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던 날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수필창작반 황복숙
아버지,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함박눈 펑펑 내리던 날을 생각한다.
밤새
내리고도 아침까지 내려 쌓인 하얀 눈길을 혼자 걸어가던 모습이 떠오르고, 그날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나이가
많아지면 몸의 세포가 오무라지듯 눈물도 말라지는 줄 알았다.
세월에
녹은 그리움은 빛바랜 사진이 되고, 가슴속 아픔도 저절로 굳은살이 되는 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친정동네
성황당을 지나노라면 옛 생각에 여전히 눈물이 고이고, 오목가슴이 꽉 막혀 오는 가슴앓이를 한다.
아버지가
떠나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지 못한 것이 끝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젊고
헤어짐의 아픔을 겪어보지 않아서였다.
어려서
떠오르는
기억으로 아버지는 무서운 호랑이셨다.
집이
쩡쩡 울리도록 불호령이 떨어지면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이불을 개고 무릎을 꿇고 앉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었다.
식구
중 누구 하나 말대꾸 하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
말씀이 떨어지면 그대로 행동해야 했었다.
시골
큰 집에서는 할아버지,
큰아버지가
어른이셨는데 전주 우리집에서는 아버지가 어른이셨다.
친척들도
이웃들도 조심스럽게 어려워하였다.
그런
아버지를 어느 때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아버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내 유년은 추운 겨울로 남아있다.
아버지가
무섭기도 했지만 창피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경찰관이 아니고 농사짓는 농부로 살았더라면,
어머니와
어린 우리가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았으리라.
어느
해 여름이었다.
도둑질을
해 교도소에 다녀왔다는 아저씨는 매일 찾아와서 우리를 괴롭히고 협박했다.
아버지
없는 날만 알고 찾아와 안방이며 우리 방까지 신을 신은 채 들어와 밟고,
물건을
부수고 ‘내가 왜 2년이나
감옥살이를 혔는디?’ 껌을 씹고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으니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때의
일들이 잊혀 지지 않고 어제 일처럼 뚜렷하게 떠오른다.
상습적으로
도둑질을 했다는 이 아저씨는 동네의 닭,
개,
곡식을
훔쳐가고, 폭행을 하고,
특히
남편 없는 과부댁들을 괴롭혀 파출소에 신고가 들어와 수차례 타이르고 경고를 했다고 한다.
등치가
크고 인상이 무섭게 생겨 바라보기만 해도 사지가 벌벌 떨렸다.
아버지가
잡아 수갑을 채워 경찰서에 끌고가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2년형을
살고 출소해,
거의
매일 우리 집을 찾아와 협박과 갈취를 일삼았다.
마당의
꽃나무를 마구 뽑고,
쌀이
없다고 해서 쌀도 퍼 주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괴롭혔는데.
마당이
넓어 꽃이 사시사철 피어 있었고 탱자나무 울타리여서 대문이 없었다.
이
아저씨가 괴롭히자 탱자나무를 뽑아내고 벽돌담을 쌓고 쇠대문을 달았다.
대문이
없을 때였다.
여름이라
마루에서 식사를 하는 우리에게 ‘밥 맛있냐?’
하며 흙을 밥과 반찬에 넣고는 나뭇잎으로 얼굴을 훑어대면 어머니와 다섯 남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소리도 못하고 폭언이 멈출 때까지 듣고
있었다.
옆방에
세든 사람이 살았지만 그 사람도,
이웃도
무서워서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파출소에 가서 말을 해주어 아버지와 경찰관 몇 분이 달려오곤 했었다.
아버지를
만나면 태도가 바뀌어 ‘형님,
내가
형님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 왔지’ 라고
핑계를
대고는 슬슬 사라졌다.
대문이
없을 때에는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괴롭혔고,
대문이
있을 때는 대문을 발로 차고 초인종을 눌러 댔지만 점점 횟수가 줄었다.
지금
기억으로 고등학교 때 종적을 감추었던 것 같다.
찾아오지
않아도 조심했다.
길에서
만나면 어쩌나 끌고 가지나 않을까,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매일
술 마시고 폭력을 일삼았는데 술을 많이 마시어 술독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름
모를 병으로 떠났다고 한다.
지금도
아중호수 산책길을 걸을 때는 왜 생각이 나는 걸까?
아중산장
있는 마을 산 밑에 살았다는 무서운 그 아저씨.
밤새도록
눈이 내리고도 아침까지 내리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그날도 출근을 하셨다.
텅
빈 새벽거리에 눈 쌓이는 소리만 사박사박 들리고,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에 아버지 발자국만 쭉 이어졌다.
눈은
아버지가 쓰고 있는 털모자 위에도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눈이
쌓이고 눈끼리 부딪쳐 움직이며 땅위로 떨어졌다.
차곡차곡
쌓이는 눈에 온 세상이 새하얗게 빛났다.
아버지가
숨 쉴 때마다 내쉰 입김이 눈송이 따라 팔랑거리며 춤을 추고, 아버지는 그 눈길을 걸어 출근을 하셨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뒤를 돌아보며 ‘들어가라,
어이
들어가!’ 하며 발길 내딛던 아버지의 걸음은 살아가는 가장의 몸무게였다.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본 나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멈추려고
해도 자꾸만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느껴 보는 따뜻한 눈물이었다.
그날
녹은 것이 쌓인 눈만 녹은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