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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연중 제3주일 복음 : 마르코 1,14-20
차태현, 이은주, 손예진이 주연했던 ‘연애 소설’은 차태현을 사랑하는 이은주와 손예진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차태현은 카페에서 일을 하다 손예진에 한 번에 반하고 맙니다. 그런데 항상 손예진과 함께 다니는 이은주가 있었습니다. 태현을 예진과 은주 모두 사랑하게 되고 태현도 둘과 지내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예진은 몸이 좋지 않아 자주 함께하지 못하게 됩니다. 처음엔 예진을 좋아했던 태현도 자주 보게 되는 은주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예진은 자신도 좋아하지만 자신의 친구를 위해 태현을 양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진은 곧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진이 죽고 은주는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인 태현을 자신에게 양보했던 혜진 때문에 너무나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은주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태현과 헤어지자고 말합니다. 태현은 영문도 모른 채 슬퍼하다 그렇게 5년이 흐릅니다. 그리고 편지 한 장으로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고 다시 은주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연애 소설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처음부터 둘이 아닌 셋이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은 둘이어야 하는데 결국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는 물러나야만 하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쓰라린 현실이 존재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을 하면 사제의 길을 갈 수 없고, 사제의 길을 간다면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한 선택을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할 수 없다면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따르기 위해 이 세상 모든 것을 끊어버릴 수 있는 사람들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첫 제자들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버리고 갔던 ‘그물’과 ‘아버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내어놓음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에게 ‘그물’은 그들의 생계수단이었고 그들의 꿈이었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어부가 그물이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에게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삯꾼들이 있었고 또한 대사제 가야파의 집에도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어부로서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자신의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를 버립니다. 이는 가족에게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손가락질을 당할 일이었습니다. 사실 애정을 끊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이게 진정으로 이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줄 모르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께 봉사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아직 세상의 ‘그물’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들을 주님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성당 내에서 성취해보려 합니다.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의 인사이동 때 이런 일들이 가끔 벌어집니다. 인사이동을 시키면 하도 불만이 많아서 전화기를 꺼 놓고 당분간 휴가를 다녀올 정도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한 신부님은 음악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사제가 음악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당을 비워놓고 음대에 다니느라고 본당 신자들의 불만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교님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우선은 본당에 충실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신학교 때부터 그렇게 공부를 시켜달라고 했는데도 해 주지도 않았고 또 지금은 음악을 공부하라고 돈도 대 주지 않아 자비로 아껴가면서 하고 있는데 너무하다고 오히려 주교님께 반발을 합니다. 자신은 훌륭한 음악가로서 교회음악의 발전을 위해 살겠다는 꿈이 있는데 교회가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냥 예를 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포기하지 못했다면 아직은 ‘그물’을 버리지 못하고 거짓으로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가짜 제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게를 하는 사람인데 성당에 나가면 사람들이 자신의 매상을 올려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봉사를 하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좋아서 임기가 다 찼는데도 다른 봉사자가 없다고 하며 10년 이상을 버팁니다. 10년이 지나면 이제 그 단체는 자신의 작은 왕국이 됩니다. 왜 대통령들이 법까지 바꿔가며 정권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하겠습니까? 바로 명예욕, 권력욕의 맛이 그만큼 강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벗어나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은퇴 나이가 되지 않으셨는데도 수원 교구장을 10년만 하시고 다 내려놓고 시골로 들어가신 최덕기 주교님이 이런 면에서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만약 다른 봉사자가 없더라도 임기가 끝났으면 퇴임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내 꿈을 이루는데 도구처럼 쓰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를 쓰시는 분이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금송아지처럼 나의 꿈을 이루는 도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버렸다는 것은 애정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들은 가족이 어려워지자 자신이 가족을 돕겠다고 옷을 벗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그나마 양심이 있는 것인데, 굳이 교회에서 하는 어떤 사업이나 큰 직책을 맡아서 자신의 가족들을 배불리려고 하는 성직자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사제 직무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람들을 만들어갑니다. 어디 놀러갈 때 꼭 신자들을 동행시키거나 돈을 대게 함으로써 주위엔 항상 신자들이 따라다닙니다. 아마도 클 때 외로웠기 때문에 사제나 수녀가 되어 그것을 이용하여 친분을 넓히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어떤 신자도 그 사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용당한다는 기분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제 자신을 모조리 봉헌할 수 있는 불같은 신앙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그래? 그렇다면 네가 불구자로 살았으면 좋겠다. 네가 차 사고가 나서도 항상 감사하며 산다면 많은 사람이 나를 믿게 될 거야”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기도를 잘못했다싶어 얼른 “그건 아니고요, 몸은 좀 성하게 해 주세요”라고 조건을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상상 속에서 차 사고가 나서 불이 붙어 화상을 입을 상황인데 천사가 앞 유리를 깨고 기적적으로 저를 꺼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실은 나도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다만 네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을 마음을 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가 그분의 죽음에 합당한 우리 생명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그분께 감사로이 봉헌한다고 하지만 온전히 봉헌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를 따랐던 제자들이 바로 그물과 아버지를 버리고 따랐다는 사실은 참으로 대단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분을 따라야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아직 포기하지 못하는 그물은 무엇이고 아버지로 상징되는 애정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하나를 버리지 않으면 다른 하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것도, 세상의 애정도 다 미워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다처럼 제자가 된다고 하면서도 결국엔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삼각관계를 만드는 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청합시다. (2015)
- 전삼용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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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