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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IS IS TOTAL WAR 원문보기 글쓴이: [총통]kweassa
다시 읽어보다가 오타도, 오류도 엄청 많이 보이는데.. 다른데다 퍼가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당혹..
결국, 내용을 보강하고 오타 좀 잡아내기 위해 퇴고를 하게 됐심. 따라서, 이전 글은 지울테니까 이 글로 대체해주시길.
공산주의 160년을 설명하자니 엄청나게 길어질 글을 가능한한 최대한 짧게 요약을 하자면...
1. "공산주의 Communism"란?
맑스와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우며,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여러 사회주의 이론과의 차별성을 주장합니다. 결국 1848년, <공산당 선언>을 통해 그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것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바, 그것이 '공산주의'라고 오늘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즉,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용어-개념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모두 맑스가 최초로 정립한 것입니다.
[추가] 1-a. "공산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따라서, 일반적으로 오늘날 '공산주의'라고 한다면, 맑시주의 혹은 맑스-레닌주의를 지칭합니다. 좌익/좌파정치가 여전히 짓밟히고 있는 한국의 토양에서야 보기 드문 일이지만, 정치활동의 자유가 훨씬 너그러이 보장되어 있는 선진국들에서는 여러 종류의 좌파계열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계열들 사이에서는 맑스주의가 아닌 형태의 '사회주의'를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즉, 아주 넓은 견지에서 얘기할 때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곧 맑스주의적 '공산주의'를 얘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맑스주의자나 맑스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아닙니다.
2. "과학적 사회주의" ?
맑스와 엥겔스가 스스로의 이론에 '과학적' 이라는 수사를 붙인 이유는, 역사상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을 펼친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상 존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부분이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형태로 공산화의 필요성을 논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아주 간단히 요약을 한다면, "사람은 욕심이 많기 때문에 재산이 있으면 욕망으로 인해 죄를 짓는다. 그러니까 모든 재산을 공유해야 돼..."라는 식인데, 이것이 무의미한 관념론에 불과한 것이라고 맑스는 얘기합니다. 하지만, 자신과 엥겔스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관념론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제적인 수탈 위에 기반한 시스템인가를 밝힌 분석을 토대로 그것에 맞서기 위한 과학적 이론이라고 맑스는 얘기를 합니다.
[추가] 2-a. 유물론
맑스 스스로도 본래는 철학의 대가로 출발을 했습니다.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의 뒤를 잇는 철학도로 출발을 하여, 점차 세상의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면서 독일의 관념철학이 지닌 한계를 깨닫고는 유물론과 변증법을 통합하려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즉, 인간의 행위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인간본성" 따위의 허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며, 어느 누구도 인간 본성이 무엇인가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맑스는 깨닫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어떠어떠하다.. 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모든 철학적 전제는, 결국 현실에 순응하거나 기정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현실의 억압을 정당화 시킨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은 원래 이익을 추구하는 법이다.." 라는 식의 일반론적인 (동시에 허구적인) 전제는 자본주의를 합리화하는 시도에서 발명된 것에 불과하며,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면모를 보이는 동시에 본능과 탐욕에 대한 자제와 절제를 보이며 사회의 공동이익을 위해 노력하려는 모습 또한 보이는, 복잡하고 상반된 성향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에 맑스는 주목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지닌 성향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어떠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본성'의 작용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어떠한 것이 더 주도적으로 발휘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 맑스의 주장이며, 이것이 바로 "유물론"의 실체입니다. 즉, 세간에서 유물론이 물질만능주의라는 둥, 인간의 본성이 물질에만 얽매야 있다는 황폐한 주장이라는 둥, 이런 소리는 한 마디로 무지몽매한 자들의 악의적인 모함과 왜곡일 뿐입니다.
3. 맑스가 얘기한 것
즉, 기본적으로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실제로 혁명을 요구하기는 하지만) 혁명을 위한 이론이기 보다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적 비판입니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붕괴 이후에 구체적으로 어떤 시스템에 따라 세상이 돌아가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오로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분석하고, 해체하고, 그것이 어떻게 자본가-노동자와 같은 계급을 만들어내는지, 어떠한 방식으로 경제적/사회적/물질적/정신적으로 노동계급을 자본계급에 예속시키는지, 어느 지점에서 착취와 억압이 발생하는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추가] 3-a. "계급"이라는 것
맑스의 이론이 등장한 이래, 대체로 오늘날에도 많은 정치경제학, 사회학 계통에서 전면적으로 사회적 '계급'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득권자들의 주장은, 학문적인 견지에서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사회계급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계급의 분화, 계급간 차별, 계급간 착취관계 등 모든 것이 다 오늘날 사회에서도 실존합니다. 당연히, 기득권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지요. 온 세계에서 다 "working class"의 존재를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노동자', '노동계급'이라는 개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대중매체에서 "근로자"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실제로 보수정권들의 필요에 따라 정책적인 검열을 통해 자리잡은 어휘입니다.
물론, 19세기 중후반의 상황과 20세기 이후의 상황은 분명히 다르고, '계급'이 단순히 노동자-자본가라는 일괄적인 스테레오 타입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오늘날에는 인정합니다. 커다란 '계급'이라는 테두리 내에 수 많은 다른 성향을 지닌 다양한, 서로 다른 이해집단이 공존하면서 이들의 사안별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때로는 여러가지 색깔로, 때로는 명백한 흑-백으로 복잡하고 다난하게 그 계급적성향을 드러냈다 숨겼다 합니다.
바로 그 점에 주목한 현대 맑스주의 또한 연구의 성과를 꽃피며 화려한 거물급 지식인들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람시, 알튀세, 루카치 등등.. 맑스주의는 이러한 천재적인 학자들을 통하여 오늘날 현대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제정 러시아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은 당시 모든 러시아인들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모두들 달랐지요.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이후 본격적으로 혁명주의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러시아의 계급 중에서 가장 다수인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본 무정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혁명을 위해 농민을 계몽하고 조직하는 운동에 매진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브나로드' 운동입니다.
하지만.. 농민이란 묘한 것입니다. 고된 현실에 불만과 혁명의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생존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가족주의와 집단이기주의에 빠져들기도 하며, 의외로 보수적이고, 의외로 반동적인 성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들의 눈에는 '공산'의 목표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는 '토지'라는 사유재산에 대한 끝없는 집착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요.
어쨌든, 그런저런 이유로 브나로드 운동의 성과가 전혀 나오지 않자, 열받은 이들은 테러주의로 전향하게 됩니다. 농민을 예속하고 있는 쉣들을 그냥 다 죽여버리면, 농민들이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살 수 있을테네 말이죠. 따라서, 이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짜르와 대공들마저 암살해버리는 무시무시한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이들은 인구의 절대다수인 농민계급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은, 비록 그 수는 적어도, 앞으로 미래의 주역이 될 노동계급을 대표하고 있다는 강한 자부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사회주의를 이끌고 있단 러시아 사회민주당에는 러시아 최고의 두뇌집단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큰 이점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에 최초로 맑스주의를 번역하여 들여온 플레하노프, 제국주의 이론 및 혁명조직의 대가인 레닌, 고결한 정신으로 무장한 전투적 이론가이자 영구혁명론의 주창자인 트로츠키, 젊은 소장파 경제학자들 중에서도 걸물이며 경제이론으로는 당대 러시아 최고로 인정받은 부하린, 유약하고 감성적인 면이 있기는 해도 자칫 폭주할 수 있는 동료들을 제지하고 항상 안정과 화합을 불러온 화합의 대가 마르토프 등등.. 삼국지로 치면 조조 밑에 모인 모사진들 급수는 될 듯한 당대 최고의 행동적 지식인들의 러시아 사민당에 포진해있었고, 이들은 도시의 노동계급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또, 산업화로 한 창 나아가고 있던 러시아의 자본가들과 경제인들, 그리고 부유층 시민들은 입헌군주제나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꿈꾸며 자신의 대표자들을 만들어나고 있었지요.
