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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이야기 (9)
퇴계 선생의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9일] 4월 12일(화) 충청감영(관아공원)→ 청풍문화단지 (5km-버스편 20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11일 퇴계선생]
◎ 충청감사 유홍(兪泓)의 배웅을 받으며 충주관아를 떠난 퇴계 선생은, 동쪽으로 길을 잡아 청풍군으로 향했다. 당시 청풍군수 성암(省菴) 이지번(李之蕃, 1508~1575)은 선생의 절친한 벗이다. 그는 《토정비결》의 저자인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형이요, 선조 때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그는 윤원형을 피하여 ‘단양’에 은거하였는데, 선생이 그에게 구담(龜潭)을 소개하자 그곳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 청풍은 퇴계 선생 42세 때인 1542년에 충청도 재상어사로서 관내를 시찰하던 중 찾아간 적이 있었다. 선생의 시 〈청풍 한벽루에 묵다(宿淸風寒碧樓)〉가 그때 지은 시이다. —《退溪集(퇴계집)》
半生堪愧北山靈 반생감괴북산령 반평생 나의 마음 북산 신령 부끄러워라
一枕邯鄲久未醒 일침한단구미성 한단 베개 깊은 꿈이 상기 아니 깨었다네
薄暮客程催馹騎 박모객정최일기 황혼이라 타향길에 역말을 달리다가
淸宵仙館對雲屛 청소선관대운병 맑은 밤 신선 집에 구름평풍 대하였네
重遊勝地如乘鶴 중유승지여승학 승지에 거듭 오니 나는 학을 탔던가
欲花佳篇類點螢 욕화가편류점형 꽃다운 시 하답하니 반딧불이 옷에 앉듯
杜宇聲聲何所訴 두우성성하소소 접동새 소리 소리 하소연이 무엇인고
梨花如雪暗空庭 이화여설암공정 배꽃이 눈인양 빈 뜨락에 떨어지네.
◎ 성암(省菴) 이지번(李之蕃)이 선조 초에 청풍군수가 된 것도 선생의 강력한 천거와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지번이 청풍군수로 부임할 때 선생이 축하하는 시를 보냈다. —《退溪集(퇴계집)》
好去淸風守 호거청풍수 잘 가시오 청풍군수여
龜潭舊主人 구담구주인 구담의 옛 주인이로세
行藏雖有異 행장수유이 나아가고 물러남은 때에 따라 다르지만
隱見豈無因 은견기무인 숨고 나타남이 어찌 인연이 없으리
臥治凝香寢 와치응향침 향기어린 장막에 누워 다스려도
欣耕抃野民 흔경치야민 농사짓는 백성과 들에서 춤을 추겠지
丁寧猿鶴友 정녕원학우 진정 들판의 짐승들과 벗한다는
莫枉訝周倫 막왕아주륜 행여 저 주륜과 비기지 마소. * 周倫 명나라 때 관리
◎ 1569년 마지막 귀향 당시 청풍군에 도착한 이 날, 선생과 이지번이 어디에서 만났고 무엇을 하였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퇴계집》을 보면, 이지번이 청풍군수였을 때, 청풍에 들렀다가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청풍 가까운 단양 초입에 있는 구담봉 정경(情景)을 시로 읊었는데, 이는 다음날인 음력 3월 13일이므로 충주를 떠난 선생이 청풍에 들러 이지번을 만나고 하룻밤을 함께 지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선생의 문인이고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도체찰사로 지낸 서애 류성룡이 1593년에 청풍 한벽루(寒碧樓)에서 지은 시가 있다. 지난 2021년 제1회 귀향길 재현행사에서 선생의 한벽루 시와 함께 이 시의 현판을 한벽루에 걸어 둔 바 있다. —《西厓集(서애집)》〈宿淸風寒碧樓 幷序〉
落月微微下遠村 낙월미미하원촌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寒鴉飛盡秋江碧 한아비진추강벽 까마귀 날아가는 가을 강만 푸르구나
樓中宿客不成眠 누중숙객불성면 누각에 자는 손님 잠 못 이뤄 뒤척이는데
一夜霜風聞落木 일야상풍문낙목 하룻밤 서리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
二年飄泊干戈際 이년표박간과제 두 해 동안 전란 속에 떠돌아서 다니다가
萬計悠悠頭雪白 만계수수두설백 온갖 계책 지루하여 머리 온통 희였는데
衰淚無端數行下 쇄루무단수행하 몇 줄기 서러운 눈물 끝없이 흘리면서
起向危欄瞻北極 기향위난첨북극 아스라한 난간에 기대어 임금님만 바라보네.
* [2022년 4월 12일 화요일 귀향길 재현단]
▶ 오전 8시, 귀향길 재현단은 충주관아 청녕헌(淸寧軒) 너른 마당에 집결하였다. 오늘의 여정은, 충주관아공원에서 충주호로 가는 ‘나즈막재’까지 5km 남짓 도로를 따라서 걷고 나서, 고개를 넘어 충주호 선착장에 가서 배를 타고 청풍문화단지까지는 가는 것이다. 일행은 크게 원을 그리고 둘러서서 김병일 원장의 말씀으로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선생의 시 〈도산십이곡〉제8곡을 반주음에 맞추어 다함께 노래한 후, 이동신 별유사의 진행으로 준비운동까지 마쳤다. — 〈도산십이곡〉제8곡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여도 농자(聾者)는 못 듣나니
백일(白日)이 중천(中天)하야도 고자(瞽子)는 못 보나니
우리는 이목총명(耳目聰明) 남자로 농고(聾瞽) 갇디 마로리
— 한자어가 많아 어렵게 느껴진다. 쉽게 풀이하면, ‘벼락이 산을 깨뜨려도 귀먹은 자[聾者]는 듣지 못하고, 밝은 태양이 하늘에 떠 있어도 맹인[瞽子]은 앞을 보지 못한다. 학문을 하는 우리는 눈·귀가 밝은 남자로서 귀 먹은 자와 맹인같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뇌정(雷霆)’은 우리를 일깨우는 진리의 말씀, ‘백일(白日)’은 학문의 도(道)를 비유한 말이다. 대조법을 통하여 우리는 학문의 진리를 깨달은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 김병일 원장은 재현단을 관아공원 마당의 서쪽에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 앞으로 인도했다. 안내석을 보니, 느티나무는 1983년에 충청북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당시 수령(樹齡)이 510년이었으니 지금은 550년이 되겠다. 수령으로 보면 퇴계 선생이 1569년 이곳에서 유숙(留宿)할 당시에도 있었을 나무였다. 지지대로 받쳐놓은 고목은 밑둥치가 엄청나게 굵고 뒤틀어져 그 오랜 풍상을 느끼게 하였다. — 김병일 원장과 이광호 교수, 그리고 김언종 교수가 차례로 말씀하였다.
