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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묵상글 ( 사순 제4주간 금요일. - 짐이 되는가? 힘이 되는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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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순 4주 금요일-짐이 되는가? 힘이 되는가?
사순시기가 점차 끝을 향해 가기에 독서와 복음은
주님께서 왜 죽임을 당하게 되는지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우리(악인들이)가 죽이려고 들 때 그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살리실 거라는 논리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인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런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호하고 구해주실 거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짓을 할 때
그런 짓을 하도록 보호하거나 구해주지 않으실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호하고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지요.
문제는 그 악이 어떤 악인가 그것입니다.
그 악이 우리가 싫어하는 그런 악인가,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그런 악인가?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싫어하는 그런 악들, 예를 들어,
병이나 실패 같은 것들로 우리를 오히려 시험하시고 단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선 그런 악에서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으시고,
어떤 때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주시어 우리를 진짜 악에서 보호하십니다.
진짜 악.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짜 보호받아야 할 것은 진짜 악들로부터입니다.
진짜 악은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인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가지 못하게 하고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에서의 시련은 우리를 세상에서 떠나
오히려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가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사람들이 악한 의도로 주는
시련과 악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악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가지 않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
그런데 오늘 지혜서를 묵상하면서 제게 더 강렬하게 다가온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To us he is the censure of our thoughts; merely to see him is a hardship for us.”
하느님의 아들이 악인들에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된다고 하는데
내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람들은 힘이 되는가? 짐이 되는가?
이 점을 묵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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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제로 만 25년을 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성소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미 신부가 되었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기 성소가 아니라며 사제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관심 있게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는 본인의 말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완성된 성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완성되지 않았으니 자기 성소가 아직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완성되기 전에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성소’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늘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이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로만 가려고 할 때, 진정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낄 수가 없으며 그 길로 제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주님의 진정한 협조자도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을 드러내고 당신을 세상에 높여 세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자기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는 성소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그 안에서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또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면서 걷어차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 안에서만 자기 성소가 완성되어 갑니다. 기도하며 또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의 성소를 성숙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성소를 확실하게 지켜 나가셨습니다. 즉,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철저하게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최고 의회 의원들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시지만, 최고 의회 의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분을 잡으려고 하지만 손도 대지 못합니다. 성경은 아직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두려웠고 자기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시선은 하느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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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감사는 좋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느낄수록 분노와 불안, 시기심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덜 느낀다. 감사하면 행복해지는 것은 분명하다(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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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
오늘 <복음>은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
사람들은 우왕좌왕 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요한 7,28)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적이고 그들 삶의 중심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여기서 ‘큰 소리로 말하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희년선포 때처럼 성령의 힘으로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요한 3,7-8)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새로운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새로 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고, 당신이 흘러들게 하소서.
영에 따라 흘러가게 하소서.
빠스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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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편견과 선입견에 갇히지 마라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우리를 나무라고 탓하는 자, 그를 모욕으로 시험해 보자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당히 당신이 누구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서 왔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며 아무도 그의 출처를 몰라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알면 힘이요, 능력이지만 어설프게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해박한 지식도 따뜻한 가슴이 없으면 자칫 교만에 빠지고 자기 안에 갇혀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문이 가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확고히 믿게 됩니다. 존 포엘신부는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의심이 해소된 후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인 확인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이 있어서 따르기보다 먼저 따름으로써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비록 저의 믿음이 부족하오나 당신을 주님으로 믿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촌뜨기가 말하여도 그 말이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습니다.”
‘개천에서 용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어디에서 났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지식으로 사느냐가 믿음의 사람을 결정합니다. 요즘 세상은 ‘얼짱’, ‘몸짱’을 선호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겸손하며 이해심 많은 ‘맘짱’에는 관심이 부족합니다. 용모나 신장의 선입견에 갇혀 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학연, 지연, 혈연, 출신성분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 신앙인의 가야 할 길입니다.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교 교수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의 벽을 넘어 ‘내가 만든 예수님 상’을 바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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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알다’라는 말을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첫째, 아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2000년 넘게 이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존감을 무너트리는 것들 중에는 ‘기억 상실증’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커다란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발전으로 우리는 기억력에 의지하기 보다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기억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보거나, 기억으로 길을 찾았는데 요즘은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길을 찾습니다. 자꾸 사용하고, 만나고, 생각하면 기억도 업그레이드됩니다.