결국, 일련의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지면서 1905년에 1차 혁명이 일어납니다. 이 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가 통과되고, 국가의회인 '두마'가 설치되면서 드디어 러시아에 선진적인 정당정치가 들어서는가.. 했더니만, 그 두마에서 최초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된 자본계급의 대표들이 심각한 레임덕 현상을 일으키는데다가, 황실은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부르봉 왕실이 종종 혁명세력에 똥침을 놓은 것처럼 떫은 표정으로 매사에 비협조적으로 나옵니다.
혁명의 여파로 전국이 불안불안한데, 이 상황에서 멍청하게스리 러시아는 제 1차 세계대전에 뛰어드는 바, 니콜라이 2세는 루이 16세의 작전: "외적을 맞이하는 전쟁을 일으키며 존내 맛깔나는 따귀를 민중에 후려갈기면, 애국주의와 근왕사상이 민중의 마음에 마구마구 돋아나 불쌍한 입헌군주가 다시 킹왕군주로 변하겠지?" 작전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니콜라이 2세는 불쌍하게도, 프랑스 혁명사를 끝까지 안읽어봤나 봅니다. 끝에 왕은 목이 달아나는데 말이죠... 우왕 ㅋ 사형 ㅋ
게다가 더욱 처참한 것은, 일단 두마 내에서 우위를 점한 부르주아 정당인 까데(Konstityutionnaya Demokratisheskaya Partya: 입헌민주당)도 똑같은 작전을 이름만 바꿔서 펼칩니다. "외적을 맞이하는 전쟁을 일으키며 존내 맛깔나는 따귀를 민중에 후려갈기면, 애국주의와 민주주의가 민중의 마음에마구마구 돋아나 불쌍한 레임덕 여당이 다시 힘쎈 여당이 되겠지?" 작전을 벌이지요. 입헌한나라... 가 아니라 ;;;;; 입헌민주당 또한 프랑스 혁명사를 끝까지 안읽어봤나 봅니다. 전쟁 일으켰다가 지롱드당이 어떤 꼴이 나는지 말이죠.... 우왕 ㅋ 좆망 ㅋ
이건 뭐, 전쟁에 나가서 좀 이겨줘야지 애국주의든 짜르에 대한 존경이든이 생기지.. 싸웠다하면 개박살나면서 장병들이 떼죽음을 당하는데, 국민 대부분이 농민인 나라에서, 그 떼죽음 당하는 군인들 모두 농민들 자식들이잖습니까. 결국, 그 전쟁에 알차게 반대했던 사회 민주당만 국민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결국, 제 1차 세계대전의 수렁에 빠져든 러시아에서는, 전쟁이 끝나기 1년 전, 1917년 2월에 두 번 쨰 혁명이 일어나는 바, 이것이 2월 혁명입니다. 인망이 높던 자유주의자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섰는데... 문제는 2월 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가장 큰 공로자들은 도시 노동자들이었고 (더구나,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굶주림을 호소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나온 여성노동자들입니다), 그 노동자들을 좀 자근자근 밟아주라고 보낸 군인들이 명령을 위반하고 민중에 합세한 것에서 2월 혁명이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자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자유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어쩔 줄 모르고 어버버 하고 있었고, 위험인물로 간주받아 추방당한 레닌은 이 사태에 대한 소식을 듣고 즉각 혁명가들이 합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캐무시만 당하고 있었고.. 결국 민중은 그 잘났다는 정치가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제정을 뒤엎어버렸던게죠.
결국, 이 때문에 '이중권력체제'라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지방의 농민들에게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부터는 중앙의 얘기가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잇었고, 자신의 막강한 힘을 깨달은 도시지역의 시민들은 임시정부를 따르지 않고 고양된 상태에서 스스로의 의사결정 기구를 만드는 바, 이것이 바로 "소비에트(평의회)"입니다. 결국, 2월 혁명 덕에 정통성을 얻은 임시정부는 아무런 힘이 없었고, 소비에트는 일단 혁명의 성공으로 기분이 좋아진 채 고분고분 임시정부를 따르겠다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모두 갖고 있으면서도) 일선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있었으니 권력의 공백상황이 발생해버린거죠. 케렌스키 정부는 뭔가 해보려고 해도 힘이 전혀 없었고, 그 힘을 지닌 소비에트들은 가만~히 물러나 있었으니까요. 이 상황에서, 추방상태를 깨고 벗어나 러시아로 4월에 몰래 돌아온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세웁니다. 당시 모든 세력의 모든 일파의 모든 정치가들이 허수아비 임시정부를 존중해야 한다는 망상삽질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권력은 이미 시민들의 소비에트에 넘어갔으며, 그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주도하는 쪽이 혁명의 향방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직시한 세력은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들 뿐이었습니다.
이런 형국에서, 꼬르닐로프라는 돌아이 장군이 쿠데타를 기도했는데, 여기에 지레 겁먹은 임시정부가 아무 것도 못하고 있을 때 볼셰비키들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민병들의 적극적인 저항으로 인해 반란은 진압됩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임시정부의 권위를 무너뜨렸고, 소비에트는 볼셰비키들에 완전한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으며, 결국 11월 7일 (당시 러시아 달력으로는 10월), 볼셰비키들은 봉기를 일으킵니다.
실제로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은 별로 많지는 않았는데, 기차역, 전신소, 동궁 등 주요 요소 몇 군데 장악하니 알아서 러시아 전체가 빠떼루 자세를 취해준,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끝나버린 봉기였습니다.
8. 혁명 이후 - 내전의 발발과 공산주의의 변질
1917년 11월 7일의 혁명으로 볼셰비키들은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국가는 "소비에트 연방" - 즉, 소련.
그리고 드디어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칠까.. 했더니..
혁명 전에는 두마에서 레임덕이던 놈들이 권력을 뺐기고 나니까 광분모드가 됩니다. 각종 정책에 대한 태업과 반항이 장난이 아니게 일어나고, 특히, 농민계급을 대표하던 사회혁명당은 볼셰비키들이 두마를 해산시키자 볼셰비키를 적으로 규정, 주특기인 테러전술을 발동하여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노립니다. (이 와중에 레닌에 대한 암살시도도 있어서, 레닌 또한 총알 몇 방 맞게 됩니다.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또, 도시에서의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장기적인 외상정책을 입안하게 되는데, 러시아 경제가 안정적인 공업발전을 통해 회복세에 돌아서면 농촌에서 무상으로 공급받은 곡물에 대한 대금을 현물로 지급하겠다는 정책이었습니다. 당연히, 농민들은 반발합니다. 특히, 당시 가장 중요한 도시인 러시아의 수도 상뜨 뻬쩨르부르크(성 피터스버그), 그리고 공업의 중심지인 모스크바에 가장 가까운 농업지역인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이러한 정책에 엄청나게 반발을 합니다. 더구나, 혁명으로 농민들이 바란 것은 지주들 땅 몽땅 쪼개서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것이었는데, 정부에서는 공산화 정책에 따라 농장을 집단화하고자 하니 농민들은 사보타쥬에 들어가지요. 이 때 부터 소련 정부에게 농민들은 단단히 밉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문제'가 본격적으로 비화되기 시작했구용.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1918년에 들어 내전이 발발했다는겁니다.