오늘의 출행
▶ 충주시 성내동 충주관아 ‘충청감영문’을 나선 귀향길 재현단은 충주시 도심의 사직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밝은 날이다. 일행은 자연스럽게 보도를 따라 대열을 이루어 나갔다. 오늘도 의관을 갖춘 이한방 교수와 홍덕화 님이 선두에서 길을 열고, 김병일 원장, 이광호 박사, 오상봉 님, 도산서원 이원봉 별유사 등 안동 에서 올라온 여러 인사들, 그리고 오늘은 필자까지도 의관을 갖추어 입었다. 그리고 80 노구의 이장우 박사 김언종 교수, 이상천· 진병구·송상철 님, 배낭 맨 진현천 님, 오늘부터 충주~단양 구간에 참가한 김경조 시인과 세 분의 친구, 황상희 박사와 예쁜 두 딸(정옥과 정아), 류점숙 교수와 지기 김명순 님,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경기지역 여성 지도위원 여러분, 그리고 성함이 확인되지 않은 여러 분이 대열을 이루었다.
도심을 벗어나, 마즈막재로 가는 길
▶ 재현단 일행은 안림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안림로의 보도를 따라 동쪽으로 걸었다. 4월의 따가운 햇살이 사정없이 얼굴을 찔렀다. 안림동성당 앞을 지나고 안림동네거리를 지나는 도로[안림로]는, 안림동에서 충주의 진산인 계명산과 그 옆의 남산 사이 안부의 고개로 이어지는 왕복 4차선 도로이다. 그 고개는 오늘의 첫 도착 포인트인 ‘마즈막재’이다. 도심을 벗어난 도로 주위의 언덕은 주로 과수원이었다. 분홍빛 복숭아꽃이 만개하여 그 선연한 자태가 눈길을 끌었다. 충주의료원 앞을 지나 완만한 경사의 도로를 따라 걷는다. KBS 충주방송국에서 재현단 행렬을 따라오며 계속 촬영하고 취재했다.
— 마즈막재 —
충주 계명산(鷄鳴山)
‘마즈막재’는 충주(忠州)의 동쪽의 계명산(鷄鳴山)과 남산(南山) 사이의 안부이다. 안림동에서 그 너머 충주댐(호)이 있는 종민동으로 이어지는 531번 도로가 지나는 고개이다. — 충청북도 충주시 용탄동에 있는 계명산은 충주의 진산(鎭山)이다. 충주시의 동쪽과 충주호 사이에 높이 솟은 장중하게 능선이 뻗어 있다. 북쪽으로 남한강을 건너 지등산(535m)이 마주하고, 남쪽으로 남산(636m)에 이른다. 높이는 774m로 서쪽으로 목행동에, 동쪽으로는 동량면에 접한다. 산의 남동쪽에는 자연휴양림이 있다. 요즘엔 자연휴양림의 숲길과 충주호의 아름다운 풍경을 어우러진 ‘종댕이길’를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 아래로 충주시가, 북쪽으로는 인등산, 천등산, 시랑산 줄기가, 동쪽으로는 충주호 너머로 부대산(富大山, 627m) 산줄기가 보인다. 계명산은 충주시민에게 아주 친근한 산이다. 참 볼거리는 많다. 충주호를 둘러싼 높고 낮은 산을 바라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특히 남동쪽 방면 월악산 정상 옆으로 아침 해가 뜨고 이 모습이 충주호에 반영되는 풍광 덕분에 전국 사진가들이 찾는 일출 명소로도 인기 있다.
▶ 계명산(鷄鳴山)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백제시대에 이 산의 남쪽 마고성(麻姑城)에 왕족이 성주(城主)로 있었다.
당시 산에는 지네가 많이 살았는데 성주의 딸이 산기슭에서 ‘지네’에 물려 죽게 돼, 성주는 산신령에게 치성을 드렸다. 그러자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길, ‘지네는 닭과 상극이니 산에 닭을 풀어 놓으라’ 했다. 성주가 그 말에 따라 닭을 방목하자 지네가 사라졌다. 그러나 다시 지네가 들끓을 것을 염려해 계속 닭을 풀어놓아 길러 곳곳에 닭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 계족산(鷄足山)이다.
원래 오동산(梧桐山), 심항산(心項山)이라 부르던 산의 이름을 이때부터 계족산(鷄足山)이라 부르게 됐는데, 하지만 ‘계족’이란 어감이 좋지 않아 충주에 인재가 나지 않고 재벌도 없고 사업을 하면 실패한다는 여론이 많아, 1958년 ‘여명(黎明)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를 뜻하는 ‘계명산(鷄鳴山)’으로 개칭했다는 것이다.