둘째, 아는 것은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맥가이버,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작품은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들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저는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편인데 문제 해결 능력은 좋지 않습니다. ‘길치, 기계치, 디지털 문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쉽게 조립하는 의자도 1시간 넘게 고민하면서 겨우 조립하였습니다. 그것도 엉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을 바로 문제 해결의 능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해결사’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마귀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만, 탐욕, 분노, 시기, 식탐, 나태, 색욕’의 마귀들이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소경, 듣지 못하는 사람, 열병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은 본인이나, 조상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고, 절망 중에 있는 이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파타(열려라)’입니다.
셋째, 아는 것은 ‘믿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성과 이성은 무한하신 하느님을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칼은 요리사가 사용하면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강도가 칼을 사용하면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에 살던 분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고, 삶을 윤택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아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인종차별을 하였고,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잘 안다는 율법학자와 대사제 그리고 바리사이들에 의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는 것을 믿음으로 승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미가 비록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하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믿음과 사랑으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끝까지 믿어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현재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기억을 넘어, 문제 해결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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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혹시, 카나 혼인 잔치의 기적. 기억나실까요?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어머니이신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말을 우리는 만납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여기서 말하는 ‘때’를 정하는 분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시작의 부분에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수난을 시작하는 순간도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의 뜻, 허락 없이는 그 어떤 시작도, 수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분노를 관통하여 지나가십니다.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때가 찼을 때 주님께서는 기도하러 산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그 유명한 기도를 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과 그분이 정하신 ‘때’에 의해 이루어짐을 우리 주님께서는 몸소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도 역시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조용히, 주님의 마음으로 아버지께 머무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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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에 대한 정의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한 하나의 정의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산다는 것은
관계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 맺는다는 것은
상처를 감내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처 없는 관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고받을 상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고받은 상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내 모습을 나에게 보여 줍니다.
이런 모습은 조금 더 매끄러운 관계를 위한 안내자가 되어줍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내 모습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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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자기 인식
-하느님 탐구, 참나의 탐구-
하루하루가 참 좋은 선물입니다. 기도하라, 회개하라, 사랑하라 주어지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3월 성요셉성월에 3월31일 부활대축일을 앞둔 지금의 사순시기는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참으로 하루하루 선물에 감사하며 힘껏 살아야 할 참 소중한 때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어 성지입니다. 성인은 수도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고 성인이 있는 곳 어디나 성지입니다. 하느님이 계신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그러니 어디에나 하느님이 계신 성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을 만나야 할 꽃자리 성지입니다. 어제 어느 형제님의 묵상글을 보면서 감동했고 다시 배웠습니다. 일부 인용합니다.
“요즘 아버지께서 성서 40주간에 참여하십니다. 연세가 89세이신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침 5시에 일어나셔서 묵주기도와 작은 성무일도를 바치시고, 평화방송에서 하는 미사에 참례를 하십니다. 그리고 저녁에도 성무일도를 바치시는 아버지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영원한 현역의 형제입니다. 이런 분들이 평범한 일상의 성인입니다. 믿음생활에는 제대가 없고 졸업이 없습니다. 죽어야 제대이고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전사이자 학생입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전사이자 죽을때까지 공부해야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89세 고령에도 성서공부에 열중하시니 참 놀라운 주님의 평생학인입니다. 이렇게 보고 배울 노령의 아버지를 둔 형제님은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싸움입니까? 무지와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참나로 살기위한 영적전쟁입니다. 무슨 공부입니까? 참나를 알기위한 공부입니다. 참나를 알기위한 평생전투요 참나를 알기위한 평생공부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이라 했습니다. 주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 탐구와 참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이자 이런 이들이 의인이요 현인입니다.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악인이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제 신원을 새로이 확인할 때 마다 읽어보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고백 기도중 한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교회에 몸담고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삼중신원입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되겠습니다. 