러시아에서의 혁명 소식을 들은 서구열강 미, 영, 프 등등에서 몽땅 원정군을 보내와 왕정복고파 반군인 "백군"과 함께 러시아 전역에서 깽판을 치고 다닙니다. 특히 '백색테러'의 공포는 어마어마해서, 소련정부에 협력한 촌락이 무차별로 초토화가 됩니다. 결국 소련정부는 모든 여력을 신생국가의 생존에 쏟아야 했던 바, 국가의 생존을 위해 정보부서인 '체카' (KGB의 전신)가 설립되었고, 반혁명 분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모조리 색출해서 처형을 하는 공포전술이 등장했으며, 백색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적색테러가 발생하고, 짜르 일가는 살해되는 등등.. 차례차례 입안했던 선정의 기본이 될 정책들이 채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죽느냐 죽이느냐의 살벌한 세상 속에서 공산주의의 첫걸음을 질식해버립니다.
1921년까지 계속된 이 3년 동안의 내전에서 위태위태해 보였던 신생국가 소련은 열강들의 원정군과 반군을 모조리 토벌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각잡힌 조직을 만들어내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트로츠키는 붉은군대 "적군"의 최고수장으로서 맹활약을 했지요.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쌓아올렸던 산업기반은 완전히 붕괴됐습니다. 농지는 황폐화가 되고 농민은 흩어져버렸지요. 자본주의 열강들은 소련과의 관계를 끊었기 때문에 국제경제에서도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6.25 전쟁으로 경제기반이 박살난 상태에서 국제고립에 들어간 북한이 완전히 아작난 꼴을 본다면, 그 규모를 100 배 쯤 부풀리면 그것이 내전 직후 소련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혁명시절에 풀뿌리 레벨에서 시민들을 조직하고 이끌었던 유능한 운동가와 양심적인 혁명가들은 (지옥같은 내전에서 모조리 최전선에 나가 병사를 이끌었으니... =_=;) 몽땅 죽어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황급히 동원된 것은 아직은 젊고 오만한 엘리트 지식인들이었고 - 이들이 바로 신흥 관료층이 되었으며, 훗날 "노멘클라투라", 혹은, "노동귀족"이라고 불리우게 될 시초가 되었습니다.
즉, "내전에서는 이겼지만, 공산주의는 그 와중에 사망했습니다"
[추가] 8-a. 초기의 소련은 무슨 체제였을까?
러시아 혁명은 일종의 도화선이 될 것이었기 때문에, 레닌과 볼셰비키들 또한 소련이 당장은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자~~~알 알고 있었습니다. 흔히, 냉전시대 프로파간다로 인해서 러시아 혁명을 '공산혁명'이라고 부르는 버릇이 오늘날까지 세간에 남아있는데, 사실 '러시아 혁명'은 한 번이 아닙니다. 앞서 얘기한 것 처럼 1905년에 최초의 혁명이 있었고, 1917년 2월에 두 번째 혁명이 있었으며, 1917년 10월에 마지막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이 3번의 연속적 혁명 전체의 과정이 '러시아 혁명'이며, 그 세 번의 혁명은 성격이 모두 다릅니다. 1905년의 혁명은 러시아 의회와 입헌군주제를 낳았고, 1917년 2월 혁명은 러시아에서 군주제를 끝내고 공화정을 수립했으며, 1917년 10월 혁명은 2월 혁명으로 탄생한 불안정한 체제를 종식시키고 신생국가 소련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세 번의 혁명 중 '공산혁명'은 없습니다. 즉, 10월 혁명의 성공 이후 레닌은,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의 건설을 향해 나아간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곰곰히 생각을 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지요. 즉, 볼셰비키 주도의 10월 혁명이 성공한 시점에서 러시아의 상황이 "아직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혁명에 성공하여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는데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향해 나아간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말이 안되걸랑요.
그렇다면, 10월 혁명 이후 탄생한 신생 소련의 중앙당은 그 최초의 정책들을 펴면서 스스로의 체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놀랍게도, 레닌과 집권 볼셰비키들은 스스로의 체제를 "국가독점 자본주의 state capitalism"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볼셰비키들 또한 그 시점에서도 '자본주의의 자연적 발전의 결과 최고조를 맞이한 자본주의 국가가 수립된 이후에야 사회주의가 도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9. 스탈린 체제의 등장, 그리고 "현실사회주의"
원래 레닌의 생각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세계혁명의 첫 테이프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예측 대로라면 러시아에서 발발한 혁명이 서쪽으로 전화되어야 했고, 특히 러시아와 가장 가까운 독일에서의 혁명이 일어나주면서 아직은 경제적으로 걸음마 단계인 소련이 당분간은 독일에 빌붙어 먹고 사는 것이 원래계획이었지요. 그런데, 독일에서 혁명을 시도했던 칼 립크네히트와 "붉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스파르타쿠스단은 진압되었고, 지도자들은 말 그대로 목이 날아갑니다. 그 일격으로 독일 내부의 좌파들 사이에서 혁명을 믿는 일파는 완전히 몰락했고, 점진적 개혁론자들이던 사회민주당이 완전한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이 때 부터 독일의 주요 정당으로서 공산당 대신 사민당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됩니다.
어쨌든, 기대했던 독일에서의 혁명을 불발로 끝났습니다. 더구나, 갓난 소련은 태어나자마자 참혹한 내전을 겪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거 존내 큰일났습니다.
"실패다. 소련 만든거 취소하자"....하면서 리와인드를 시킬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어디에선가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이 나타날 때 까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소련의 지상과제가되었습니다. 내전의 경험, 국제적 고립, 그리고 사회주의를 꿈꾸었던 모든 희망적 조건들이 절멸된 상황에서 이제 소련을 지배하는 키워드는 오로지 "생존"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엄청난 카리스마와 냉철한 두뇌의 소유자, 행동적 지식인이자 냉혹한 정치인, 치세의 능신이자 난세의... (엥?)... 어..어쨌든 혁명의 상징 그 자체였던 레닌이 내전 후 3년 뒤에 암살시도 후유증으로 사망합니다. 레닌은 죽기 전에, "지나친 권력이 서기장 스탈린에 집중되고 있으며, 스탈린은 너무 포악하여 여러사람을 이끄는 지도자로는 맞지 않기 때문에 여럿이 힘을 합쳐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마치 미래를 내다 본 듯한 유언을 남깁니다만.. 당연히 레닌 사후 이 유언은 스탈린의 손에 넘어가 고스란히 분자결합이 해제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벌어진 후계자 쟁탈전에서 레닌을 대신할 1순위로 꼽혔던 트로츠키가 패배하게 됩니다. 엄청난 두뇌의 소유자이자 내전시절 붉은 군대를 일으켰던 유능한 조직가.. 그러나, 잘난체가 심한데다가 성격이 지랄맞아서 인망이 전혀 없었던 트로츠키에게는 적이 많았으며, 거기에 착안한 스탈린은 이 때 부터 평생동안 유명해질 '통일전선전술'을 최초로 선보입니다.
[추가] <어린이를 위한 통일전선전술 개요>
1. 내 옆에 A, B, C가 있다.