▶ 마즈막재는 삼국시대부터 지금은 수몰된 남한강을 통해 청풍, 단양, 죽령을 넘나들거나 송계, 미륵리, 하늘재를 넘어 영남에 이르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충주시에서 충주호 관광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왜 ‘마즈막재’인가? 마지막을 떠올리게 하는 이 이름은 청풍과 단양의 죄수들이 사형 집행을 받기 위해 충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 고개만 넘으면 다시는 살아 돌아갈 수 없어 마즈막재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대몽항쟁전승기념탑
마즈막재, 계명산 산록에 ‘대몽항쟁전승기념탑(對蒙抗爭戰勝記念塔)’이 있다. 이 탑은 고려 때 충주산성에서 몽골군과 싸워 승전한 김윤후(金允侯) 장군과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2003년 건립했다. 기념탑은 산성의 성벽을 상징하는 화강암으로 조성했고, 상단부에는 승전 연도인 ‘1253’을 동판에 새겨 부착했다. 탑신은 5인의 군인상과 충주 백성의 대몽항쟁 모습을 묘사했으며, 부조벽에는 70여 일간 충주 백성이 어떻게 결사 항쟁해 승리했는지를 기록해 호국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 감문위상장군 김윤후(金允侯)
김윤후(金允侯)는 고려 후기 충주산성 방호별감을 역임한 무신이자 승려이다. 그는 용인(龍仁) 백현원(白峴院)의 승려였는데, 1232년(고종 19) 몽골 병이 침입해 오자 처인성(處仁城)]으로 피란해 성민들을 지휘했다. 이때 처인성의 주위를 지나던 몽골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활로 쏘아 죽여 몽골군을 퇴각시켰다. 이 전과로 인해 고종이 김윤후를 상장군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공을 타인에게 양보하고 관직을 사양했다. 이에, 관직을 낮춰 섭랑장(攝郞將)으로 임명하자 그때야 관직을 받아들였다.
1253년(고종 40년) 10월 김윤후는 충주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 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때 야굴이 이끈 몽골의 대군이 이곳 충주로 쳐들어왔는데, 그는 70여 일 동안 몽골의 대군을 맞이해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해 적을 물리쳤다. 김윤후는 식량이 떨어져 위태롭게 되자, “만일 힘을 다해 싸우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니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하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어서 관노의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워 몽골군을 물리쳤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높이 평가해 김윤후를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에 임명했고, 그 밖에 전공을 세운 자들은 관노, 백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작이 제수됐다. 조정에서는 충주산성 전투의 공로로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시켰다.
충주산성 [남산성]
몽고군과의 격전지로 추정되는 산성
충주시 안림동과 직동 및 목벌동에 걸쳐 있으며 남산성 또는 금봉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충주는 옛날부터 삼국시대 각국의 변경으로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 흔적이 고구려의 유산인 ‘중원고구려비’, 신라의 유산인 ‘누암리 고분군’이며 여기 충주산성[남산성] 또한 그 같은 사례이다. … 충주산성은 고려 때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몽고병을 물리친 곳으로 추정되며, 고종 40년(1253) 9월 몽고가 제5차 침입을 감행하여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충주 창정, 최수가 금당협에 매복하여 몽고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포위당한지 70여일에 군량이 다하고 사기가 저하되자 방호별감, 승장 김윤후가 전군과 관노까지 격려하여 사력을 다해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1254년 9월에는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뿐 아니라 성안의 고려인이 열심히 싸우자 차라대도 물러갔다. 몽고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유린되었으나 충주산성은 끝내 수호되었다.
* 마고선녀의 전설이 살아있는 곳 * 축성에 대한 유래는 기록이 분명치 않아 알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마고선녀가 7일만에 축성하였다 하여 일명 마고성이라고도 하며, 또한 백제 구이신왕 21년(475)에 축성하여 적을 방어하였다고도 한다.
마즈막재 ‘무공수훈자공적비’
‘무공수훈자공적비’는 마즈막재 남산 쪽 언덕의 광장에 있다. 이 공적비는 조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혁혁한 공헌을 인정받아 무공훈장을 받은 6·25참전용사와 세계평화를 위해 월남 전선에 나아가 대한민국 국군의 용맹성을 만방에 떨친 공훈으로 무공훈장을 받은 참전용사들의 전공을 기리며 애국심의 표상으로 2001년 8월 8일에 세웠으나 오랜 세월에 탑신이 검게 훼손되어 2019년 10월 10일에 공적비 개선공사를 하면서 추가로 국토방위를 위항 헌신한 공로로 보국훈장을 받은 보국수훈자 등 국가유공자 총 443명의 공훈을 후세에 기리고자 공적비를 세웠다. 을지문공훈장 6명, 충무무공훈장 33명, 화랑무공훈장 284명, 인헌무공훈장 27명, 보국훈장 수훈자 93명이다.
공적비는 높이 4.8m로 화강암 비신(碑身)을 3단으로 구성하여 세웠다. 제1단에는 4면 부조 칼라 세라믹을 삽입하여 방위별로 거리를 표기하아여 한반도 중심도시 충주를 표현하였고, 탑신 전명 2단에는 무공수훈자 마크롤 주물로 제작하여 부착하였으며 공적비 3단에는 ‘武功受勳者功績碑’(무공수훈자공적비)를 음각하였다. ‘명각비(名刻碑)’는 무공수훈자와 보국수훈자를 구분하여 한글로 음각하여 별도로 세웠다.