참으로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참 자기인식도 참나의 삼중 신원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면서 가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의인과 악인의 대조가 뚜렷합니다.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이들이 의인이요, 주님도 참나도 모르는 무지한 이들이 악인입니다. 의인을 시험하는 무지한 악인들의 모습을 지혜서는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무지의 악에 눈먼 이들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에 대한 처방은 단 하나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을 알고 참나를 알아가는 삶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서서히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도 무지의 악인들에 포위되어 있는 의인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오늘 지혜서의 반복같습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영원히 지속될 무지의 악과의 전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자기가 누구인지 압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참나의 신원을 확인하는 의인이자 현인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알아야 참나의 신원을 알게 되고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이 또한 우리의 평생과정입니다. 무지의 치유,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날마다의 미사전례보다 평생교육에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 “더불어,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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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제대로 떳떳하게>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요한 7,26)
굳건하게
믿는 겁니다
박해의 칼날이
감히 자를 수 없도록
끝까지
희망하는 겁니다
패배의 유혹이
감히 덮을 수 없도록
뜨겁게
사랑하는 겁니다
탐욕의 손길이
감히 닿을 수 없도록
힘차게
나아가는 겁니다
무기력의 벽이
감히 막을 수 없도록
오롯이
함께하는 겁니다
홀로의 단맛이
감히 스밀 수 없도록
당당하게
외치는 겁니다
침묵의 살길이
감히 노릴 수 없도록
깨끗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감히 더럽힐 수 없도록
아름답게
죽어가는 겁니다
삶의 비루함이
감히 넘볼 수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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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요한 7,2.10)
이집트로 피신하심은 남몰래 축제에 가신 사건의 예시
약속의 땅, 곧 영원한 나라에 아직 이르지 못했으므로 현세에서 우리는 천막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초막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도록 운명 지어진 이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낯선 이임을 아는 사람은 말하자면 초막에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본향을 그리워하며 한숨짓는 자신을 볼 때면 자기가 낯선 땅을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초막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초막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분께서 눈에 띄지 않게 처신하시어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직은 그림자가 빛을 가리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빛이 오자 그림자가 사라졌습니다.
그때엔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지 않게 계셨습니다. 초막절에 오시긴 했지만 감추어져 계셨습니다. 지금은 이 일들이 이미 다 알려져 있고, 현세에서 우리는 우리가 광야를 가고 있음을 압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광야에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왜 그러한가? “존재는 하느님이 만물에게 말을 거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하느님의 말씀, 창조의 말, 하느님이 깃들어 있는 우리 내면의 말이다. 존재는 창조를 위한 창조주의 말이다. 왜냐하면 “창조는 존재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공동으로 지니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다. 모든 존재는 만유내재신론의 수영장에 푹 잠겨 있다. 모든 존재는 하느님 안에서 헤엄을 치고, 하느님은 그들을 바다처럼 에워싼다. 존재는 하느님의 활동 무대다. 우리의 삶이 존재로 에워싸이는 만큼,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연결된다. 우리의 의식과 생활 방식을 발전시켜 존재와 하느님과 우리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아무리 우리의 삶이 하찮을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존재로서 굳게 붙잡는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삶에 도달했던 그 어떤 것보다 더 고귀해질 것이다. 존재는 하느님과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엑가르트는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자신을 지키는 것, 녹아서 밖으로 흘러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실로, 존재는 안으로 녹아듭니다. " 존재는 안으로 녹아들어, 우리가 흘러 나온 근원, 곧 하느님 안으로 데려간다. 존재는 하느님 안에 있는 생명이다. 이런 이유에서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싶다: 한 송이의 꽃도 하느님 안에서 존재를 얻는다. 이것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하찮은 미물이 온 세계보다 고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찮은 미물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천사를 아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다.(136)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새로 세례받은 사람들의 모범인 바오로
그가 이전에 행한 모든 것은 그렇게 해야 계명을 열심히 지키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그는 오직 불안과 혼란에 빠져 들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주신 하느님께서 직접 그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 있고 자신도 모르게 몰락될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을 때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참된 진리의 빛을 받자마자 오류를 벗어던지고 진리의 사자가 되어 온 세상에 나가 전했습니다. 그가 참된 신심으로 처음 인도해야 할 사람들은 대사제가 그에게 써준 편지의 수취인들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유다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대사제와 온 의회가 증명해줄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들로부터 다마스쿠스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떠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신도들까지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벌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사도 22,5).
여러분은 바오로가 사자와 같이 포효하며 미쳐 광란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변화되어 양과같이 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모두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박해하며 고통을 준 사람이 갑자기 그리스도 때무에 유다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바구니에 담겨져 성 밖으로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노하고 있던 유다인들로부터 살해되지 않기 위해 안개 낀 밤에 체사레아로 걸어갔고, 거기서 다시 타르수스로 갔습니다.(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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