2. A, B와 편먹고 C를 깐다
3. A와 편먹고 B도 깐다.
4. A만 남았으면 직접 깐다.
5. 내가 짱 먹는다
(*) 차례대로 계속 누군가를 까면서도, 지금 내 편인 놈이 "혹시 나도..."라는 의심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치력이 필요함
-끗-
당의 오래된 고참들과 유능한 풀뿌리 활동가들이 내전에서 전멸한 상황에서 새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모두 스탈린을 지지하는 관료엘리트들이었고, 내전 이후의 심각한 상황에 놓인 시민들 또한 트로츠키의 노선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스탈린은 결국, 최고권력을 확보하고, 이제는 트로츠키를 상대로 연합을 이루었던 지노비에프와 부하린 모두 숙청시켜버리고, 경제정책은 입장을 바꿔 트로츠키 일파가 주장한 노선으로 선회합니다.
이렇게 스탈린이 세운 체제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최종적 승리와 초강대국화로 이어져서 냉전시대를 개막하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개인숭배의 독재체제가 정착되었고, 독재와 국가안보를 통한 '생존논리'가 모든 국민의 권한보다 우선됨으로써 완성된 이 "스탈리니즘" 체제는 서쪽으로는 동독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중국과 북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산권 국가에 퍼져나가게 됩니다. 특히, 19세기 중엽에는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모색하던 단체였던 '인터내셔널'은 소련 주도의 '코민테른'으로 바뀌면서, 소련이 전방위로 둘러치게 되는 완충적 꼬붕국가들에 자신의 체제를 수출하기 위한 창구로 전락합니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자를 따라야 하고,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안보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러한 것을 국민이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세뇌조차 불사한다.... 는 우리에게 익숙한 전형적인 '공산국가'는, 이전의 수 많은 지식인들과 혁명가들이 꿈꿔왔던 모든 것을 짓밟으면서 '공산주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추가] 9-b. 스탈린 체제 이전의 소련
소련 초기의 정책구상은 다음과 같은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디:
"사회주의가 당장 도래할 수 없는 조건들 속에서도 일단 혁명을 일으켰으니, 세계혁명을 기다리는 동안에 "자연적인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통해 자본가 계급이 절대권력을 쥐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가 그것을 규제하며, 또한 국가는 계획적이고 정책적인로 주도를 통해 고도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이행한다 - 그리고, 그 후에야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10월 혁명 없이 2월 혁명의 체제가 살아남아서, 러시아 내에서 자본주의가 서구와 같은 코스를 걷게 된다면 (여느 자본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숱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도래시킬 것이고, 그 와중에 자본가 계급이 강성해지면서 국가와 사회의 모든 것을 장악할 것이며,무한한 착취와 이윤의 추구를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경제적 부는 쌓여가지만 또한 자본가들에게 독점되겠지요. 그런데, 이미 2월 혁명 이후에 모든 권력이 자본가들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농민계급에게 넘어와 있는 상황에서, 그 권력을 다시 자본가들에게 돌려주며 "너희가 우리 나라를 부강한 자본주의 국가로 만들어줘"라고 부탁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볼셰비키들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0월 혁명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스탈린체제의 도래 이전의 소련은, 자본가들이 아니라 국가가 계획을 통해 전략적으로 경제를 육성하면서 자본주의적 체제를 공고히 갖추게 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당장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 식량문제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에게서 곡물을 (일종의 세금 형태로) 징발하는 대신에 이후 도시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업에 필요한) 기계류나 (라디오나 전축 등) 생활자재로 되갚는 물물거래식 시스템을 임시로 도입하게 되었지요. 문제는, 임시로 시행되기로 예정된 그러한 시스템이 내전의 발발로 인해 "전시 공산주의 war communism"라는 비상체제의 필요성 아래 민간식량 및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시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했으니까요.
내전이 끝나고 도입된 "신경제정책 NEP"에 대해서는 들어보신 분들도 있을텐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전시공산주의"로 인해 집단화된 강압적 체제를 풀고, 어느 정도 민영화된 거래 및 기업형성을 허가하는 자본주의를 허가함으로써 공업 및 농업생산을 증대시키고자 한 정책입니다. 이것을 대부분 교과서 등지에서는 "혁명가들의 안일한 이상주의가 막장으로 치닫자 할 수 없이 레닌이 시행했다가, 좀 효과가 있어 보이니 열받아서 취소했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는데, 기실, NEP는 최초부터 구상되고 예정된 정책이었습니다. 즉, 당장의 식량문제를 풀기 위해서 앞서 얘기한 현물거래 시스템을 장려한 후에, 혁명을 경험한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에 이룩하면 규제를 풀고 국가의 철저한 감독과 주도 아래에 민영화된 기업을 허용하고, 자본주의적 공업/농업경제 발전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원래부터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전의 발발은 '생존을 위해 모든 수단을 발휘할 것'을 신생 정부에 강요하였고, 그 결과 1921년, 엄혹한 '전시공산주의' 비상체제 아래에 고생하던 일부 시민들과 군인들이 "크론슈타트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란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으나, 이 반란은 소련의 지도자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비상체제인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풀고 소련의 경제를 본궤도에 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듭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NEP 식의 자본주의적 정책에 회의를 품고, 보다 공산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옹호하던 레닌은 크론슈타트 반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고는 생각을 바꿔 NEP의 도입을 지지하게 됩니다. 특히, NEP는 농민들과의 갈등을 상당히 완화하고 소련에 대한 국민들의 충성을 확보하는데 효과적이었습니다.
[추가] 9-c. 스탈린: 국가독점 자본주의에서 "현실사회주의"로
NEP의 형태를 통해 '국가의 감독 아래 진행되는 건전한 자본주의'라는 정책을 처음부터 지지한 것은, 경제학의 거물 니콜라이 부하린이었습니다. 반면, 전투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혁명가들이었던 레닌과 트로츠키는 NEP의 도입에 반대를 했었으나, 바로 위에 말한 것처럼 레닌은 후일 생각을 바꾸어 NEP를 지지하게 되었고, 반면, 트로츠키는 (NEP의 성공과 소련 농업/공업 생산량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레닌 사후에 그 후계 권력투쟁에서 지노비에프, 부하린, 스탈린은 연합을 이루어 트로츠키를 실각시키는 바, 그 최초의 공격이 바로 NEP에 대한 입장에서부터 나옵니다. NEP는 명백하게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그것을 반대하던 트로츠키와, 트로츠키를 지지하던 "볼셰비키 좌파"의 입지는 좁아지게 되었지요. 반면, 지-부-스 연합이 이끌던 "볼셰비키 우파"는 당 내에서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볼셰비키 좌파는 주로 전투적 혁명가 출신들로 이상주의적이고, 완고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강경파로써 당원들이 목표를 잃지 않도록 이끄는 사람들이었으며, 볼셰비키 우파는 경제학자들, 행정관료들, 그리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로써 경제현실에 대해 보다 타협적인 생각을 갖고 좌파의 폭주를 막아주던 온건파에 속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트로츠키가 실각하여 망명하고 볼셰비키 좌파들 숙청당하자 스탈린은 님 좀 짱급 정치수완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지-부-스 연합 내에서 동지들의 뒤통수를 갈깁니다. 부하린과 지노비에프가 숙청당하고, 우리의 짱먹은 스본좌님은 이번에는, NEP를 지지하던 볼셰비키 우파들이 "공산주의의 이상을 버리고 자본주의적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자본가 계급과 결탁하여 혁명을 배신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 모조리 제거해버립니다.