마즈막재 → 충주호 종댕이길
▶ ‘무공수훈자공적비’와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이 있는 마즈막재 주변은 오늘 따라 벚꽃이 만개하여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맑은 햇살이 받은 순백의 벚꽃, 참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계절이다. 일행은 마즈막재 사각정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김병일 원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1569년 퇴계 선생이 이 고개를 넘어 청풍으로 가는 여정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행이 다과를 들며 쉬는 사이 KBS 충주방송국 기자가 퇴계선생과 귀향길 행사의 의의에 대해 이광호 박사를 대상으로 인터뷰·촬영하기도 했다. 마즈막재에서 531번 지방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금방 충주호에 이른다. 충주호와 계명산 자락의 심항산을 연결하는 아름다운 호반 길을 ‘충주호 종댕이길’이라고 소개한 안내판이 있다.
충주댐, 충주호
충주댐은 1980년에 착공하여 1986년에 완공되었다. 국내 최대의 콘크리트 다목적댐인 충주댐은 충주시 종민동 게명산(770m)과 동량면 조동리 관모봉(628m)의 협곡에 건설한 댐으로 남한강을 막아 수자원 확보 및 홍수피해 방지, 전력생산을 목적으로 한다. 높이 97.5m, 길이 447m, 저수용량 27억5천만 평방미터의 댐으로써 본댐 하류에는 높이 21m, 길이 480.7m의 조정지댐이 있다. 충주댐 좌안정상에는 ‘물전시관’, ‘기념탑’,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우안정상에는 물레방아 휴식공간, 헬기장, 유람선을 탈 수 있는 ‘충주호나루’가 위치해 있다. 충주호는 충주댐 건설로 생긴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에 걸쳐있는 인공 호수이다. 충주댐 나루터에서 신단양(장회) 나루까지 충주호(忠州湖)에는 관광유람선이 충주∼청풍∼단양간을 운항하고 있다.
충주호 물길
오늘의 유람선 사정
◎ 1569년 이날, 선생은 마즈막재에서 동남 방향의 길을 따라 황강역 근처에서 청풍 지경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 마즈막재를 넘어가 그 아래의 남한강을 만나서 굽이굽이 물길을 따라 청풍으로 가는 옛길은 1983년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 때문에 마즈막재에서 예전 청풍군이었던 지금의 제천시 청풍면으로 가려면 충주호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야만 한다. 선착장은 충주댐 건너 충주시 동량면 하암리에 있다.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려면, 마즈막재에서 531번 지방도로를 타고 충주호 가까이에 있는 계명산자연휴양림 앞을 지나 충주호 하류 방향으로 내려가 충주댐을 건너서, 호수의 건너편으로 가야 한다. 마즈막재에서 유람선 나루터까지 약 9km를 걸어서 가야 한다. 그런데 그 길은 실제 선생이 가셨던 마지막 귀향의 경로가 아니다.
충주호 선착장에서 청풍문화단지 선착장까지는 약 25km, 1시간 20분이 소요된다. 1569년 퇴계선생은 충주에서 마즈막재를 넘어 청풍까지 말을 타고 남한강 강변의 육로로 이동하였다. 오늘날의 귀향길 재현단은 충주호 담수로 인해 배편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선생이 다녔던 길은 수몰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동안 동호의 두뭇개에서 충주까지 선생의 경로는 뱃길이었는데, 귀향길 재현단은 그 남한강 물길을 도보로 걸어서 왔다. 이제 충주에서 청풍까지 선생이 말을 타고 갔던 길을 우리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이다.
청풍으로 가는 길
그런데 오늘 충주호 유람선이 ‘충주→청풍’ 편도(片道)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하는 수 없이 차편으로 청풍루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귀향길 재현단은 배가 아닌 지원단 버스편으로 청풍문화재단지로 향했다. 서울의 경복궁을 출발한 귀향길 재현단이 처음으로 차편을 이용하여 이동하게 된 것이다. … 청풍문화재단지는 1983년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 위기에 처한 예전 청풍관아 건물과 주변의 유적들을 높은 곳에 옮겨놓은 곳이다. 청풍관아(淸風官衙)의 본래 위치는 청풍호 선착장에서 남한강 하류로 500m 쯤 아래라고 한다. 지금은 제천시 청풍면이다. 퇴계선생과 관련된 유적으로 ‘한벽루’와 ‘응청각’이 있다.
청풍문화단지
청풍(淸風)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문물이 번성했던 곳으로 많은 문화 유적을 갖고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청풍면 후산리, 황석리, 수산면 지곡리에 있던 마을이 문화재와 함께 수몰될 위기에 있었다. 충청북도청에서는 1983년부터 3년간 수몰 지역의 예전 청풍관아 건물과 주변의 문화재를 원형대로 현재 위치에 이전, 복원해 단지를 조성했다. 제천시 청풍면에 있다.
청풍문화단지 내에는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4동), 지석묘, 문인석, 비석 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 점이 원형대로 이전 복원되어 있어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이어진 남한강 상류지역 청풍의 역사와 문화를 한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다. —
퇴계 선생과 관련된 유적은 한벽루와 응청각이 있다. 2021년 제2회 귀향길 재현행사 당시 퇴계 선생과 류성룡의 시판을 한벽루에 걸어두었다. 청풍관아의 본래의 위치는 현재 청풍호선착장에서 남한강 하류로 500m쯤 아래라고 한다.
▶ 낮 12시 정각, 귀향길 재현단 일행은 청풍문화단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 정면의 계단 위에 팔영루(八詠樓)가 우뚝 서 있다. 팔영루는 청풍관아의 정문으로, 너른 계단 위에 석문(石門)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락형태로 지은 누각(樓閣)이다. 이날, 팔영루 석문 위에 ‘敬,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라고 쓴 현수막이 게시되어 있었다. 우리 재현단의 행사를 세상에 알리는 내용인데, 문득 반가움과 함께 선생의 현덕을 생각하게 되었다. — 팔영루에서, 미리 와 있던 청풍군수 이지번(李之蕃)의 후손인 ‘한산 이씨 종친’ 여섯 분이 내려와, 재현단 김병일 원장을 맞아 인사를 나누었다.
