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자화상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6, 46×38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느껴질 때면 고흐의 자화상을 보라는 말이 있다. 고흐가 그린 자화상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고통'이 아닐까? 실제로 고흐는 서른일곱의 나이로 권총 자살을 하기 전에 "고통은 영원하다"(La tristesse durera toujours)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삶이란 본래 고통의 연속인 것일까?
고흐는 렘브란트 다음으로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다. 그는 짧은 생애동안 40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죽기 얼마 전인 1885~1889년 사이에 그린 것이다. 당시 처음으로 파리에 도착한 고흐는 열정과 흥분과 무모한 행동으로 이어졌고 조급한 성격과 직설적인 언사로 늘 사람들과 떨어져서 외톨이로 지냈다.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은 1886년 봄에 그린 것이다. 이때 고흐는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처음으로 파리에 도착했다. 이 그림은 그의 초기 작품으로 조형에 비교적 짜임새가 있다. 화가는 두상을 화면 왼쪽에 치우쳐서 배치했고 삐딱하게 문 파이프는 화면 오른쪽의 공백과 힘의 균형을 이룬다. 이 그림은 고흐가 그린 자화상 가운데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고흐는 불과 서른세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림 속 남자는 중년을 훌쩍 넘겨 보인다. 파이프와 덥수룩한 수염이 그를 훨씬 나이 들어 보이게 한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7, 34×26.7cm, 미국 디트로이트 예술연구소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은 강렬한 색채 대비와 거칠고 역동적인 붓놀림을 통해 고흐의 혼란스런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마치 안질에 걸린 것처럼 왼쪽 눈 부위가 붉게 충혈 돼 있고, 귀도 피가 맺힌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밀짚모자는 1888년에 그린 〈씨 뿌리는 사람〉의 하늘 배경에서처럼 노란색으로 짙게 덧칠했다. 고흐는 노란색을 매우 강하게 사용한 화가로도 유명하다. 〈해바라기〉나 〈까마귀가 나는 밀밭〉 같은 작품에서 노란색의 미학을 한껏 느낄 수 있다.
〈귀를 자른 후의 자화상〉은 고흐가 아를에서 처음으로 정신분열을 일으켰던 1888년에 그린 작품이다. '고흐=고통'의 등식을 성립시킨 유명한 그림이기도 하다. 당시 그는 아를에 예술가 마을을 만들 생각으로 친구 고갱을 초대했다. 그해 10월 고갱이 아를로 찾아왔지만 두 사람 사이에 심한 말다툼이 오갔다. 그때 정신발작 증상이 나타난 고흐는 면도칼로 고갱을 위협하더니 결국 자신의 오른쪽 귀를 잘랐다.
〈귀를 자른 후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8, 60×49cm, 영국 런던 코톨드 인스티튜트 갤러리
그림에서 보듯 오른쪽 귀를 잃은 고흐는 붕대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 그의 얼굴 표정은 싸늘히 굳었고 침울한 눈빛은 그림 밖의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작품의 색채 대비는 이전 작품에 비해 강렬하지 않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며 풍부한 색채감을 보여준다.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인 1889년에 그린 〈자화상〉은 그의 피폐하고 암울한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 두 점의 〈자화상〉은 푸른색과 초록색으로 배경 색깔을 완전히 달리 하고 있지만 채색 방식은 비슷하다. 두 작품 모두 전체적으로 물감이 매우 두껍게 칠해져 있다. 고흐는 때때로 튜브에서 물감을 짜서 그대로 캔버스에 칠했다. 이렇게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화법을 임파스토(impasto)라고 하는데, 로코코 양식과 17세기 벨라스케스의 화법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아래 첫번째 〈자화상〉의 배경은 붓으로 물결무늬를 빽빽하게 만들었고 화가의 적갈색 머리는 그림의 주조를 이루는 파란색과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화가의 얼굴에는 강한 집착과 병적인 불안함이 엿보인다. 아래 두번째 〈자화상〉은 고흐가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린 것이다. 주조를 이루는 녹색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림 속 화가는 고개를 숙인 채로 시선을 옆으로 두고 있는데, 눈빛은 온통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다.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9, 65×54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9, 51×45cm,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
당신에게 노란색을 권한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던 것과는 달리 고흐는 이십 대가 훨씬 지나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마흔도 안 되어 일찍 세상을 떴으니 실제로 그가 그림에 몰두한 시간은 아주 짧았다. 더욱이 고흐가 남긴 그림 중 걸작으로 꼽히는 것은 대부분 그가 죽기 2, 3년 전에 완성한 것이다.