이렇게, 자신의 옛 동지들이었던 볼셰비키 좌파도, 우파도 몰살시켜 놓은 후에, 그 빈 자리에 대신 임명되고 추천되어 스본좌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지닌 젊은 벼락출세 엘리트 관료들 위에서 스본좌님은 군림하게 되었고, 트로츠키가 있었을 때에는 존내 지지하던 NEP를 '타락한 자본계급의 음모'로 매도하면서 이번엔 존내까기 시작합니다. 결국, 1928년 NEP는 스본좌님의 주도로 폐지되었고, 소련은 다시 전시공산주의 체제 비슷한 강압적 집단화에 들어갔으며,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다시 개박살 나기 시작하고, 민간기업가들은 숙청으로 수용소로 가서 "arbeit macht frei"의 예행연습을 하고, 공업정책은 완전한 국가통제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로서 초기 소련의 정책구상자들이 "우리는 국가독점 자본주의다"라고 말한 체제는 붕괴되었습니다. 스본좌는 이 시점에서 "우리야 말로 [현실 사회주의]다"라는 얘기를 하셨고, "우리의 체제는 이미 공산주의에 도달했다"는, 정통 맑스주의 이론가들을 당황하게 만들 자신만만한 선언도 하시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현실 사회주의", "일국 사회주의", "진짜 공산주의" 체제를 스본좌께서 선언하심으로써 그 때 부터 이러한 소련식 체제를 우리는 "공산주의 체제"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10. 소련의 붕괴, 그리고 "현실사회주의"의 실험의 몰락
1992년, 내적으로 말라죽어가던 소련이 갑자기 붕괴했습니다.
1917년, 모든 세력이 무기력에 빠져 삽질만 하던 상황에서 단 한 번의 주도적 행동으로 알찬 실리를 볼셰비키들이 챙긴 것처럼, 그와 완전히 똑같은 일이 1992년에도 벌어졌습니다. 광장에서 탱크에 올라탄 주정뱅이 보리스 횽아가 연설을 하고 있을 때, 그 위기를 지켜보던 정치가들도, 관료들도, 군부도 모두 서로의 눈치만 보며 "어..? 어..?" 하고 있다가 순식간에 소련의 해체가 선언되어 버렸습니다. 맑스-레닌주의의 변질로부터 시작하여 스탈린체제에 도달한 '현실사회주의'의 긴 실험이 끝났고, 숱한 비극과 역사적 오점을 남기면서 말이죠.
[추가] 10-a. 소련 붕괴의 의의: 국제정치의 면에 있어서
소련의 붕괴는 아무도 예상치 모한 사건이었으며, 이후 '자유진영'에서는 그것을 '자유진영과 레이건 정권의 승리'로 자화자찬을 하게 되었지만, 정작 소련이 붕괴되던 당시에는 미국 정부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이 들어서게 되면서 '자유진영'은 "체제경쟁의 시대가 끝났고, 이후는 절대강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가 평화로운 21세기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찬 선언을 했습니다. (얼마 후, 소련이 무너진 이래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은 미국이 일으키게 되었으며, 중동에서 한 번, 발칸반도에서 한 번, 소말리아에서 한 번 깽판을 치다가 1945년 도에 몇 방 얻어맞았던 가미가제 공격을 몇 방 더 얻어맞고는 중동에서 한 번 더, 중앙아시아에서 한 번 생지랄을 떨게 됩니다. 1945년에서 1992년 까지 47년의 냉전 동안 벌어진 전쟁보다, 소련 망하고 이후 10년 이내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 더 많습니다..)
소련의 붕괴는 세계의 전략적 구도에서 미국의 유일한 경쟁자가 소멸함으로써 미국의 폭주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을 불러왔으며, 그와 동시에 역설적으로, 소련이 존재했을 때에는 미국에 기대어 굽신거리던 나라들이 소련이 사라지자 미국 말을 듣기 않기 시작하는, 미국 패권체제의 불안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점점 더 미국에 개기기 시작하고, 대처리즘 이후로 살짝 미쿡빠가 된 영국을 제외하고는 미국의 엉덩이에 와서 키스를 해주는 국가들의 숫자가 팍 줄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신세계질서 NWO'를 천명함으로써 여전히 미국의 조폭파워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무리수로 이어졌으며, '악마왕 소련이 망했으니 이젠 평화의 21세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 놈이, 21세기 들어서자마자 그 악마왕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블랙코메디를 불렀습니다. 찌끄래기 독재국가 하나를 누명씌워 개박살 난 후에, "죄는 입증 못했지만, 어쨌든 나쁜 놈이니까 패도 돼"라는 소리를 함으로써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었고요. (그 나라에 까는데 동원한 군사력을 보면 웃음이 싹 가시겠지만..)
[추가] 10-b. 소련 붕괴의 의의: 전세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련은 일종의 씁슬한 상징성을 지닌 국가였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소련이 많은 사람들이 꿈꿔오던 그런 이상적 공산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참혹한 일들이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 또한 누구나 알게 되었고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자본주의 체제만이 유일한 체제라는 주장을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중요성을 띄고 있었는데, 그것은 소련의 탄생이 19세기에 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맑스주의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혁명가들의 활동과 수많은 드라마틱한 시련을 견뎌내고 탄생한 (후일 엄청나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 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온 세계의 '좌파'가 소련을 지켜보는 눈은 '방탕한 형제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에 가까웠습니다. 패륜적이고 타락한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이며, 한 때 누구보다도 큰 기대를 받았던 맏아들이었고, 온갖 역경과 시련을 극복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찾아오는 불행으로 인해 알콜중독에 빠지고, 자포자기한 것처럼 막장으로 치닫는 그런 형제를 바라보는 눈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는 짓이 하도 막되먹어서 공적으로는 비난을 퍼부을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언젠가는 정신을 차리고 잘 해주기를 기대하던 그런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러던 녀석이 결국 젊은 나이에 망가진 몸으로 인해 세상을 떠버린, 그런 느낌입니다. 그 놈 때문에 고통을 받던 사람들은 속이 다 시원하다고 할테지만, 그래도 같은 핏줄인 형제들은 마음 속의 비애감으로 괴로워할테죠.
실제로, 그러한 것이 1992년 이후의 세계 '좌파'의 반응이었습니다. 소련의 붕괴는 전 세계에 자본주의자들의 승리의 함성을 울려퍼지게 했으며, 그러한 함성은 일거에 온 세계를 우경화 시켰습니다. 케인즈주의의 붕괴와 함께 70년대 부터 새로운 체제로 자리를 굳혀나가던 신자유주의는, 냉전체제경쟁에서의 승리를 자신의 공로로 삼으며 (실제로는, 노동계급의 안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자본주의의 내부적 모순을 해결해나가기 위해 노력했던 케인즈주의/수정자본주의야말로 소련과의 체제경쟁에서 '자유진영'에게 소련에 비해 실질적/도덕적 우위를 안겨준 장본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빼어난 자본주의가 세계자본주의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진보진영에 속하는 정치인, 철학자, 이론가, 등등은 쇼크에 빠져 세계적 규모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우경화에 대해 아무런 비판도, 반대도, 저지도 할 수 없었고 삽시간에 세계의 저울추는 오른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진보진영을 이탈하여 '전향'을 선언하는 이들도 줄줄이 뒤따랐습니다. 학문분야에서 맑스주의적 시각들은 폐기되었고, 이름에 '합리'라는 두 글자를 다는 변종 이론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학문적 분야에서 '합리'라는 이름이 들어간 이론은 =_=a 간단히 말하자면 자본주의 애널써킹 이론이라고 보면 됩니다)
사민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주장하던 앤소니 기든스 등 일부 날라리 좌파들 또한 몰락했습니다. 전 세계의 보수화와 함께 저울추는 우측으로 기울었고, 이미 신자유주의가 승리를 주장하는 때에 더 이상 누구도 '제 3의 길'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련이라는 '대안'의 죽음은 맑스주의의 정신 그 자체의 죽음으로 여겨졌고, 1992년 그 때 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그 동안 20세기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난장판을 계속하는 세계의 모습을 보며 이제서야 '좌파'들의 머리는 조금씩 다시 깨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11. 뮤턴트: 중국
오늘날 중국은 사실상 자본주의 국가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굳이 분류를 한다면, 앞서 얘기한 초기 소련 시스템의 국가독점 자본주의에 가깝습니다만, 보통 그런 형태에 기대하는 것보다 민영자본의 비중이 훨씬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즉, 중국에서의 '공산주의'라는 것은 사실상, 국가의 엘리트 관료계급에 해당하는 공산당의 정치적/경제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구색에 불과합니다.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로 전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적 민주화가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당과 관료계급의 우위는 자연히 상실되어 민간자본가 계급의 우위로 넘어갈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니까요.