▶ 청풍문화단지의 식당 ‘성현 한식당’에서 내빈과 재현단 일행이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서울에서 안병걸 교수가 내려와 함께 참석했다. 한산 이씨 종친이 ‘한산소곡주’를 가져와 반주로 내 놓았다.
청풍 한벽루(寒碧樓)
▶ 점심식사를 마친 후, 내빈과 재현단 일행은 팔영루 안, 위쪽에 위치한 한벽루(寒碧樓)에 올랐다. 한벽루는 청풍호(충주호)가 내려다보이는 망월산(337m) 높은 곳에 자리 잡은 2층 다락형태로 지어진 누각이다. 그 옆에 응청각-관수루(觀水樓)가 있다.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청풍호에 임해 있는 조선 시대의 누각이다. 청풍 한벽루(寒碧樓)는 청풍 관아에 딸린 건물로,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 출신 승려 청공(淸恭)이 왕의 스승인 왕사가 되면서 청풍현이 청풍군으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누각*이다. 본채 옆에 작은 부속채[翼廊]가 딸려 있는 형태로, 밀양 영남루(嶺南樓, 보물 제147호), 남원 광한루(廣寒樓, 보물 제281호)와 함께 조선 시대 누각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는 건물로 꼽힌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ㆍ김수증의 편액과 김정희가 쓴 현판(懸板)이 있고, 이준이 쓴 중수기가 있다. 보물 제528호로 정식 명칭은 ‘제천 청풍 한벽루(堤川 淸風 寒碧樓)’이다. * 누각(樓閣)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을 말한다.
누각 위에 있는 중수기에 "崇禎甲戌九月日賓山翁李埈記"(숭정갑술구월일빈산옹이준기)라는 발기가 있어 1634년(인조 12)에 개창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900년 보수한 것이 1972년 8월에 대홍수로 건물이 무너지고 현판들도 모두 떠내려가서 1975년에 본래 모습대로 다시 지었다. 송시열이 쓴 현판은 사진을 보고 다시 만들었다. '청풍 한벽루'라는 편액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쓴 것이며, 하륜(河崙)이 청풍의 아름다움과 한벽루의 경치에 관해 쓴 〈한벽루기〉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
◎ 건물의 평면구조는 앞면 4칸, 옆면 3칸이며 단층 팔작지붕이다.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다락의 마루를 결구한 뒤 주위에 계자(鷄子) 난간을 돌렸으며, 그 위에 사각형 기둥을 얹고 다시 그 위에 8각기둥을 세워 상부를 가구했다. 공포(栱包)는 익공계이면서도 주심포가 절충되어 있기 때문에 장화반 대신에 따로 만든 화반을 설치했다.
다락집 형태의 익랑(翼廊)을 부설한 것이 특이한데 일종의 누각으로 출입하는 복도와 같은 형상이다. 즉 사다리를 타고 익랑을 거쳐 한벽루로 올라간다. 이 익랑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한벽루에서 펼친 강담회(講談會)
다시 살아나는 유서 깊은 이야기들
▶ 점심식사를 마친 후, 한산 이씨 종친 등 내빈과 귀향길 재현단 일행은 팔영루 안쪽에 위치한 한벽루(寒碧樓)에 올랐다. 사방 풍경이 훤하게 보이는 한벽루 2층 다락에 올라가, 크게 빙 둘러 좌정했다. 먼저 김병일 원장이 퇴계 선생이 1569년 오늘 청풍관아에 도착하여 청풍 군수 이지번의 영접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 1569년 오늘 퇴계 선생은 청풍 관아에 도착했다. 충청감사 유홍의 배웅을 받으며 충주관아를 떠난 퇴계선생은 동쪽으로 길을 잡아 청풍군으로 향했다. 청풍 초입인 황강역에서 당시 청풍 군수 성암(省菴) 이지번(李之蕃, 1508~1575)이 퇴계 선생을 기다렸다. 이지번은 오래전부터 선생과 마음을 주고받은 절친한 벗이다. 일찍이 그는 척신 윤원형을 피하여 단양(丹陽)에 은거하였는데, 퇴계 선생이 그에게 구담(龜潭)을 소개하자 그곳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그렇게 퇴계 선생에게는 남한강의 아름다운 절경을 지닌 청풍은 정겨운 인연과 유서가 깊은 곳이다. 퇴계 선생 42세 때인 1542년에 충청도 재상어사로 충청도 각지를 시찰할 때 청풍 관아의 응청각에서 유숙한 일이 있고, 1548년 이웃 단양 군수로 재임할 때 이곳 한벽루과 구담봉 등 청풍의 절경을 돌아보기도 했다. 특히 1569년 마지막 귀향길에 청풍에 유숙한 것은 마음을 나누는 벗 이지번에 청풍 군수로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 마음의 벗, 이지번(李之蕃)
이지번(李之蕃, 1508년∼1575년 12월 1일)는 조선 명종 때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한산(韓山)이요, 자는 이성(而盛), 형백(馨佰)이며, 호가 성암(省菴)이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명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판관 이치(李穉)이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목은 이색 선생 영당’과 ‘목은관’이 있다.
그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인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맏형이요, 선조 때 재상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년~1609년)의 아버지이다. 부모에게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학문이 뛰어났으며 천문과 지리에도 밝았다. 이지번은 38세인 1545년 인종 원년에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올라 장례원 사평이 되었으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윤원형이 횡포를 부리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이지번의 맏아들 이산해는 지극히 총명하여 열두 살에 문과 초시에 급제할 만큼 문재(文才)와 글씨가 뛰어났는데, 척신 윤원형이 이를 탐하여 사위로 삼으려 하자, 청렬하고 강직한 이지번은 한 마디로 이를 거절하고 벼슬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단양으로 낙향해 버린 것이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여 새로운 선비들을 등용할 때 퇴계가 이지번을 조정에 천거하였는데, 벼슬에 생각이 없던 이지번이 사양하자, ‘청풍 군수’라도 하라고 권유하자 마지못해 그 자리를 받았던 것이다.
