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대의 역사를 요약하면(복습)
스페인 제국의 몰락
1) 여기저기 전쟁을 치루느라(네델란드 독립전쟁 등) -- 국가 파산
2) 무적함대의 영국 침입—영국이 떠오른다는 뜻이다.
(영국 100명 전사에 스페인 4000명 전사 —화약을 사용하영)
3) 프랑스와 왕위 계승전쟁 —패배
영토도 뻿기고, 왕위도 부르봉 가에서(필리페 5세)
4) 종교 전쟁이 끝(베스트팔렌 조약 1648) -네델란드 독립
2. 네델란드 독립
1) 바다로 진출 – 일본 조선까지(하멜 표루기)
식민지 건설을 않고, 무역에만
2) 대도시 중심의 정치체계 형성
에라스무스와 데카르트 영향이 크다.
3. 영국이 바다로 진출하지 이해가 충돌하여 전쟁이 일어남
3. 영국
1)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해외무역으로 – 네델란드와 충돌
크롬웰이 죽자,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보복으로 시끄럽다.
의회파의 반격 등등등 역사적 사건을 겪고--> 명예혁명으로
4. 부르봉 왕가
1) 신-구 교간의 종교 전쟁을 치루었다.
2) 그 와중에 앙리4세 – 루이 13세 –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른다.
3)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을 펼치면서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진다.
*절대왕정
중세 유럽은 수많은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시 공동체, 장원 공동체, 교회 공동체, 대학 공동체 등이다. 이들 중 특히 독자적인 장원을 보유한 교회와 영주들이 중앙 국가권력에 대항해 왕권의 집중을 견제했던 것이 유럽 봉건제의 특징 중 하나이다.
왕은 넓으진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행정관료와 군대가 필요했다. 관료와 군대를 지탱하기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했고, 세금을 많이 거둘 수 있는 부장상인과 은행가를 가까이할 필요가 있었다.
도시 공동체는 주 수입원이 제조업과 상업이었고, 교회는 갈등을 빚고 있었다. 도시들은 상공업과 시장의 발달을 보장받기 위해 왕권과 결탁할 필요가 있었다. 왕권은 정책 수행(전쟁 수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에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 도시들과 결탁할 이유가 있었다.
최고 권력자인 왕이 도시의 상공업 경제력과 결합함으로써 영주의 농업 경제력에 기반한 군사력, 교회의 교회세에 기반한 사회기능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도시가 발달하고, 시민계급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왕권과 시민계급이 다른 공동체를 압도할 만큼 성장한 것이 바로 절대왕정이다.
그렇더라도 모든 시민이 동등한 권리를 기진 것은 아니엇다. 신분간의 차별(귀족 우대)도 있었다. 모든 시민이 참정권을 가지는 것도 아니었다.
전제군주정(Autocracy)의 군주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절대왕정의 군주는 전제군주와 달리 자의적으로 과세, 재산/토지 몰수, 제도 신설/개정 등을 할 수 없었고, 비록 막강한 권력을 보유했을지언정 그 행동은 교회법, 관습법, 도시 법률 등에 의해 제한받았다. 루이 16세가 세금을 더 걷기 우해 삼부회를 소집해야만 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절대왕정 때에 교황의 권위에서 각 국가들의 주권이 교황의 권위에서 벗어나기 시작함으로, 이것을 근대적 국가의 시작이라고 보는 연구자가 많다.
프랑스는 종교전쟁을 끝내고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절대왕정이 펼쳐졌다.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의 권력은 여기저기서 많은 전쟁을 수행한다. 프랑스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 시기에 문화의 중심지는 왕실이었다. 왕실에서는 귀족에게 예법을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모임을 만들었다.(앙리 4세가 시작하였다고 한다.) 귀족들도 스스로 귀족 모임을 만들었다. ‘살롱’이다.
살롱은 프랑스에서 계몽사상이 꽃을 피우는 요람이 되었다.
삼부회
삼부회는 원칙적으로 왕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다. 즉 국민의 지지가 필요해서. 교황과 갈등에서 지지를 받기 위해, 세금을 걷기 위해서 등등
프랑스 국왕의 필요만큼이나 삼부회의 각 구성원들 역시 삼부회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 했는데, 귀족과 성직자는 국왕의 요구에 동의하는 대신 자신들의 수입원이었던 농민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기회를 얻고자 하였고 도시대표자들은 자신들이 바치는 조세의 대가로 경제활동에 대한 특권을 얻고자 하였다.
삼부회(三部會)는 프랑스 세 신분(귀족, 가톨릭 고위 성직자, 평민)의 대표자가 모여 중요 의제에 관하여 토론하는 장으로써, 근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신분제 의회다. 1302년 4월 10일[1]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분쟁시 필요했던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파리의 가톨릭 성당인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시킨 것이[2] 삼부회의 시초가 되고 있다.[3] 1614년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후 175년이나 열리지 않았으며, 1789년 세금 징수 문제로 국왕 루이 16세에 의해 다시 소집되었다. 하지만 평민대표인 부르주아(제3신분)들이 머릿수에 따른 표결을 주장하면서 삼부회는 사실상 해산되고 말았다.
프랑스가 절대 군주제로 변화된 후 삼부회의 기능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으며 1614년 이후 1788년까지 개최되지 않았다.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북아메리카대륙에 미 합중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했기 때문에 재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국가경제 파산이 되자 루이 16세는 면세 특권을 누리던 귀족과 성직자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는 이러한 과세안에 반발하였고 루이 16세는 새로운 세금을 위해 삼부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삼부회는 봉건적 특권의 축소와 폐지를 요구하는 제3신분인 평민대표와 귀족, 성직자의 대립에 의해 붕괴되었고, 이로부터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