이러한 현상은 등소평의 개혁정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등소평을 평가한다면, 정말로 명민한 사람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공식적으로 남은 기록이 없기에 추측을 할 수 밖에 없지만, 등소평은 소련이 말라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냉전체제의 경쟁에 있어서 공산권이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을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에서는 '공산권'의 패배를 내다보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추세였고, 공산권 내부에서도 그런 불안감이 늘어가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등소평의 명민함은 바로 그가 '공산주의'라는 팻말을 내리지 않고서도 충격을 최대한 완화하며 스리슬쩍 중국이 자본주의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하는 장기적인 플랜을 실현에 옮기기 시작했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세간의 주목만 많이 받았지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이 그저 떠들석하기만 했던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는 차원이 다른 원대한 계획입니다.
모택댕 생전의 시절에서부터 소련과 중공은 서로 미묘하게 다른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이것은 냉전체제 경쟁에 있어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평가를 높이는데 크게 일조했습니다. 미국의 직접적인 '주적'은 소련이었고, 그 소련과 뭔가 불화가 있다면 인구와 땅덩이에서 무시할 수 없는 동아시아의 거대국가인 중공에 미국은 거리낌없이 꼬리를 칠 수 있다는 것이 소위 '핑퐁외교'의 시대로 명백해졌으니까요.
그 결과, 소련이 계속해서 비쩍 말라가고 있으면서도 미국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 와중에 중공은 뒷전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개방화의 준비도와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고, 마침내 소련이 무너진 직후에 미국이 다음 '주적'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을 때 이미 세계의 자본은 중국에서 살살 보내오는 러브레터를 바도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붕괴 이후에 러시아 경제는 피라냐 떼처럼 몰려든 세계자본에 의해 완전이 잠식당했고, 내부적으로는 질서와 기강이 완전히 무너져 부패와 범죄가 만연한 상태에서 국제자본과 동맹을 맺고 새로이 흥기한 범죄적 자본가들과 대부호들에게 의해 장악당했으며, 그 러시아판 재벌들은 대러시아주의를 주장하는 깡패 아돌프 푸틀러가 이끄는 거의 극우적 여당 '통일러시아당'에 빌붙게 되는 바, 한국의 70년 대를 연상하게 되는 시절을 겪고 있습니다.
반면, 중국은 이미 옛날부터 자본주의로의 편입을 계획한 상태에서 오랜 시간의 준비를 거쳐 적당히 츤데레스럽게 콩사탕 앙탈을 부렸고, 그와 동시에 뒷전에서는 살포시 속살을 비추어주며 외국자본의 협력과 동맹을 유혹하되, 러시아처럼 그 과정에서 정신줄 놓는 일 없이 공산당이 적극적으로 그 협력관계를 관리하며, 국가의 혼란과 붕괴 없이 기존의 기득권 계급인 공산당 엘리트 관료계급들이 자연스럽게 자본가계급과 영합하거나, 그 스스로가 자본가게급이 되어가도록 세팅을 해놓았으니.. 이 밀고 당기는 밀월관계는 최고 난이도의 미연시의 공략캐릭터가 무색할 정도의 섬세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인 불안요소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중국공산당'을 '공화당'으로 치환시키고, 중국의 최고권력자들을 '박통'으로 치환시키면 당장 우리 눈에 좀 더 익숙한 형태가 되는데, 금날인즉슨 사실, 소련이 초기에 시도했던 '국가독점 자본주의'라는 것은 우리 나라도 70년 대에 시도를 했고, 중국도 지금 시행하고 있는 바로 그 체제라는 것입니다.
즉, 앞서 소련의 경우를 얘기하며 '국가독점 자본주의'에 대해 설명을 했을 때를 상기해본다면 알겠지만, 소련은 황폐화되고 낙후된 국가에서 공산주의로 나아갈 기반을 쌓아가기 위해, 우리 나라는 내전으로 황폐화된 땅에서 급속한 자본주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지금 중국은 당이 통제력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급속도로 국제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편입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과정 전반을 국가가 강철의 권력으로 철저하게 관리를 해나가며 전략적인 경제개발 및 발전을 주도해나가는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스탈린주의식 정치모델을 사용하는 소련과 중국이야 국가의 권력으로 국민을 채찍질하면 관리하기가 쉽겠지만, 처음부터 자유진영에서 민주국가를 표방해온 대한민국은 그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군바리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여 총칼로 찍어눌러 성공율을 높이도록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좀 있습니다만.. (바꿔 말하면, 한국의 군사정권이 한 일들은 본질적으로 경제체제의 면에서 보자면, 그렇게 신나게 싸질러 욕햇던 '공산당'과 별 차이가 없는 짓이었다는 소리가 됩니다만..)
그것은, 뒤집어 애기하자면 중국도 한국이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중후반까지, 그리고 90년대 말에 다시 겪은 그러한 종류의 위기를 동일하게 겪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얘기도 됩니다. 경제체제의 변화, 그리고 부의 증대는 그 국민으로 하여금 부의 증대를 늘리고 가속화하기 위해 더 많은 자유와 더 적은 규제를 요구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힘은 맑스도 주목한 것으로써,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그로 인한 환경적 변화는 억압받던 계급들에게 봉건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심어주는 바, 이것을 '자본주의가 지닌 진보성'이라고 합니다) 중국은 어느 시점에 들어와서, 필연적으로 그러한 국민의 요구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혹은 훨씬 더 걸릴 수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져도 좋습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중후반까지 격동을 겪은 대한민국을 생각해보다면, 그 보다 몇 십 배는 거대한 중국에서는 대체 어떠한 규모로 그런 문제가 터져나올까요? 그 때 가서 공산당이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면 어떠한 유혈사태가 벌어질까요? 고삐를 늦춘다면... 봇물 터지듯 공산당이 몰락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더구나, 국가독점 자본주의는 오늘날 고도의 효율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비해 상당히 느리고, 둔하고, 취약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아름다운 조각을 하기 위해서 커다란 통나무를 놓고 힘차게, 강경하게, 투박하게 커다란 모양새를 깎아내는 그러한 작업과도 같습니다. 언제까지나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며, 오래 동안 그런 형태를 고집해오거나, 그러한 형태를 취해왔을 때의 관행에 익숙해진 경제가 단 한 번의 외환위기에 어떻게 허망하게 개박살이 났는지는 누구나 1998년을 기억해보면 될겁니다. 한국의 수 십배의 규모로 그러한 위기가 중국에 찾아왔을 때에도 중국공산당은 불멸의 철가방일 수 있을까요?