단양으로 내려온 이지번에게 단양의 구담(龜潭)을 소개한 사람이 퇴계 선생이다. 청풍의 옥순봉·구담봉은 퇴계 선생이 단양 군수로 재임하면서 자주 찾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 깊은 이지번이 바로 구담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신선처럼 살았다. 그래서 그를 구선(龜仙)이라고도 한다. —그 후 선조 때 청풍 군수, 내자시정 등을 지냈으며, 아들 이산해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 성암 이지번(李之蕃)이 선조 초에 청풍 군수가 된 것도 선생의 강력한 천거와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지번이 청풍군수로 부임할 때 선생이 축하하는 시를 보냈다. —《퇴계집》에 실려 있다.
好去淸風守 호거청풍수 잘 가시오 청풍군수여!
龜潭舊主人 구담구주인 구담(龜潭)의 옛 주인이로세.
行藏雖有異 행장수유이 나아가고 물러남은 때에 따라 다르지만
隱見豈無因 은견기무인 숨고 나타남이 어찌 인연이 없으리.
臥治凝香寢 와치응향침 향기어린 장막에 누워 다스려도
欣耕抃野民 흔경치야민 농사짓는 백성과 들에서 춤을 추겠지.
丁寧猿鶴友 정녕원학우 진정 들판의 짐승들과 벗한다는
莫枉訝周倫 막왕아주륜 행여 저 주륜과 비기지 마소. * 周倫 명나라 때 관리
— 이지번이 청풍 군수가 되어 부임하게 되면, ‘향기어린 장막에 누워 다스려도 / 농사짓는 백성과 들에서 춤을 추겠지’ 라고 하면서 선정을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
시(詩)에 담은 청풍 한벽루
한벽루(寒碧樓)의 풍광은 절경이다. 퇴계 선생이 한벽루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쓴 ‘살아 온 반평생 산수를 등진 게 부끄러워라(半生堪愧北山靈)’ 하고 토로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자연을 벗하여 인생을 경영하는 퇴계 선생은 단양군수 시절 ‘청산을 거닐 때는 구름에 깃든 학처럼 살고 싶다(在山願爲棲雲鶴)’고 노래하기도 했다.
◎ 한벽루에서 보는 경치가 매우 빼어나서 조선 시대의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한벽루를 주제로 시(詩)와 그림들을 여러 편 남겼다. 우선, 17세기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28세 때 한벽루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시를 지었다.
寒碧領仙景 한벽령선경 한벽루가 선경을 차지해서
爲樓淸且豪 위루청차호 누각의 모양이 맑고 또 호걸스럽다.
能令忘寵辱 능령망총욕 능히 총애와 욕됨을 잊게 하고
可以渾山毫 가이혼산호 가히 산과 풀들과 잘 어울리게 한다.
長瀨聲容好 장뢰성용호 긴 여울은 소리와 모습이 좋고
群峰氣象高 군봉기상고 많은 봉우리의 기상도 높구나.
癖難濟勝景 벽난제승경 고질병은 고치기가 어렵지만
携賞豈言勞 휴상기언로 손 붙잡고 완상하는데 어찌 힘이 든다 하겠는가?
◎ 18세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한벽루의 날아갈 듯한 아름다운 풍모와 청풍호와 어우러진 풍경을 선망하여 시로 표현했다. 〈登淸風寒碧樓(등청풍한벽루)〉(청풍 한벽루에 올라)이다. —〈茶山詩文集〉(제1권)
絶峽蒼陰轉 (절협창음전) 깊은 협곡 푸른 숲그늘 돌아가니
飛樓白日寒 (비루백일한) 날아갈 듯한 누각에 한낮의 태양이 차갑고,
霜天唯石壁 (상천유석벽) 서리 하늘 아래 석벽 하나 우뚝하며
秋水自波瀾 (추수자파란) 가을 물 절로 파란을 일으키누나.
正欲乘舟過 (정욕승주과) 배에 올라 지나가려 하여
聊成立馬看 (요성입마간) 잠깐 말 세우고 구경한다만,
使君吾羨汝 (사군오선여) 사또여 나는 당신이 부럽다오
卽此已仙官 (즉차이선관) 여기가 곧 선관의 임지이기에.
▶ 2019년 퇴계 선생의 제1회 마지막 귀향길 450주년 기념 재현 행사 때에 한벽루에서 퇴계선생과 청풍군수 이지번(李之蕃)을 기리는 강연회를 진행했고, 2021년 제2회 행사에서는 한벽루에 퇴계(退溪) 선생과 서애(西厓) 류성룡의 ‘한벽루’ 시판(詩板)을 걸었었다.
◎ 우선 한벽루에 걸린 선생의 시 〈청풍 한벽루에 묵다(宿淸風寒碧樓)〉이다. 이 시는 청풍은 퇴계 선생 42세 때인 1542년에 충청도 재상어사로서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지은 시이다. 《퇴계집》에도 실려 있다.
半生堪愧北山靈 반생감괴북산령 반평생 지난 일이 북산 신령에 부끄럽고
一枕邯鄲久未醒 일침한단구미성 베개 속 청운의 꿈은 아직도 못 깨었어라.
薄暮客程催馹騎 박모객정최일기 황혼의 타향 길에 역말을 달리는데
淸宵仙館對雲屛 청소선관대운병 맑은 밤 선관[한벽루]에서 구름 병풍 마주했어라.
