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9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주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아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 5:21).
그러하기에 우리는 육으로 주님을 알지 않고 영으로 아는 자 곧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셨습니다(5:15).
이렇게 사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임을 믿습니다(5:17).
하오나 육신으로 이 땅에 있는 한 언제나 넘어지고 자빠지는 연약한 질그릇이오니 그런 나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의지하여 살게 하소서.
넘어질지라도 아들을 힘입어 일어나 담대히 아버지 품으로 나아가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새 날을 주신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하루가 되게 하시고 정욕에 이끌려 다니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1:1-8
제목 :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5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하니
6 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7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 나의 묵상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다.
당시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2년 동안 다스렸다.
그는 왕궁에 있는 그의 침실의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다.
그래서 그가 믿고 섬기는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자를 보내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는지 물으라고 보냈다.
이 때 여호와의 천사가 선지자 엘리야에게 아하시야 왕의 사자를 만나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안 계셔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고 말하라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아하시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누워 있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길을 떠나 왕의 사자들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그러자 아하시야의 사자들이 곧바로 아하시야 왕에게로 돌아왔다.
아하시야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왜 이렇게 속히 돌아왔느냐?
이에 그들이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오더니 왕께 이렇게 전하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그가 전해준 말을 전하였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안 계셔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너는 지금 누워 있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아하시야는 너희에게 그 말을 전한 사람의 용모를 물었다.
그 사자들이 말하기를 그 사람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매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그 사람은 디셉 사람 엘리야라고 하였다.
아하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아합의 길과 어머니 이세벨의 길, 그리고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
그는 아버지 아합과 같이 바알을 섬겨 하나님을 노엽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며, 그의 아버지가 행한 온갖 악행을 다 저질렀다.
그런 아하시야가 침실이 있는 왕궁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났을 때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신인 바알세붑에게 자기가 살 수 있는지 물으라고 사자들을 보낸 것이다.
이처럼 이방신 바알세붑에게 묻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왕이 하나님을 떠나서 악행을 저지르는 것들이 이상한 것이지, 하나님을 떠난 자가 이방신에게 묻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이상한 일은 나에게서 일어나곤 하였다.
나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늑막염에 걸렸을 때라든지 폐암에 걸렸을 때라든지 하나님께 엎드려 여쭙기 전에 아무런 생각 없이 병원으로 달려간 것이다.
아플 때 병원으로 달려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것은 아무도 나무랄 이가 없다.
하지만 아프거나 중병에 걸렸을 때 적어도 목사라면 왜 그 아픔과 고통이 내게 왔는지는 하나님께 여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고통의 자리로 초청하셨다면 그 다음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자리를 무덤으로 알고 주님과 함께 성소를 짓되 거기서 깊은 사귐과 교제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맞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묻지 않았다.
아프니까, 그것도 중병이니까 그저 낫기만을 바라며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모습은 갸륵하나 하나님이 주신 그 상황을 알지 못하고 그저 문제와 상황 해결에 초집중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 아니라 이방신에게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어떠셨을까?
하나님은 중병이라는 고난을 통하여 무덤으로 초청하셨는데 나는 그 고난이 나에게 필요 없다고, 내 것이 아니라고, 나에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셔서 수술을 통하여 고쳐주셨고 회복도 시켜주셨다.
그러나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래 내가 고쳐주기는 하지만, 너는 아직 멀었구나.”라고 말이다.
누구나 고난을 좋아하고 환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주님이 필요해서 그 고난의 자리로 초청하신다면 우리는 그 자리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시는 새 사람으로 덧입어야 한다.
욥은 어느 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였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
심지어 그런 고난 곧 모든 재산을 한 순간에 다 날리고, 10명의 자녀들이 한꺼번에 다 죽는 참상을 겪었다.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원망과 하소연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였다.
(욥 1:21-23)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이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다는 것은 그가 당한 고난이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고통이었음을 말해준다.
누구라서 가진 재산을 잃는 것은 고사하고 자식을 다 잃은 후에 미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욥은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예배한 것이다.
이런 욥을 가리켜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믿음이 실로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며 그를 본받자고 아우성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그의 행동은 칭찬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그가 자녀들의 생일잔치 후에 하나님께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에게 있던 그 많은 재산과 명성을 잃어버릴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욥 3:25-26)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재앙)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그는 그동안 쌓아놓은 부와 명예를 결코 잃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마음을 노엽게 하지 않으므로 그의 부와 명성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순간에 그의 모든 부와 명성 그리고 자식들까지 다 잃어버렸다.
그런 그는 그에게 있던 믿음마저 다 날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욥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그토록 하나님을 잘 섬겼는데 왜 이런 고난과 재앙이 자신에게 임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있는 뿌리 깊은 자기 義 곧 자기주장의지를 교정하여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자기주장의지는 다름 아니라 아담이 지었던 죄인데 곧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악 중에 악이다.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셨기에 그런 모진 고난을 주셨다.
그 정도의 고난이 아니면 욥의 그런 죄악을 벗겨내실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신 주님이 하신 행동하심이다.
욥은 이 일은 통하여 죽기를 구하였지만 죽음도 그를 비켜나간다.
문제 해결을 위하여 온갖 시도를 해보지만 그 무엇도 그의 마음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고통만 가중될 뿐이다.
그 때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의 물줄기를 뿜어낸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기사를 쭉 말씀하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어디 있었느냐?
내가 바다를 지을 때 너는 그 바다의 샘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가 보았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이쯤 되었을 때 그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두 손으로 입을 가린다.
그리고 하나님의 한 말씀 곧 결정타로 인하여 그는 두 손을 다 들고 항복한다.
(욥 40: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느냐?
이에 욥은 이런 고백을 한다.
(욥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욥에게 주기 원하시는 복음 중에 복음 곧 장사복음이다.
장사복음은 죽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음과 3일간의 무덤을 통하여 새 사람으로 일으킴을 받는 것이다.
그 3일간의 기간은 주님이 정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이며 그 자리에서 먼저 오셔서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 성소를 짓고 깊은 영적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새 사람으로 일으키심을 받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바로 그런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바라신다.
그런데 나는 이전까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저 고난당하면 마땅히 그 고난은 해결되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얼마나 부르짖으며 기도했는지 모른다.
나만 아니라 아는 성도들에게 기도부탁까지 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그런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러나 “너는 아직 멀었구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신앙의 성숙은 저만치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고난이 오면 먼저 주님 안으로 들어간다.
나뿐 아니라 성도들이 힘들어질 때면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한다.
그 자리는 주님이 초청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요, 이방신에게 기도하는 자였나이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은 헤아리지 않고 이방인이 기도하는 것처럼 중언부언 하였으며, 나의 욕심을 위하여 얼마나 외쳐 부르짖고 간구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버리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크고 놀랍습니다.
주를 찬양하오니 경배를 받으옵소서.
주님이 초청하는 자리는 거부할 수 없나이다.
어떤 상황이든지 주님이 초청하시면 그 자리가 가장 안전한 자리요, 최고의 자리임을 믿나이다.
그곳을 통하여 나를 새롭게 하심도 믿나이다.
어리석어 그 은혜를 발로 차는 우를 범하지 말게 하소서.
하늘의 지혜로 이제는 주님을 더 깊이 아는 지혜를 주옵소서.
오직 성령으로만 말하게 하시고 듣게 하시며 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