[추가] 11-a. 중국의 공산화: 막장 중화민국
중국의 '공산주의'는, 맑스주의에서 비롯된 소련의 맑스-레닌주의와는 거의 아무런 상관도 없이 발생한 일종의 변종입니다. 그것이 유럽의 공산권과 가진 유일한 공통점은 스탈린주의적 개인숭배 모델과 국가안보 논리와 동일한 형태가 모택동 말년에 중국에서도 자리잡게 되었다는 정도겠지요.
본래, 맑스의 공산주의는 최고단계까지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부터 이행을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기준에서 볼 때 20세기 초의 중국은 어떠한 기준도 충족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도입 및 정착은 메이지시대를 거친 일본에 비하면 정말로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설립된 단계에서도 중국은 '근대국가'에 온전히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소련이 되기 전의 제정러시아가 온갖 모순이 산재해있던 특이한 국가였다면, 중국 또한 그 못지 않게 특이한 조건들이 많았지요.
우선, 봉건제의 타파,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한 손문의 신해혁명은 약골이 되어 빌빌되면 청조를 무너뜨리긴 했으나, 손문이라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존한 바가 컸던 만큼 그의 사후에 실질적으로 중화민국은 여러 독립국가들로 분열된 것과 같은 양상을 띕니다. 주로 청조에서 군관료를 지내거나 했던 고위군인들이 각각 이끌고 있던 '지방군'을 통해 독립적인 군벌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어떠한 의미에서도 그들은 서로 협력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근대국가라고 하기에는 무색하고 오히려, 역성혁명이 종종 발생하던 종래의 중국의 봉건시대의 역사와 같은 형태가 되풀이되었다고 볼 수 있고, 각 군벌이 이끌던 지방군은 공식적인 국가인 "중화민국"의 소속이라기 보다, 각각의 지역에 할거한 군벌들의 사병들에 가까웠습니다. 그 장병들은 자신의 군벌왕초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고, 그래야만 그들의 가족들도 그 군벌이 지배하던 세력권 내에서 먹고 살아야 했으니, 위촉오가 서로를 다른 국가로 보고 통일왕조를 수립하기 위해 목숨걸고 싸웠듯, 명목상 중화민국의 일부인 군벌들도 지들끼리 땅갈라먹고 잘먹고 잘살자는 주의였지요.
이 과정에서 손문이 꿈꿨던 근대 중국은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고, 특히나 군벌들과의 분쟁을 조장하고, 군벌들끼리 서로 대립하고 있어야만 자신이 공식적인 '국민당정부'의 수반으로 중재자의 역할을 맡으며 권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매지컬 장개석 총통의 등장은 여느 막장왕조가 그렇듯, 훌륭했던 창건자 손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며 '중화민국'이라는 알흠다운 이상을 까부수고 부패와 폭압으로 전 중국을 얼룩지게 만들었고요. (물론, 매지컬 장총통은 역시 보통 막장은 아니라, 근대적 산업화와 자본주의화의 절대적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라, 한 편으로는 군벌들끼리 분열시켜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열심히 군비를 지출하여 중앙군을 강화하고, 군대의 증식 및 유지에 도움이 줄 산업기술 분야에 투자를 했지요)
[추가] 11-b. 중국의 공산화: 중국공산당의 노선
그런데, 여기에 중국의 공산당이 등장합니다. 초기의 이론가들이야 사회주의의 '정석'에 따라 생각을 하는 학구파들이었으나, 그 이후에 중국공산당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모택동과 같은 경우에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제대로 공산주의를 공부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택동에 대해 알려진 얘기만 들어도, 그는 항상 영웅이 되고싶어 했던 행동적이고 실천적인 타입의 이상가이자, 사람을 끌어들이고 잘 부리는 능력이 있는 조직가, 선동가이지 치밀한 이론에 따라 현실을 파악하는, 레닌이나 트로츠키 같은 타입의 지식인 혁명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맑스주의에서 받아들인 것은 그 저항의 정신 정도였던 것 같고, 몇몇 용어나 개념을 빌려다 쓰기만 했지 정작 그러한 용어나 개념을 낳게 되는 그 원리와 이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거든요.
여하간, 모택동과 비슷한 성향의 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서 차세대 지도자로 이름을 날릴 무렵에 맞이한 문제는, 어느 모로 봐도 중국은 맑스가 얘기한 공산주의가 도래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고도의 자본주의화는 커녕, ==; 아직 근대화조차 이룩되지 않았는걸요.
따라서, 이후 중국공산당은 물론이고, 중국과 비슷하게 안습한 상황에 있게 되는 제3세계 국가들에 들어서는 모든 공산당들도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계통의 공산주의는 사실 '진짜 공산주의의 도래'를 노리기 보다는, 농민이나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근대국가의 수립 및 근대화... 를 목표로 삼게 됩니다. 일전에 모택동주의에 대해 그저 "말년에 정신줄 놓고 로리콘으로 변해버린 변태영감의 쓰레기 이론" 쯤으로 얘기한 어느 글에 대해, 제3세계 국가들의 독립과 국가수립, 공산주의의 전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이론이라는 반박을 한 기억이 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이유에서입니다. 모택동주의는, 애초에 공산주의가 들어설 수도 없는 낙후된 전근대적인 국가에서는 자본가-노동자의 대립이 주체가 되기 보다는 봉건세력-농민의 대립이 주체가 된다고 설명을 합니다.
[추가] 11-c. 마오이즘: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즉, 맑스-레닌 주의를 주창하면서 레닌이, 아직 자본주의화가 덜 된 러시아 같은 국가에서는 혁명을 일으킨 후에 정부의 관리감독과 주도 아래에 노동자들이 계급적 우위에 있는 자본주의화를 이루고, 이후에 때가 왔을 때 어떠한 자본주의적 저항도 없이 바로 공산주의로 넘어갈 수 있다고 주장을 한 것처럼... 모택동 또한 그 논리를 기반으로 다음과 같은 이론을 만든 것입니다.
"아직 근대화조차 이루지 못한 국가라면, 여느 봉건적 국가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우위에 서면서 봉건주의가 타파되고, 자본주의가 정착하고, 산업화가 일어나고, 국민국가가 수립되고, 근대화가 완성되어 훗날 공산주의가 가능해질 때까지 쭈욱 기다릴 필요가 있는가? 자본가 계급이 우위에 서게 되는 과정을 겪을 필요가 없이, 농민이 직접 주체가 되어 먼저 국민국가를 수립하고, 봉건주의를 타파하는게 최우선이다."
맑스가 보면 기겁을 했을 논리적 허점이 한 두개가 아니지만, 어쨌든 중국공산당은 무엇보다도 당과 농민계급이 주도하는 중화의 통일된 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 모택동이 우선적으로 기댄 것은 바로 민족주의였습니다. 일전에도 종종 여러 글을 통해 설명을 했지만, 민족주의는 근대국가의 수립에 있어서 절대적 중요성을 띕니다.
