠크시(市)를 먹느냐 먹히느냐를 가름하는 '삼각지대'를 이루고 있다.
도네츠크주 삼각지대를 이루는 '차소프 야르'(표식)과 '아브데예프카'(오른쪽 맨 아래), 맨왼쪽의 '포크로프스크'의 위치. 아브데예프카 바로 왼쪽 위에 오레체티노가 보인다. 포크로프스크로 가는 길목이다./얀덱스 지도 캡처
오체레티노의 위치. 맨아래 도네츠크시가 보이고, 그 위에 아브데예프카, 왼쪽 끝에 포크로프스크가 있다. 맨 위는 바흐무트다. 바흐무트 서쪽에 차소프 야르가 있는데, 도네츠크주 삼각지대를 이룬다/얀덱스 지도 캡처
러시아군은 이미 아브데예프카를 삼킨 뒤 포크로프스크를 향해 북서진(北西進) 중이다. 이 진격로에서 맞딱뜨린 첫번째 난관이 바로 '오체레티노'인데, 러시아군은 이미 마을 대부분을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곳을 또 손에 넣으면, 아브데예프카에서 퇴각한 우크라이나군이 새롭게 방어진지를 구축하려는 베르디치와 뉴요르크, 토레츠크로 밀고 들어갈 수 있다. '오체레티노'는 아브데예프카에서 북서쪽으로 약 20㎞, 포크로프스크까지는 약 30㎞ 정도 떨어져 있다.
'오체레티노'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한 우크라이나군 지휘부도 나토(NATO)군의 최신 장비를 갖춘 제47 기계화 보병 여단은 증원군으로 보냈으나, 러시아군은 군 부대의 교체라는 빈틈을 이용해 마을로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체레티노(아브데예프카) 전선에 나타난 러시아 '거북이' 탱크. 드론 공격을 막기 위해 탱크 전체를 철판으로 감싼 상태다/영상 캡처
위성사진 등을 분석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점령 상황을 지도로 보여주는 우크라이나 텔레그램 채널 ‘딥스테이트’는 24일 오체레티노역을 포함한 마을 대부분 지역을 러시아군이 점령한 것으로 표시했다. SNS 엑스(X, 옛 트위터)에는 오체레티노의 한 건물 옥상에 러시아 국기가 게양된 영상도 올라왔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4일 "우크라이나군은 공식적으로 오체레티노 상황에 대해 인정하기를 매우 꺼려하지만, 현지 러-우크라 소식통들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은 이미 마을 대부분을 점령했다"며 "지형적으로 높은 지대에 위치한 오체레티노의 함락으로 인근 도시 베르디치와 토레스크 등이 후방과 측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차소프 야르'와 '오체레티노' 등을 공략하는 러시아군의 전술을 우크라이나 군사전문가들은 '두더지 작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전선의 여기 저기를 수도 없이 찔러보다가, 약점이 발견되는 지역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우크라이나군의 방어선을 뚫는다는 것이다. 주로 우크라이나군 보충 병력이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거나, 부대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퇴각 조짐을 보일 때 결정타를 타격을 가하는 방식이다.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군의 가장 큰 약점으로 서방 측이 지원한 무기와 탄약의 재고 바닥이 아니라, 절대적인 병력 부족을 꼽았다. 전선에 보충되는 병력이 없다보니, 기존 병력으로는 러시아군의 '두더지 작전'을 잡을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우크라이나 최고라다(의회)도 이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 11일 군 동원 기피자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는 새 동원법을 채택했지만, 우크라이나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동원 기피 민심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왔다. 일부 서방 외신들도 미국의 대우크라 추가 지원이 확정됐지만, 전황을 극적으로 되돌리기는 어려운 요인의 하나로 병력 부족을 들었다.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하르코프에 만들어진 지하 학교/사진출처:텔레그램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반으로 부러진 하르코프 TV 타워/영상 캡처
도네츠크주의 '삼각지대'외에 러시아군이 노리는 곳은 하르코프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러시아는 가까운 장래에 하르코프를 점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지속적인 공습으로 도시를 폐허로 만들기로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테레호프 마리우폴 시장은 "하르코프가 '제2의 알레포'(러시아군의 시리아 공습 당시, 최대 피해를 본 북서부 중심도시/편집자)가 될 위기에 처했다"며 “러시아는 도시의 에너지 등 인프라를 파괴하고 130만 주민을 도시 밖으로 쫓아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러시아군은 4월 초부터 거의 매일 미사일과 에어폭탄(활공폭탄, KAB) 등으로 하르코프를 두들겼다. 14일 밤에는 샤헤드 드론이 대량으로 날아왔다.
급기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8일 하리코프 상황을 점검하는 최고 지휘부 회의를 열기도 했다. 그렇다고 뽀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하르코프 상공을 방어할 수 있는 패트리어트 방공 미사일의 추가 지원을 서방측에게 요구했을 뿐이다. 미국의 추가 지원이 확정된 만큼 우크라이나군은 방공미사일 시스템으로 이 곳에 최우선적으로 배치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크라이나는 또 러시아 국경에서 남쪽으로 10㎞ 떨어진 하르코프 북부 지역에 100㎞ 길이의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독일 일간지 빌트가 지난 8일 보도했다. 러시아군이 일단 집중 공습으로 하르코프시를 부순 뒤, 새로운 지상군 병력을 국경선 남쪽으로 내려보내 도시를 점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러시아가 하르코프를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준비중이라는 소문도 이미 퍼진 바 있다.
서방 외신도 경고 경보를 울리기 시작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키예프(키이우) 소식통을 인용, "러시아는 하르코프를 민간인 거주에 부적합한 '회색지대'로 만들고 싶어한다"고 보도했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러시아군의 공습은 하르코프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러시아 국경에서 40㎞ 떨어진 하르코프를 점령하면, 모스크바는 돈바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을 완전히 포위할 수 있다"며 지상 공격 가능성을 열어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