고흐는 모두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유화가 약 900여 점이고 드로잉과 스케치가 1100여 점에 이른다. 지금이야 이 작품들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천문학적인 가치가 되었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아를의 뜨거운 태양은 고흐에게 "색이란 바로 이렇게 강렬하게 빛나는 것"이라는 진리를 일깨워 주었다. 그동안 쉽게 다루지 못했던 노란색이 아를에서의 고흐를 온통 사로잡았다. 그는 일명 '노란집'이라 불리는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림 작업에 들어갔다. 고흐의 간절한 희망에 따라 친구 고갱이 아를의 노란집을 찾았을 때 작업실에는 온통 고흐가 그린 노란색 그림투성이 였다. 수많은 그림들 가운데 유독 고갱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품이 바로 〈해바라기〉였다. 아를의 강렬한 태양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식물이기도 한 해바라기를 그린 고흐는 고갱에게 이 작품을 헌사 했다. 마치 노란색이 캔버스 밖으로 폭발해 버릴 것처럼 눈부신 〈해바라기〉를 보면서 고갱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채, 1888, 91×72cm, 독일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미술관
고흐는 파리를 돌며 화가로서 견문을 넓혀나갔지만 어딜 가든 그는 늘 가난에 찌든 보헤미안 예술가였다. 한 때 파리에서 파사로, 고갱 등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기도 했지만, 그는 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주변만 기웃거리는 아웃사이더에 지나지 않았다. 젊은 화가 고흐는 서서히 지쳐갔고, 이제 그에게 남은 거라곤 술과 매춘뿐이었다. 그는 항상 성병을 달고 살았다. 거리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그 사이에 사내아이가 태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고흐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888년에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간 고흐는 쉼 없이 작품을 쏟아내지만, 이때 처음 고흐에게서 정신분열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흐는 그 뒤로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병원을 들락거리는 정신병자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1890년 어느 날, 그의 손에는 붓 대신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고흐는 자신의 그림 속에서 슬픈 눈을 깜박이며 빛나는 별이 되었다.
나는 지금 아를의 강가에 앉아 하늘을 밝히는 별을 새고 있다네.
문단 소리 없이 빛나는 별들은 그 밝음 속에
문단 얼마나 아픈 절망과 고통을 감추고 있는 걸까.
문단 별들은 나를 향해 절망과 고통을 얘기한다네.
-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캔버스에 유채, 1888~1889, 72.5×92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섬머셋 모음의 달과 6펜스를 보면서 현실과 이상의 갈등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달과 6펜스는 고갱을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다. 고갱이 그림을 그리기위해 가정을 버리고 타이티섬으로 떠난 예술의 세계와 생활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림을 스트릭랜드가 보여주고 있다. 문명과 세속의 삶을 버리고 예술세계에서 도덕과 관습으로 헤메이는 인간의 이상적 갈등, 그것이 고갱의 삶인 것이다.
고갱이라는 천재예술가의 탄생은 주변 모두가 미학적이며, 예술의 극점에 이르기 위한 관념과 통념을 모두 무시하고 최악의 상황까지 가야 예술의 가치가 뛰어난다. 세속적인 명성을 갈망하는 감정은 예술이라는 높고 고매한 목표로 시작 됐을 것이다.