重遊勝地如乘鶴 중유승지여승학 경치 좋은 땅에 다시 노니 학(鶴)을 탄 것 같아
欲花佳篇類點螢 욕화가편류점형 좋은 시에 화답하려니 반딧불 켜진 듯하여라.
杜宇聲聲何所訴 두우성성하소소 두견의 슬픈 울음, 무슨 하소를 하는지
梨花如雪暗空庭 이화여설암공정 눈빛 같은 (하얀)배꽃이 빈 뜰에 몰래 피었어라.
◎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지냈던 서애 류성룡이 한벽루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임진왜란 당시 전란의 비통함을 노래한다.〈宿淸風寒碧樓〉(숙청풍한벽루) (청풍의 한벽루에 묵으면서)이다. —《西厓集(서애집)》〈宿淸風寒碧樓 幷序〉
落月微微下遠村 (낙월미미하원촌)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 가는데
寒鴉飛盡秋江碧 (한아비진추강벽)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樓中宿客不成眠 (루중숙객불성면) 누각에 머무는 손 잠 이루지 못하는데
一夜霜風聞落木 (일야상풍문락목) 온 밤 서리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
二年飄泊干戈際 (이년표박간과제) 두 해 동안 전란(戰亂) 속에 떠다니느라
萬計悠悠頭雪白 (만계유유두설백) 온갖 계책 지루하여 머리만 희었네.
衰淚無端數行下 (쇠루무단수행하) 서러운 두어 줄기 눈물 끝없이 흘리며
起向危欄瞻北極 (기향위란첨북극) 아스라한 난간 기대고 북극만 바라보네.
4월 23일, 나는 병이 나서 6월 중순까지 앓아누웠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왜적은 남쪽의 해변에 주둔하면서, 바다를 건너 회군하려 들지 않고 진주를 다시 침범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다급하게 남하하여 성주의 안언역에 도달하였으나, 진주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날 저녁 나는 고령현에서 숙박하였는데, 왜적은 이미 초계현에 침입하여 고령현 30리 밖까지 진군해 왔다. 나는 곧 장병을 모집하여 우도 절반을 보전하려 하자, 총병 유정과 유격대장 오유충 등 모두가 병사들을 인솔하고 합천현에 집결하였다. 나 역시 그들을 따라 합천현에 도착하였는데, 며칠 안 되어서 조정의 소환령에 응하여, 행재소에 들러 대부인을 찾아뵙고 문안을 드린 다음, 죽령을 넘어 원주 신림원에 도달했다. 그런데 잠시 후 분부가 내리기를, 아직 본도에 머물러 제장들을 단속하라’는 성지를 받들 어서, 마침내 신림원에서 청풍현으로 돌아왔다. ― 한벽루에 올라 업무로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정감을 언사로 표현하였는데 이때, 어가는 해주에 머물고 계셨다.
(四月) 二十三日。余病卧。至六月中始起。時賊屯據海邊。不肎渡海。聞將復犯晉州。余力疾南下。至星州安彦驛。聞晉州已陷。是夕。余宿高靈縣。賊已入草溪。去高靈三十里。余將收召將士。欲保右道一半。而劉摠兵綎,吳遊擊惟忠皆率兵來會陜川。余亦隨至陜川。數日。召赴行在。道安東。省大夫人。踰竹嶺至原州新林院。又有旨姑留本道。約束諸將。遂自新林還抵淸風。登寒碧樓。感事興懷。情見于辭。時車駕駐海州。―〈宿淸風寒碧樓 幷序〉
◎ 한벽루에 걸린 시판 중에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년)의 시(詩)도 있다. 이산해는 이지번(李之蕃, 1508년∼1575)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던 이산해는 명종과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덕분에 그는 반대 세력인 서인들의 수많은 탄핵에도 불구하고 화를 입지 않고 동인—대북파의 영수로서 선조 때에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玉欄飛棟枕江流 옥란비동침강류 화려한 난간 날씬한 기둥 누각이 강물을 배고 있는 듯
形勝湖西第一州 형승호서제일주 명승지 호서지방의 제일의 고을이라.
紅樹白雲曾駐馬 홍수백운증주마 붉은 나무 흰 구름 속 말을 타고 가다가
亂峯殘雪又登樓 난봉잔설우등루 여러 봉우리 잔설을 보며 또 누각에 올랐네.
荒郊霽色明村逕 황교제색명촌경 황량한 들판 비 개인 경치에 마을길이 환하고
極浦斜陽逞釣舟 극포사양령종주 아득한 물가 석양 아래 낚싯배 들어오네.
自笑浮名眞誤我 자소부명진오아 스스로 가소롭기는 부질없는 명예 진정 나를 그르쳤지만
拂衣猶未老滄洲 불의유미노창주 옷깃을 떨치고 아직도 은거지에 늙지 못하고 있네.
— 弘文館副應敎 李山海(홍문관 부응교 이산해) 隆慶己巳春(융경기사춘)
기사년 이른 봄, 호서 제일의 아름다운 고장 청풍(淸風) 한벽루(寒碧樓)에 올라, 마을길이 환하게 열리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석양이 비낀 강물에서 돌아오는 낚싯배를 바라보며 부질없는 명예를 좇아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한산 이씨 명문가 출신인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고려 후기의 대학자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토정 이지함(李之菡)의 조카이다. 이산해는 북인의 영수였고, 서인인 송강 정철(鄭澈, 1536~1593)과 함께 당시 정치세력의 양대 산맥 같은 존재였다. 송강 정철 뒤에는 윤근수 등이 포진해 있었고, 이산해의 주위로는 류성룡, 퇴계 이황,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있었다. 정철, 이이(李珥) 등과 이산해는 처음에 친한 사이였지만 자신들의 당파 때문에 차차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화폭에 담은 청풍의 경치
호서(湖西) 제일의 누각이라는 말을 들었던 한벽루는 당연히 그림의 주요 소재가 됐다. 한벽루를 진경산수식으로 그린 화가로는 겸재 정선, 윤제홍, 이방운 등이 있다. 이중 청풍부사를 지내기도 했던 윤제홍(尹濟弘·1764∼?)은 다음과 같은 시문을 그림 속에 남겼다. "내가 이 사계절을 한벽루에서 보냈지만, 그 경치의 만분의 일도 그려내지 못했다. 진경을 그린다는 것이 이다지도 어렵단 말인가."