봉건국가는 '국가'라는 추상적 가치에 모든 국민이 통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분으로 인해 규정되는 계급들 사이의 관계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예컨데, 어떤 마을의 영주가 있는데, 그노무쉐키가 속민들을 존내 괴롭히고, 세금 엄청 걷어가고, 여자들 건드리고 다니는 포악한 짓을 일삼는다면, 그 마을의 주민들은 기회만 생기면 영주에게 반란을 일으켜 피의 보복을 가하거나, 아니면 다른 영주에게 충성맹세를 가져다 바치고 지금의 영주를 몰아내는데 협력을 합니다. 이러한 관계에 '국가'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 마을은 프랑스인 마을인데 그 영주가 주민들을 괴롭힌다면, 그 마을의 주민들은 두말않고 이웃의 영국인 영주가 있으면 그에게 들러붙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상위계급으로 올라가도 마찬가지라서, 100년 전쟁의 초중반 정도 쯤 되면 영국에 승기가 보이니까 프랑스인 영주들이 줄서기에 나서서 영국왕의 프랑스왕국 왕위계승권을 지지하는 쪽에 들러붙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전쟁 말기에 가면 영국놈들이 워낙 깽판을 심하게 치고 다녀서 모두들 "아나 젠장, 우리 프랑스 땅에서 영국놈들 다 꺼지라고 해" 하는 민족의식에 각성을 하고, 밥처녀 세이버...가 아니라..==a 성처녀 쟌다르크를 구심점으로 모여 전세를 역전시키게 되지만요. 어쨌든, 그러한 민족주의의 형성은 봉건적 갈등관계를 완화하며, 귀족이든 평민이든 왕이든 모두가 하나의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다 같이 국가의 목적을 수행하고 국가를 위해 싸운다는 민족주의, 애국주의, 국가주의 등 관념을 사람들의 머리에 박아넣게되는데, 중국은 손문이 그러한 일을 하던 와중에 죽어비록, 이후 군벌들끼리 갈라진 이래로 민족주의가 말짱 꽝이 되었다는 겁니다.
다만, 한 가지 중국이 유리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극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일본을 제외하면 대체로 유교아념 아래에 치밀한 관료제를 유지하고, 그것을 통해 중앙집권적 통치형태를 유지하는 식의 정치체제에 꽤 오래동안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왕이니 황제니 하는 대빵들은 곧 국가와 동일시 되었으니, 대빵에 대한 충절은 나라에 대항 충성이고, 나라에 대한 충성은 대빵에 대한 충절이라고 생각하여 '니도 내도 다 같은 국가의 백성'라는 공동체 의식과, '외적이 쳐들어오면 의병을 일으켜야디!' 하는 국가적 충성의 관념이 민족주의의 발흥을 아주 쉽게 했다는 것이죠.
따라서, 군벌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데 고생하고, 등쳐먹는 국민당 때문에 또 고생하는 중국의 민중들 사이로 퍼져나간다는 전술이 점차 모택동의 혁명전략이 되어간 것입니다. 즉, 국가에 대한 애국과 민족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러한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곧 공산당임을 강조함으로써 그 민족주의적 충성심이 그대로 공산주의의 세력확대에 직결되도록 하는 혁명이론을 주창한 것입니다. 이것은 맑스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이론이고, 그렇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공산주의 혁명은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제3세계의 혁명이론으로써 절대적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시도를 하는 군벌들도 있었고, 국민당도 딱히 그와는 다른 생각을 한 것은 아닙니다만, 문제는 '실천'입니다. 카렌 오르텐시아라는 수녀님을 보고 경건한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이론이 좋아도 실천이 개차반이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중국공산당이 다른 군벌이나 국민당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것은 그들은 이런 쪽으로 실천을 하고, 그 효과를 우려먹는데는 아주 귀재들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중국공산당이 초기에 남방에서 삽질만 하다가 결국 대장정을 통해 서북지역으로 도망가 험지에 짱박히게 되었을 때, 그 대장정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그야말로 투철한 정신과 강인한 신체를 지닌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모택동의 엄격한 지휘에 따라 "인민의 바다"로 뛰어듭니다.
이것이 훗날, 중일전쟁과 국공합작 시절은 물론,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바로 시작된 제 2차 국공내전에서 좁쌀만한 홍군이 수박만한 국민당군을 관광태우는 기적을 일으키게 됩니다. '혁명전쟁'의 와중에서, 병력에서 절대적으로 밀리는 홍군은 집결하여 싸우는 정규군의 형식을 버리고, 모택동의 이론에 따라 '인민의 바다'로 뛰어들어 인민의 생활을 돕고, 그들을 교육하고, 끊임없이 대의를 강조하는 솔선수범을 통해 점차 중국의 수 많은 촌락 단위에서부터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게 되었으며, 촌락민들의 보호로 그 틈에 숨어 활약하며 독립된 작전을 수행하며 계속해서 세력을 늘리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게릴라전략'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 1949년, 좀비가 물면 좀비로 변하는 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국민당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면서 중국은, 기존의 어떤 '공산주의'이론에도 속하지 않는 공산국가가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중공을 '공산국가'를 표방하는 주제에 맑스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대체로 상극인, 지극히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공산국가를 만들어냈으며, 후일 등소평의 결정이 있기 전까지는 대체로 인민의 자발적인 의지와 근면성에 의존하여 근대화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을 갖춰나가는 방향의 정책을 사용하게 됩니다. 경제기반을 닦는 작업이 초반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후일 그것이 답보상태에 빠지면서 어떠한 정책으로 전환하느냐에 대해 공산당 내에서 의견이 갈라지게 되는데, 소련의 볼셰비키들이 NEP의 도입을 놓고 서로 갈등을 겪었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사회적/경제적 정책을 두고 내부적인 갈등이 발생합니다. 말년으로 갈 수록 모택동은 정신줄을 놓고 아방궁의 로리콘이 되어가고, 이것이 후계지위를 노리는 자들의 암투와 겹치면서 중국 경제에 자본주의적 요소를 보다 도입하여 더욱 지속적인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일파가 숙청의 선상에 걸리게 되고, 중공의 경제적 안정화와 함께 사회적인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정릉발굴을 둘러싼 해프닝이 이념논쟁으로 번지게된 '해서파관'을 계기로 문화대혁명이 촉발되어 이 때 한 삽질을 메꾸기 위해 수 십년을 소비하게 되지요.
결국, 그 수 십년의 삽질을 하는 동안 세계의 상황, 소련의 불안한 쇠락을 지켜본 등소평은 중공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내세운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당의 조직과 지도력이 제거당하지 않는 형태로 자본주의 경제에 은근슬쩍 편입하는, 변형된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 최근 10년 동안의 중국의 - 원래의 이론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명목상의 - 공산주의라고 보심 되겄습니다.
-_-; 이상, 정말로, 공산주의 160년 요약 끝.
첫댓글 퍼온거예요
이런거 올리시면.. 국정원에서 찾아옵ㄴ...;;
휴 다 읽엇네... 글 덕분에 맑스-레린사상과 러시아의 근대역사에 대해 좀더 알게 되었네요
개념글 감사합니다. 공산주의 역사 전체를 놀라운 통찰력으로 요약하는 글이군요.
글 잘 봤습니다. 직접 쓰신 줄 알았네요..
흠... 총통의 글을 여기서도 보는군요..
'"arbeit macht frei"의 예행연습' 대목에서 뿜었음 ㅋㅋㅋ (그리고 놀라운 개념글.)
크웨사님의 글은 읽고 나면 얻는 것이 반드시 있죠. 좋은 글 옮겨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하나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박정희 - 공화당과 모택동 이후 - 중국공산당을 비교하는 것은 많이 문제가 있죠. 불법으로 권력을 도둑질해서 항상 권력의 정당성에 문제를 지니고 있던 박정희와 외세를 물리치고 국내의 정치질서를 바로잡아 신중국을 건설한 중국공산당에 대한 민중들의 의식이 같을거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49~54의 신민주주의 체제에 대해서도 보완했으면 더 좋을꺼 같아요 ^^
11-a 부분은 약간 어페가 있는것이... 이미 남북의화 이후에 쿠데타로 원세개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손문은 서남군벌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으니까요.. 사실 군벌이라는 것이 양무운동기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고, 변법, 의화단운동, 신축신정이 실패한뒤 신해혁명기엔 이미 수면위로 떠올랐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