미술가들의 자화상은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인식하고 그 시대의 사회적인 시대에 자신의 삶의 변화를 언어를 대신하는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전적 기록이다.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고갱의 자화상도 다른 화가들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이 변화되어지는 삶의 행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가들과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한 시간을 벗어나기 위해 원시적인 타이티섬으로 떠나야만 했던 자신감 없는 모습에서부터, 당당한 자신의 모습과 우울증과 병마에 시달리는 자신의 모습까지, 스스로의 고독한 시간들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술가의 삶은 예술이라는 높고 이상적이고 평범하지 않은 목표로 시작 되어진다. (그림 1888년)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과 늦은 화가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괴감으로 현실과 갈등하는 고갱. 그에게는 어려울 때 함께 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좋은 것도 어느 한계가 있는 것. 개성이 강한 두 화가는 각자의 다른 예술세계로 의견이 분분하다.
서로를 이해한다고 해도 문명 속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너지는 자존감과 자괴감으로 끝내 귀를 자르는 고호와 타이티섬으로 떠나는 고갱은 예술가들의 현실적응도와 자신만의 고집스로움이 각자의 확실한 자리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고집스러움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만들지 못하면 쟁이가 아닌 듯 하다.
예술가의 길로 가는 현실은 그다지 녹녹하지 않으며 문명을 핑계 삼아 현실을 회피하려는 젊은 날의 초상이다. 문명에 대한 허우적거림과 친구와의 불화는 현실도피로 원시생활을 찾게 되고 원시적인 타이티섬을 얻은 고갱은 스스로 문명인에 대한 우월함으로 꾀나 거만스럽다. 이것은 문명을 버리지 못한 고갱의 원시생활에서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옆으로 그려진 날카로운 눈매는 매우 강하고 뚜렷하나 왠지 슬픔을 느끼게 한다. 굳게 다문 입은 강한 의지와 확실하고 야무진 신념으로 고집스러움 보여지며 무엇인지 불만족스러워 보인다. 빛에 의해 더욱 입체적으로 각진 코는 솔직함과 단순함으로 빛의 대비를 만들고, 원시적인 강렬한 붉은색과 초록색의 대비가 평면적으로 공간감을 무시한 배경 속에 레미제라블이라고 쓰여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또한 빈센트는 왜 썼는지.
(1893년 자화상) 아마도 친구와 헤어진 슬픔과 그리움,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처럼 자신이 타이티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나 보다. 자신은 문명의 희생량, 아니면 스스로 장발장이 되어 타이티의 원시생활을 훔친 장발장이 되었는가? 세상이 자신을 믿지 않아도 자신에 대한 믿음. 스스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감성을 신념적이고 주관적으로 표현한 자화상이다. 타이티에서 귀국했을 때 모습이다. 친구와 헤어지고 문명세계에서 쫒기 듯 타이티섬으로 갈 때의 모습보다도 더욱더 자신감이 넘치고 날카로운 눈매로 그려져 있다. 고갱은 아마도 문명세계에서 얻지 못했던 자신만의 세계를 원시적인 타이티섬을 통해서 얻었나 보다. 한층 더 거만하고 오만하고 야심만만한 자화상이다.
고갱의 마지막 자화상이다. 매우 우울해 보이고 건강이 안좋아 보이는 모습이다. 젊었을 때 걸렸던 매독으로의 긴 병세와 사랑하는 딸 알린의 사망으로 고갱의 갈등과 시련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그림이다. (1902년 자화상)
그 야심만만한 고갱의 모습은 타이티섬에서의 여러 해의 여정으로 인해 초췌하고 초라하며, 신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병든 모습이다. 안경너머로 보이는 고갱의 눈은 사랑하는 딸 알린을 그리워하듯 먼 곳을 주시하고 여전히 굳게 다문입술은 오랜시간 고통을 참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