19세기 초 이방운(李昉運·1761∼?)은 문인화가는 아니었지만 당시 청풍부사 안숙의 부탁을 받고 〈錦屛山圖〉(금병산도)를 남겼다. 이 그림은 ‘금병산’을 주제로 한 그림이나, 오히려 ‘한벽루’가 눈에 더 크게 들어온다. 근경에는 한벽루, 중경에는 남한강 강물, 원경에는 금병산을 배치했다.
◎ 앞서 소개한 한벽루에 걸린 선생의 시 〈청풍 한벽루에 묵다(宿淸風寒碧樓)〉는 시에 대한 해설이 있었다. 이 시는 청풍은 퇴계 선생 42세 때인 1542년에 충청도 재상어사로서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지은 시이다. 《퇴계집》에도 실려 있다.
응청각—관수당
▶ 장장 3시간에 걸친 한벽루의 시화와 퇴계-이지번에 관한 인연에 대한 강연회를 마치고, 망월산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며 경내를 둘러보았다. 한벽루 바로 옆에 ‘凝淸閣’(응청각, 정면 현판)이 자리하고 있는데, 청풍호 쪽 처마에는 ‘觀水堂’(관수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열면 남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 한벽루가 단순한 누각이라면 관수루를 유숙을 할 수 있는 방을 갖추고 있는 정자이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퇴계 선생이 하룻밤 유숙한 곳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2층의 누정으로 아래층은 토석축으로 벽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을 지은 팔작지붕이다. 건물 우측에 목조계단을 만들어 2충으로 오르내린다.
관수정—망월산성 망월루에서 조망
오늘의 청풍호반은 여기저기 화사한 벚꽃이 만발하여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응청각에서 안부로 내려갔다가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가 망월산 산록에 지은 ‘觀水亭’(관수정, 육각정)에 올랐다. 그야말로 남한강 청풍호수 주변이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처이다. 관수정 앞에는 연리지소나무가 있고 ‘청풍성혈현인악성우륵탄강유지비’가 있다. 관수정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망월산성이 있고 산정(337m)에 ‘望月樓’(망월루, 팔각정)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보니 청풍호반의 일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군데군데 복사꽃이 피어있는 주변의 풍경과 하늘과 땅, 청풍호수가 아름다운 풍경화의 파노라마를 그리고 있다.
관수정에 올라, 남한강 청풍호를 조망한다. 청풍호 동쪽에 2개 주탑에 현수교로 세워진 ‘청풍대교’가 보인다. 청풍대교는 이곳 청풍(면)과 제천(시)를 잇는 82번 도로와 단양군 매포읍을 잇는 532번 도로에 연결되는 교량이다. 청풍대교 뒤로 보이는 높은 산이 제천의 진산 ‘금수산(錦繡山)’이다. 치악산의 지맥인 금수산은 약 5백년 전까지는 백암산(白巖山)이라 불렸는데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그 경치가 비단에 수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강 건너 맞은편은 청풍레이크호텔, 팬션, 식당 그리고 유람선선착장 등을 갖춘 제천 청풍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청풍호(충주호)는 국내 최대 인공 호수인 소양호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제천시와 충주시, 단양군에 걸쳐 있어 제천에서는 청풍호, 충주에서는 충주호라고 부른다. 청풍호 주변에는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들이 곳곳에 있다. 비봉산, 정방사, 옥순봉, 청풍문화재단지 등이 손꼽힌다. 최근 비봉산(531m)은 최신 케이블카가 시설되어 운행되고 있다. 청풍호를 관망하는 명품 코스이다. 물태리역에서 정상까지 2.3km 구간을 9분만에 올라간다. 비봉산 531고지 정상에는 2층의 널따란 테크 전망대가 있는데, 청풍호반 일대를 사통팔달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부대시설로 식당, 카페, 편의점 등을 갖추고 있다.
금남루(錦南樓)→ 팔영루(八詠樓)관
▶ 망월산성에서 내려와 옛날 청풍부 동헌이었던 ‘금병헌(錦屛軒)을 올려다 보며, 아래로 내려와 ‘都護府節制衙門’(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금남루’(錦南樓)를 지나, ‘물태리 石造如來立像’(석조여래입상, 보물 546호)을 돌아보고,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팔영루(八詠樓)’에 이르렀다.
▶ 팔영루는 옛 청풍부를 드나드는 문루인데, 고종 때 부사 민치상이 청풍8경을 노래한 팔영시(八詠詩)로 인하여 ‘八詠樓’(팔영루)라 불리게 되었다. 조선 숙종 28년(1702) 부사 이기홍이 ‘현덕문’이라고 한 자리에 고종 7년(1870) 부사 이직현이 다시 지었다. 정면 3컨,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지금은 청풍문화재단지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 1569년 마지막 귀향 당시 청풍군에 도착한 이 날, 선생과 이지번이 어디에서 만났고 무엇을 하였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퇴계집》을 보면, 이지번이 청풍 군수였을 때, 청풍에 들렀다가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청풍 가까운 단양 초입에 있는 구담봉 정경(情景)을 시로 읊었는데, 이는 다음날인 음력 3월 13일이므로 충주를 떠난 선생이 청풍에 들러 이지번을 만나고 하룻밤을 함께 지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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